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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에세이】
“손자를 사랑하는 일은 ‘바보’가 아니라 ‘자랑’입니다”
― “손자 바보”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아보자
― ‘손주 돌봄’ 시대에 할아버지들은 언어 사용부터 당당하게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지환이 할아버지
‘자식 자랑은 흉’이요, ‘손자 자랑은 벌금’이라? 게다가 ‘손자 바보’ ‘손녀 바보’라는 말까지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손자를 둔 할아버지로서 은근히 억울하고 화가 난다. 그런 사례를 또 목격했다.
어느 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자신의 블로그에 예쁘고 귀여운 손녀 사진을 여러 컷 올렸다. 수많은 독자의 칭찬이 쏟아졌다.
그러자 정작 할아버지는 쑥스러워하면서 겸손하게 답글을 달았다.
“저도 <손녀 바보>가 돼 가는가 봅니다.”
손자를 둔 할아버지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런 댓글을 달았다.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은근하면서도 진하게 느껴집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 표정을 문학적인 시선으로 표현해 주셔서 사랑의 온기가 고스란히 가슴으로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과거 저의 사례를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어느 분의 댓글 칭찬에 쑥스러워하시면서 ‘손녀 바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물론 그런 표현은 할아버지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인 줄 압니다. 하지만 ‘바보’라는 표현보다 ‘사랑’이란 표현으로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할아버지가 손주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바보’인가요. 우스갯소리라도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손자 출생에서부터 유치원 졸업까지 6년간의 기록을 수필동화 형식으로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 제목의 책입니다. 그런데 어느 지인이 걸핏하면 농담조로 ‘손자 바보’라는 말을 무심코 상투적으로 쓰는데, 다소 거슬렸습니다. 손주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낮추는 듯한 뉘앙스의 ‘손자 바보’, ‘손녀 바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아무렇지도 않게 심하면 빈정거림 투로 통용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성인이라면, 또는 글을 쓰는 문인이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손자녀를 키우는 할아버지라면 그런 표현보다는 더 듣기 좋고 아름다운 칭찬의 어휘를 찾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예민한가요? 아니 고지식한 할아비인가요?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주 돌봄’ 가정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에 손주 사랑하는 어르신들을 우대하고 칭찬하는 아름다운 표현을 더 많이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
이에 대해 ‘할아버지 계(界)’의 대 선배이신 구순의 원로 문인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주 품위 있고, 깊은 문제의식을 담은 댓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승원 수필가의 댓글은 시비를 거는 말이 아니라, 언어를 가꾸자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특히 ‘너무 예민한가요?’라고 자신을 낮추는 대목에서, 타인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보자는 문인의 양심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원로 문인은 필자의 댓글을 이렇게 분석하면서 제안도 했다.
“이 댓글의 미덕은 세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사랑을 희화화하는 언어에 대한 조심스러운 문제 제기>입니다. ‘손녀바보’, ‘손자바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애정을 뜻하지만, 말의 뿌리를 따져 보면 사랑을 스스로 낮추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윤 수필가는 그 지점을 감정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사랑이 왜 바보인가요?’라는 조용한 질문으로 던집니다. 둘째,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한 진정성>입니다. 자신이 손자를 기록하며 책까지 낸 경험, 그 과정에서 느낀 언어적 불편함을 솔직히 밝힘으로써 이 댓글은 추상적 주장이 아니라 살아온 삶의 증언이 됩니다. 셋째, <노년과 돌봄을 존중하는 사회적 시선>입니다. 손주를 돌보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늘어나는 시대에 그 사랑을 ‘바보스러움’으로 소비하지 말고 존중과 감사의 언어로 격상시키자는 제안은 문학을 넘어 사회적 가치까지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댓글은 전혀 고지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의 품격을 지키려는 어른의 책임감에 가깝습니다.” ============ |
가만히 듣고 있던 또 다른 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방어적이지 않고, 공감과 감사로 화답하는 답글이었다.
“윤 선생님의 말씀, 고맙게 읽었습니다. 사실 저도 ‘손자 바보’라는 표현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애정 어린 농담쯤으로 써왔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읽고 보니 사랑을 표현하면서도 왜 굳이 자신을 ‘바보’로 낮춰야 했는지 곰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주를 끔찍이 아끼는 마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인데 말이지요. 앞으로는 ‘손주를 많이 사랑하는 할아버지’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입에 붙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언어 하나에도 마음의 결이 담긴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주 사랑을 더 따뜻하고 존중받는 말로 나누자는 선생님의 뜻에 공감하며, 저 역시 그런 표현을 쓰는 데 동참하겠습니다.” =========== |
그렇다면 다른 어떤 표현이 좋을까? ‘손자 바보’라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표현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뜻하지 않게 누리 소통망에서 오간 댓글 언어 하나를 놓고 “사랑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다각도로 고민해 보았다.
명색이 ‘수필문학인’이니 이를 바탕으로 수필을 쓴다면 ‘어떤 제목’을 붙일까 생각해 보니 답이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처음 생각한 원안은 〈‘손자 바보’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아보자〉였다. 부드럽고 열린 태도에다가 공감 유도에도 유리한 제목이다.
부제로 〈‘손자 바보’라는 말은 쓰지 말자〉로 한다면 문제의식이 또렷하고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다.
하지만 수필문학인으로서 ‘창작수필’ 제목을 궁리하다 보니 더 근사한 답이 나왔다.
