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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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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유우익씨와 낙동대감
오대댁손자 추천 0 조회 145 08.02.02 15:0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유우익 씨가 이명박 정권의 대통령실장으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에 희한한 구절이 딸려 있다.

 

‘ …초대 대통령실장으로 내정된 유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의 다양한 면모가 화제다.

경북 상주 출생인 유 내정자는 `낙동대감`으로 불리며 조선말기 좌의정을 지낸

`낙파`(洛坡) 유후조의 손자다.

 

서애 유성룡의 8대손인 낙파는 노론에 이은 안동 권씨의 집권으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출신으로, 영남권에서는 250년 만에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낙동강 강변에 주로 살았다고 해 낙동대감으로도 불렸다 조선일보 2-01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

 

공직자 프로필 소개에 으레 따라 붙는 무슨 대학, 무슨 고교 출신도

지겨운 판에 이젠 남인(南人) .. 낙동대감 까지

 

이런 디테일이 신문에 괜히 날리는 없다.

유우익 씨 머리 속에 양반 의식이 뿌리 박혀 있고 평소에 자랑하고

다녔으니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어쨋던 위 신문기사를 부연 설명해 본다.

 

낙파 유후조(洛坡 柳厚祚, 1798~1876)

 

본관 풍산(豊山). 자 재가(載可). 호 매산(梅山)·낙파(洛坡). 시호 문헌(文憲).

유성룡(柳成龍) 8대손. 1858(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호군

(副護軍)·이조참판·공조판서를 거쳐, 1866(고종 3) 우의정에 이르렀다.

 

연대 상 유우익 씨는 유후조의 6대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출신으로

 

쌍팔 년도 이야기 해서 뭐 하자는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550년 전 단종 때 사육신 선정을 송사로 해결하려 들고,

700년 전 목화를 보급한 사람이 장인이냐 사위냐 가지고

두 문중이 박 터지게 싸우는 것이 현실이니 몇 마디 해 본다.

 

선조 때 학맥-사승관계를 주로 따라 당파가 갈라지는데 지역적으로

모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중 경상도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낙동강 동쪽-경상좌도(慶尙左道)는 대략 퇴계(退溪) 문인(門人)들로 남인(南人),

낙동강 서쪽-우도(右道)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門人)들로 북인(北人)을 이루었다.

 

선조 후반 정국의 주도권은 북인(北人)에게 있었다.

북인(北人)은 다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大北)으로 갈라지는데

역사에서 배운 대로 광해군이 즉위하니 대북(大北)의 승리다.

 

대북 (大北)의 주축을 이룬 경상우도 (慶尙右道)선비들은

남명(南冥)학문을 이어 받아, 실천적 성격이 강하여

임란(壬亂)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지대한 공을 세웠다.

 

대북정권은 오늘 날 다시 평가할 만 하지만, 과격한 정책을 쪽수도

부족한 집단이 연합세력도 구하지 않고 밀어 붙이다 기어코 역풍을 맞아

침몰하니 바로 쿠데타 즉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다. (1623)

 

반정(反正) 후 대북(大北) 세력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소북(小北)

남인과 서인에 흡수되어 북인은 그 흔적 마저 사라진다.

 

이리하여 경상도의 유일한 당파로 남은 것이 좌도 쪽의 남인이다.

남인(南人)은 반정(反正)에 협력을 했으니, 멸문지화 당한 대북(大北)

비할 바는 아니지만, 권력은 부자(父子)사이에도 나누지 못하는 것이니

정권을 장악한 서인(西人) 아래에서 재미 보기는 애초부터 틀린 일이었다.

 

이후 남인(南人)은 서인(西人)정권에 여러 차례 도전 하나 판판히 패한다. 

그나마 기호남인(畿湖南人) 근기남인(近畿南人)은 벼슬 근처에 가 보기나

해 보지만 경상도 남인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안동 권씨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의 오식으로 보인다. ‘노론에 이은 안동 김씨..’ 로 바꾸어 읽어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안동 김씨가 바로 노론인데..노론에 잇기는 뭘 잇나?

 

 

영남권에서는 250년 만에 정승의 자리에

 

근기고 경상도고 간에 남인은 숙종 때 장희빈 사건 후 완전히 도태 되는 데,

낙파 유후조(洛坡 柳厚祚) 1866년 고종 3 좌의정이 된 것이 남인 출신

재상으로 250년 만이라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고종 초년 대원군이

노론과 세도가문을 누르는데 남인을 이용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정책이다.

 

낙동대감

 

유후조가 재상을 지내고 상주에 내려온 이래 선비들과 관원들이 찾아와

문안인사를 하는 일이 잦아지자, 아예 낙동나루 근처로 처소를 옮겨 버렸다.

국가 중책에 바쁜 관리와 선비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길가에 나가 앉으면 그들이 공무를 보는데 편리할 것이라는 발상에서였다.

어느 날 한 선비가 늙은이의 등에 업혀 낙동나루를 건넌 뒤 유후조의 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내가 그 사람이라 고 말해 그선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는 일화가 있다. 이후 유후조는 이 지역에서 낙동대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낙동지점과 낙동나루

 

여름에 장마가 져서 비 피해가 우려되면 낙동강 수위고 그때 마다

낙동지점 이야기기 빠지지 않는다.

 

낙동강홍수통제소는 17일 오전 1 30분을 기해 낙동강 상주

낙동지점 에 홍수주의보를 발령했다.

-이 예문은 2006 7월 어느 날 뉴스 보도다.



 

상주시에 낙동면 이란 면이 있다.

 

 

 

위 지도 중 빨간 핀 꽂은 곳이 낙동면으로 그 옆으로 강이 구불구불

흐르니 홍수통제소에서 수위측정 한다는 낙동지점이 그 부근일 것이다.

 

 

 

 

낙동강(洛東江) 이름의 유래

 

상주(尙州)는인구 57,000 남짓이니 지금은 경상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지만, 옛날에는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서 각 한 글자씩 따서

경상도(慶尙道)란 이름을 지을 정도로 중요한 고을이었다.

그것은 낙동강 조운(漕運)의 시작과 끝 지점이 바로 상주였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땅에 중국지명을 비정하는 일이 잦았다. 

이건 요즈음도 그렇다.

서울에 로데오 거리가 없나 ? 미아리에 텍사스가 없나 ?

 

 

이때 상주 별칭으로 낙양(洛陽) 으로 불렀고,

이 상주의 동쪽-낙양의 동쪽을 흐른다 하여 낙동강이 된 것이다.

(洛東者 謂尙州之東也 : 택리지에서)

 

 

낙동대감도 좋고 다 좋은데 낙동대감이 앉아 있던 낙동나루를 자칫 훼손시킬

대운하 계획은 제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주었으면 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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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2.03 10:32

    첫댓글 양반 거 대단히 중요하지요 선비의 정신을 굽히지말고 꿋꿋이 지켜갔으면하는바램이고 대운하 계획은 모험 입니다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좋은글 주시니 이제야 함오방 빛을찾아가는듯하군요,오대댁손자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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