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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 연설 중이다. (VOA 영상 갈무리) |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그가 전혀 여성을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여성으로서 이것은 내가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였다. 예전에 여자 후배 두 명과 산행을 갔다가 벌거벗고 달려드는 미친 남자 때문에 혼비백산해서 거의 구르다시피 산을 내려온 후, 한동안 길에서 낯선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 같으면 공포로 얼어붙곤 했다. 그리고 성범죄자의 성기를 다 잘라버려야 한다며 치를 떨기도 했다. 트럼프는 내게 그런 남자를 상징했다.
트럼프가 자기가 원하는 여자 아무나 성희롱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할 때 같이 있던 빌리 부시라는 주요 텔레비전 방송 진행자가 그 비디오가 폭로된 후 해직되었다. 트럼프와 맞장구를 치며 부추기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일하던 여성 앵커들이 더 이상 그런 사람과 같이 일하기 불편하다는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고, 그 사건 이후 여성 시청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때문에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사로서는 그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트럼프 옆에서 맞장구치는 남자도 같이 일하기 불편하다고 해임시켰는데, 그 주인공인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힐러리를 찍은 여성들의 충격이 어떻겠는가.
힐러리는 왜 대통령이 되지 못했나
모든 여성이 힐러리를 찍었다면 분명 힐러리가 당선되었을 것이다. 결국 여성들 중에서도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이야기다. 이 또한 의아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모든 여성이 같은 생각은 아니라는 말이다. 힐러리는 흑인들의 지지를 생각보다 많이 받지 못했다. 사실 흑인들 입장에서는 힐러리가 여성이기도 하지만 백인이라는 점에서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오히려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에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트럼프가 당선되었든 힐러리가 당선되었든 그들이 백인들의 세상에서 산다는 사실은 변함없다는 것이다. 성별간의 장벽만큼 인종간의 장벽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힐러리의 당선은 백인 여성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진보적 성취였겠지만, 그게 흑인들에게는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여성 운동의 중요한 분기점도 흑인 여성들이 백인 여성들과 다른 노선을 취한 데서 생겼다. 실제로 노예 해방 운동이 있기 전 백인 남성보다 백인 여성들이 더 노예들을 잔혹하게 대한 사례들도 많았다. 남편은 언제나 자기든 노예든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흑인 여성 노예들이 남편의 정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경쟁자였던 것이다.
힐러리는 이번에 흑인들보다 라틴계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이민 정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트럼프보다 힐러리가 유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흑인들 입장에서는 라틴계가 그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흑인들은 적어도 미국 시민이었다. 하지만 라틴계들의 (불법)이민으로 일자리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성, 인종, 계급의 교차적인 원인들이 트럼프의 당선을 만들어냈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 그동안 박탈감을 느꼈던 미국 백인 블루칼라 남성들의 반격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힐러리와 샌더스가 경쟁할 때 샌더스가 안 된다면 차라리 트럼프를 찍겠다는 남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샌더스가 아니면 트럼프란 말인가.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백인 남성이라는 것밖에 없는데. 바로 그 점이다. 백인 남성이라는 것. 그러니 미국 백인 여성으로서는 여성 운동의 역사를 적어도 50년은 돌려놓은 것 같은 허탈감에 빠질만 하지 않겠는가. 자신들이 평생을 들여 쌓아온 것이 그냥 순식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힐러리는 미국에서 대선 후보가 밟을 수 있는 정치 경력의 정석을 걸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트럼프에게 졌다는 건 여성이라는 요인 외에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여파의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했는데, 1960~1970년대에 제2의 여성 운동 물결의 영향을 받은 여성이라면 그들의 숙원이 산산조각이 나는 깊은 아픔을 느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종종 읽는 여성주의와 종교 블로그에서도 연일 이 사태에 대한 여러 생각과 반추들이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무엇을 예상할지 몰라 당황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며 마음을 다지기도 한다.