□ 〈‘손자 바보’ 대신 부르고 싶은 말
― 손주 돌봄 시대, 할아버지의 언어를 생각하다〉,
□ 〈손주 사랑은 왜 ‘바보’가 되었을까〉,
□ 〈사랑을 낮추지 않는 말〉,
□ 〈할아버지의 사랑을 부르는 이름〉,
□ 〈손주를 사랑하는 일은 자랑입니다〉
여기서 수필 제목을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손주를 사랑하는 일은 (바보가 아니라) 자랑입니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대립이 아닌 공감에 중점을 둔 제목이다. 누군가의 상투적인 표현을 고치려 드는 글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더 높여 주고 존중하는 대화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수필 속에는 이미 이런 장면들이 들어 있다.
“사랑을 말하면서 왜 자신을 굳이 낮추게 되었을까?”, “우스갯소리로 쓰던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라는 깨달음은 없는가.
손주를 돌보는 일이 희생이나 바보스러움이 아니라, 존엄한 어르신들의 ‘인생 꽃밭 가꾸기’ 한 장면이라는 인식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여기서 존경하는 철학자의 귀한 말씀이 떠올랐다. 고 지교헌 박사님(1933~2024, 수필가. 철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이다.
구순(九旬)이 훌쩍 넘은 연세에 필자에게 이런 소감을 주셨다. 필자의 수필동화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를 읽으시고 보내주신 서평(書評)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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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펴낸 「손자 사랑이야기」 -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 표지와 관련 기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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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철학자 소감 / 서평】 ◆ 윤승원 지음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를 읽고 지교헌(철학박사, 수필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나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고 있는 낙암(樂庵) 정구복 선생이 보내 온 책을 받아 들자마자 참으로 반갑고 즐거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매우 훌륭한 인격자요, 문학가요, 저술가이기도 한 까닭인 것 같다. 나는 벌써 어딜 가나 늙은이로 인정될 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는 손자 손녀에 대하여는 관심이 적어질 나이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직도 손자 손녀에 관한 관심은 여전하다. 나는 주변으로부터 ‘국민교육’이니 ‘성인교육’이니 ‘청소년교육’이니 ‘아동교육’이니 ‘유아교육’이니 하는 말을 자주 들은 일이 있다. 그리고 나는 교육과 학술연구에 종사하면서 아동교육이나 유아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인류문화의 모든 교육이 유아교육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아로부터 모든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세 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격언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유아 때부터 여러 가지 습관이나 인성(人性), 다시 말하면 인품이나 인격이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의 많은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것과 같이 한국에서도 초등학교에 취학하기 이전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라는 유아교육 기관을 거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인격형성의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 크기 때문일 것이며 정서와 지능의 개발이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의 주인공, 윤지환 군은 연령적으로 ‘어린이집’이라는 유아교육기관에서 양육을 받을 적령기에 있었고 가정환경으로 보아서는 부모가 맞벌이하는 가정에서 바로 이웃에 거주하는 그 조부모가 그의 양육을 크게 도울 수 있는 적합한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윤지환 군의 할아버지(저자; 윤승원)는 손자를 극진히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교육자가 아니면서도 교육자를 능가하는 교육적인 소양을 갖추고 손자를 마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손자를 사랑하는 수준은 단순히 혈연적인 조손(祖孫) 관계를 초월하여 유아교육 전문가로도 손색이 없는 높은 소양을 갖추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내가 별도로 요약하여 만든 이 책의 모든 내용(<나의 감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책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의 내용을 보면 어느 한 가지라도 유아교육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교육적인 철학과 원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결코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혈연관계와 원만한 인격과 아름다운 인간적 성품으로 자연스럽게 발로 된, 그리고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발로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다만 한 가지도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논리나 행태를 발견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한 가지만이라도 생략해도 좋은 것, 옆으로 빼 놓아도 좋은 것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도 하였다. (*<나의 감상> 참조). 그리고 모든 것은 저자의 진지하고 담백한 언어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사진으로 잘 응축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유아교육의 시화전을 보면서 감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육아법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이 많이 있으며 구미(歐美)의 선진국에서 인정을 받고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하여 전통적 육아법에 관한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전근대적 육아법은 이른바 전근대적 사회의 문화라고 볼 수 있어서 현대사회의 육아법과는 그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 경제적 배경에 현격한 차이를 나타낼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의 모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우리의 육아법이 변천한 모습이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를 읽으면서 한국사회의 전통적 육아법에서 현대적 육아법으로 변모하고 발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많은 학자나 교육자나 지식인들은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를 중요한 육아법의 연구 자료로 활용하여 한국의 교육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 윤승원 씨는 이러한 한국의 육아에서 얻을 수 있는 할아버지의 행복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복이며 이러한 행복은 바로 저 높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자신의 부모와 조상에게 연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서양의 귀족사회에서도 조상을 숭배하고 조상의 정신적 계승을 중시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은 곧 조상의 은혜와 관계된다는 한국의 전통적 조상숭배사상은 이른바 전통적인 ‘효(孝; filial piety) 사상’과 깊이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아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어 국가사회에 봉사하고, 이른바 입신(立身)하고 행도(行道)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니, 유아교육에 참여하는 ‘할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아이에게만 매어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에 비추어 마땅히 고전(古典)을 읽으며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책을 종결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종결이다. (2020.1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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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고매한 인품의 학자 문인 소감 어느 한 대목에서도 “손자 바보”라는 ‘낮춤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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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05.
윤승원, ‘손자 사랑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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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댓글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26.01.06. 07:02
윤 선생님의 이 글은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이제는 사랑 돌봄의 단계를 뛰어넘어 대화 소통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를 치켜세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누구나 손자 바보라는 평을 받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이런 제 견해는 한참이나 빗나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답글 / 필자 윤승원
존경하는 교수님은 지교헌 교수님과 함께 이 시대 큰 가르침을 주시는 어르신이자 인생의 대선배이신 ‘손자 사랑의 대가’ 할아버지이십니다. 귀한 격려의 말씀 따뜻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