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쉐프도 아니고 윤여정에게 식당을 열라니. 당사자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의 여느 주부라면 구수한 된장찌개나 생활형 음식 정도는 척척 해낼 내공의 나이지만, 그녀는 배우다. 더구나 90이 가까워도 정정하게 딸을 챙기시는 어머니 덕분에 살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아무리 ‘예능 제작 천재’ 나영석 피디라지만, 참여자들도 시청자들도 모두 고개를 갸우뚱 했다. 차라리 <삼시세끼> 때 놀라운 요리 실력을 발휘했던 에릭이나 차승원이면 모를까. 아휴, 난 못해. 그녀의 손사래는 진심이었을 거다. 무려 ‘윤’식당이라니. 잘하는 일이 아닌데 내가 ‘대표’가 되고 ‘수장’이 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식당일이 ‘처음’인 것은 식당보조로 참여했던 정유미나 서빙과 음료부를 맡았던 이서진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허둘허둘, 잔뜩 긴장하고 시작하는 낯선 공간에서의 어설픈 일은 어느덧 시청자들까지 손에 땀을 쥐며 같이 발을 구르게 만들었다.
“아휴, 일단 불고기를 한번에 볶다가 나누면 될 텐데.”
“어머, 저거 너무 익는 거 아니야?”
마치 제 일처럼 안달이 난 시청자들은 회가 갈수록 점점 ‘노하우’를 익혀가는 출연자들을 보며 마치 자기가 훈수를 둔 공로인듯 뿌듯해했다.
불고기 햄버거에 불고기 라이스, 불고기 누들이라니. 언뜻 보면 세 가지‘나’ 되는 요리 같지만 결국 기본은 다 같은 거 아닌가. ‘고작’ 그 세 개조차 땀을 뻘뻘 흘리며 어눌하게 만들어내는 모습이 만약 휴양지가 아닌 생계 현장에서 벌어졌다면, 우리는 과연 응원과 격려의 시선으로 응시할 수 있었을까? 발리의 작은 섬 그러니까 휴양지라는 특수성이, 뭔가 어설픈 이 식당 사람들을 따듯하게 바라보게 했던 것 같다. 식당 손님들도 그랬다. 경쟁적 일상의 시간성과 계산적 관계성이 잠시 멈춘 공간인 휴양지, 그곳에서는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30분 이내에 밥을 먹고 1시까지 회사로 복귀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주방에서의 서투름으로 식사가 늦게 나오는 것을 견디기 힘든 법이다. 하지만 어차피 밥 먹고 할 일은 내 자유다. 호텔 방으로 돌아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든, 소화도 시킬 겸 해안을 거닐든 바다 수영을 하든,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누가 뭐라고 조정하고 닦달할 상황이 아니다.
<윤식당>에서 손님들은 그저 기다리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온 도시, 그곳의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풍성한 식탁 교제가 만들어진다.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으로 답가를 하며 <윤식당>을 배려와 낭만으로 가득 차게 한다.
“아, 제가 마침 드론이 있는데 휴양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영상으로 찍어 줄까요?”
기꺼이 나누며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저절로 엄마미소다. 제작진들도 이런 ‘낭만’을 원했던 건지, 세계 각국 손님들의 대화를 번역해주는 시청자들에게 윤식당 앞치마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열정 페이 논란이었는데, 그건 ‘저 쉼의 공간’과 ‘이 치열한 노동 공간’의 충돌이 빚은 해프닝이었지 싶다. 너희는 돈 받고 제작하고 돈 받고 찍으면서 너희들의 ‘업적물’을 만드는 일에 왜 우리의 열정을 ‘그냥’(앞치마 한 장이면 자본주의적 가치로는 그냥이 맞다) 사용하려 하지? 우리도 만약 그 공간에 있었다면, 그래서 옆 테이블 손님의 언어를 ‘마침’ 아는데 뭐라는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설마 그걸 해석해주며 돈으로 환산하려 하겠는가? 이건 전제와 작동방식이 전혀 다른 두 공간이 ‘인터넷’과 ‘텔레비전’이라는 탈공간적 매개를 통해 동시에 만났기에 발생한 ‘불상사’이지 싶다.
그래도 <윤식당>은 흥했다. 하나씩 하나씩 메뉴가 늘었고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의 맛’(예를 들어 믹스커피 두 개로 만든 아이스커피라든가 만두 넣은 라면과 같은?)을 외국인들이 즐기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마치 국위선양이라도 한 듯 함께 즐거워했다.
“저건 나도 만들겠다.”
