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논의 역설>
제논(Zenon, BC490년경~430년경)은 그리스 엘레아Elea 출신으로서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스승으로 따랐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BC515?~BC445?)의 사상을 좇아서 세상 사람들의 감각적인 인식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논증 방식으로 입증하려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원론적인 주장을 한다. 참되고 진실한 실재는 하나밖에 없으며 이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不變實有=常住論)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불변의 존재는 유일한 참된 것이어서 공간을 가득 매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대립되는 비어있는(존재하지 않는,無)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한곳에서 다른 비어있는 공간으로 물질이 이동한다는 ‘운동’ 개념의 거부로 이어진다. 세상 만물의 움직임과 다양성은 인간의 감각에서 생긴 거짓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일반적인 상식에 맞지 않았으며 그 자체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제논은 역설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스승의 학설을 옹호하고자 했다. 그의 역설들 가운데 유명한 세 가지가 있다.
제논의 제1역설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발점에서 종착점으로 가려면 중간지점을 지나쳐야한다. 그 중간지점에서 시작하여 종착점까지 가려면 그 구간의 중간지점을 지나야한다. 이런 식으로 구간을 쪼개어 그 중간점을 지나려 한다면 아무리 짧은 거리라 해도 남은 구간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중간지점은 영원히 남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종착점에 다다를 수가 없게 된다.
제논의 제2역설
제 아무리 빠른 아킬레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빠른 사나이)라 할지라도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세워 놓고 경주를 벌이면 아킬레스는 거북을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 한번 거북이를 앞세워 놓고 경주를 시작해 보자. 그러면 아킬레스는 거북이가 원래 있었던 위치만큼 달려간다. 이 때 거북이는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킬레스보다는 조금은 앞서가고 있을 것이다. 다시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위치로 달려가면, 마찬가지로 거북이는 또 조금 앞서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므로 아킬레스는 거북이와의 거리를 좁힐 수는 있겠지만, 거북이를 추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자들의 말처럼 운동이 실재한다고 가정한 다음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할 때, 거북이가 A만큼 앞서 출발한다면 아킬레우스가 A만큼 갔을 때 거북이는 다시 B만큼 더 가게 되며 아킬레우스가 B만큼을 갔을 때 거북이는 다시 C만큼 더 가 있을 것이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제논의 제3역설
공중을 향해 쏜 화살은 결코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화살은 언제나 자신의 길이와 같은 만큼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그 위치에 정지해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화살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서는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화살이 없는 공간에서도 움직이지 못한다. 결국 화살은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제논의 역설은 운동을 부정한다. 이 역설에서 무엇이 맹점인가를 한번 살펴보자. 여기서 운동이란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정지된 무수한 순간들이 합쳐진 것이 아니라고 이해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운동을 설명하면서 시간이란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시간 역시 운동과 변화를 표현하는 유용한 개념일뿐 실체가 아니다. 시간 또한 무한히 짧은 순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순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머리 속에서 생각해 낸 개념일 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논의 역설들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인간들의 상식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역설을 깨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시간을 재는 것이다. 사실 경주를 한다고 했으니 달리기 기록을 재는 게 당연한 순서이다. 가령 거북이를 아킬레스의 전방 1000미터 앞세우고 경주를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아킬레스가 처음 1000미터를 따라잡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일까? 아킬레스가 달리는 속도를 알 수는 없지만 편의상 100초가 걸렸다고 하자. 이제 그 다음 1미터를 따라잡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당연히 100/1000=0.1초일 것이고, 그 다음 1/1000 미터를 따라잡는데 걸린 시간은 0.1/1000=0.0001 초일 것이다. 따라서 제논의 논의에 따라 걸린 시간을 전부 더하면 다음과 같다.
100초+0.1초+0.001초+0.0000001초+0.0000000001+........
