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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자유간접화법과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
1. 서론
자유간접화법의 개념은 이미 오랫동안 소설이론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이 개념을 영화에서 수용할 때 영화적 방식이나 그 의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자유간접화법의 영화적 수용의 문제를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바흐친은 소설에서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을 다음성 개념을 통해 분석했다. 그런데 영화는 서사 형식으로서 소설과는 구분되는 형식상 특징을 지니므로,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는 쥬네뜨가 서사형식 분석에서 화법을 거리(distance)의 개념으로 규정한데서 암시를 찾으려 한다.
두 번째로 소설에서 자유간접화법의 의미는 주로 문체상의 문제이었다. 그런데 특히 현대영화에서 이런 자유간접화법을 수용했을 때 그 의미는 더욱 고차적인 것이었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ꡔCinema IIꡕ에서 현대영화를 주로 분석하면서, 이 자유간접화법의 의미를 생성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바 있다. 필자는 이 문제에서 들뢰즈의 사유를 전체적으로 개괄해 보고자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 영화 매체의 특징은 자유간접화법에 있으므로, 영화라는 예술의 일반적인 철학적 의미가 이런 분석을 통해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자유간접화법
1)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적 개념
말의 화법은 화자가 타인의 말과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을 말하며, 이는 일반적으로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타인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흉내내어 전하는 것이며, 후자는 화자가 타인의 말과 생각을 자기의 말로 축약하여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화법적 문장은 형식적으로 보아 이중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전달하려는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전달하는 화자의 전달 행위이다. 전자는 문장의 종속절이고 후자는 주절이다.
이런 형식적 구분에서 자유간접화법은 간접화법의 문장 가운데 주절이 빠지면서, 종속절만 남은 경우이다. 그래서 화자의 전달행위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 없지만, 그렇다고 화자의 전달행위가 완전히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아있는 종속절 속에 여전히 간접화법을 암시하는 표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속절의 주어로서 3인칭 표현과 시제로서 과거 표현이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 종속절에서 타인의 말을 흉내 내는 직접화법의 요소가 남아있어 여기서 두 화법의 혼합이 이루어진다. 물론 직접화법적 요소의 잔여에는 다양한 정도 차가 있을 수가 있다. 종속절이 서술된 독백의 경우 인물의 말을 바로 듣는다는 환상이 야기된다. 그러나 서술된 보고에 이르면 인물의 말과 생각이 화자의 말과 생각으로 대체되어 그 직접성은 상당히 감추어진다. 자유간접화법과 유사한 것으로 자유간접 지각이 존재한다. 이는 타인의 초점화된 지각을 자유간접적 화법의 형식에 담는 것이다. 자유간접 지각에서도 화자의 개입을 알려주는 표현이나 인물의 초점을 암시하는 말이 비록 형식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더라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자유간접화법의 효과는 무엇인가? 대체로 이는 전달방식에서 규정되어 왔다. 즉 간접화법은 전달되는 것을 신속하게 스케치해낼 수 있다. 반면 직접화법은 전달되는 것의 현실감을 되살려 낼 수 있다. 이제 자유간접화법은 이 양자의 장점을 종합하여 전달되는 것의 현실감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상을 스케치하려는 목표를 가진다고 한다.
2) 바흐친의 다음성(多音聲) 개념
자유간접화법은 매우 미묘하고 다채로우므로, 이런 형식적 구분만을 가지고 실제로 나타나는 모든 자유간접화법을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는 자유간접화법을 화자의 전달 방식이라는 문제에 제한함으로서 그 깊고 다양한 의미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최근 바흐친(M M Bakhtin) 의 소설 문체 분석은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산하고 그 깊이를 심화시켰다. 그는 소설이 이질적인 문체 상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서, 작가의 문학적 담론과 인물의 독특한 개성이 담긴 발언, 그 외 다양한 구어체 서술의 양식화와 문어체적 일상 서술의 양식화(편지, 일기 등), 또는 다양한 비예술적 담론(윤리, 철학, 과학, 수사, 묘사 , 비망록 등)이 혼재된 복합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기에 그는 소설의 장르적 특징을 다음성이나 대화성(對話性)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다음성이란 소설이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하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소리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뒤섞여서 미분리된 것도 아니다. 양자는 서로 독자적 목소리를 내면서도 상호의존적으로 관련된다. 