며칠전 이 사랑방을 처음 알았습니다. 사랑방을 둘러보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고, 몇해전 경남의 어느 산골짝에서 뵈었던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쓸쓸함, 지독한 고독…., 그리고 공중의 새를 보라던 해맑은 얼굴도 스쳐갑니다.
가끔씩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허기진 사람처럼, 암컷에 굶주린 야수처럼, 글을 쓰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저 허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세상에 대해 구애를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고백해야할 모양입니다. 사랑방을 둘러보면서 작지만 넘기 어려운 정서적 차이 때문에 망설였지만, 그래도 일상의 모양 만큼은 비슷할 듯 하여 제가 집짓는 얘길 써 볼까 합니다.
아참, 먼저 제 소개를 드려야죠. 저는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가 시작하는 곳에 홀로 집을 지으며, 농사짓는 시늉도 하고, 본업이 술을 마시며 흥얼거리는 것으로 알고 지내는 마흔이 조금 넘은 사내입니다. 그럼, 얘기를 시작할까요.
무작정 떠나기
2년전 가을이었습니다. 서울 변두리 어느 시골 마을에 농가주택을 세 얻어 살고 지내던 사내는 문득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떠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내는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해가며 떠나는 것이 순리지만 일상의 묻혀가는, 그리고 사고무친의 땅에서 적막함을 견뎌낼 용기가 없었던 탓이지요.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집을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사내는 서울의 아파트 한평값도 안되는 돈을 손에 쥐고 살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다 써버리고 지하철을 전전해도 좋다. 거기에도 생생한 삶이 펼쳐지고, 어쩌면 삶의 진수를 빼먹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내는 그런 생각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강원도의 어느 산장을 찾았습니다. 여행중 두어번 들러 소주를 마시며 친해졌던 산장지기 선배에게 다짜고짜 살 터 하나를 만들어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소개를 받은 곳이 오대산과 계방산 사이의 어느 계곡에 있는 백평도 안되는 조그만 땅이었습니다. 그 즉시 사내는 집을 짓는 것을 전제(토지형질변경을 조건으로)로 하고 계약을 했습니다. 길을 나선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텐트 하나를 구해다가 쳤습니다. 언제 집을 지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는 그 텐트에서 일년을 보냈습니다. 계획과 달리 토지형질변경이 되지 않아 계약은 파기됐지만, 마침 인근 건축공사장에서 막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난해 계약이 파기되면서 새로 구입한 땅이 지금 집을 짓고 있는 곳입니다. 무려 천 삼백평이나 됩니다. 그중 절반 가까이가 실제로는 산이니까 쓸 수 있는 농지는 반쯤 될 겁니다. 평당 만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거기다 집을 짓기 위해 토지형질변경을 하니까 토지에 들어간 비용이 대략 2천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땅 구하기
땅이 좀 넓었으면 했습니다. 집을 짓고 나도 농사도 지을 수 있게 천평에서 2천평 정도쯤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뜻을 가지고 이웃이며, 업자에게까지 얘기를 건네놓았습니다. 일년동안 산속에다 텐트치며 막일하는 사람에게 적어도 땅값가지고 장난치지는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몇몇은 그 돈으로는 못구한다고 웃었습니다. 며칠후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땅을 구했습니다.
조금 높습니다. 해발 9백 5십미터 정도 된다니까 워터월드가 되어도 끄떡없습니다. 오대산에서 계방산, 태기산으로 이어지는 차령산맥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 아침이면 아랫마을에 안개가 자욱해도 집터에는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비가 갤 때면 눈 높이에서 구름이 수평선을 이룹니다. 맑은 날 아침 산책길에는 오대산 저편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바라보고, 계곡을 타고 빠르게 흩어지는 안개들이 눈부십니다.
먹고 사는 건 몰라도 적어도 땅값 때문에 귀거래의 꿈을 접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허가얻기
상대농지(밭)를 샀으므로 대지로 전용허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이런데서 사실은 콱 막힙니다. 용어도 생경하고 절차도 까다롭고. 특히 사내처럼 관공서 기피증이 조금 심해서 심지어 “만권의 책을 읽어도 법률책은 읽지 않는다”는 동파의 시구절을 읊조리는 사람에게는 여간 짜증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대행해주는 업체가 있습니다.
“그래, 그들도 먹고 살아야지.”
측량해서 대행해주는 업체에 80만원을 냈습니다. 이럴때마다 용감해 집니다.
그래서 지난해 8월경 무난히 백평을 대지로 전용받았고, 또 무슨 명목인가 3백40만원을 내라고 하더군요. 아! 대체농지조성비. 이 나라 법률의 정신 중에는 아직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사대부들이 읊조리던 농자천하지대본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돈이 모여서 간척사업을 했다면, 오-, 사내는 범죄자입니다. 주머니 털리고 죄의식 갖기. 사내는 화가 났습니다.
“관공서가 아직도 너무 가까이 있어.”
아,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공무원이 형질변경에 대한 조사를 올 때 길이 제대로 나 있어야 한다고 해서 15만원주고 포크레인을 반나절 불러서 터로 올라가는 길을 정비했습니다. 뭐 하자는 짓인지! 하여간 집터까지 가는 대부분의 농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만 2백미터 가량 비포장 언덕길이 비만 오면 패이고 해서 트집을 잡고 허가를 안내줄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뭐하자는 짓인지? 내 땅에 내가 집을 짓고 살겠다는데…. 누가 포장을 해달라고 그랬나, 길 보수를 해달라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했더니 땅을 판 사람이 ‘이 사람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를 하나’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군요.(역시 허가조건부로 계약을 했으니 그 사람도 허가에 민감하게 반응했죠) 할 수 없이 포크레인을 불렀습니다. 그 때문에 지출된 15만원은 정말 피 같은 돈이었습니다.
