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 있을 수 없었던 날들
증 언 자 : 김영민(남)
생년월일 : 1937. 8. 3(당시 나이 43세)
직 업 : 곤로수리(현재 곤로수리)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식기, 곤로 등의 땜질로 생활하던 김씨는 공수부대의 폭력 만행을 듣고서 20일부터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20일 MBC방송국 방화현장을 목격했고 21일 집단 발포시에는 자신도 머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MBC 방송국 방화의 현장
나는 집안이 여의치 않아 중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함평에서 5년간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 먹고살기에는 장래가 너무 암담해 장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는 비자로 기생충약을 만들어 팔아 생활했지만 기생충약을 계속 팔기가 어려워 고향으로 아주 내려와 땜질법을 배웠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곤로와 난로를 수리하였고 후에는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그리고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오후 5시까지 일을 찾아 날마다 쉬지 않 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역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광주시민들이 들고일어나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귀에 담지 않고 그날도 나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뭣 때문에 데모를 하는지 궁금했다. 일손을 놓고 걸어서 광주역으로 갔더니 사람들이 군인 트럭 두 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민들은 걸레에 불을 붙여 차 뒷바퀴에 던졌다. 나는 구경만 하다가 젊은 청년들에게 왜 불을 붙이냐고 물었다. 청년들이 지금 전두환이가 정권을 잡고 군사정권을 세워 국민들을 탄압하 려한다고 간단히 일러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전두환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젊은 청년들이 저리도 분노하여 군인들의 차를 태운 것을 보며 또 다른 정권이 세워져 박정희 같은 군사정권이 전라도 사람들을 탄압한다는 말에 분노가 일어났다. 또한 총칼로 무수히 사람들을 잡아다가 때린다는 말에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파들 틈새에서 차가 불타는 것을 보고 젊은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가기에 나도 마치 젊은 사람들처럼 노기가 충천하여 따라 나섰다.
시청 옆에 광호교통 차고가 있었는데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차를 달라고 사무실 직원에게 청하였다. 아마 30대를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시민들과 뭉쳐야만 우리가 차를 얻을 수가 있다며 나이 든 사람들에게 함께 요청하자고 하였다. 차 주인인 듯한 사람이 개인별로 차를 관리하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하자 젊은이들이 차에 불을 지르겠다고 윽박질렀고, 차 주인이 10대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세 사람 밖에 없어서 그곳에서는 세 대만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나에게도 어떤 젊은이가 운전을 하라고 권하였지만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광호교통 옆에 목재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각목을 들고 차에 탔으며 산수동으로 가며 '전두환을 몰아내자', '전두환 처단하자' 구호를 외쳤다.
나도 버스에 올라탔다. 법원과 농장다리, 문화방송 등지를 돌면서 시민들에게 주먹밥을 얻어먹고 시위를 하다가 5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농구화를 신고서 산장 입구로 갔다. 그때 만화가게를 하는 사람과 함께 갔었는데 이름은 모르겠고 동네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산장 입구로 하여 계림동 파출소에 가보았더니 시민들이 파출소를 부수고 불지르려고 했다. 파출소는 순식간에 불에 탔다. 그때는 저녁이라 해도 아직 석양녘이었는데 계림극장 사거리에서 군인들과 시민들이 밀고 밀리며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나도 인파에 섞여 싸움을 구경하려고 서 있었는데 어느 여고생이 최루탄을 맞아 쓰러져 있었 다. 계엄군이 여고생의 발을 짓밟아 데리고 가려 할 때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달려들어 여학생을 빼왔다. 나는 여고생의 손목을 끌어내어 근처의 동성제재소로 들어갔다. 얼굴과 손목을 씻어주며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정신을 차린 여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전여고 뒤 개천가로 갔다. 그곳에서도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던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함께 했다. 최루탄이 터지자 나는 도망가다가 계엄군의 몽둥이에 맞았으나 냅다 뛰어 어느 가정집에 들 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집은 꽤나 커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숨어 들어와 있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둑어둑해지자 그 집에서 나와 MBC 방송국으로 갔다. 방송국은 이미 불타고 있었는데 MBC 방송국 옆에 있는 금성센타대리점의 물건이 불 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물건을 들어다가 전여고 담벼락 있는 곳에 옮겨주었다. 지하실에는 냉장고 텔레비젼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전기, 전자제품을 옮겨다놓았다. 그리고 MBC 방송국 바로 옆에 개인병원이 있었는데 불길이 그곳까지 번질 것 같아서 병원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병원에 있는 환자들과 의사 간호원이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해 하고 있었다. 환자들을 우선 옮겨야 했다. 우선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남자 두 사람을 밖으로 옮겼고 가재도구 등을 챙겨 가로수가 있는 곳에 걸쳐놓았다.
MBC 방송국이 불타는 중에도 장갑차를 몰고오는 계엄군들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들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게 하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시키려 한 것이다. 너무나 갑자기 다가선 장갑차에 얼떨결에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 많이 다치고 쓰러졌을 것이다. 시민들이 다가드는 장갑차를 향해 드럼통을 밀어 막기도 하였고 12톤 트럭을 장동으로 밀고 나가기도 하였으며 돌을 던져대기도 하였다. 계엄군들이 최루탄을 쏘자 나는 전남여고로 도망가려고 뛰어가다 최루탄에 맞아 도랑으로 빠지고 말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한참 허우적대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왔다.
