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인 최배달을 다룬 양윤호 감독의 <바람의 파이터>는 실화와 허구, 인간과 영웅 사이에 액션과 눈물이라는 징검다리를 놓고 공감을 호소한다. 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어느 쪽으로도 함정이 드러나고, 영화는 허점과 모순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바람의 파이터> 중반 이후는 주인공 최배달(양동근)이 일본의 도장들을 차례로 격파해 가며 '도장 깨기'라는 신화를 이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치 MTV의 화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강렬한 음악과 그에 맞춰 전개되는 대결 구도는 기세 등등한 액션 장면들로 대부분이 채워진다. 그러나 종반전에 이르면 비장미 넘치는 액션 장면들은 <바람의 파이터>에서 가장 진부한 장면들이 된다.
<바람의 파이터>에 대한 언론의 전반적인 평가는 중반 이후의 중심을 이루는 액션 연출에 높은 점수를 주고, 게이샤인 요우코와 펼치는 로맨스나 전반적인 드라마 전개의 평이함에 낮은 점수를 매기고 있다. 조선인 최배달이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후 입산 수도해 일본 최고의 무도인이 되는 과정은 분명히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다.
하지만 <바람의 파이터>는 드라마의 요소를 최소화하는 대신 중반 이후를 액션에 집중하도록 편집해 놓았다. 이러한 설정은 액션영화의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꼴인데, <바람의 파이터>를 액션영화라는 범주에 놓고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상투적인 드라마는 용인할 만한 수준의 것일 수 있다.
고유함 없는 액션
액션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 그대로 액션의 고유함이다. 양윤호 감독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이 <바람의 파이터>는 와이어를 쓰지 않고 사실적인 액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러한 야심은 몇몇 장면에서 액션의 거친 질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사실적인 액션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의 파이터>의 미덕이 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바람의 파이터>는 'No CG, No WIRE'를 내세우는 <옹박>과는 다를뿐더러, 더욱이 최배달의 행적을 재현하는 배우 양동근은 무에타이의 고수인 토니 자와는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 다른 배우다.
드라마를 보자면 <옹박>이야말로 옹색하기 그지없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고려지만 <바람의 파이터>가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나 구도를 전개시키고 있다. 아무래도 역사적인 실존 인물을 그려내는 많은 배경이나 세트에서부터 신경 쓸 요소가 많다.
그런데 <옹박>이 단순한 드라마의 결점을 사뿐히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액션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걸출한 액션 배우의 몸동작과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 구성을 통해 신기에 가까운 즐거움을 제공해줬다. <바람의 파이터>는 드라마를 단순화하고 상당한 장면을 액션 신으로 구성했지만 내놓을 만한 무협의 설계나 구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것은 양동근의 무협 연기가 모자랐다는 식으로 폄하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사실적인 액션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고집을 부릴 일은 더더욱 아니다. "Yes CG, Yes WIRE"라는 카피 문구를 내세울지라도 '최배달'이라 불리는 실존적 인물에 맞는 고유한 액션을 감안해야 했다.
대다수의 무협이나 액션 영화에서 드라마가 빼어난 경우는 드물다. <소권괴초>와 같은 성룡의 초창기 무협영화는 뻔한 복수극의 줄거리에 의지해 극을 이끌어 간다. <바람의 파이터>에서도 하인 범수(정두홍)와 최배달의 우연적인 관계를 통해 복수를 끌어들이듯이 복수는 나의 것을 외치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무협영화의 모티프다.
하지만 성룡의 무협영화가 남다르게 각인되는 이유는 특유의 코믹한 액션과 처절한 사투를 펼치는 라스트 장면을 통해 성룡만의 액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박력 넘치는 절권도가 영화의 감정이자 드라마의 감정으로 승화한다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제트 리라 불리는 이연걸의 현란한 발차기는 그 자체로 고유한 기호가 된다.
<바람의 파이터>에는 이러한 고유함이 부족하다. 매끈하게 넘어가기는 하지만 무협영화에서 오히려 필요한 것은 덜커덕거리며 마음에 인상적인 동작이나 장면이 박히는 것이다. 움직임이 많은 영화에서 액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가 된다. 대결 속에 오가는 합을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과 분노를 나누게 되고, 가라앉은 드라마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감정의 리얼리티는 어디로
방학기의 원작 만화는 이 점에서 유리하다. 컷으로 나뉘어진 화면과 화면 사이로 말풍선을 달아놓고 최배달의 심리적인 대사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인물들과의 암묵적인 대화를 형성하면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최배달의 액션이 삶과 죽음을 초탈한 무도의 길로 향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심리 전달이나 상황 묘사는 불필요한 독백이 되기 쉽다. 대결의 흐름은 전적으로 액션을 통해서만 설계될 수 있고, 대결을 펼치는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차별화된 구성을 통해 극의 긴장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것이 현명하다. 이때 액션은 극을 지배하는 감정이 된다.