이런 관계를 그가 대화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 관계가 단순히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사학적 상호 작용은 이런 관계의 수동성을 전제한다. 수사학은 수동적 청자만을 전제로 하므로 화자의 말이 명료하고, 설득적이며, 생생하기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 그 관계는 마치 대화에서 상대방의 응답을 미리 예상하고, 그 응답을 고려하여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동적 이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를 “화자가 청자의 개념적 지평을 뚫고 들어가 그의 지각체계에 맞서서 자신의 발언을 구축하는 것”2)이라 말한다. 거꾸로 말한다면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개념체계 안에 이해의 대상인 말을 통합하는 행위”3)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이 여러 목소리란 역사로부터 추상된 개인들의 목소리가 아니다. 소설과 구분되는 수사학의 경우, 타자는 단순히 추상적인 개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 경우 두 대화자는 동일한 음성을 가지고 있으나 다만 언어적 의미에서만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고 파악된다. 그러나 소설에서 개인은 역사 속에 구체적인 개인들 즉 사회화된 개인들의 목소리이며, 그러므로 소설은 한 시대 서로 갈등하는 사회적 세력들의 상호작용, 즉 역동적인 대립과 조화를 토대로 하여 출현한다. 4)
바흐친은 이어서 소설 속에 여러 목소리가 중첩되는 다양한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그가 여기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문장 내부에서 두 목소리가 중첩됨으로써 독특한 문체적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이다. 그의 문체적 효과에 대한 분석은 자유간접화법의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는 산문 문체의 유형을 크게 ‘대상을 겨누는 말’과 ‘낯선 말을 겨누는 말’로 구분한다. 전자에는 대상을 기술하는 간접화법과 타인의 말이나 내적 독백을 재현하는 직접화법이 속한다. 후자에 속하는 것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작가의 말에 타자의 말이 개입하여 들어오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를 그는 ‘혼성구문’이라 규정한다. 다른 하나는 인물의 말에 작가가 개입하는 경우이다. 그는 이에 속하는 것으로 ‘양식화’, ‘패러디’와 같은 수동적인 이해에 속하는 것과 ‘은폐된 논쟁’과 같은 능동적인 이해에 속하는 것을 들었다. 그 외 그는 ‘변형’이라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양식화는 재현되는 인물의 언어로 말하되, 재현하는 주체 즉 작가의 의식에 의해 조명되는 경우이다. 즉 작가는 인물의 언어를 작가의 관점이나 평가를 드러내는 특정한 양식적 틀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반면 패러디는 재현되는 인물의 언어가 재현하는 작가의 의식에 의해 대립되는 두 부분으로 절단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재현되는 인물의 언어가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고 간주된다. 그런데 비해 숨겨진 논쟁의 경우, 작가는 재현되는 인물의 말을 제시함에 있어서, 그것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미리 고려하여 재현하는 것이다. 양식화, 패러디, 숨겨진 논쟁의 경우 비록 재현된 인물의 언어가 사용되더라도, 재현하는 작가의 언어의식이 개입한다. 작가는 인물의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굴절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변형은 작가의 언어가 재현되는 인물의 언어에 직접 개입한다는 점에서 앞의 것과 구분된다. 5)
그런데 바흐친의 이런 문체 분석은 자유간접화법의 개념을 확대시켜 준다. 즉 형식적 의미에서 자유간접화법은 단순히 간접화법에서 주절이 생략된 경우로 형식화되어, 자유간접화법의 다양한 경우들을 포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흐친은 다음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두 가지 목소리가 문장 속에 중첩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유간접화법 개념을 확대하였다. 이런 개념의 확산과 더불어 이제 자유간접화법의 의미는 단순한 전달의 한 방식을 넘어서서 양식화, 패러디, 숨겨진 논쟁, 변형 그리고 혼성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가의식을 드러내는 문체적 표현의 방식으로 확산된다. 더구나 그의 다음성 개념은 그 밑에 사회적 언어의 다양성, 사회적 세력의 갈등과 대립과 같은 삶의 근본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자유간접화법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초석을 놓았다고 보겠다.
2.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
1)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적 가능성.
쥬네뜨(G Genette)는 서사의 형식을 다루면서 태(voice)와 법(mood)을 구분했다. 전자는 화자가 영상에 대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말해준다. 이는 재현하는 화자가 영상 내부의 인물인지 영상 밖에 존재하는가를 가리는 인칭(person)의 문제와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중적 구조인지 단순한 이야기로서 일차적 구조인지를 가리는 층위(instance)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후자는 화자가 영상을 어느 만큼 전달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과 같은 거리(distance)의 문제와 전달하는 영상의 범위에 관한 내 외부적 초점(focus)의 문제6)로 구분된다. 이런 쥬네뜨의 개념규정에 비추어 , 자유간접화법은 거리의 개념과 관련된다.