허가를 얻었으니 이제 집을 지어야죠. 그런데 작물이 들어서 있어서 수확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더덕, 당귀, 들깨. 당년에 수확할 수 없는 더덕은 사내가 인수하기로 하고 당귀와 들깨 수확을 한 연후에 기초공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까지 사내는 건축공사장에 인부로 나가며 공사비도 벌고 집짓는 일을 더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글이 길어지는군요. 혼자서 집짓는 얘기는 다음에 쓰지요. 사람을 쓸 경제력도 없고 도와준다고 사람이 온다해도 잠재워줄 곳도 없고, 밥해줄 사람도 없는 형편이라 혼자서 밥해 먹어가며 집을 지었습니다. 사실은 아직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들땐 까짓거 안지으면 어떤가 하고 일손 놓고 술한잔 마시고 늘어지게 잡니다. 그래도 어딥니까? 얼마전엔 텐트생활 청산하고 다락방이라고 2층에 두평짜리 방을 꾸며서 짐을 옮겼는데요. 거기서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밭을 봅니다. 미처 갈지 못한 밭은 망초와 쑥대밭으로 아름답고, 농사라고 지어놓은 옥수수는 집짓는 와중에도 두번이나 풀을 매 주었지만 거름기가 없는 탓인지 앉은뱅이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까짓거 옥수수 안먹으면 어떻습니까? 걱정을 하기로 하면 세상 모든 짐을 다 져야하고 내려놓기로 하면 팬티까지 벗어놓고도 가볍게 춤출 수 있는 산꼭데기에서 말입니다. 그럼…..
전기 끌어오기
산속에 전기없이 집짓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내는 용기도 없었고 그런 독종이 못됩니다. 그래서 전기를 끌어와야겠는데 그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전신주가 있는 곳에서 200미터(전신주 4개 설치)까지는 기본료로 가설해주지만 그 이상은 자부담으로 미터당 4만원이 넘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 전봇대에서 200미터가 넘는 곳에서는 전기없이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내의 집터는 3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래도 4백만원이 넘는데 어디 엄두를 낼 수가 있어야죠. 가정용 풍력발전은 어떨까, 전기없이 살 수는 없을까 등등 오만생각을 했지요. 전기라? 다 좋은데 일년간 텐트생활 경험으로 냉장고없이 살 자신이 안 나더군요(하긴 아직까지 냉장고가 없습니다.).
때 마침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21세기에 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위한 필수적인 요소고, 따라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에 속한다.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내의 가옥에 대해 전기가설을 해줄 의무가 있다......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정부투자기관이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만든 규정쯤은 사내가 잘 응용해서 전기가설을 해도 나쁘지 않다. 생각이 거기까지 나가더군요. 기본권을 누리기 위해서 약간의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대강은 그르지않다는 거였죠. 편리한 소피스트적 발상, 그게 또한 사내의 특기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도움을 얻어 200미터 떨어진 곳에다 농업용전기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난달 한번 더 가정용전기를 신청해서 마침내 집에까지 전기를 끌고 왔습니다. 모두 75만원이 들었죠. 주로 당하고 사는데 이럴 때라도 조금씩 돌려준다며 마지막 전봇대를 놓던 다음날 아침에 똥을 누면서 낄낄거리고 웃었습니다.
하여간 그렇게해서 지난해 10월에 농업용전신주를 가설했는데 문제는 계량기를 달아주지 않는 겁니다. 농사철 다 끝났으니 내년 봄에 달아준다는 겁니다. 할말이 없더군요. 결국 텐트를 옮기지 못하고 30분거리를 오가면서 기초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전기는 그렇고 돈 잘버는 한국통신은 더 합니다. 전화전신주는 2개만 기본이고 나머지는 자부담입니다. 그래서 전화는 아주 포기하고 삽니다. 다행히 산꼭대기라 휴대전화가 잘터져서 공사시작과 함께 휴대전화를 구했습니다.
집터닦기
집터를 닦고 기초를 하자니 평면도를 그려야 합니다. 대개들 모눈종이를 사다가 그려보고, 조금 심한 사람은 수수깡을 사다가 모형을 만들어보기까지 한다더군요. 혹시 공간치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으면 만들고요. 사내는 평면에 그려진 입체도형만 봐도 머리가 찌끈거립니다. 도대체 공간감각이 없습니다. 미술은 항상 낙제였을 만큼 공간에는 백치 수준이지요. 그런 사내에게 공간을 창출하는 건축 자체가 무리입니다.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합니다.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사내는 평면도 한번 제대로 그려보지 않고 집터닦기를 시작했습니다. 평면도 대신에 넘버3 송강호의 무대뽀정신이 사내의 무기였습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거였죠. 경험적으로 가능하더라 이겁니다.
집터를 닦아줄 장비를 수배해놓고 이른 아침 집터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중순이었으니 서리가 내리던 무렵입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집터를 거의다 오를 무렵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청명한 아침의 가을하늘입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입니다. 눈을 돌려 지나온 아랫마을을 바라보자 안개, 안개, 안개의 바다였습니다. 안개의 바다에 높은 산 봉우리들이 여기저기 섬처럼 떠 있는 겁니다. 그랬구나! 아침은 또 이렇게도 열리고 있었구나! 사내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머리의 회로마다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공사고 뭐고 집어치우고 퍼질러 앉아서 소주를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땅히!
싱겁게 끝났습니다. 장비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포크레인 한대로 집터를 닦고 거푸집을 세울 곳의 버림콘크리트까지 타설했습니다. 단 하룻만에.
