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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68) 여호사밧의통치(5) 여호사밧과 아합의 차이 대하19:1-11
지난 시간 아합의 최후를 살펴보셨습니다. 그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싫다고 밉다고 배제하고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한 사람을 가두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말씀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스겔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신 것입니다(겔17:24)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 우연히, 무심코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여호사밧을 죽을 자리로 밀어넣고, 자신은 변장하고 저 전장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화살이 그의 갑옷 솔기를 꿰뚫었고, 변장하고 들어간 것이 자충수가 되어 해가 지도록 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싸우다가 죽게 됩니다. 아마 왕으로서의 명예를 지켜주신 것 같지요? 끝까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아합이 되게 말이지요. 그러나 미가야에게 주신 말씀대로,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대로, 올라가서는 안되는 길에 올라선 아합은 죽고 말았고, 백성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흩어지게 됩니다. 또한 나봇의 피를 흘렸던 곳에서 아합의 피는 개들이 핥게 됩니다.
여호사밧은요? 오히려 왕복을 입고 적 지휘관들의 병거에 둘러싸여 위기에 처했으나, 오늘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물어보소서 하였으나 귀담아 듣지 않고 아합과의 동행을 선택했던 여호사밧, 하나님께서 벌하셔도 지당하신 상황이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도우십니다. 적들을 감동시켜주시지요? 여호사밧에게 손대지 않고 저들이 떠나갔던 것입니다. 수많은 화살이 창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여호밧은 머리카락 하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다시 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장 1절이 증언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대하19:1)
그러나 이내 그에게는 아합과 함께 길르앗 라못 전투에 참여한 일로 선견자 예후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19:2)
기독교는 분명 사랑을 가르칩니다. 원수까지도 선대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히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악한 이와의 연합은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근묵자흑, 근주자적, 어느 새 우리를 변질시킬 저 누룩들, 죄와 악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엊그제 모택동과 등소평의 이야기를 잠깐 말씀드리면서 공칠과삼이라는 이야기를 드리기도 했는데, 공칠과삼과 함께 유명한 이야기가 흑묘백묘입니다. 여러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를 얼른 발전시키고 성장시킬 사람들로, 장교출신이라니 일본사관생도출신도 괜찮고, 미국에서 유학을 했으니 어떤 삶을 살았어도 상관없는게 아닙니다. 독립군을 잡아죽인 집안이든, 나라를 팔아먹은 집안이든 아무나 쓰면 되는게 아닙니다. 지금 그 결과를 우리가 톡톡하게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베트공들이 자꾸 숨는다고 고엽제를 뿌리면 안되듯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만연되어 고쳐질줄 모르는, 결과만 나오면 과정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 이것은 우리네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돌을 떡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이고, 명성과 인기를 위해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위해 마귀에게 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당한 결과를 위해 정당한 과정을 밟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루하루 정당한 과정을 밟아나가야 결과마저 합당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시편과 로마서에서 확인해볼까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1: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러나 예후는 여호사밧이 비록 아합을 돕고 사랑하는 실수는 했을지언정,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도 행했음을 언급합니다. 공칠과삼.
아니 어쩌면 공1과9이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공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3절)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호사밧은 하박국의 기도처럼,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합3:2), 아람사람들로부터 살아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장 18장 31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추격을 그치고 돌아갔더라”(대하18:31-32)
변장을 한 아합이 죽은 전투,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전장에 있었지만 무사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오늘 19장 1절을 보니,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
자, 그때, 진노 중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여호사밧을 책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요? 어차피 저 요나가 고백한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잘 알고 있으니, 천천히 나중에 할 수 있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일까요? 오늘 예후의 책망을 들은 여호사밧은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여기에 여호사밧과 아합의 차이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요. 의인이건 악인이건, 잘못을 범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책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당신의 귀에 들린 대로 판단하시는 분이시지, 무조건 편애하시거나 죄를 덮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책망을 들으며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오늘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이 책망이 하나님과의 여전한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사랑인 것을 알고 돌이키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 이 둘이 어떻게 달랐는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는 예루살렘 밖에서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합이 잘 살고 있던 사마리아를 떠났던 목적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지요?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한 마음이요,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을 아람과의 전쟁 중에 죽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다윗이 우리야를 싸움이 맹렬한 곳으로 보내어 죽이려 하듯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짓밟고 내 마음을 앞세우는 행동이었지요. 그렇다면 오늘 오늘 예후의 책망을 들은 여호사밧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합이 사마리아를 떠나듯, 잘 돌아온 예루살렘에서 다시 나갑니다. 왜 나갔을까요? 4-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유다 온 나라의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읍마다 있게 하고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19:4-7)
왜 예루살렘에서 다시 나갔다고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겨주셨던 일, 그래서 오늘 내 과를 덮어주셨던 일, 그일에 다시한번 힘을 내기 위해 나가았떤 것입니다. 유다 땅 전부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그것도 저 민간에 두루 다니며 하나님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사밧은 성읍마다 빠짐없이 재판관을 세우고, 명령합니다. 사람을 위해서 판결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판결하라고 말이지요. 불의함도, 치우침도, 뇌물받는 일도 없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함께 하시는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판결하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어느 누구 하나 손들어주는 판결이 아닙니다. 모두를 살리는 판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여 화해하고 용서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재판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요, 저 아합은 온통 자기의 것을 삼기 위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심지어 저 나봇의 포도원도 나봇을 죽여가며 빼앗고 자기 채소밭을 만드는 일, 대대로 지켜온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욕심과 탐욕을 채우기 위한 일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살았다면, 여호사밧은 다시금 유다땅에 하나님의 법도가 바르게 세워지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깨닫고 배운 구원의 진리와 영원한 생명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중하게 간직해서 수건에 싸서 땅에 파묻어두지 마시고, 많은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전하고 알려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요. 다니엘서가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 궁창에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려면,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지요. 모든 족속에게 파송하십니다. 성령을 보내 권능을 더하여 줄테니,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으라고,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나아가라고 말이지요.