그런데 쥬네뜨의 개념을 영화에 적용하는데 영화적 서사와 소설적 서사의 형식적 차이로 인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화법의 경우, 소설에서 화법은 그것을 발화하는 기호가 존재하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간접화법에서 재현하는 발언이 아니라 그 속에 재현된 발언의 화법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서 재현되는 발언은 하나의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문장의 파편적 부분이기 때문에 그 화법을 가리는 발화기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의 경우에 재현된 발언의 화법은 문맥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반면 영화의 경우는 소설의 경우와 달리, 현재적이며 공간적인 이미지를 매체로 하므로, 화법을 발화하는 기호(과거시제, 인칭 등의 표현)가 없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화법의 판단은 매우 어려운 문제인데, 여기서 쥬네뜨의 개념이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축약적 전달(diegesis)인가 아니면 재연(再演; mimesis)의 방식인가는 화자가 사건에 대해 취하는 거리에 달려 있다. 물론 이 거리는 물리적 시공간적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거리는 담론의 시공간과 스토리의 시공간 사이의 거리이다. 그러므로 이는 논리적 심리적 거리이다. 이처럼 전달방식으로서 화법의 문제가 거리의 문제로 규명되면, 발화기호를 가지지 못하는 영화에서도 화법이 가능하게 된다. 카메라가 스토리공간 내부에 존재한다면, 이 카메라는 스토리를 재연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화법이며, 반면 카메라가 스토리공간 밖에 즉 담론공간에 머무르게 된다면 카메라는 불가피하게 축약적으로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대체로 심도화면의 경우는 직접화법이며, 몽타주 시컨스의 경우 간접화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심도화면의 경우 카메라는 스토리와 동일한 공간 내에 머무르지만, 반면 몽타주 시컨스의 경우 카메라는 스토리공간을 벗어나 담론공간으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즉 몽타주 시컨스에서 카메라는 스토리공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굽어보고 있다. 7)
화법이 이처럼 거리에 의해 규정된다면, 이제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설의 자유간접화법이 형식적으로 보아서 두 개의 화법적 문장이 혼합됨으로써 즉 그 중 일부는 간접화법이고, 일부는 직접화법으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영화의 경우 사실 이런 부분적 결합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에 필자는 몇 가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방식을 구상해 보았다.
a. 심도화면의 경우; 심도화면은 직접화법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의 이미지가 성층화(stratification)된 경우, 그 중 일부는 인물의 것이고 다른 일부는 화자의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여기서 인물의 것에 속하는 이미지는 스토리공간의 연속성 내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것에 속하는 이미지는 스토리공간과 이질적이며,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자유간접화법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때 이런 이질성은 결코 공간적으로 연속된 전체의 어떤 다른 측면이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이미지들은 담론과 스토리공간처럼 전적으로 구분되는 두 공간에 속하는 이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b. 몽타주의 경우; 일반적으로 몽타주된 시컨스들은 하나의 통일된 스토리공간을 형성한다. 이 경우는 그냥 간접화법이다. 그러나 이 경우 통일성이 스토리공간 자체의 펼쳐짐으로 이해되면서, 사실 이것을 통일시키고 있는 작가의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몽타주된 시컨스들이 하나의 통일적 스토리공간의 펼쳐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가능하다. 특히 쇼트 사이의 단절이 극심한 경우가 그렇다. 이 경우 불가피하게 이를 연결시키고 있는 작가의 의식이 드러나게 된다. 관객은 이 몽타주 시컨스를 통해 외부에 있는 작가의 숨결과 주의, 그 목소리를 매우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때 영화의 화면은 자유간접화법적인 이중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즉 하나의 화면이 스토리상의 의미와 작가적 의미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이중성은 영화가 자기반성적인 경우 더욱 강화될 것이다. 즉 화면의 커튼 뒤에 감추어져서 그 은밀한 흔들림만으로 느껴지던 작가의 모습이 화면 속에 직접 비추어진다면, 작가의 신체나 음색을 통해 화면을 지배하는 작가의 숨결과 목소리는 더욱 확실하게 관객에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c. 트래킹 쇼트;
위의 두 가지는 소설과 유사한 방식이다. 즉 전자의 경우 한 화면에 두 부분이 혼합되며, 후자의 경우 한 화면이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과 다른 탁월한 자유간접화법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카메라는 이중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즉 카메라가 한편으로는 스토리공간에 머무르는 것으로 해석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카메라가 이를 벗어나 담론공간에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미지가 한편으로는 등장인물의 직접적 발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간접적 발언이 된다. 그러므로 심지어 카메라가 인물의 시선의 위치를 차지하더라도, 그것을 담론공간 속에 있는 카메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카메라가 자유롭게 공간을 드나들어 담론공간에 있다고 보는 경우에도 그것은 각 스토리공간 자체 내 각각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영화의 카메라는 정확히 그 어디에 있는지 애매모호하다. 그러므로 모든 영화는 잠재적으로 자유간접 화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중적 위치의 효과는 트래킹 쇼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카메라가 등장인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면(또는 바로 그 곁에서 등장인물을 따라 움직이면) 그 효과는 더욱 강화되는데, 이 경우 카메라의 프레임이 지속적으로 변화되면서 화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때 화면은 관객에게 등장인물의 심적 주관성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등장인물에 대해 작가가 일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관객은 매우 강하게 의식한다.
d. 다중(多衆) 서사;
이상의 세 가지 방식이 순수하게 영화의 이미지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이라 한다면, 실제로 더욱 많이 사용되는 것은 영화의 다중서사라는 특징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영화 속의 목소리와 목소리, 목소리나 영상 사이의 충돌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목소리가 화자를 맡고, 이미지가 인물을 맡거나, 이미지가 화자의 역을 맡고, 목소리가 인물을 소화하는 경우, 또는 이미지 속의 인물에 입혀진 타인의 목소리나, 타자의 영상 속에 집어넣어진 인물의 목소리 등 다양한 방식이 구체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 경우에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목소리와 영상 사이의 충돌의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만일 두 가지가 서로 조응한다면, 이는 연속된 시청각적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로 충돌하는 경우에 비로소 양자는 자유간접화법으로 결합될 수 있다.
