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대중가요계 비하인드 스토리
한국 대중음악은 구한말 창가를 시작으로 해방과 1950년대, 60년대를 지나면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한때는 미8군 무대가 주도했고, 그 절정은 1970년대 ‘청년문화’로 승화됐다. 1964년 등장한 비틀스는 세계 대중문화의 흐름을 바꿔 놓았으며, 월남전에 반대하여 반전과 평화를 주창한 모던 포크의 물결이 이 땅에도 밀려와 ‘저항음악’이 싹트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통기타가 유행하고 서울 한복판에 밤마다 고고 파티가 열렸는가 하면,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위해 경찰이 바리캉과 줄자를 들고 다니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런 웃지 못 할 시대에 ‘노래’는 그야말로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는 청량제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가요계의 뒷이야기들이다.
11. 김 시스터서와 이 시스터 스는 친자매가 아니다
한국 가요 사에서 ‘김 시스터스’가 이룩한 업적은 우리나라 가수 중 최초로 해외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팝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을 겁 없이 뛰어들어 라스베이거스를 주 무대로 활동했다. 한국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 이난영과 김해송 슬하에 7남매 중 두 딸이 바로 ‘김 시스터스’였고, 그 남동생들이 ‘김 보이스’다.
숙자, 애자, 민자로 구성된 김 시스터스는 친남매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민자는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용의 딸로 사촌지간이었다. 김 시스터스는 노래뿐만 아니라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 만돌린, 드럼 등 한 명이 네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루는 멀티 플레이어들이었다. 마릴린 몬 로와 함께 주한미군 위문 차 내한한 코미디언 밥 호프가 김 시스터스의 공연을 보고 미국 초청을 약속했고, 그렇게 1958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했던 것. 김 시스터스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8군 무대에서 외국 노래만을 주로 불렀기에 가요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곡은 <김치 깍두기> 정도다.
김 시스터스는 우리나라 가수로서는 역시 최초로 1965년 미국에서 <Charlie Brown>이 담긴 음반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이 곡은 원래 흑인 남성 그룹 코스터스가 불렀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비록 팝 차트에 들지는 못했으나 앨범의 전곡을 영어 버전으로 취입하여 미국 시장에서 발매했다는 데 의의가 컸다. 김 시스터스에 이어 패디. 김이 1961년 TV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 출연을 계기로 미국에 진출했고, ‘김치 캐츠’, ‘윤복희’ 등도 있으나 대개는 조그만 술집이나 재미교포를 상대로 한 공연이라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 시장 진출로 보기는 어렵다.
요즘 동남아에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것은 좀 과장된 측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예컨대 ‘한류 열풍’의 대부분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음악 쪽은 아직도 바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를 성싶다. 물론 ‘보아’가 일본 차트를 석권한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가수가 일본 시장을 노크했지만 이성애,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등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미국 팝 차트에 든 한국 가수가 없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1963년에 사카모토 큐라는 가수가 <Sukiyaki>라는 노래로 미국 시장을 평정했고, 핑크 레이디, 마쯔다 세이고, 라우드니스, 히로시마 등이 미국 팝 차트에 올랐다. 그런 면에서 김 시스터스의 활동은 아쉬움이 더 남는다.
그런가 하면 이 시스터스도 친자매는 아니다. 이 시스터스는 원래는 김씨 성을 가진 김천숙, 기명자, 그리고 <키다리 미스터 김>을 부른 이금희의 동생 이금이(본명은 이대란)가 모여 만든 그룹으로 1960년 KBS <노래자랑>에서 입상하면서 가요계에 입문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김 시스터스로 출발했으나 아무래도 ‘김 시스터스’와 혼선이 있어 ‘이 시스터스’로 바꾸고, <목석같은 사나이>, <남성 금지 구역>, <울릉도 트위스트>, <여군 미스 리>,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등의 히트곡으로 1960년대 최고의 여성 그룹으로 군림했다.