기초공사
줄기초를 합니다. 귀틀집을 지을 계획이었습니다. 줄기초는 가장 간편하게 거푸집을 세우고 레미콘을 갖다 붓는 것으로 정했죠. 트럭도 빌리고 거푸집용 판넬도 빌려서 실어 왔습니다.(물론 공짜로-그간 공사판을 다닌 인연으로) 트럭에 판넬을 싣고 올라오는데 집터 백미터를 남기고 차가 헛바퀴만 돌고 있었습니다. 도리가 없었죠. 그 자리에서 내려놓고 몇번에 나눠서 싣고 올라갔습니다.-집터로 오르는 마의 백미터, 거기가 지금까지 속을 썩입니다. 철근은 트럭에 실을 수 있도록 4미터로 잘라서 사서 가져왔습니다. 철근을 잘랐으니 부실공사라구요? 맞습니다. 부실공사입니다. 하지만 제가 늙어죽는 날까지는 끄떡없을 겁니다. 아님 주저앉아버리면 또 어떻겠습니다. 귀거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온 곳으로 돌아간다! 무덤을 본택(本宅)이라 한다 하니 알맞은 때 무너져준다면 한번에 두개의 집을 완성하니 그 또한 건축의 예술적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여하튼 그렇게 자재를 준비해놓고 아는 목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거푸집 작업을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수가 이틀간 일을 해줘서 무사히 거푸집을 완성했습니다. 그때 목수에게 품값으로 지불한 16만원이 사내가 지금까지 지불한 인건비의 전부입니다. 사내는 이틀 더 철근을 꼼꼼히 넣고 레미콘을 불렀습니다. 씩씩하게 올라오던 레미콘차 결국 마의 백미터 구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다가 돌아가 버렸습니다. 길이 바짝 마른날 펌프카를 불러놓고 레미콘을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그래서 비가 안오고 낡이 맑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열흘을 지나서야 기초공사를 마쳤습니다.
나무 껍질 벗기기
거푸집을 뜯어낼 무렵 나무가 도착했습니다. 5치(가는 곳의 두께가 15센티), 12자(3미터 60)의 낙엽송 150개를 역시 5치로 양면치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쌓기 편하게 양면을 친 겁니다. 개당 만 칠천원쯤, 모두 2백 5십만원 가량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걸로 벽체 쌓을 나무는 전부 마련된 것이었죠. 껍질을 벗겨서 열십자로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수퍼에 들러 빵과 김밥을 사들고 집터로 가서 껍질을 벗기다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대략 마른 나무는 혼자서 들기에 부담이 없었는데 덜 마른 것들은 밧줄을 묶어서 질질 끌며 이동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껍질을 벗길 때 근육을 통해 전해지는 단단한 섬유질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낙엽송은 작업중 손에 가시가 자주 박힐 정도로 잘게 잘게 부서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단단하다는 얘기겠지요. 사내의 집에는 낙엽송과 잣나무를 썼습니다. 싸니까요. 잣나무와 낙엽송은 양파와 대파의 차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잣나무는 무르고, 낙엽송은 단단합니다. 잣나무는 성기고 낙엽송은 구성이 치밀합니다. 잣나무는 껍질이 두텁고 낙엽송은 아닙니다. 무른 놈은 두터운 껍질을 필요로 하고 야무진 놈은 아닌 모양입니다. 자작나무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껍질부터가 종이처럼 얇게 쪼개집니다. 추운데 사는 놈들은 다릅니다. 책 한권이 같은 두께의 나무 보다 더 단단한 것 처럼. 지어놓고 나도 다르더군요. 비를 맞아도 낙엽송은 거의 변함없는데 잣나무는 푸른곰팡이 때문에 금방 푸르죽죽 변하더군요. 낙엽송은 주로 박정희때 심은 일본이깔나무를 말합니다. 북녘으로 가면 우리 이깔나무가 많습니다. 뭐, 우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질이 다르다는 거지요. 무른 놈은 무른대로, 단단한 놈은 단단한 대로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는 놈은 그 쓸모없음을 쓸모로 한다지 않습니까?
하여간 그렇게 껍질을 벗겨서 쌓아놓고는 담배를 피워물고 산을 바라봤습니다.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또 한대, 또 한대..... 주머니에 못 한 박스 살 돈마저 없이 다 떨어져 버렸거든요. "하늘이 내게 나무를 바짝 말릴 시간을 주는 군!" 그렇게 편리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진 사내는 소주 한잔 먹고 쓰러졌다가 다음날 품팔러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벗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공사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그걸로 지난해는 끝이었습니다. 얼추 공사비를 벌었다 싶어서 내려갔지만 이번엔 눈이 가로막았습니다. 동네 사람들 말하길,
"거기에는 4월이나 되어야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하여간 무지하게 눈이 왔습니다. 1미터가 넘게 쌓인 곳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저 많은 눈이 봄이 된다고 녹을까......?
잡설이 길었습니다. 하여간 혼자서 집짓는 얘기는 또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모양입니다. 3월말에 텐트를 옮기고 4월 1일에 처음으로 톱을 손에 잡았으니까요. 다음에 쓰지요. 그런데 며칠간 집안에 일이 있어 서울 왔다가 심심풀이삼아 썼는데, 내일 아침에 돌아가면 언제 또 쓰지요? 아시다시피 거기선 인터넷이 안되는데......그럼.
시작은?
아직도 응달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던 지난3월말 드디어 텐트를 옮겼습니다. 길고 긴 겨울, 그리고 기다림이었습니다. 3월 31일 아침 일찍, 씌웠던 천막용 커버를 벗기자 5달 동안 겨울바람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햇살을 받았습니다. 처음이란 확실히 좋습니다. 하얀 백지위에 붓을 드는 가슴 떨림처럼, 대지위에 근육으로 글을 써가는, 그렇습니다. 집짓기도 문학이고 노래입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리듯 나무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가늠하다가, 어느 순간 먹줄을 튕깁니다. 시작입니다. 시작은 항상 가슴 벅찹니다.
사내는 신발을 조여 매고 못 주머니를 차고 고리에 망치를 끼웠지요. 그리곤 체인톱의 스위치를 누르며 스스로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촌스럽게 사진 한방 찍고 싶었습니다. 수컷들이란 의례 그런가 봅니다. 수컷 공작새는 깃털을 한껏 세우고 장동건은 폼 나게 엔진톱을 돌리다가 하늘을 응시하지요. 말보루 담배갑 표지 그림이 시사하는 것 말입니다. 어깨엔 견장이며, 가슴엔 요란한 표식과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페라리에 흥분하던 알 파치노나 조금은 초라하지만 못 주머니에 망치 걸고 체인톱 돌리면서 으스대고 싶어하는 사내나 그리움이 향하는 밑바닥에는…..그래, oo의 향기. 사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무를 누릅니다. 톱밥이 튑니다. 가볍게 날아 흩어집니다.