2) 자유간접화법과 불연속성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 영화에 이르는 50-60 년대 서구 영화(현대영화)의 형식적 근본적 특징을 이와 같은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우선 자유간접화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작가가 자기를 간접적으로 타자에 귀속되는 이미지의 시컨스를 통해 보고, 거꾸로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이 타자로 간주되는 작가의 시야 속에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방식. ...이렇게 자유간접 담론 혹은 자유간접 시야 (vision)가 형성된다. 그것은 서로 이행하는데, 작가가 자신을 작가와 다르며 작가가 설정한 배역과 다른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인물의 간섭을 통해서 표현하던가, 인물이 마치 그 자신의 제스처와 그 자신의 말이 이미 제3의 편에 의해 보고된 것처럼 행위하고 말한다.”8)
들뢰즈의 이런 규정은 다음성이라는 바흐친의 규정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자유간접화법이 현대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불연속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다음성 즉 작가와 인물의 이중적 목소리가 이미지 내부의 단절(심도화면)이나 이미지 사이의 단절(몽타주)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미지의 내, 외부적 단절 즉 불연속성은 결국 담론공간의 작가와 스토리공간의 인물의 대립에 의해서만 실질적으로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불연속성이라는 현대영화의 형식적 특징을 ‘이미지들 사이의 틈’, ‘무리수적 커트’라 이름 붙인다. 현대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거짓된 연속성이라는 몽타주 방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현대 영화의 이미지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마치 텅 빈 공허로부터 생겨나고 다시 이것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며, 여기서 이미지들 사이의 연합이나 연쇄는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불협화음과 파편화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를 ‘일자(one)의 영화’가 아니라 ‘사이(between)의 영화’이며, ‘동등(eqaul)의 영화'가 아니라 '동시(and)'의 영화라 규정한다. 또한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곧 무리수적 커트이다. 유리수를 절단하면 절단된 선들은 각기 끝점을 지닌다. 반면 무리수는 끝도 없고 동시에 시작도 없는 두 선분의 결합으로 연결된다.
불연속성의 개념은 다시 이미지의 비중심성과 연관된다. 현대영화는 어떤 외부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비중심적이다. 들뢰즈는 현대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sequence shot 이나 piecemal cutup의 이미지들이 이런 비중심적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한다. 들뢰즈는 이런 이미지의 특징을 미술에서 원근법과 상관하여 설명한다. 17세기 과학의 발달로 대상의 외부에 시각적 중심이 존재하는 원근법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외부의 시각적 중심은 대상 자체에로 옮겨진다. 그 결과 sequence shot의 통약 불가능한 이미지나, piecemal cutup의 평면화된 스틸사진 이미지처럼 각 이미지 자체에 중심이 내재하면서 다중적 중심의 이미지들이 생겨난다.
들뢰즈는 이런 이미지들 속에는 인물의 주관적 이미지와 카메라의 객관적 이미지 사이에 구분이 사라진다 본다. 다시 말하자면 인물이 보는 카메라와 인물을 보는 카메라 사이에 구분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현대영화는 개념상 곧 자유간접화법이 된다.
“산문적 영화와 대조적으로 시적 영화에서, 인물이 주관적으로 보았던 것과 카메라가 객관적으로 보았던 것의 구분이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카메라가 주관적 현재를 추구하며 내적 시각을 획득하고, 따라서 인물이 보는 방식을 모방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간접 담론이나 자유로운 간접 주관성이라는 특수형식을 얻게 된다”9)
3)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연속성
들뢰즈는 현대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은 단순히 이미지에서의 불연속성으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사운드10) 사이의 독특한 관련 즉 불연속적 관계로 전개된다고 파악한다.
