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 발표—2023 겨울호(2023.12.15.)
시조 10편 +시작노트
배롱나무 3
몸통은 벌어지고 속은 구새 먹었다
톡톡톡 두드리면 목탁처럼 울렸는데
어느 날 박새 가족이 그 속에서 나왔다
유턴
어쩌다 두고 온 너에게로 다시 간다
아차차 놓쳐버린 너에게로 다시 간다
결국은 원으로 가는 U턴들의 uu턴들ㅡ
기도
지인이 그를 위해
기도한다 말하자
그이는 그것을
정중히 사양했다
기도도 아무에게서나
받는 게 아니었다
어느 집 개
지나가는 사람도 무척이나 반가운지
엉덩이째 꼬리치고 누워서도 꼬리친다
어쩌나 나도 엉덩이를 흔들어 주었다
어떤 넉살
—전주 중앙시장 복숭아집
“주물르지 마세요
영감 붕알 아닙니다”
“주물르지 마세요
할멈 젖 아닙니다”
윗글만 써놓았는데
아래로도 읽혔다
실상사實相寺
옛 해우소 바로 앞에
자리한 매실나무
다 익은 열매는
떨궈도 놓았다
남에게 먹이가 되고
거름이 되라는 듯
해인매
해인사 매화는
또 하나의
대장경
꽃과 열매
잎과 가지
모두가 경판이리
날마다
그 삶 그대로
중생을 밝히리
쑥부쟁이
세 송이만 피울까
열 송이만 피울까
쉰 송이는 어떨까
궁리해 보다가
한가위, 백여 송이씩
열 그루를 꽃 피웠다
화석
농사일에 오 남매,
까칠남男과 살아내려
허리는 꺾어지고
무릎은 삐걱댔다
누님은 세상을 버리고야
빗돌로 꼿꼿했다
그림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았던 것들이
골골대는 사이에 앞자리를 차지했다
점점 더 늘어만 가는 그림의 떡 차림
<시작노트>
가을이 깊어지면서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날마다 가는, 동네 뒷산 약수터 산책길에도 나뭇잎이 내려 쌓인다. 바람이 좀 세게 부는 날에는 이파리들이 축복의 꽃잎처럼 우수수 날아내린다. 잎을 받아보고 잡아보려고 손을 내밀어 보지만 쉽게 손안에 들지는 않는다. 수직으로나 사선으로나 일정하게 내리지 않고 순간순간 방향을 바꾸며 날아내리기 때문이다. 재미 삼아 행운을 얻듯 한참을 이파리 맞이를 해보아도 겨우 한둘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길을 덮고 있는 낙엽을 줍기도 한다. 대왕참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메타세콰이어, 목련의 잎들을 주워 와서는 이런저런 모양으로 맞춰도 본다. 그럴듯한 그림이 되면 문방구에 가져가 코팅을 해서 두고 보기도 한다.
지난여름부터는 낙엽 대신 새로운 말 받기, 얻기, 줍기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시조 쓰기는 단풍잎 12장으로 그림 한 점씩을 맞추기라고나 할까? 시조를 익숙하게 접해 왔지만, 쓰기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기본은 갖춰졌는지부터 조심스럽기만 하다.
-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어떤 넉살', 잼있습니다. 그리고 "누님은 세상을 버리고야 빗돌로 꼿꼿했다"도 절창입니다.
그니샘, 감사합니다.
삶의 해학이 녹아 있네요^^
진경산수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시조를 모르나 깊은 산 속 맑은 물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