그런데 <바람의 파이터>가 보여 주는 액션은 온전히 화면 안의 배우의 것으로 머물러 있거나 관조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며 밀도 있는 감정을 전하지 못한다. <바람의 파이터>는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액션을 늘어놓고, 감정의 증폭을 위해 음악을 활용하는 쪽이다.
음악의 과도한 사용은 액션이 주는 섬세함을 가려버리기도 하고, 화면 전체가 뿜어대는 일방적인 감정으로 치환해 버리기도 한다. 특히 여러 차례 반복되는 대결 구도에서 음악의 지나친 사용은 절제된 액션의 동작들을 살리지 못한다.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무사시노 벌판의 대결이 실망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다양한 유파의 수십 명 고수들과 혈혈단신으로 사투를 벌인 무사시노 대결은 최배달의 행적이 최고점에 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간결하다 못해 아쉬움만 남는다.
지난 FILM2.0과의 인터뷰에서 양윤호 감독은 "실제로 최배달은 한번 싸우면 2~3분이다. 결코 오래 안 한다. 내가 볼 때, 관객의 기대감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리얼리티의 측면에선 맞는다. 최배달의 액션은 싸움이 아니라 무도다. 그건 승패가 갈렸을 때 깔끔하게 끝내고 예를 갖추는 거다. 그걸 표현하는데 액션이 길게 갈 필요가 없었다"며 무사시노 대결 장면이 간결한 이유를 설명하지만, 그는 중대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관객의 기대감이 되었든, 영화의 감정 연출에 의한 것이든 '리얼리티'는 최배달이 몇 분간 싸웠는가를 물리적으로 재현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감정을 싣고 어떻게 싸우는가 하는 감정의 리얼리티로부터 온다. 물리적 길이가 아니라 심리적인 대결과 장면의 길이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액션의 긴장감을 주기 어렵다. 현실을 충실하게 다루겠다는 리얼리티의 집착은 자칫하면 '영화적 리얼리티'를 위한 조건을 망각해 버린다.
개인 대 역사, 현실과 신화 사이
<바람의 파이터>는 무협영화이면서도 실존 인물에 대한 전기영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액션 연출과는 별도로 기획 단계에서부터 영화가 안고 가야 할 책임이었다. 최배달은 소년 시절부터 머슴 범수에게서 태껸을 배우며 파이터의 꿈을 키우는 인물이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에 연루된 범수가 자취를 감추자 비행사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의 밀항을 선택한다. 배달 겨레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름을 배달이라고 부르는 사내는 일본에 도착한 직후 파칭코 기계로 도박판을 벌이는 춘배(정태우)를 사귀게 되고, 게이샤 요우코를 통해 성과 사랑에 눈뜨기도 한다.
다양한 인물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고난을 겪는 과정은 현실적인 캐릭터의 풍모라기보다 영웅 서사의 구조를 닮아 있다. 대체적으로 영웅 서사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도주했다가 새로운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동기와 사명감을 부여하고 고귀한 성품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곳에서 새로운 권위를 획득하는 최배달의 성장 과정은 영웅의 성장 과정을 반복한다. 역사상의 실존 인물을 끌고 온 한 편의 영화가 영웅 서사의 관습을 취하면서 '신화'의 세계로 빠져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최근 한국영화의 폭발적인 흥행을 이끈 것은 넓은 의미에서 '역사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과거사를 배경으로 허구적인 인물들을 창조한 이들 영화는 역사적 배경과 허구적인 캐릭터 사이의 긴장감을 통해 1천만 관객 시대를 이루어 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효자동 이발사>에 이르는 계보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캐릭터 사이의 조화 내지는 긴장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영웅과 반영웅의 모습을 대변하며 한편으로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의 파이터>를 필두로 개봉 예정에 있는 <역도산> <청연> <도마 안중근>은 실존 인물을 내세워 허구의 캐릭터를 대신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아픈 과거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이며,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사라져간 인물들 위에 올라서서 역사에 기록된 신화화된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선보일 개인과 역사, 현실과 신화 사이의 갈림길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과거와 대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시대와 무관한 눈물의 영웅
그러나 <바람의 파이터>에 등장하는 최배달은 이러한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 영화의 드라마적 구성이 실패한 점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통해 기존의 허구화된 캐릭터와의 차이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람의 파이터>는 <실미도>의 반영웅주의나 <효자동 이발사>의 소시민주의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영웅의 자리로 빠르게 편입해 들어간다. 하인이자 친구인 범수의 억울한 죽음 이후 힘에 눈을 뜨는 최배달의 수련 과정은 이상한 형태의 모방을 낳는다. 일본의 전설적인 영웅 미야모토 무사시의 발자취를 따라 여러 유파의 도장을 깨부수면서 이방인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사회의 인정을 받아내기 위한 인정 투쟁이며, 일본 사회의 영웅 서사에 힘입어 자신의 존재를 편입시키는 과정이다.