들뢰즈는 무성영화는 주로 이미지의 몽타주에 의존하는 데, 몽타주는 간접화법의 형식을 기초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간접화법은 이미지 앞에서 감추어짐으로써, 이미지는 자연화 된다. 즉 그것은 마치 실재하는 것과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무성영화의 감추어진 간접화법을 드러내는 것이 사운드이다. 무성영화에서 이미 발화가 현존하고 있지만, 그 발화는 들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글자의 이미지로 읽혀지며, 이 글자는 담론공간에서의 작가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무성영화에서 사운드는 자연화된 이미지에서 감추어진 간접화법을 폭로한다. 그런데 사운드와 이미지에 담긴 작가의 목소리는 진리의 목소리이며 법과 금기의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는 일정한 지배적인 사회구조를 전제로 하고 나오는 목소리이다. 바로 이 진리의 목소리에 의해 이미지는 실재인 것처럼 자연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들뢰즈는 토키가 등장하면서 단순히 무성영화에 사운드가 입혀지는 것만은 아니라 한다. 토키의 등장은 영화의 전체적 형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토키에서 발화는 이제 읽혀지지 않고 들려진다. 이제 발화는 작가의 목소리가 아닌 인물의 구체적인 발화이다. 그러므로 직접화법적 형식이다. 그것은 진리와 법의 목소리가 아니라 욕망하고 상대화된 개별적 인간의 목소리이다. 여기서 발화자는 청자와 더불어 상호관계를 지닌다. 그리고 관점이 서로 교환되면서 발화자와 청자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런 발화의 상호작용은 일정한 사회구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작용의 평형을 통해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토키에서 사운드의 본성이 변화됨에 따라서 이는 이미지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지는 탈자연화 된다. 이제 이미지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이미지와 대상의 관계는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마치 무성영화에서 사운드가 가시화 되듯이 토키에서 이미지는 가독화(可讀化) 된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특정한 관점이 해석되면서, 그것이 어떤 상호작용을 깔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미지는 감추어진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문제적으로 되며 모호해진다. 주요한 것은 토키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이다. 양자는 서로 조응한다. 이점은 토키에서 자주 사용되는 voice off가 잘 보여준다. voice off는 그 자체로는 조응하는 이미지가 없지만, ‘시야 밖’의 이미지의 현존을 암시하면서 추후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응이 확보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제 현대영화는 토키의 새로운 단계이다. 이 단계의 특징은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의 비조응에 있다. 이제 사운드가 이미지로부터 해방되면서 사운드는 독자적으로 전개된다. 양자는 단일한 이미지의 두 자율적 요소가 아니다. 양자는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사운드가 이미지로부터 분리되면서, 현대영화에서 발화행위는 이야기행위(storytelling)로 전환된다고 한다. 이야기행위란 영화의 발화가 독자적으로 구어적 문학작품 즉 설화가 된다는 의미이다.
사운드가 이미지로부터 분리되므로, 시야 밖의 목소리인 voice off가 아니라 이미지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voice over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화법에서의 voice over와 달리 이 목소리는 작가의 목소리, 진리와 지배 및 금기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제 voice over로서 사운드와 이미지는 상대화된다. 그것은 작가와 인물, 가상과 실제, 진리와 허위를 각각 담당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해서 서로 식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면(多面) 거울 방에서 서로 마주선 두 사람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비조응을 들뢰즈는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의 무리수적 커트라 규정한다.
이처럼 이미지와 사운드는 분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무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복잡한 연계에 의존하여 새로운 통일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시-청각적 이미지라 한다. 무성영화에서 사운드가 이미지화하며, 토키에서 이미지가 들려진다. 이에 비하여 현대영화는 시각적이며 동시에 청각적인 이미지이다. 양자는 서로 조응하지 않으면서 그 극한에서 서로 만난다. 그 극한은 바로 말해 지지 않으며, 보여 지지 않는 것이다.
“발화가 발화하는 것은 시각이 오직 투시를 통해 볼 수 있는 불가시적인 것이다. 시각이 보는 것은 발화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1)
4)비인과적 스토리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은 이처럼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의 불연속성으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에서 재현과 객관적 사건 사이의 관계도 전도시킨다. 들뢰즈는 고전적 영화에서 재현은 객관적 사건을 전제로 한다고 한다. 따라서 사건의 전개는 물질적 인과에 따라 합법칙적으로 전개되며, 이는 일정한 의미를 향해 극적으로 발전한다. 사건은 유크리트적 기하학의 공간에서처럼 최단거리인 직선에 따라 가장 효율적으로 전개되고, 이런 사건의 외적인 형식이 뉴톤적 절대적 시간 즉 연대기적 시간이다. 고전적 영화에서 재현이란 이 같은 사건의 전개를 가장 가깝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목표를 가진다. 고전영화에서 카메라는 물질적 흔적을 그대로 담는 도구이며, 문제는 얼마나 사건에 가까이 그리고 핵심에 다가가는가 하는데 있다. 들뢰즈는 이런 점에서 고전 영화에서 재현이란 니체가 말하는 진리에의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은 작가와 인물, 그리고 담론과 스토리를 혼합시킨다. 이렇게 된다면 재현의 행위와 재현되는 대상으로서 사건의 절대적 구별도 사라진다. 이제 재현의 행위가 객관적 사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건의 대상성이란 일정한 재현 행위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근대회화에서 사실감이 원근법적 재현형식의 효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실주의적 영화가 연속편집의 효과인 것과 같다.
