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이나, 음역이 넓은데다 고저(高低)의 차가 심하여 일반 회중이 부르기는 좀 벅찬감이 든다. 그러나 박력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면이 있는 찬송이며 찬송시의 내용의 뜻도 매우 깊다.
이 찬송은 왈터 촬머스 스미쓰 목사(Walter Chalmers Smith)(387장)가 작시한 찬송으로 1887년 그의 성가집 [주일 저녁을 위한 사색과 환상(Thoughts and Fancies for Sunday Euenings)]에
84장으로 실었었다.
이 찬송은 시편 51편 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 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의 말씀에 근거한 찬송이다.
여기의 우슬초(Hyssop)는 박하종류의 향기로운 식물(植物)인데 담장에 나며 (왕상4:33), 비위 틈에서 자라고 꽃과 잎에 향취가 있으며 부식이나 약용으로도 쓰이며 줄기는 모아 정결의식에 사용한다. (출12:22, 례14:4,6,51,52, 민19:6,18, 히9:19) 그런데 로마병정은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예수의 입가에 댔다.(요19:29).이 찬송은 중생을 통한 성결을 부른 찬송으로서:
1절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부족한 것이요. 죄 투성이라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씻어달라는 간구다. 특히 후렴에 물로 씻든가 불로 사르든가, 안과 밖의 모든 죄를 다 멸해 달라는 호소는 중생이전 뿐만 아니라 중생 후에도 부르짖는 우리의 호소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좌중에 살던 몸이었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중생의 관문을 통과했다. 요한복음 3장3절에 있는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이며, 이 찬송의 후렴이 되어있다. 사도 바울은 “옛사람”과“새 사람”이라고 구분하고 있다.(고후5:17, 엡4:24, 골3:10). “옛사람”은 하나님을 거사려 죄 중에서 멸망으로 달리고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으나(엡2:3). “새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전혀 새로 피조된 사람으로 중생을 의미한다. 이 중생은 구원의 출발인 것이다.
후렴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
우리의 안과 밖의 죄는 다 멸해져야 하고 깨끗이 씻겨야 한다. 그래서 작시자는 물로 씻기 우든지 불로 태워지든지 모든 죄를 멸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시편기자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불과 물을 통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66:12)라고 감사하며 “수양과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나이다.”(시66:15)라고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고 했다. 이는 안과 밖의 죄를 씻음 받은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멸하셔야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믿음의 꽃이 필 수 있는 것이다.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농장에서 2년 정도 되어 잎이 무성해 지면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붇는다. 그러면 한창 무성하게 올라오든 파인애플 잎 사이에서 감미롭고 싱싱한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세상적인 잎으로 번창해 있을 때 성령의 뜨거운 불이 내리면 아름답고 감미로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작시자는 안과 밖을 씻음 받아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한다.
2절 내 어둔 눈 밝히시니 참 기쁘고 고마우나
그보다 더 원 하오니 정결한 맘 주옵소서.
중생한 후 몇 가지 변화를 체험하는데 첫 번째로는 영의 눈이 밝아져서 선과 악을 잘 구분하게 되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양심의 감도가 민감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생하기 전에는 무거운 죄짐을 지고서도 괴로움을 몰랐으나, 중생 후에는 적은 짐도 벗어 버리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한다. 마치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올려놓아도 모르나, 산 사람은 불과 한 근도 되지 않는 적은 짐도 올려놓으면 괴로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 번째로는 부드러워지며 겸손해지는 것이다. 죽은 나무는 휘어지기 힘이 드나 살아있는 나뭇가지는 잘 휘어지고도 잘 부러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며, 끝으로 그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체험한 중생 자는 자연히“정결한 맘을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지 않겠는가?
3절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이러한 맘 나 얻으면 눈 까지도 밝으리라
정결한 마음을 얻은 후에는 신령한 빛이 비친다. 이 신령한 빛은 기쁨의 빛이요, 이 신령한 빛은 언제나 찬송을 수반하는 것이다.
4절 못된 행실 다 고치고 악한 생각 다 버려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는 못 하리라
위의 시는 중생자의 겸손이다. 우리가 못된 행실을 다 고치고 죄질 생각을 다 버렸다 해도 어찌 선(善)의 근원이신 주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촛불이 아무리 밝다고 해도 태양 앞에선 것과 같으리라.
이 찬송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신학적 논리가 잘 짜여져 있다. 그러기에 가렛 호더(W. Garrett Horder)목사는 말하기를:
스미쓰 박사의 찬송들은 모두가 다 하나같이 생각이 풍부하고, 표현에 있어서
활발하고, 지금보다는 앞으로 훨씬 더 찬송가 편집자들의 관심사가 될 것이며,
또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찬 송 곡 ONE THING I OF THE LORD DESIRE
이 찬송곡은 프레드 바이쉬(Fred H. Byshe)가 1901년에 작곡한 것으로 되었을 뿐 작곡자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