‘가치’에 따른 선택 vs.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
이들이 이렇게 추스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에서 진보의 가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진보는 우리가 서로 입장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힐러리가 비록 부자고 여성이지만, 그가 제시하는 ‘모두를 위한 가치’(inclusivity:포용성)에 교육 받은 시민이라면 동의할 것이라는 게 진보의 믿음이다. 성별이나 인종이나 계급이나 성적 지향이나 개인의 신념 때문에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건 바로 그런 믿음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비차별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 결과를 보면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성별, 계급, 인종, 종교 등을 넘어서는 이타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흑인이어서 차별 받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백인 여성을 지지하겠다던가 하는 결정은 그리 쉽게 내려지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차별의 원칙은 어떠한 요인에도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며, 그것은 이러한 차이들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성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이 본질주의와 씨름해왔다. 본질주의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종, 계급 등 다른 요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차별은 이 요인을 본질화하고 서열을 매기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미국을 기준으로) 서열의 제일 우위에 있는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개신교인 비장애인 가장’이라는 요인을 다 갖춘 사람은 많지 않고, (그리고 이러한 인구 통계 범주에 속했다고 모두가 자신이 가진 자라고 생각하거나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이 교차하는 요인들 중에서 어느 하나든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혹은 소속감을 더 느낄 수 있는,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인을 상황에 따라 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세기 영국의 기독교사상가이자 작가였던 도로시 세이어즈는 자신이 뛰어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여성을 여성이라는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봐줄 것을 요구했다. 말하자면 자신은 여성이지만 자기 집에 와서 가사를 도와주는 여성보다는 대학에서 같이 강의하는 동료 남자 교수들과 더 동질감 내지는 공통점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여성이지만, 모든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와 동질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남자보다 더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진보의 이념은 이러한 교차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모두를 위한 최선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번 미국 대선의 결과는 이것이 정말 이념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경험하지만, 나는 내가 가지는 ‘아시아 여성’이라는 교차성의 요인에서 여성으로서 백인 여성과 공감하지만 또 어떤 때는 그 백인이라는 요인 때문에 그들이 말도 못하게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오바마 대통령 때 힐러리 대신 그를 택한 흑인 여성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진보적인 백인 여성도 여성의 가치는 힘차게 주장하면서도 이민자들에게 쉽게 국적을 준다고 사적으로 불만을 표출할 때는 결국 여러 교차성 중에서 자신의 이익에 타격을 주는 요인에 대해서는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데이빗 홀린저라는 미국 종교학자에 의하면, 미국의 진보적 기독교가 복음주의와 같은 보수 기독교에 밀려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민 사회의 의제를 기독교의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보적 기독교가 계속해서 싸워온 것, 즉 인종차별 폐지나 남녀평등과 같은 의제들이 어느 정도 시민 사회에서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교회로 만들었던 요인을 상실하고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보수 종교가 성장하고 있다는 건 결국 이념은 인간 경험을 다 담지 못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믿을 건 ‘미국적 가치’의 힘?
그러나 여전히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이 상황을 수습해나가는 미국인들의 논리를 보면서 ‘미국적 가치’의 힘을 보게 된다. 유럽의 종교 전쟁을 피해 새 땅의 옛 주인을 몰아내고 국가를 세운 미국은 종교와 국가의 분리라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그럼에도 이 다인종의 나라가 연합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미국적 가치 때문이다. 미국적 가치란 바로 개인의 자유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 핵심에는 양심/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있다. 이 자유의 보장은 곧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쓸 수도 있다는 의미인데, 미국 역사에는 바로 이러한 수사학을 구사하면서 미국이 하는 일을 정당화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역으로 이 논리를 이용해서 국가로부터 권리 보장을 얻어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티싸 웽거라는 종교학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원래는 종교라기보다는 우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신앙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 자신들이 믿는 것도 종교라고 주장함으로써 미국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적 가치가 이 나라의 자부심이고 자신들이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인종이 달라도 일단 미국 시민이 되고 나면 이 미국적 가치를 되뇌며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자부심은 대단해서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도 그것이 지나고 난 후에는, 우리가 이것도 이렇게 이루어냈다고 하면서 또 한편의 미국의 신화를 쓰는 것이다. 민권운동이 한 예이다. 오랜 흑역사 끝에 얻은 이 성취는 미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랜 흑역사를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말하자면 시민종교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누구나 자기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는 자신들의 가치를 실천하면서 위대한 미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힐러리가 대선 결과 후 연설에서 이제 우리는 트럼프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미국적 가치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위가 보여주듯 아직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트럼프에게 미국의 최고급 기밀 정보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모두를 두렵게 하는 일이다. 트럼프의 탄핵을 예견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을 미국의 수치로 기억할 것 같다. 실제로 대선 후 예상 외의 결과에 대해서 <워싱턴포스트>는 ‘수줍게 숨어서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shy supporters of Trump)을 설문 분석에서 놓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부터도, 예전 수업시간에 어떤 백인 여성이 ‘아직도 터키 여성들은 강제로 베일을 써야 한다’면서 불쌍하게 여기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무지 착잡했는데, 이제는 그러는 너희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냐고 (속으로라도) 반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던 것이다. 물론 현명한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선 전에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냐고 미국 친구에게 물었더니 교육 못 받은 백인 남성들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게 놀랍다고 했더니 친구는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렇게 저렇게 분석을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트럼프의 당선은 우주의 신비이다.
양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