5월 21일 오전 내내 몸이 피곤하여 늦게까지 잠을 잤다. 집사람이 최루탄을 맞고 늦게 들어온 엊저녁 일을 되새기며 나이 먹은 사람이 데모하다 그 고생을 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어제 오늘 사이 목격한 것과 시위로 인하여 그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하던 것도 팽개치고 점심을 먹고 나서 또 밖으로 나갔다. 슬슬 산장 입구로 갔더니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덕화가 있었다. 친구와 함께 녹십자약국 앞에 서 있었더니 2.5톤 트럭을 타고 오던 세 사람이 총을 들고 약국 앞에 섰 다.
"계엄군들이 광주시민을 죽이고 잡아가고 있는데 우리들이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아저씨들도 우리와 함께 차를 타고 광주시내를 지키는데 앞장섭시다. 자! 차를 타시오."
그러고는 총을 쓱 내밀더니 말했다.
"공원에서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계엄군들이 있는 도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가지러 화순으로 가려는데 공수가 있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대극장으로 가서 계엄군에게 발사하시오. 군대 다녀오셨소? 자, 먼저 유동으로 해서 가시오."
21일 도청 앞 발포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음에도 별 두려움 없이 선뜻 응낙하였다.
나와 덕화가 함께 트럭에 올라타 금남로 지하상가를 막 지날 무렵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콩볶듯이 울렸다. 시민들이 차에 타 도청 쪽을 향하여 총을 겨누는 모습도 있었고 총소리가 나면 재빨리 몸을 숨기곤 했다. 또한 직접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도로 한켠에서 보게 되었다. 확실히 모습을 기억할 정도는 못 되나 여하간 쓰러지는 모양에 나는 두 눈을 뜨고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광주은행에서 사거리가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하는수없이 2.5톤 트럭을 유동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 총알이 팔꿈치에 맞았다. 그러니까 차가 갑자기 급회전하려고 하였는데 총알이 튀어오고 있었고 차는 인도와 차도변에 엇갈려 가로수 나무에 부딪혔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 핏물이 범벅이 되었으며 코뼈가 짓뭉개졌고 앞니와 옆 송곳니가 깨져 나갔다. 차에 탄 사람 중 나뿐만 아니라 다른 젊은이들도 그랬다. 그 경황에도 차를 몰아서 우선 다친 부위부터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함께 탄 사람이 기운을 차려 유동으로 차를 몰았다.
유동 삼거리로 갔더니 아직 해가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곳에는 2.5톤 트럭에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차에 치어 죽여 있었다. 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떡을 많이 담아 트럭에 실어놓았다. 아마도 죽은 시신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노인은 무척 서럽고 애달파했다.
나는 피로 물든 상처를 신문지로 닦았다. 병원에는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젊은이들이 도청을 밀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계속 거리에 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차에서 피를 닦아내며 거리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서양인이 비디오를 들이대어 나를 찍기에 바빴다.
이마의 상처로 통증이 심했지만 나도 총을 쏘아야 할 경우에는 쏘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총을 쏠지 몰라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어떻게 쏘느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감히 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상처부위의 통증으로 인해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워 유동에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덕화라는 친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집사람이 나를 보더니 같이 못 살겠다고 화부터 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다쳤는지 너무도 뻔하다는 투로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투정부터 부리는 것이다. 덕화 애인이 집으로 와서 나를 보더니 누가 총을 메고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자기 애인이 죽은 것이 아니냐며 왜 아저씨만 살아왔느냐고 슬퍼하며 원망을 했다. 덕화는 집에 돌아갔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일렀더니 후닥닥 밖으로 나갔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 이후 줄곧 집에 누워만 있었다. 산장약국에 가서 약을 타다가 먹었으나 상처의 진물은 8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다. 당시 변변치 않은 살림이었던지라 병원에 가기도 어려웠다.
기독교병원 이비인후과 고강연 씨가 나의 사정을 알고 무료치료를 해주었지만 애초에 치료를 하지 않아 그 형태를 아물게 하기는 어려웠다. 아직도 머리카락이 나지 않아 모자를 쓰고 다녀야만 하고 눈도 제대로 뜨기가 어렵다. 코는 코뼈가 짓이겨져 남들이 나를 보면 흉칙한 모습에 외면한다. 그러나 나는 추호도 부끄럽다거나 내 모습이 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양길에 접어든 곤로, 난로수리로는 벌어먹기가 수월치 않지만 자식들이 모두 장성했으므로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다만 사회가 잘되려면 전두환, 노태우 같은 놈들을 정치에 발을 디뎌놓게 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는데 5·18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그전부터 누적되어 온 국민들의 불만을 터뜨렸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지역적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언젠가는 가만있지 않을 광주시민이었는데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군인들에게 대항하여 싸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름없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내가 그런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5·18 광주민중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울분에 가득 찬 대항이었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그 이면의 모습과 정황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잘살 수 있는 나라, 그러한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