이 숫자들을 아래쪽과 같이 계산해 보면 모두 합해서 100.1001001001… 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100+100X(1/1000)+100(1/1000)X(1/1000)+...=1/(1-(1/1000))=100000/999
중요한 요점은 여기에 있다. 제논은 ‘영원히’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게 문제이다. 아무리 잘 봐줘도 101초도 넘지 않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영원히’ 걸린다고 말했으니 이는 논리적 비약이다. 이 정도 비약이라면 허풍장이 수준이다. 제논의 ‘역설’이 아니라 제논의 ‘허풍’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간단한 계산으로 얻을 수 있는 바로 이 100.1001001001001… 초가 지나는 순간 제논의 주장은 무효가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거북이와 아킬레스가 동일선상에 놓이며, 당연히 그 시점을 지나면 아킬레스가 앞서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어 줄만 계산하면 간파할 저런 허점을 쉽게 놓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논의가 쉽기 때문에, 계산 같은 것은 생략하고 ‘상식’ 혹은 ‘감’에만 의존에서 판단하려는 경향 때문이 다. 특히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에서는 ‘작은 수라도 무한 번 더하면 무한’이라는 ‘감’이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감이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사실 아무리 작은 수(양수)라도 무한 번 더하면 무한히 커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원리’라고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인다. 실수(實數)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로 상당히 중요하다. 이 원리를 굳이 수식으로 써 보면 아래와 같다.
a>0이라면 a+a+a+a+......+a=∞
그런데 이러한 직감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에는 통하지 않는다. 처음에 제 아무리 큰 숫자로 시작하더라도, 일정 비율로 꾸준히 줄어드는 숫자인 경우에는 ‘무한히’ 더하더라도 ‘유한값’이라는 사실은 간단하게 알 수 있다.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1 < r < 1 일 때 아래와 같다.
a+ar+ar x r+....=a/(1-r)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다루는 무한등비급수 문제이다. 앞에서 설명한 아킬레스의 경우는 다음과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0+100X(1/1000)+100(1/1000)X(1/1000)+...=1/(1-(1/1000))=100000/999
제논의 논증을 듣다 보면, 아킬레스가 처음 1000미터를 따라 잡을 때, 다음 1미터를 따라 잡을 때, 그 다음 1/1000 미터를 따라 잡을 때에 대해 비슷한 얘기를 늘어놓기 때문에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이 사건들이 비슷한 시간 간격에 일어난다는 생각에 빠져버리는 것도 역설의 함정에 빠지는 한 가지 원인이 된다.
역설은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역설은 궤변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니라, 왜 옳지 않은지를 따지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바르게 보는 견해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제논의 역설 등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제논의 역설이 함축하고 있는 설일체유부의 찰나론 문제>
제논이 스승으로 삼고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살펴보자. 그는 세상 만물의 근본과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상주불변하는 유일실재를 상정한다. 그 실재는 세상에 편재하며 만상의 근본이 되고 원인이 된다. 상주불변의 유일실재에서 변화와 운동을 보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이 착각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파르메니데스는 전형적인 일원론, 상주론, 실체론, 전체주의자이다. 그는 변화와 운동, 다양성과 차별을 부정한다. 천박하고 완고한 이상주의자, 꽉 막힌 결벽주의자 같이 보인다. 이런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히틀러나 스탈린, 뭇솔리니와 마오쩌뚱 같은 사람이 된다. 제논은 스승의 주장을 맞다고 입증하기 위해 역설을 사용한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에서 운동이란 개념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아킬레스A가 느림보 거북이T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A는 유한한 거리L를 시간t만큼 경과하여 T를 따라잡는다. 그 때 T는 이미 조금 기어가서 L`만큼 앞에 있다. 다시 A가 L`만큼 간다. 이때 걸린 시간이 t`이다. 그러면 다시 T는 L``만큼 기어가 있다. 다시 A가 L``까지 간다. 이때 걸린 시간은 t``이다. 그 시간에 T는 L```만큼 앞선다. 이런 식으로 무한 반복된다. 결국 A는 T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살펴보자. t+t``+t```+t```+.......=t(1+e+e`+e``+e```+...). 이 경우 일반적으로 e가 1보다 크다면 e+e`+e``+e```+...은 무한히 커지겠지만,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e는 0<e<1이다. 그러므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은 시간 t+t``+t```+t```+....은 무한대가 아니고, 일정한 수에 수렴한다. 그러므로 아킬레스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거북이를 따라잡고 만다.