이처럼 재현과 대상적 사건의 미구분은 진리의 판단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제 진리는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없이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판단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므로,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파괴된다. 들뢰즈는 이런 점에서 현대영화는 진리에의 의지를 부정한다고 한다. 그는 현대영화가 ‘허위화의 힘’에 의존한다고 하는데, 이 허위화의 힘이란 곧 진리의 판단가능성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그런데 자유간접화법에서 재현의 행위 자체가 끊임없이 유동하므로, 그것에 의해 산출되는 스토리적 흐름도 고전 영화에서와 구분된다. 사건들의 전개는 일정한 물질적 인과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사건들은 우연적으로 전개되고, 이런 사건의 전개에는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이 서로 감응한다. 이처럼 합법칙성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사건은 극적 의미도 상실한다. 사건은 이제 시작도 끝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돌연 시작했다가 마치지도 못하고 끝나고 만다. 사건의 한가운데는 절정과 전환점이 없다. 사건의 흐름은 다중적인 방향으로 분산된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비유크리트 기하학적 공간에서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가 여러 개가 나타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대영화에서 사건과 사건은 수축하여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그것은 현대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360도 회전’ 장면과 같다. 여기서 카메라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결국 자기를 비추게 되듯이, 현대영화에서 지난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앞으로 나타날 사건을 발견하게 되거나, 사건이 앞으로 흘러가면서 결국 영원히 못 박힌 것처럼 과거의 그 지점으로 항상 되돌아간다. 미래는 이미 와있으며, 과거는 아직 도래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전영화의 인과적 스토리가 연대기적 시간을 외적 형식으로 삼듯이 현대영화에서 사건의 형식을 담는 시간은 이처럼 수축적인 시간이다. 들뢰즈는 이를 시간의 직접적 개념으로서 지속의 개념과 연결시키는데, 그는 이제 자유간접화법적인 현대영화의 철학적 의미를 궁극적으로 이런 수축적 시간의 개념에서 찾으려 하였다.
3. 자유간접화법과 지속의 시간
앞에서 바흐친은 자유간접화법의 효과를 단순한 전달방식에서 스타일화, 패러디화 등과 같은 문체적 효과의 차원에 올려놓고 분석하였다. 그런데 들뢰즈는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의 의미를 보다 포괄적인 철학의 차원에 올려놓았다. 그의 철학적 분석은 자유간접화법이 현대인의 운명과 관련된다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순수 실재로서 시간적 지속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1) 시청각적 상황12)
들뢰즈는 현대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현대인이 외부의 대상에 대해 적절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였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상황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인에게 어떤 우연적 사건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기에 다만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는 이런 상황은 현대인의 일상적 삶이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현대인이 그저 습관적으로만 대응한다는 데 기인하기도 한다. 현대인은 이런 진부한 삶 속에서 감각-행위의 도식을 통하여 대응하는 행위의 능력을 상실한다. 그 어느 편이든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은 오직 시청각적 능력만을 고도로 발전시킨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단연 보는 자이다. 그에게는 보는 능력이 비상하게 발달하므로 그의 눈은 이제 천리안과 같다. 그것은 단순히 보는 능력의 양적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보는 방식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담고 있다.
2)시간의 직접적 개념
자유간접화법에서 작가와 인물, 담론공간과 스토리공간의 혼합은 결국 담론적 현재와 스토리적 과거의 혼합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자유간접화법의 의미를 새로운 시간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들뢰즈의 시간 개념은 베르그송의 진정한 실재로서 지속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a. 상기이미지와 순수상기
시간 개념에 관련하여, 들뢰즈는 과거의 기억으로서 재인(再認 recognition)의 개념을 다룬다. 그는 우선 습관적 재인을 드는데, 이는 몸에 익혀져 있는 신체적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며, 어떤 외부적 자극이 들어오면 곧바로 행동으로 나오는 기억이다. 이런 신체적 기억은 과거에 습득되었지만, 현재에도 작동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재의 평면에 존재하는 기억이다.
습관적 재인과 달리 주의(主意)적 재인은 이제 과거의 상기이미지이다. 현재의 행위가 일시 중지되면서, 과거의 상기가 일어나게 된다. 상기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현재화된다. 이런 상기이미지는 현재의 지각과 연합하여 일시 중지되었던 행위를 더 포괄적 차원에서 복원한다.
그런데 과거의 상기가 단순히 현재에 상상된 것과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어떤 과거의 상기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들뢰즈는 상상과 달리 상기에는 어떤 필연성의 느낌이 깔려 있다고 한다. 이 필연성의 느낌은 운명에 대한 느낌과 같은데, 이는 상기가 자기를 초월하는 어떤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상기이미지에게 과거라는 내적 징표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순수상기이다. 이런 순수상기는 현재와 과거가 나누어지는 분지점 넘어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너머로 주의(主意)적 재인이 미치지 못하며, 순수상기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비수의(非隨意)적 재인이라 한다. 이 비수의적 재인은 현재의 필요나 관심과 무관하며, 따라서 행위와 무관하다.
들뢰즈는 이 순수상기의 필연성 힘을 시간의 분지(分枝 ramification)라 이름 붙인다. 이를 분지라 이름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현재와 과거가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분지는 회상(flashback)에게 필연성을 주고, 상기 이미지에게 진정성과 과거의 무게를 부여한다. ”13)
상기이미지에서 순수상기는 그저 그 흔적을 통해 암시될 뿐이지만, 몽유나 최면 환각 광기 등에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현대의 시청각적 상황과 관련된다. 여기서 우연한 사건,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 도래하면서, 신체는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마비된다. 신체는 잠이나 환각 혼란의 상태에 빠지며, 이때 순수상기가 출현한다. 이때 순수상기는 마치 ‘심원한 자유’, ‘현기증 나는 속도’, ‘부유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순수상기는 상기이미지처럼 과거가 현재적 지각으로 현재화되는 대신에, 다른 이미지와 응축하여 제3의 이미지로 출현한다. 이 이미지의 응축이 무한히 계속되면서, 이른바 꿈의 변신의 계열이 형성되는 것이다.
b. 크리스탈 이미지; 가상과 실제의 통일.