최배달이 평소 미야모토 무사시가 쓴 <오륜서>의 애독자이며 그를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의 행적을 따름으로써 최배달은 안전하게 편입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방학기의 원작 만화는 이 점에 있어서 이중적이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여러 경구들을 즐겨 인용하면서도, 최배달의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어쩌면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시대의 사슬에 얽힐 수밖에 없는 최배달의 인간적인 번뇌였을 것이다.
원작 만화에 비하자면 영화는 최배달이 지닌 모순적인 측면을 슬쩍 감추는 쪽이다. 전반적으로 영화는 민족주의자 최배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신화화의 과정을 마무리 짓고 있다. <넘버 3>의 유명한 송강호의 대사처럼, 최배달이 돌진하는 소를 향해 가라테의 주먹을 내지르는 마지막 장면은 신화적인 영웅에 대한 봉인이 될 것이다. 양윤호 감독은 애초에 미국 프로 레슬러와의 승부를 벌이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지만 그러한 결말을 만들었어도 신화적인 영웅의 봉인이라는 의미화는 비슷하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마음에 흡족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왜냐하면 최배달을 신화 속의 인물로 묘사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며, 민족주의에 대한 흔적을 약화시키는 것만으로 영화 속 최배달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람의 파이터>에는 좀 더 다른 모습의 최배달을 그려내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마련하는데, 그것은 결투를 펼치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눈물을 흘리는 인간적인 최배달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바람의 파이터>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검객 료마를 살해한 후에 크게 부각된다. 최배달은 인간을 살해한 것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감에 몸을 떨며 료마의 아내와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는 용서의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무도인으로서의, 구도자로서의 눈물이다. 수많은 고난과 상처를 입는 고통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희대의 영웅은 개인적인 수치심과 도덕적인 책임감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양윤호 감독은 이것이야말로 신격화된 영웅의 인간적인 면모라고 여겼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무도인으로서 책임을 지려는 그의 눈물은 오히려 인격에 대한 신화화를 부추기고 말았다. 그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배달의 눈물이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시대에 대한 슬픔이나 분노의 차원으로 이어지지 않고, 일본 사회가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대우에 분개하지 않고 개인적인 인격 수양의 부도덕함을 호소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탈역사적이면서도 완전한 영웅형 인간을 구현한다.
대단한 유혹
지난 시대의 실존 인물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소재임에 분명하다. 그들의 이름은 남았지만 여전히 미지의 인물들이 역사라는 살아 있는 영광과 고통의 상처를 배경으로 스크린 위에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짧은 식민지의 경험은 유일하게 영웅의 탄생을 가능케 한 시대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두한이라는 인물의 모습 속에는 민족주의자에서 정치 깡패를 오가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 중 영웅의 시대를 산 것인 일제 치하라는 짧은 역사적 시기다. 이 속에서 김두한은 정의의 주먹으로 승화되며 근대 이후 대중적인 열광을 끌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어쩌면 역사적인 인물들을 부활시킨다는 이름 아래 해방 이전으로 내려가 일제 시대의 인물들을 한꺼번에 끄집어내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기보다는 '영웅의 시대'가 가능했던 무대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른다.
<바람의 파이터>는 영웅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며, 최배달이 짊어진 역사의 무게를 덜어내 버리고 감정 없는 액션과 신화적인 에피소드들과 인격적인 눈물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문제는 비판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람의 파이터>는 여전히 거대하고 육중한 몸집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상한 무게감이 도사린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한국영화의 형식이나 미학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한국 사회라는 자장이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압박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일제 치하라는 역사적, 문화적 잔재들을 어떻게 다뤄내야 할지 사회적으로 합의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다. 친일 유산이나 문제들은 여전히 유령처럼 한국 사회의 곳곳에 스며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스크린의 전면에 부각될 때 우리는 잊고 싶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망각된 집단 무의식과 마주하게 되고, 그 무게에 눌려 이성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가라테의 주먹에 쉽게 으스러질 것도, 삼단 발차기에 사뿐히 날아갈 것도 아니다.
영화 이론가 지크프리드 크라카우어의 말처럼, 영화가 그 사회의 집단 무의식이라면 영화 속의 최배달이 취한 어정쩡한 포즈야말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자신의 유산을 판타지로 엮어낸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은 서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후대에게 남겼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있다. 만약 이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물 밖의 물고기만이 물의 존재를 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한국영화가 과거 역사를 다루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 물 밖의 물고기가 되는 여유로움과 성찰, 그리고...
첫댓글 평론가라고 길게도 썼네요...
정말,되게 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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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말씀드리지만 내가 안죽였어요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