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의 마음, 한 주발의 차에 있나니... / 함허 득통 스님
우리나라 茶人 중 한 분이신 함허 득통 스님에 대한 글입니다.
"차문화"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 沙光岩)
< 어진 사람의 行>
차실에 걸어 놓고 음미하고픈 시가 있다.
한 주발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한 조각 마음이 한 주발의 차에 있나니
마땅히 한 주발의 차를 맛보소서.
한번 맛보면 응당 한량없는 즐거움이 생기리.
이 차시를 지은 고려시대 함허(涵虛·1376~1433) 화상의 이름은 己和요,
호는 得通이다. 옛 이름이 守伊요, 호는 無準이며 계시던 방은 함허당이라 하였다.
속성은 劉씨이며 남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聽이며 벼슬은 典客侍事를 지냈고, 어머니는 方씨였다.
고려 우왕 2년(1376. 11. 7)에 태어났는데 어려서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글을 배웠는데 기억력이 뛰어나 하루에 수천 개의 말을 기억하였다.
학문이 차차 깊어짐에 따라 이치에 깊이 통달하고,
학문을 강론할 때는 그 뜻이 깊고 미묘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임금을 모시고 그 명을 받아 대행하면
반드시 周公旦이나 召公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12세 때 동문수학하던 벗이 요사하는 것을 보고 슬피 울다가
세상살이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할 뜻을 세웠다.
그러나 쉽게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지내던 중 우연히 海月이라는 스님을 만나 논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인민을 널리 도와주고 여러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仁이냐”는
문제에 이르러 해월 스님이 “맹자가 어진 이입니까”하고 물었다.
함허가 “그렇다”하니 “닭·돼지·개 등도 만물의 하나입니까”, “그렇다”,
“어진 사람은 천지만물을 자기 몸으로 삼는다(논어 주석)고 한 것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맹자가 진실로 어진 사람이고 또 닭·돼지가 만물의 하나라면
왜 그런 가축의 고기를 칠십 노인은 먹어도 옳다고 했습니까?”
이 물음에 그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여러 경전을 상고해 보았지만
살생에 대한 이론의 밝힘도 없었고, 선배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석연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1396, 21세) 봄, 삼각산 僧伽寺에 놀러가게 되었다.
이때 어느 노승을 만나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노승이 “불교에는 十重大戒가 있는데
그 첫째가 ‘살상하지 말라’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석연히 ‘어진 사람의 行이다’고 심복해 마지 않았다.
또 仁道의 말을 깊이 새겨서
이로부터 유교와 불교의 사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시 한 수를 지었다.
경사(經史)에서 정자·주자가 불교 헐뜯는 말을 들어서
불법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했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오다가
비로소 진실을 깨달아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노라.
이같이 생각한 그는 곧 출가할 뜻을 내어 義相庵에서 같은 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차 마시며>
이듬해(1397, 22세) 봄에 檜岩寺로 가서 처음으로 왕사 無學 대사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수행하다가
1404년(29세) 봄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한 방에 홀로 있으면서 보고 듣기를 아주 끊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밥 먹거나 쉬거나 조금도 어지럽지 않았다.
이내 깨친 바 있어 스스로 읊었다.
行行忽廻首(행행홀회수) 가고 가다가 갑자기 머리 돌리니
山骨立雲中(산골립운중) 산뼈가 구름 속에 섰다.
또 어느 날은 변소에 갔다가 나와 물통을 내려 놓으면서
“오직 이 하나의 일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한갓 헛된 말이겠는가.
1406년(31세) 여름에 功德山 大乘寺에 돌아와
그해부터 1409년까지 4년 동안 『반야경』 강석을 세 번 베풀었고,
1410년(35세) 여름에는 천마산 관음굴에서 지냈다.
1411년 가을에는 佛禧寺로 가서 3년 동안 결제하면서 절을 수리하고
여러 신도들을 모아 組風을 널리 드날렸다.
1414년(39세) 3월에는 자모산 烟峰寺로 가서 조그만 방을 정하고 당호를 涵虛堂이라 하고,
3년 동안 부지런히 수행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 뒤로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수행하되 마음에 맡겨 자유로웠으며
산천의 언덕에서 소요하고 인간 세상에서 자재하였다.
1420년(45세) 늦가을에 오대산에 들어가 향기로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오대산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에서 나옹 화상의 진영을 뵙고 제사한 후
이틀 밤을 그 암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날 꿈에 어떤 神僧이 나타나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을 己和라 하고 호를 得通이라 하라” 하였다.
스님은 절을 하고 공경히 받은 후에 갑자기 꿈을 깨니 몸과 마음이 상쾌하여 마치 하늘에 오른 것 같았다.
다음날 월정사에 내려와 지팡이를 놓고 한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아 있으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차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이에 주머니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어 그 道德이 세상에 알려졌다.
1421년(46세) 가을에는 세종대왕이 불러 어찰인 大慈寺에 머물게 하면서
先妃인 大妃의 명복을 빌게 하고 왕과 여러 군신들을 위하여 설법하게 하였다.
이렇게 4년 여를 지내다가 1424년 가을에 글을 올려 사퇴하고 강화도 吉祥山으로 떠났다.
오늘날 길상산은 전등사가 위치한 정록산 남쪽에 솟은 높이 336미터의 산으로,
절은 없고 남쪽에 지난해(98) 개교한 가천의과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 정수사와 함허동천>
길상산 서쪽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469m) 동쪽 신라 선덕왕 8년(639)에 창건된 정수사가 있다.
1426년 함허가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남을 보고 ‘精修寺’를 ‘淨水寺’라 고쳤다.
이 절 북쪽 등성이에 함허 득통 부도가 있다.
그리고 등성이 너머 계곡을 ‘함허동천’이라 부르며 바위에 글자가 석각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한 정수사 안내판과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불교사전』에도 위와 같은 사실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마니산을 길상산으로 혼용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江都誌』에는 “고려 말엽에 원나라 道人 함허 대사가 수도하던 곳인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으므로 그의 처가 찾아와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니
앞 바다에 빠져 죽어 각시바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40여 년간 전국 각지를 답사한 바 있는 필자는 이곳에 위치한 험허 대사의 부도처럼
아름답고 예술미 넘치는 부도를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지형 또한 바다를 조망하는, 좌청룡· 우백호 거북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명당터였다.
이후 함허는 孔德山 大乘寺, 雲岳山 縣燈寺 등의 여러 산을 편력한 뒤 1431년(56세) 가을,
영남의 희양산 鳳岩寺에 돌아가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다가 세종 15년(1338) 4월 1일에,
떠남에 다다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시방세계가 푸른 허공이다.
그 가운데는 아무런 길도 없고
바로 서방의 극락세계로다.
라는 임종頌을 마치고 곧 떠나시니 세수는 58세요, 법랍은 38세였다.
열반 소식을 들은 孝寧대군이 세종께 알려 강화 정수사· 현등사· 봉암사· 烟峯寺 등
네 곳에 부도를 세우고, 舍利를 모시게 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圓覺經疏』, 『般若經五家解說誼』, 『顯正論』, 『般若懺文』,
『윤관(貫)』 등과 제자들이 시문을 거두어 만든 『함허당어록』이 있다.
강화 정수사. 함허 스님이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났다 하여
절 이름을 ‘精修寺’에서 ‘淨水寺’로 고쳤다.
출처 : 봉은사랑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