12. 미8군 쇼 여걸 3인방 - 한 명숙, 현미, 이금이
1960년대 초반 국내의 쇼 무대는 일반 무대와 미8군무대로 나뉘어 있었다. 극장을 중심으로 한 일반 무대에는 박재란, 안다성, 권혜경, 박재홍, 남일해 등의 가수들이 활동 중이었다. 그러다가 한명숙의 <노오란샤쓰의 사나이>가 한국가요로는 최초로 동남아에 퍼져 나갔다. 이것은 미8군 무대 가수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명숙은 1935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음대 교수인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때부터 합창단으로 활동했다. 여고 2학년 때인 1952년 전쟁을 피해 월남했다가 외삼촌 제자의 주선으로 태평양극단에 입단했고, 1954년 미8군 무대 세븐스 스타 쇼의 단장 이준영의 눈에 들어 미8군 쇼에 들어갔다. 피나는 노력으로 ‘한국 가수 중 가장 영어 발음이 좋은 가수’로 평가받았고, 스물한 살에 미8군 무대 밴드마스터 이인성과 결혼했다. 그 후 가수 최희준의 소개로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노오란샤쓰의 사나이>를 내놓는데, 그때가 1961년이었다.
<노오란샤쓰의 사나이>의 원곡은 느릿한 블루스 풍의 재즈곡이었으나 맘보와 트위스트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손석우가 빠른 템포의 트위스트 리듬으로 편곡했던 것이었다. 이 노래는 일본과 대만은 물론,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유행했다. 한명숙은 그 유명세를 타고 이들 나라에 순회공연을 다녀왔고, 1966년 파월 장병 위문 차 세 차례의 월남 공연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도 공연했다.
나중에 한명숙은 너무 노래를 부른 나머지 성대에 이상이 생겨 두 차례나 수술을 받고 타의에 의해 가수생활을 접었다. 이후 교도소와 장애인을 위한 노래봉사 활동으로 법무부 장관의 감사패를 받았으며, 2000년 가수의 날을 맞아 노래로 국위선양을 하고 사회봉사 활동을 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현미는 1937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1·4후퇴 때 월남하여 덕성여대 무용과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 뒤 1957년 미8군 무대에 진출해 여성 3인조 그룹 ‘현 시스터스’(당시 멤버로 탤런트 강부자가 있었다)의 리드 싱어로 활동하면서 마할리아 잭슨, 새라 본, 다이나 워싱턴 등 흑인 여자가수들의 곡을 즐겨 불렀다.
현미는 미8군 쇼의 같은 무대에 섰던 이봉조가 편곡한 재즈 넘버 <밤안개>(원곡 : <It's Old Lonesome Town>)로 일반 무대에 데뷔했다. 두 사람은 결혼까지 했으나 뒤늦게 이봉조가 유부남이란 사실이 알려져 결혼생활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들 부부는 콤비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의 히트곡을 냈고, 1971년 그리스 가요제에 <별>이란 곡으로 출전했다. 현미는 한국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1981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가를 불렀다.
이금희(본명은 이대금)는 평북 선천에서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와 목사 아버지를 둔 집안의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 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했다고 할 만큼 풍부한 성량의 소유자였다. 해방되고 월남하여 중2 때 당시 음악선생 오현명(성악가)한테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병으로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금희는 좌절의 세월을 보내다가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의 쇼를 보게 된다. 쇼에 나온 인기가수들의 노래에 매료되어 가수가 될 결심으로 가수 송민도을 따라 부모 몰래 상경하여 송민도의 오빠인 KBS 관현악단장 송민영을 찾아가 오디션을 받고 번안곡 <동창이 밝았네>(원곡 : <It's Almost Tomorrow>)로 방송에 출연한다.