상기이미지의 배후에 있는 순수상기의 발견은 시간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시간은 공간적 사물이 운동하는 텅 빈 그릇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사물의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히 직선적으로 흐른다. 그 속에서 과거가 사라지면 그 순간 현재가 시작된다. 시간의 흐름에서 매순간은 어느 순간이나 동일한 것이다. 사라진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주관적 의식의 기억에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 뉴톤의 절대적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적 상기이미지가 의존하는 의식초월적 순수상기의 발견을 통해서 들뢰즈는 시간의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사물과 시간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에게서 사물이란 시간의 축적일 뿐이다. 인상파화가에서 사물이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순간적 인상들의 복합체이듯이 들뢰즈에게서 사물이란 시간적 흐름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는 사라져 주관적 의식 속에 남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존한다. 그것은 현재 속에 축적되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미래도 그저 주관적 의식의 기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도 이미 현재와 더불어 현존하면서, 현재를 끌어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음악의 화음과 같다. 이전이 음의 울림이 현재의 음 속에 살아있으며, 다가올 음의 빛이 현재 음을 비추고 있다. 이런 화음이 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실재 자체의 구성이라는 게 들뢰즈의 입장이다. 그의 입장은 실재를 시간적 지속으로 규정하는 베르그송의 입장을 이어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시간의 화성악적 구성은 더욱 복잡하다는 게 들뢰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과거가 현재에 축적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과거에게는 미래로서 이미 과거에 있었던 것이다. 미래는 현재에 이미 있지만, 현재는 미래에게는 그 과거로서 미래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앞에서의 설명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누적적 시간의 형식을 보여준다면, 뒤에서의 설명은 미래에서 과거에로 흐르는 시간의 재귀적 형식을 보여준다. 이런 두 가지 시간 형식의 교차를 통해서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서 과거인가 하면 현재이고 현재인가 하면 과거이다. 과거와 현재는 서로 순환된다.
시간이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순환이라면, 시간은 직선적이거나 단일하다는 뉴톤적 시간 개념도 부정된다. 시간은 폐쇄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굽은 우주에서 빛의 화살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다. 이 폐쇄된 시간은 그것의 굽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다. 시간은 이런 이질적인 시간들로 이루어져서 마치 화음으로 이루어진 다성적 음악처럼 전개된다.
들뢰즈는 과거와 현재의 순환 즉 굽어있는 실재적 시간의 개념을 가상(vertual)과 실제(actual)의 통일로서 크리스탈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그는 이런 크리스탈 이미지의 예로서 다면 거울 상에서 어느 것이 실재이고 어느 것이 반영인지 구분되지 않으면서 양자가 동시에 나란히 있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크리스탈적 이미지는 사물과 그 그림자, 배우와 그 역할, 종자와 그 환경 사이에서도 발견되며, 영화 속의 영화와 같은 모든 재현의 체계에서 발견된다 하겠다. 이런 크리스탈 이미지가 현대영화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자유간접화법이다. 그것은 화자와 인물, 담론공간과 스토리공간, 재현과 재현대상이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므로, 결국 가상과 실제가 통일되는 크리스탈 이미지가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고전영화가 운동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간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순환하는 실재적 시간의 직접적 개념이 현대영화의 자유간접화법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한다. 들뢰즈는 가상과 실제, 과거와 현재의 이런 관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일 때 이미 과거가 아니라면, 현재는 결코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재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랬던 현재와 공존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실제 이미지, 그것과 동시적인 과거는 가상적인 이미지 즉 거울 속의 이미지이다”14)15)
c. 시간의 수렴
들뢰즈에서 시간은 하나의 폐쇄된 체계이다. 들뢰즈는 이를 하나의 사건이라 말한다. 마치 음악이 다양한 화음의 다층적인 구성에 의해 이루어지듯이 시간의 전체는 이런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전체 시간을 이루는 사건들의 구성방식을 들뢰즈는 시간의 평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제 시간은 무한히 많은 시간적 평면들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평면은 공존하면서 일정한 점을 향해 수렴된다. 이 점이 바로 일련의 사건들의 계열을 생성하는 지점이다. 각 평면들은 나름대로의 거리에서 이 점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각 평면들은 이미 그 내부에 문제의 지점을 포함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이 문제가 구현되는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각 평면의 이런 수렴은 결코 연속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평면으로 들어가거나 다시 다른 평면으로 이동하는 것은 연속적 이동이 아닌 점프를 통한 이동이다.
들뢰즈는 웰즈(O Wells)의 영화 ‘시민 케인’의 구성방식을 통하여 시간의 수렴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영화 ‘시민 케인’은 죽은 케인과 관련된 각 인물들의 케인과 관련된 회상을 다룬다. 그 각각은 고유한 사건으로 하나의 평면을 이룬다. 그런데 이 각 평면은 케인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지향한다. 그 각 평면은 각자 전체적으로 케인을 규정하지만, 사실은 케인의 전체를 부분적으로만 다룰 뿐이다.