여기서 어떤 선입관이 개입되었기에 이런 착각을 일으켰는가? 시간을 무한히 나눌 수 있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독자적인(어디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다른 것과 관계없이 저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실재인가 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시간을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설정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찰나론ksana, khana이다. 1찰나란 1/76초라고 아비담마구사론(줄여서 구사론이라 한다)에 나온다. 1찰나에 생주이멸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생生에 다시 생주이멸이 있으니 생생生生, 생주生住, 생이生異, 생멸生滅의 4亞刹那아찰나, sub-khana가 있게 된다. 그러면 1찰나=생주이멸 4아찰나 x 생주이멸 4아찰나=16아찰나. 이런 식으로 더 쪼개나가면 16아찰나 각각에 생주이멸이 있게 되므로 16x4=64아-아찰나가 생겨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더 쪼개나가면 순환오류에 빠져서 끝없이 맴돌게 된다. 그래서 설일체유부에서는 편의상 16아찰나만 설정한다. 이런 찰나론으로 운동을 설명하려한다면 제논의 역설에 넘어지고 만다. 쏜 화살은 영원히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역설을 찰나론으로 설명해보자. 쏘아진 화살은 어느 한 찰나에 어느 지점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존재’란 말을 쓴다. 그것이 아주 극히 짧은 찰나라 할지라도 그 찰나순간에 그 지점에 도착했다가(生), 있다가(住), 지나가야(異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찰나생 찰나멸이다. 쏘아진 화살은 찰나생 찰나멸을 반복하면서 과녁에 도달한다. 과녁에 도달한 순간 ‘쏜 화살’은 멸한다. ‘과녁에 꽂힌 화살’은 분명히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상식에 어긋난다. 그러기에 찰나론은 제논의 역설에 걸려들어 세속제를 어그러뜨린다. 왜 그럴까? 시간이란 최소단위 찰나를 실체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법유론法有論, 법실재론, 요소실재론이다. 그리고 시간을 실체화했다. 상대성물리학에서도 시간의 독자성이 부정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상호의존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설일체유부에서 시간의 자성을 인정하면서 현상과 사실을 설명하려하니까 그 모순을 드러낸다. 시간은 자성이 없다. 공간도 자성이 없다.
운동하는 물체와 운동을 따로 분리할 수 있느냐는 것도 문제이다. 쏘아진 화살과 날아가는 운동을 별개인가? 만일 그렇다면 제논이 말하듯이 날아가는 화살은 공간 속에서 제 몸길이만큼을 점유해야하니까 그 위치에서 정지해있는 셈이다. 그래서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있다는 결론이 유도된다. 이런 발상은 운동하는 물체와 운동을 서로 연관이 없는 개별적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의존연기설에 의하면 운동이 있기에 운동하는 물체가 있고, 운동이 없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없다. 운동하는 물체가 있기에 운동이 있고, 운동이 있기에 운동하는 물체가 있다. 쉽게 말하면 ‘운동’이 관측되면 그것은 어떤 물체의 운동이지, 운동하는 물체가 아닌 딴 것의 운동이 아니라는 말이다. ‘화살의 날아감’이 관측되면 그것은 화살의 날아감이 지, 화살 따로 ‘날아감’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쏜 화살은 출발지점에서 과녁까지 줄곧 날아갈 뿐이지, 중간에 순간을 설정한다하여 그 순간 마다 화살이 정지해 있을 거라는 발상은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니다. 쏜 화살은 매 순간 정지해있다는 생각은 연기설에 어긋나며 따라서 사실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란 연기적 현상으로 空性이지만 일정한 한도 내에서 작용하는 능력이 있기에 假名가명으로써 공능을 발휘한다. 시간과 공간을 너무 실체화하면 제논의 역설과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제논이여, 억지 부리다가 결국 왕에게 사형당하고 말았구나. 일찌기 말 많고 고집 세면 고통이 따른다는 걸 깨닫고 진즉에 인도로 와서 보리수 나무 그늘아래 쉬다가 다행이 붓다의 가르침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첫댓글 오류임에도 억지 부리는 제논에게 시지포스의 신화를 들려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니힐리즘이 아닌 희망의 역설을!)
스님~ 지난 번에 이어 유식의 한계와 중관의 개념을 더 설해주시니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핵심 키워드를 연결해 더 깊이 성찰해야 하지만요~) 감사드려요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