일전에는 순회 율법교사 전담팀을 꾸려서 파송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뛰어듭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에게까지 말씀드리면 예수님께 송구하지만, 신하들을 보내던 그가 이제는 그렇게 왕좌에서 내려와 직접 이스라엘의 백성들, 저 민간에 두루 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들을 세워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을 때, 여호사밧은 이렇게 하나님 선히 여기시는 일을 위해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여호사밧의 2차 종교개혁이라고도 부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전쟁터에서 생명을 얻어 돌아온 그의 남은 생애, 이제는 자신이 직접 다니며 말씀으로 성읍들을 견고하게 세우는 사명자가 되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을 때, 더욱 내가 해야할 일을 찾아보시길 축복합니다. 특별히 징계와 책망의 말씀을 듣고 낙망할 것이 아니라,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 주실 위로와 긍휼을 잊지 말고, 죽을 자리, 내 욕심대로 나아간 자리에서조차 생명을 지켜주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를 도우시고 저 대적들을 감동하사 나를 살려보내게 하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다시금 하나님 앞에 힘을 내시는, 노략물로 얻은 내 생명을, 더욱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에 헌신하시는 이 시대 여호사밧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 차이는 예루살렘 안에서 행한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을 더욱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성읍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재판의 권한을 주었습니다(8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질서가 바르게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잘 마음에 새기면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라 어떤 성읍에 사는 너희 형제가 혹 피를 흘림이나 혹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와서 송사하거든 어떤 송사든지 그들에게 경고하여 여호와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너희가 이렇게 행하면 죄가 없으리라”(대하19:9-10)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잘 경고해야 어떻게 된다고요?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죄가 없게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게 만들면, 이것이 죄가 되어, 죄 있는 것이 되어, 우리와 우리 형제 모두에게 진노하심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안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도 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죄를 범하는 일이 되는지 아닌지를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주변을 늘 바른 길로 경고하고 깨우치고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가 우리에게 늘 충만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했던 일이 무엇이지요? 종교적 권한과 정치적 권한의 분리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정치문제는 유다지파의 어른 스바댜가 감당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11b) 11절을 읽어볼까요?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에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희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희 앞에 관리가 되리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대하19:11)
그래요. 이렇게 여호사밧은 바른 신앙과 정치의 질서를 세웠습니다. 누구와 반대로? 네, 아합과 반대로 말입니다. 정치도 종교도 모두 다 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하들도 다 왕의 뜻대로, 선지자들도 모두다 왕의 뜻대로 움직이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왕과 백성들이 모두 늘 형제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죄를 범하게 만드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아합과 그의 결국을 보고 난 뒤여서인지, 오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책망을 달게 받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선한 이들의 정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선한 이들의 예배가 되게 했던 것이지요. 어느 누구도 사사로운 유익을 위한 정치와 예언을 할 수 없도록, 혹여 왕을 위한 정치, 왕을 위한 예언이 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래요. 여호사밧이 비록 악인과 함께 하고, 악인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책망을 받았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토록 겸비하고 바른 태도를 보였기에, 오늘 남유다의 선한 왕의 반열에 오늘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여호사밧도 아합과 함께 전쟁을 치름으로 전리품도 얻고 영광도 얻고 영토를 확장해보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물질과 조약으로 아람과 동맹을 맺었던 아버지의 과오를 씻어내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한바탕 작용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평안히 살아 돌아온 은혜에 이어, 오늘 하나님 주시는 책망의 말씀 앞에서, 그간 잘못 품었던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과 온 유다 백성이 더욱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에 집중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도 여호사밧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도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이에게는 더욱 말씀을 주십니다. 들어나 보자 식의 태도 안 듣느니만 못합니다. 언제나 살아계시고, 주도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요즘 욥기에서 확인하시고 계시지요? 하나님은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십니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귀를 열어 말씀하십니다. 또한 병상의 고통과 뼈가 쑤시는 징계로도 말씀하십니다. 사시와 연한을 이루시며,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온 천지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수시로 듣고 깨닫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한 삶에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여호사밧 아합을 보이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 살아가면서 잘못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경과와 책망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 앞에 돌이키고 방향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사도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선한 분들이 되시고, 머무신 예루살렘은 물론 그곳에서 나와 이르시는 단에서 브엘세바 모든 곳에 진실과 정의가 평화를 만드는 이 시대 여호사밧으로 쓰임 받으시길, 벌써 죽었어야 했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생명을 가지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충성하고 순종하는 복된 종들이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산지 민간에 두루 다니는 여호사밧처럼, 오늘도 주님 맡기신 구석구석 모든 영혼을 살피고 돌보고 세우는 종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늘 하나님을 위하여 판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경외하게 하시고, 모든 일에 힘써 행하는 하나님 함께 하시는 선한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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