이때 베니 김(본명은 김영순)의 눈에 들어 미8군 무대에 데뷔, <Sing Sing Sing>, <Be-Bop A Lula>, <Diana>, <Hound Dog> 등 비교적 빠른 템포의 팝송을 즐겨 불렀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61cm의 볼륨 있는 몸매로 화끈한 춤을 추는 이금희의 공연에 미군은 물론 파월 장병 위문공연에서도 앙코르가 그치질 않았다. 이처럼 대중의 주목을 받으면서 여러 작곡가들로부터 음반 취입 제의가 몰려들었고, 그 중 한 사람이 황우루였다.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지겹게 따라다니는 것이 귀찮아 취입한 곡이 <키다리 미스터 김>(황우루 작사, 작곡)이었다. 이 노래는 요즘 말로 떴는데, 당시 황우루는 노래 홍보를 위해 180cm가 넘는 키다리 모델을 모아 팬클럽을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키가 작은 박정희 대통령께 잘 보이려 한 어느 고위층 인사가 이 노래를 방송 금지시키는 엉뚱한 조치를 내렸다. 이금희는 이에 상처를 받고 1969년 슬그머니 은퇴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후 이금희는 1987년이 되어서야 KBS <가요무대>를 통해 컴백하는데, 그녀는 1960년대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로 기록된다.
13.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 - 김인배, 여대영, 강대관
1960년대 국내 쇼 무대는 만토바니, 베니 굿맨, 글렌 밀러, 빌리 본, 로렌스 웰크, 버트 캠퍼트 등의 영향을 받아 빅 밴드가 유행했다. 엄토미, 김광수, 노명석, 박춘석, 김강섭, 이봉조, 여대영, 이동기, 엄기돈 그리고 일본에서 합류한 길옥윤 등이 자신의 악단을 이끌었다. 베니 김, 이봉조, 길옥윤은 샘 테일러나 실 오스틴의 영향을 받아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엄토미와 이동기는 베니 굿맨 흉내를 내며 클라리넷을 불었다. 또 박춘석과 김강섭은 에디 두친처럼 피아노를 쳤으며, 김인배, 여대영, 강대관은 루이 암스트롱을 따라 트럼펫을 불었다.
이들은 대개 미8군 무대에서 재즈를 다루다가 일반 무대로 옮겼는데, 가장 성공을 거둔 멤버는 이봉조, 박춘석, 길옥윤이었다. 오늘날 ‘트로트 음악의 대가’로 불리는 박춘석이 재즈를 연주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춘석은 이미자, 남진, 하춘화, 문주란 등이 트로트 가수로 대성하게끔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즈음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던 악기는 트럼펫이었다. 트럼펫하면 떠오르는 것이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이 루이 암스트롱을 흉내 낸 연주자들이 여럿 등장했다. 그 중 김인배는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 작곡은 물론, 트윈 폴리오, 펄 시스터스, 조영남 등의 음반 기획에도 참여했고 KBS라디오 악단장을 지냈다.
그런가 하면 여대영 역시, 작곡을 겸하며 MBC-TV 악단장을 지냈다. 그는 원래 조용한 성격으로 나서기를 싫어해 다른 방송 악단장보다는 유명세를 덜 탔다. 또 한국의 ‘마일즈 데이비스’로 불리는 강대관은 TBC의 수석 연주자로 트럼펫 연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주한미군 위문공연을 왔을 때 강대관을 무대로 초청해 협연할 만큼 트럼펫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트럼펫에 버금가는 인기 악기가 색소폰으로 1960년대는 빌리 본 악단이 유명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도 테너 색소폰이 인기였다. 지금은 케니G의 소프라노 색소폰이 유행이지만 당시는 테너 색소폰이 절대적이었다. 가끔 이봉조를 비롯해 길옥윤, 정성조 등이 TV에 나와 색소폰을 협연하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14. ‘패티 김’ 데뷔시절 이름은 ‘린다 김’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 주변은 외래어의 홍수 속에 파묻혔다. 초콜릿, 추잉검, 비스킷, 커피, 드롭프스 등 먹는 것조차 미국산 일색이었다. 연예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할리우드 영화가 판을 쳤고, 미8군 무대의 가수들도 외래어로 예명을 지었다. 베니 김, 후랭키 손, 로라 성, 신 카나리아, 자니 리, 위키 리 등등. 패티 김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티 김’의 본명은 김혜자다. 그녀의 원래 꿈은 아나운서였으나 시력이 나빠 시험에서 원고를 더듬거리며 읽는 바람에 낙방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큰 오빠 친구의 소개로 ‘베니 김’을 만난 게 가수가 되는 계기였다. 당시 미8군 쇼의 연예단체 ‘화양’에 전무로 있던 베니 김이 그녀의 오디션을 보고 즉석에서 합격시켜 ‘베니 김 쇼’의 간판가수로 무대에 세우는데, 그때 예명이 패티 김이 아닌 ‘린다 김’이었다. 린다 김은 당시 할리우드의 ‘린다 다넬’이란 여배우의 이름에서 빌려 붙인 이름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약 6개월여를 린다 김으로 활동하다가 집안에서 시집가라는 성화에 1년여 동안 활동을 중단하지만, 노래에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베니 김을 찾는다. 그때 바꾼 예명이 ‘패티 김’으로 당시 미국의 인기가수 패티 페이지의 이름에서 딴 것으로 전해진다.