3)차이의 철학
현대 영화에서 보여지는 자유간접화법적 이미지들은 가상과 실재의 통일로서 시간의 직접적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이런 자유간접화법의 이미지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차이의 사유와 연결시킨다. 이 사유는 앞에서 말한 각 시간의 평면을 생성하는 점과 관련된다.
동일성의 사유는 보편적 개념에 개별자들을 포섭시키는 사유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경험주의적 사유, 추상적 사유에 해당된다. 그러면 그것에 대립하는 차이의 사유는 무엇인가? 들뢰즈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자주 들고 있는 예가 바로 원추 곡선이다. 광원을 원추에 놓고, 원뿔을 투사하면 다양한 곡선의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때로 그것은 원이며, 때로 타원이고, 때로 포물선이다. 각각의 곡선은 고유한 특이성을 지닌 하나의 곡선이다. 그러므로 각 곡선들이 서로 통약할 수 없는 차이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어떤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그 점은 곧 원추 위의 광원인데, 이는 이 곡선들의 외부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선 모두에 들어 있는 것이다. 개별적 곡선과 원추 위의 광원은 개별자에 대한 보편적 개념의 관계는 아니다. 원추 위의 광원은 모든 개별 곡선들에 선행하면서 개별 곡선을 생성시키는 생성의 점이다. 원추곡선에 대한 비유는 차이의 사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도록 해준다. 차이의 사유는 이처럼 통약 불가능한 차이를 가진 사물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향한다. 이는 개별자를 포괄하는 보편자로서 전체가 아니라, 개별자의 외부에 있는 전체이다. 여기서 외부에 있다는 것은 단지 공간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개별자에 선행해서 놓여져 있다는 의미에서 곧 문제(Pro-blem)이지만, 개별자 내부에서 측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월적 외부이다. 그것은 개별자로부터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며, '참을 수 없는 것', '지시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별자를 초월한 그러면서 개별자를 생성하는 이 문제가 바로 차이의 사유가 지향하는 그것이다.
들뢰즈는 영화는 이런 차이의 사유를 강제하는 힘을 본질적으로 갖는다 한다. 사실 이미 아이젠슈타인의 영화도 전체에 대한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 아이젠슈타인은 한편으로 이미지의 충돌을 통한 리듬을 창조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에 대한 감각적 메타퍼를 통하여 전체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나 아이젠슈타인이 추구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현대 영화에 이르러 이제 전체는 열려진 외부로 간주되며, 영화는 이 외부의 문제를 지향하게 된다. 그렇다면 개별자에게 사유되지 않는 이 외부의 문제를 현대영화는 어떻게 사유하는 것인가?
현대 영화에서 인물들은 시청각적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행위적 관련성을 상실하면서 외부로부터 단절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논리적 사유, 또는 실천적 사유의 힘을 상실한다. 이런 상실은 외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금기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이런 상태를 ‘사유를 도둑맞은 상태’라 이름 붙인다. 이 상태는 그저 사유할 수 없는 멍멍한 상태가 아니라 동일적 사유를 지배하는 보편적 개념을 해체하는 사유의 폭발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무능성 앞에 인물의 행위는 자동화(automatism)된다. 그 행위는 현실에 적합하지 못하며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마비되고 경화되며 해체된 행위이다. 이들의 행위는 그러므로 정신병적 강박증을 보인다. 물론 표현주의 영화에서도 환각이나 몽유병 등 왜곡된 내면을 투사하는 이미지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 이미지들이 현실에 대립됨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완하는 기능을 지닌 것이라면, 이제 현대영화에서 나타나는 자동화된 이미지들은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그것을 현실 속에 깨어서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사유의 무능성, 그리고 자동화된 행위는 이처럼 현실과 단절되어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는 보다 심원한 외부로 향하여 내부에서 열려지는 지점이라 말한다. 어느 것이 우선적인지를 판단할 필요는 없다. 논리적 사유가 막힌다는 것, 그것은 이미 논리적 사유로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미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꾸로 논리적 사유가 막힘으로써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가 충격적으로 시작된다.
5.결론
이 논문을 끝내면서 푸르스트가 자신의 과거에 도달하려 시도했던 그 엄청난 고투가 떠오른다. 기억의 저편에 있는 순수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현재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거의 기억 없이는 현재의 삶은 파편화된 채 이해될 수 없는 괴물과 같은 것이리라. 그것은 용서될 수 없는 삶이며, 고독이라는 굴레 속에서 질식된 삶이다. 과거를 회복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며 사회적 삶을 서로 소통시키는 작업이기에, 푸르스트는 그토록 기억을 위해 고투했던 것이 아닐까?
현대 영화의 자유간접화법은 들뢰즈가 말했듯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이를 통해 삶의 생성점을 을 바라보도록 하는 차이의 사유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자신의 파편화된 삶을 극복하는 실존적 투쟁이기도 하다. 이것이 현대영화, 아니 일반적으로 영화라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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