벽체 쌓기
하루 10개씩만 쌓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보름이면 벽을 다 만듭니다. 하방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거 품 많이 듭니다. 첫줄부터 엇갈려 쌓았습니다. 반턱맞춤, 그런 거 할 리가 없습니다. 무지하게 품 많이 듭니다. 나무가 짧으면 밑에다 나무 하나 가로 걸쳐놓고 그대로 210미리 직결나사 두어개 찌르고 대못 마구 때려 박아 넣었습니다. 계획대로 하루 10개씩 무난히 쌓아 갔습니다. 귀틀집이 편한 건 높은 곳에 나무를 올리는 작업도 혼자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미 쌓은 벽을 사다리 삼아 한 계단씩 밀어올리거나 끌어올리면 웬만큼 무거운 나무도 혼자서 다 올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내가 귀틀집을 짓기로 결정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전통 건축에 대한 미학 따위는 갖질 못했고, 건강이나 자연친화적인 따위의 유행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혼자서 싸게 지을 수 있는 집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대충대충 지어도 안 무너지고, 따뜻하게 할 수 있고, 보기도 크게 흉하지 않은 집…..그런 집을 지어서 향기 맡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벽체를 쌓기 시작하면서 공학적인 고민에 빠졌습니다. 긴 나무의 전체적인 중심을 기준으로 수직을 맞추며 쌓아 올려야 하는지, 귀를 트는 부분에 수직을 맞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운 적도 없고, 그 흔한 집짓기에 관한 책 한권 없었거든요. 이리보고 저리보다가 그냥 수직자를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그냥, 대충 눈대중으로 봐서 크게 균형이 어긋나지 않으면 귀를 트는 곳에도 맞추고, 벽체에도 맞추다가 이도 저도 아니면 반반씩 절충해서 맞추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직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때부터 벽체를 다 쌓을 때까지 먹줄하나 튀기지 않고 쌓았습니다. 먹줄과 자를 버리고 눈을 믿었고, 눈으로도 알 수 없을 땐, 기울어진 집에서도 행복하게 살면 그만아니냐며 넘어갔습니다. 집이 부실해서 웃음꽃이 안피더냐, 뭐 그런 배짱이었습니다. 집은 대충 짓더라도 사는 건 알차게 살자, 그런 주의였습니다. 그렇게해서 150개의 나무를 혼자서 비오는 날을 포함하여 보름도 안되는 기간에 쌓아 올렸습니다.
천정 만들기
또 나무를 사왔습니다. 천정과 지붕할 나무입니다. 천정은 현대식으로 수평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사내는 천정을 다 만드는 순간까지 전통 가옥들은 천정서까래라고 해서 경사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책 없는 사내였습니다. 천정은 최소한의 나무만 걸치고 그 위에 일부는 루바를 대고, 일부는 대패나 그라인더 페퍼질도 안한 송판을 올렸습니다. 이땐 정말 누가 한쪽을 잡아주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밑에서 위로 다람쥐처럼 오르락 내리락, 왼쪽에다 못 하나 박아서 고정시켜놓고 다시 오른쪽 끝에 가서 발로 밀어서 고정시켜 놓고 못을 박고 다시 왼쪽으로….반복 또 반복…..그렇게해서 3백여장 되는 송판에 10개 정도씩 못을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그 위에다 흙 못 올렸습니다. 혼자서 천정에 흙 올리는 건 정말 독종들이나 하는 겁니다. 그냥 스티로폼 올렸습니다. 각목으로 상을 대고 50미리를 올리고 다시 엇갈려서 50미리를 더 올리고 그 위에 합판으로 마감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비가 여러 번 왔습니다. 루바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서야 비가 오면 천막을 씌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는 둥 마는 둥 할 때, 더덕밭에 막 싹이 트는 잡초들을 제거했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떳떳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누가 봐도 저 놈은 집만 짓고 있네, 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도 같고. 이상하지요? 귀농을 한 것도 아닌데. 아마 사내에게도 여전히 일일부작 일일불식 따위의 금언들이 만들어내는 노동, 그것도 농사에 대한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매지는 않았습니다. 사내는 자신이 바로 사회의 잡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부지런한 농사꾼과 같다면 내가 어떻게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살겠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게지요. 그렇게 4월이 여물고 있습니다.
지붕만들기
지붕은 천정에서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걸어서 서까래를 박기로 했습니다. 기둥과 도리감으로 잣나무 원목을 사왔습니다. 6치짜리로 해서 12자 짜리가 6개 있고, 5미터에 이르는 특수목을 5개 가량 샀습니다. 당초에 맞배지붕을 할 요량으로 샀는데 합각지붕으로 변경했습니다.( 계산을 잘 못해서 목재도 잘 못 사온 탓인데 덕분에 맞배지붕을 할 경우 생기는 천정과 지붕사이의 세모꼴 공간이 없어져서 뒷날 공간 메우는 일을 덜었습니다.) 첫번째 작업은 목재 옮기기 입니다. 목재운반 트럭이 마의 백미터 구간을 올라오다가 힘이 부쳐서 중간에 마구 떨어뜨려 놓고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내는 승용차(트럭이 없습니다. 처분하고 중고트럭이라도 구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워낙 압류 걸린 것이 많아서, 거의 대포차 수준입니다)에다 와이어를 걸고 하나씩 하나씩 끌어올렸습니다. 타이어 다 해먹었습니다. 타이어가 심하게 마모되면 철심이 보인다는걸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요. 다음은 그 나무를 천정위로 올리는 작업입니다.