졸지에 ‘윤식당표 불고기 레시피’는 한국 저녁상의 메뉴가 되기도 했다. 그 ‘만만함’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저 눈으로 감상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적극적 참여자가 되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낯섬이 익숙함으로, 어설픔이 능숙함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함께 겪으며 출연진도, 식당 손님들도, 그리고 시청자들도 결국 <윤식당>의 구성원이 되어갔다.
“서로가 함께!” 사도바울이 교회 공동체의 가장 귀한 덕목이요 작동원리로 제시한 이 원리가 ‘윤식당’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내 이름 걸고 운영되는 식당인데 내가 망칠 수는 없잖아.”
‘사장’ 윤여정은 어설플지언정 매사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뜨거운 불 앞에서 더 뜨거운 모습으로 동동거렸다. ‘주방보조’ 정유미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발랄함과 긍정적인 반응으로 사장님의 불안함을 덜어주면서도, 꼭 필요한 손길을 침착하게 건네며 사장님이 숨고르기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뉴욕대 경영학과’ 출신이라며 모처럼 전공 살리고 있다는 농담을 종종 했던 이서진은 비교적 다양한 외국인들을 만나왔던 경험을 살려 든든한 소통의 매개요 해결사가 되었다.
“아, 이렇게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우리도 알바가 필요해요.”
목 놓아 외친 결과 ‘얻게 된’ 노동인력은, 대선배 신구가 아니던가! 신구가 알바로 등장하는 순간 <윤식당> 구성원의 관계성은 이미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만만하게 막 부려야지, 생각했던 일상의 전제는 인생 선배요 직업 선배인 신구의 존재감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김치 좀 드릴까?”
느끼한 메인 요리를 먹고 있는 손님들에게 그저 툭 던지듯 묻는 그의 말과 행동은 <윤식당> 사람들은 물론 시청자들에게도 인생의 내공을 생각하게 했다. 사장도, 주방보조도, 총무도, 알바도 ‘마주보며’ 상대의 부족함을 채우고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일구어나가는 모습, 그 모습이 아름다워 모두들 <윤식당>에 열광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휴양지에서 보았던 저 아름다운 시간성, 공간성, 관계성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을 밟으면서는 이미 비현실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열광했으리라. 아, 좋겠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곳에 가 봐야지. 이국적 공간이 이상화되며 잠시 들렸다 오는 비일상적 경험으로 부러워하고 소망하며... 하지만 필시 출연진도, 손님들도, 시청자들도 <윤식당>에서 벌어졌던 관계성을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올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꿈인 듯, 상인 듯 그렇게 며칠 보내고 다시 치열한 개별 경쟁의 일상으로 돌아가, 너를 밟지 않으면 내가 뒤쳐진다는 ‘생존의 법칙’을 되새기는 것이 ‘당연’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물론 저 시간, 저 공간, 저 관계를 일상에서도 이어간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낭만적인 혹은 어리석은 발상이 맞다. 여전히 근현대적 자유 경쟁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우리의 삶의 현장은 치열하고 전투적이니까. 하지만 교회도 그런 작동방식과 세상을 닮은 관계망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움이 크다. 1세기 로마의 제국적 시스템과는 정말 다른, 모두가 형제요 자매로서 권위와 소유를 나누며 서로를 건설해갔던 공동체가 교회의 출발이 아니었나. 사회제도적 보호망에서 안전과 생존을 보장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저 교회 안으로 뛰어들어오기만 하면 살 수 있었던 공간.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마주보고 애찬을 나누던 곳. 교회는 굳이 발리까지 가지 않아도 그 낯섬과 다름을 경험할 수 있는(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대한민국 땅에, 우리 일상의 공간에 차고 넘치게 많으니까. 이런 교회가, 충분한 여행경비를 모으거나 일주일 이상 쉼을 위한 시간을 뺄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주 가까이에 다른 시간성, 다른 공간성, 다른 관계성이 작동하는 공간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어설픔과 낯섬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가진 장점들을 공동체 안에서 자발적으로 나누며 익숙함이 되고 치유가 되는 그런 곳 말이다. 가뜩이나 개별경쟁화된 업적물을 내라는 세상의 법칙에 이미 지치고 상한 영혼인데... 교회에서조차 꼭 도달해야할 등록교인수, 프로그램, 재정목표에 연연하여 교인들을 응시하는 것은 그저 슬픈 일만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을 잃음이기도 하다. 경쟁의 시간이 멈춰지고, 평가와 조정의 관계성이 그치고, 그래서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처음 보아도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배려 받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 21세기 무한경쟁 사회 한가운데서 교회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백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