가는 곳이 18센티 정도하고 굵은 쪽은 30센티씩 하는 5미터 짜리 나무를 2미터가 넘는 천정위로 올릴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더군요. 들지도 못해서 지렛대로 굴려서 조금씩 옮겨야하는 판인데……그래서 체인브럭이라 부르는 도르레를 빌려 왔습니다. 도르레를 걸 수 있는 지주목을 높이 세우고 나무를 한쪽이 좀 기울어 지도록 매달아 끌어 올렸습니다. 천정보다 더 높이 나무가 올라갔을 즈음 나무의 가벼운 쪽(높은 쪽)에 줄을 걸어 밑으로 힘껏 당기면서 90도를 확 돌려버렸죠. 무게중심에 따라서 나무는 천정위에 떡 걸쳐지더군요. 그래서 천정에 올라가 슬슬 도르레를 풀면서 나무를 천정 안쪽으로 옮겼죠. 그렇게 나무를 다 올렸습니다. 도르레, 역시 몇 사람의 몫을 해내더군요. 참, 도르레 얘기를 하다 보니까 도르레와 관련하여 장자에 나오는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도르레가 편리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도구에 의존하다 보면 그 도구로 인한 일이 또 생긴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돈을 벌자니 자동차가 필요하고, 자동차를 끌고 다니자니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휴대폰도 그렇고….우리의 일상이 다 그런 걸…..적당히 쓰고, 적당히 외면하고 사는 밖에요.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겠다는(향기는 빼고)! 하여간 사내는 그렇게 나무를 올려놓고 "내가 신라시대로 돌아갔군!"하고 중얼거리며 맛나게 담배를 피웠습니다.
여기서부터 전통적인 한옥의 기법입니다. 촉 파서 기둥 세우고, 십자매기해서 도리 얹었습니다. 먹줄도 튀겨가면서…..목수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못 주머니도 했겠다, 사귀도 틀줄 알고 십자매기도 하니 어디가서 목수라고 제법 일당 좀 받겠다 싶더군요. 이제 시다바리는 끝이다 싶었죠. 하여간 사내들이란….. 어쨌건 그렇게해서 마지막 도리, 마루보라고도 하는 상량을 하던 날 인근에 사는 역시 날나리 목수가 와서 도와줘 거뜬히 상량을 했습니다. 혼자서 들 땐 별의별 쇼를 다해가면서 올려야 했던 5미터짜리 나무가 둘이서 하니까 왜 그렇게 간단히 올라갑니까? 그날이 5월 1일입니다. 처음 나무를 쌓기 시작해서 상량까지 한 달하고 이틀 걸렸습니다. 상량문, 아직 안 썼습니다. 문방구를 가야 하는데, 자꾸 까먹습니다. 이렇게 쓸까 합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그런데 괜히 별 것도 아닌게 폼잡는 거 같아서 이렇게 쓸까도 고민중입니다. "가볍구나, 좋다! 구름이로다!" 별 거 아닙니다. 사내의 집에서 볼 거라곤 구름밖에 없습니다. 매일 구름 바라보며 나오는 탄성입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깨도 아프고 팔은 근육이 뭉쳤습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헌데 비는 자주 오고…..쉴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서까래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강행군입니다. 그래서 열흘후에 지붕에 방수쉬트를 좍~깔았습니다(2평짜리 2층 다락방 만들 공간을 제외하고). 지붕 역시 서까래위에 널판지대고 50미리 스티로폼 넣고 그 위에 합판마감하고 방수쉬트를 깐 구조입니다. 나중에 너와식으로 피죽을 올릴까 합니다. 그게 아스팔트 슁글보다는 재료비가 훨 싸더라구요. 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그렇게 해놓고 6월초까지 빈둥거리듯 느긋하게 일했습니다. 조금씩 집짓는 일도 하고, 뒷 밭에 옥수수, 고추, 열무 등등 심고, 더덕밭에는 섶도 줬습니다. 밭 일을 하고 나니까 밀릴 숙제를 한 기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집짓는 일보다 두배는 더 재미있습니다. 내년엔 그 재미 많이 볼 수 있겠죠.
왜 2층을 만들고 싶었을까?
사내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하여간 반드시 2층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건 욕망입니다. 다른 높이에서 뭔가를 응시하고 싶었을까요? 꼭 그것 때문은 아닐겁니다. 티비에 보면 근사한 집에는 꼭 2층이 있지요.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 행위가 나옵니다. 계단을 오르는 행위, 거기엔 분명치 않지만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욕망의 통로 아니면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거나, 뭔가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어쩌면 10만년전 현생인류가 처음 지구상에 나타났을 때 살았던 아프리카 사바나의 열대우림의 나무 위? 땅으로 내려온 인류가 그 나무 위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하여간 사내도 2층으로 오르는 통로를 만들고, 거기다 두 평 남짓한 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집은 남향이지만 2층방은 북향입니다. 집 귀퉁이에 만들었기 때문에 앞에서는 안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 오는 사람들은 2층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뒷곁에 있는 우물에 물을 마시러 와서야 놀란 눈으로 "어! 2층이 있네?"하곤 합니다. 사내는 지금 그 2층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집안에 있는 계단을 통해 오르지만, 머지않아 밖에다 수직계단을 놓고 창문으로 드나들 계획입니다. 2층 침대에 있는 것과 같은 수직계단 말입니다. 조금씩이라도 빗나가고 싶은 욕망인가요? 머리아픈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가로지르고, 선분을 타고….. 뭐 그런 거. 대체로 이층은 일층을 지배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난 아이들의 해방구입니다. 비로소 큰 숨을 내쉬고 잡담을 하거나 문걸고 인터넷 하지요. 또 신혼부부들이 시부모로부터 벗어나 이층계단을 오르는 순간은 어떻습니까? 한 두 계단 오를 땐 조심스럽다가도 마지막 계단쯤에선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급하게 …. 왜 이층이 현실에서 그렇게 작용하고 있을까요? 사내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도, 처용의 아내가 아니라도 몰래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필요하다는 것이 사내의 생각입니다. 관리되지 않는! 혹은 눈 감는! 또 혹은 기꺼이 눈 감아 줄 수 있는! 아마, 당신도 집을 지으면 작게라도 2층을 만들고 싶어질 겁니다. 도시를 떠난다는 건 어쩌면 그 이층방으로 오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숨쉬기, 탈출하기, 중심에서 벗어나기, 주류에 등돌리기, 아이처럼 살기….등등. 물론 사내의 생각입니다만.
아, 2층이요? 귀틀로 올리지 않고 목조주택 형식을 빌렸습니다. 하중을 적게 받도록 기둥세우고 각목으로 틀을 잡아 스티로폼넣고 양쪽에 합판으로 마감했습니다. 난방시설은 없습니다. 뚝딱뚝딱 아주 간단합니다. 2층을 안 만들었을 경우와 비교하면 문달고 창문다는 비용까지 쳐서 최대로 백만원 가량 더 들었을 겁니다. 평당 50만원입니다. 만들 만 하지 않습니까? 계단은 8치짜리 통나무 하나 비스듬히 세워놓고 발 밟는 곳만 홈 파듯 날렸습니다. 계단값 재료비 달랑 3만 2천원입니다. 혼자서 8치짜리 나무 세우느라고 낑낑거린 고락은 0원이고.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는 흙치기와 구들놓기, 야외화장실 만들기입니다. 그걸로 산촌사람의 혼자서 집짓기는 마무리 할 계획입니다. 아직 거기까지밖에 진도가 안나갔거든요. 여기까지 읽은 분에겐 고맙다고 해야 겠죠. 고맙습니다. 사내의 인사입니다.
산촌사람의 '혼자서 집짓기'는 이번으로 끝을 냅니다. 이것저것 쓸 것이 있지만 쓰다 보니까 못된 버릇이 도져서 잡소리가 많아집니다. 그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흙 치기
길이 끝나는 곳, 사내는 거기에 삽니다. 집 앞에는 고추밭과 들깨밭이 있습니다. 그 두 밭주인이 올라오지 않는 이상 사내는 사람 얼굴 보기가 어렵습니다. 5월까지 분주하게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아주머니들의 발길도 풀이 무성해지면서 뚝 끊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밭주인들이 올라온다고 해서 별반 얘기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바쁩니다. 그저 만날 때 사내가 먼저 건네는 "안녕하세요"하는 인사가 곧 작별인사를 겸하기 일쑤죠.
고추밭은 농사가 철저히 농업경영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밭은 작물공장입니다. 투입과 산출의 대응관계만 있습니다. 전 과정이 화폐화되어 설명됩니다. 흙마저도 철저히 관리됩니다. 관리되지 않는 유일한 요소인 날씨는 과정에 개입하는 우연적인 요소입니다. 신비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우스를 치고 나면 더 완벽하게 방정식의 오차가 줄어들 것입니다. 남는 건 시장가격의 변동뿐입니다. 반면 들깨가 심어진 밭은 지난해 묵었다가 올해 온전히 노부부의 노동으로 일구어지고 있습니다. 노인네는 지금도 밭을 갈고 있습니다. 산에서 당귀를 캐다가 들깨 사이에다 옮겨 심고 있더니, 봄에 미처 갈지 못한 곳을 갈아서 당귀를 더 심는 중이죠. 소가 갈아도 힘들 경사진 밭을 노인네가 두 손으로 쟁기를 끌며 갈고 있습니다. 요즘 할머니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작물공장에 일당 이만육천원짜리 품을 파는 모양입니다. 노인네가 쟁기를 끄는 것을 보고 있자면 불편합니다. 외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내는 흙을 칩니다.
흙치기는 6월초부터 시작되었죠. 서울서 벗들이 일 도와준다고 연휴에 찾아왔습니다. 덕분에 술도 많이 먹었지만 혼자서 일주일은 걸릴 분량의 일을 이틀 동안 했습니다. 나무는 단단하고 흙은 부드럽습니다. 귀틀집은 단단함으로 뼈대를 만들고 부드러움으로 그 사이를 채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흙을 이겨서 흙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흙은 마르면서 갈라지고, 부서져 내립니다.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사내는 흙이 부서져 떨어지지 못하도록 나무 사이에 대못을 촘촘하게 박고 대못 사이를 철사로 이었습니다. 마치 싸릿대를 엮어 흙벽을 만드는 것처럼. 대못과 철사는 효과가 있는 모양입니다. 적어도 덩어리로 흙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작업을 위해 사내는 무려 대못을 3박스나 나무 사이에다 찔러 넣었습니다.
사내는 팔이 아프고 손가락 마디가 굳어 옵니다. 이틀에 12자 방의 벽 한면을 치기가 빠듯합니다. 흙치기는 먼저 외발수레 가득히 두번을 퍼와서 합판위에 쏟아 붓습니다. 거기다가 볏짚을 적당히 뿌리고 물을 붓고, 삽으로 반죽을 합니다. 그렇게 대충 반죽을 해놓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물이 골고루 침투하기를 기다립니다. 남들은 포크레인으로 이겨서 비닐로 덮어놓는다는데 그럴 공간도 장비도 없습니다. 그저 한사람이 두어시간 칠 수 있는 분량만 반죽해서 잠깐만 기다렸다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시적인 방법, 즉 손으로 마무리 반죽을 합니다. 그렇게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반죽을 해서 벽에다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합판 가득히 세판 정도하고 나면 손가락 끝에서부터 어깨까지가 뻐근합니다. 도무지 저 많은 틈과 벽을 다 메울 것 같지가 않습니다. 지치고 힘들고…..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땐 멍하니 앞을 바라 봅니다. 하늘이 반이고 산이 반입니다. 그러나 항상 다릅니다. 하늘과 산의 모양새를 수시로 바꾸는 것은 안개, 구름입니다. 무궁한 것이 무상한 것의 조화속에 있습니다. 그렇게 구름이 흘러가듯 시간이 가면 일은 되어 있습니다. 쉬어가면서 했지만 거의 한달 가까이 걸렸습니다. 대략 일차로 모든 틈새의 흙을 메우고 나니 15톤 덤프트럭 한 대 반의 흙이 들어갔습니다. 덤프트럭 한 대 반, 그걸 모두 삽으로 떠서 옮겨가지고 손으로 이겨서 벽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벽을 완성하려면 반 차 이상은 더 들어가야 할 겁니다. 그건 숙제입니다.
흙일은 거의 손으로 합니다. 다른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손으로 이겨서 손으로 칩니다. 손의 감각으로 일을 합니다. 반죽 상태를 아는 것도 손이고 잘 붙었는지 아는 것도 손입니다. 눈보다 더 정확한 것이 손이라는 말이 실감이 갑니다. 어떤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첫번째 이유가 얼굴보다 손이라는 연구결과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확실히 손에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숨어있는 모양입니다. 당신은 손으로 무엇을 합니까? 손으로 무엇을 인식합니까?
흙작업을 하면서 사내는 수없이 되물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사내는 대답합니다. "모른다" 사내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모른다" 그러면서도 사내는 계속 흙을 쳤습니다. 운명처럼! 그렇게 6월이 가고 7월, 사내는 일손을 놓고 길을 나섰습니다. 충동에 이끌려, 때로는 기꺼이 충동적으로 살고자 했던 사내였습니다. 며칠씩 길 나섰다가 돌아와 일하다 또 길 나서곤 했습니다.
구들놓기
결론부터 말하면 다시는 구들 놓을 엄두가 안 납니다. 구들만큼 집 지으면서 많은 고민을 한 작업도 없습니다. 구들을 놓아 본적도 없고 놓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책에서 잠깐 봤던 기억과 구들을 놓아본 사람에게 들은 얘기가 사내가 아는 구들에 관한 지식의 전부입니다. 사내는 간편하게 구들을 놓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내의 구들놓기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한 용어는 모르지만 함실구들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솥을 걸지 않고 방바닥 밑에 직접 불을 때는 함실이 있는 구들입니다. 그럴때 문제는 함실위에 올리는 돌(명칭은 모름)이라고 합니다. 웬만큼 크고 두껍지 않은 돌은 직접 불이 닿으면 다 깨져서 방이 내려앉는다는 것입니다. 근처에 사는 후배가 그렇게 구들을 놓았다가 2년만에 방이 꺼져서 새로 구들을 놓으면서 솥을 걸고는 사내에게도 솥을 걸라고 일러주더군요. 하지만 사내는 솥을 걸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궁이를 집안에 만들었기 때문에 솥을 걸만한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웠고, 불 땔 때 마다 물을 끓일 이유도 없거니와 아까운 열을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마침 전봇대 공사를 하다가 포크레인이 커다란 돌 하나를 끄집어 냈습니다. 순간 저거다 싶었죠. 두께가 20센티에서 25센티 정도로 일정하고 직사각형 모양으로 폭이 좁은 쪽이 90센티 넓은 쪽은 1미터 10센티 정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혼자서 방으로 갖고 들어가는가, 였습니다. 말이 돌이지 거의 바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사내는 지렛대로 돌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꼼짝도 않습니다. 이럴때 사내는 약간 흥분이 되면서 신이 납니다. 조금은 어렵지만 분명히 풀 수 있을 것 같은 수학문제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이리저리 굴려보면 반드시 해법은 있거든요. 며칠간 그대로 두었습니다. 잡아놓은 사냥감을 바로 먹지 않고 갖고 놀고 있는 맹수의 심정도 이와 같을 겁니다. 영화 라파누이가 생각납니다. 왜, 자연파괴의 상징처럼 얘기되는 이스터섬의 석상을 소재로 한 영화 말입니다. 거대한 바위를 통나무로 받쳐가면서 옮기지요.
사내도 땅과 돌 사이에 약간 틈이 있는 곳에다 작은 통나무를 끼웠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지렛대로 힘껏 밀어올렸습니다. 돌이 약간 나무위로 올라 타면서 틈이 조금 더 커졌습니다. 이번엔 조금 큰 통나무를 끼웠습니다. 그런식으로 통나무의 크기를 늘려가자 드디어 돌이 앞뒤에 커다란 통나무 바퀴를 달고 올라 앉았습니다. 그러자 그 육중한 돌도 지렛대로 미니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돌을 옮겨서 함실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곤 자동차용 자키를 함실 바닥에 대고 돌을 들어서 받쳐진 통나무를 빼냈죠. 돌 하나 옮겨서 설치하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습니다. "저 돌을 데울려면 도대체 불을 얼마나 때야 할까?" 사내의 구들방은 아랫목은 따뜻해지지 않는 이상한 방이 될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랫목이 내려앉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참, 돌을 옮기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돌과 흙, 나무 등 자연소재로 짓는 집이 자연친화적이라는 말, 그거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저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린다는 차원의 미적 감각에 관한 얘기입니까? 숲이 피라미드 건설로 사막이 되어버렸지만 피라미드는 가장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되어버린 지금, 인류의 미적 감각의 기준도 알 수 없습니다. 별개의 문제입니까? 오! 그 지나친 변덕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함실을 만들었으니 고래를 놓아야 겠지요. 그런데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손님맞이 하느라 일 안하고 놀았습니다. 일년에 한번 휴가라고 놀러 온 사람들에게 일하자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잊지 않고 찾아준 것만도 고마운데 말입니다. 같이 바닷가도 가서 놀고, 더덕캐서 더덕구이 해주며 열심히 대접했습니다. 또 손님맞이 한다고 뚝뚝뚝딱 야외화장실도 하나 만들었습니다. 모든 게 불편한데 화장실마저 없어서야 주인된 체면이 안서지요.
휴가철이 끝나고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고래를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길입니다. 장마로 마의 백미터 구간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삽들고 나가서 두번째 복구를 하면서 또 망가진다면 더 이상 길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요. 생각같아선 레미콘 몇차 부르고 싶지만 형편이 형편인지라….4륜구동이 아니면 올라오지 못합니다. 하긴 올라온다 해도 돌을 나르는데 승용차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두번째 문제는 풀이 무성하고, 밭에는 작물이 들어있어서 돌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구들을 새로 놓던 후배가 제안한 방식) 토관을 바닥에 깔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래도 놓을 필요 없고 구들장을 구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냉큼 토관을 구해왔죠.
4천원짜리 70개를 샀으니 거금을 썼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헛돈을 썼습니다. 토관(연탄 화덕입니다)은 약해서 쓸 수가 없었습니다. 토관이 젖으면 손쉽게 부서져, 흙을 20센티만 올린다해도 그 흙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하중을 견뎌낼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28만원을 날리고, 손쉽게 해보겠다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사내는 오기가 생깁니다. 오기에다 보상심리까지 더해져 무슨 일이 있어도 원칙대로 끝장을 보겠다는 턱도 없는 결정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이 결정을 할 때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지극히 감정적입니다. 토관은 시공경험이 전무한 계획이었으니 실패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손쉬운 구들 시공방법은 많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감정에 휩싸인 사내……, 제 풀에 지치지 않는 이상 못 말립니다.
결론을 내리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 순간부터 돌을 주워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폐가들에 구들장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소유권자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원칙대로 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말입니다. 들거나 등에 지거나 해서 하나씩 하나씩 날랐습니다. 외바퀴수레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망가지고 경사진 길에서는 그저 맨손으로 들어 나르는 것이 가장 쉬웠습니다. 집터 인근의 돌부터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50미터, 백미터, 이백미터, 점점 돌을 들고 오는 거리가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돌 하나를 목 뒤에 지고 2백미터씩 언덕길을 올라오고 나면 숨이 차 본의 아니게 씩씩거립니다. 이 대목에서 사내는 처음으로 "힘든 건 괜찮아. 몸만 성하길"하고 바랐습니다. 몸을 바짝 엎드리고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돌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고래를 놓는데 5일이 걸렸습니다. 작은 것이 국어대사전 크기였고 큰 것은 그 두배는 됐습니다. 그런 돌만 7-80개는 들었을 겁니다. 정사각형의12자 방, 생각보다 넓었습니다. 모두 손으로 날랐습니다.
고래로 쓸 돌보다 더 구하기 힘든 것이 구들장입이다. 얇고도 넓고 평평한 돌, 그게 어디 흔합니까? 지렛대를 들고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습니다. 밭 가장자리에 쌓아둔 돌무더기를 뒤지고, 개울의 돌을 캐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적당한 돌이 나타나면 차가 다니는 길가에 들어다 놓았습니다. 그렇게 골라 놓은 돌을 승용차를 끌고 가서 몇 개씩 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승용차, 이번엔 완전히 끝장을 볼 모양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백미터 구간은 도리없이 하나씩 들고 날라야 했습니다. 등에 질 수 없이 무거운 건 외발수레에 싣고 질질 끌고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른쪽 팔 근육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밭 위에 있는 커다란 돌 하나를 길까지 들고 내려오다가 근육이 놀란 모양입니다. 중간에 쉴 수가 없었습니다. 내려놓으면 남이 농사지은 배추가 몇 포기 망가집니다. 구들장을 절반쯤 놓았을 때 였습니다. 이틀간 파스를 붙이고 일했습니다. 이러다가 골병이 들지 싶더군요. 사내가 집을 짓자는 건 이런게 아닌데 말입니다. 사내는 벗에게서 겔로퍼를 빌려왔습니다. 바로 며칠전입니다. 대단합니다. 돌을 싣고 집앞까지 거침없이 올라옵니다. 그렇게해서 구들을 놓고 있습니다. 하루만 더 하면 한줄기 연기를 하늘로 피워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틀째 비가 오고 있습니다. 이 비 그치고 하늘에 사내의 집터에도 사람이 산다는 신호를 올리는 날……술 한잔 해야겠지요. 한 줄기 연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기호가 아닙니까? 해야 할 일은 지천이지만 한 이틀쯤 다 놓아버리고 한 잔 하렵니다.
그날도 혼자라면 연명이 그랬던 것처럼 "아침부터 술잔 들고 거문고 타며, 술독에 술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혹 벗이 있다면 동파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를 베개삼아 동방이 이미 밝았음을 모르더라". 그렇게 마실 겁니다. 술은 마시고, 마음은 털어버리고……
첫댓글 가슴이 뭉쿨하고. 웃음도 나오고 조은글이라 퍼왓어요 ^^
퍼온글이셨구나..^^ 저는 라일락 문지기님의 경험담이신 줄 알았는데... 인터넷 게시판 글치고는 꽤 장문인 글인데 읽다보니 꼭 제가 그 사내가 되어버린듯이 흠뻑 빠졌었네요... 그리고 이후가 너무 궁금하네요... ^^
인터넷으로 이 글을 읽는 자체가 부끄러운, 아름다운 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소개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 읽고나니 퍼오셨다고? 어딘지 찾아가볼 수 있을가? 한껏 기대를 했었는데..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아!, 퍼온 글이란다.................
(전봇대를 놓던 다음날 아침에 똥을 누면서 낄낄거리고 웃었습니다. ) 이부분 일으면서 만은 공감이 가더군요 ^^
이글은 오래전 글인데,요즘은 농업용전기는 꼭 관정을 파야만 설치해줍니다..아마도 이사건 땜시 그런것 같기도(유명한 일화로 퍼진것 같음)...
대단하십니다. 장자도 님앞에서는 스스로를 사치롭다고 여길지도 ... 홀로서 산에 사시는 용기와 단순하게 일을 추진하시는 박력이 예사롭지는 않아보입니다. 인연이 닿으면 술 한잔 드리고 싶네요.
아!! 아쉽네요 에구 퍼온글이라고요 어딘지 함찾아가서소주한잔기울이려고했는데 하여간 멋진분이시네요. 나도 자유인이고싶당 ㅠㅠ
글 잼나게 읽고..... 마지막에 퍼온글이라니....애석..... 어디서 퍼 오셨을까요?????궁금......
10년전에 저도 처자식 모시고 산으로들어가서 처와제가 직접손으로 1년4개월동안 집을지었지요 어쩌면 저와넘 똑같은 시작과 감정과 무대뽀 ......... 집짓는거 처음부터끝까지 한번해보면 담엔 훨씬쉽게 지을수가 있지요 자신도 생기고요 모쪼록 님 존경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