패티 김 이후 가수들 예명에 외래어를 붙이는 것은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데 이것이 1970년대 유신시절에 문제가 됐다.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외래어 순화운동’ 지침을 마련해 각 언론사에 통보하면서 외래어 예명의 모든 가수의 이름을 본명이나 우리말로 바꾸라는 압력을 가했다. 여기에 가장 앞장 선 방송사가 MBC였다(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MBC 사장 출신이었다). 여하튼 이런 정부당국의 압력에 더러는 고집을 피우다가 방송 출연 금지라는 규제를 당하기도 했다.
웃기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급조하여 개명한 이름이 엉성해 잘 어울리지 않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 ‘김치 캣츠’를 ‘김치 고양이’로 고치는 둥 몇몇 사례들을 소개하면 이렇다. ‘패티 김’은 본명인 ‘김혜자’로, ‘루비나’ 역시 본명인 ‘박상숙’으로, ‘키 보이스’는 ‘열쇠 소년들’, ‘샌드 페블스’는 ‘모래와 자갈’, ‘딕 훼밀리’는 ‘서생원 가족’, ‘트리퍼스’는 ‘나그네들’, ‘라나 에 로스포’는 ‘개구리와 두꺼비’, ‘블루 벨스’는 ‘청종’, ‘옥슨’은 ‘황소’, ‘템페스트’는 ‘폭풍’, ‘데블스’는 ‘친구들’, ‘투 에이스’는 ‘금과 은’, ‘캔디 시스터스’는 ‘금비 단비’, ‘이 시스터스’는 ‘이 자매’, ‘양키스’는 ‘함중아와 초록별들’, ‘라이너스’는 ‘범수리’로 둔갑했는데,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15. ‘포 클로버스’와 학사가수들의 등장
1960년대 경제개발 전까지 우리나라 농촌에는 ‘보릿고개’라는 게 있었다. 식량이 모자라 초근목피를 먹어가며 배고픔을 달래던 것을 보릿고개라 했다. “배고픔이라는 산을 넘어가는 게 그리도 힘들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시는 그 만큼 먹고 살기 어렵다 보니 부모들은 자식만큼은 고생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로지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소 팔고 논 팔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고 방학 때 서울에 유학 갔던 아들이 시골에 내려오면 부모들은 이웃들에게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는 대학을 다니면 무슨 행세(?)나 하는 분위기였다.
그즈음 가요계에 소위 ‘학사가수’가 등장했으니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혜성처럼 나타난 최희준이었다. 그는 경복고, 서울대 법대를 나온 전도유망한 명문대 출신 학사가수. 그래서 방송 출연을 할 때는 꼭 사회자가 “학사가수 아무 아무개”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최희준은 솔로 활동 외에 ‘포 클로버스’라는 그룹 활동도 병행했다. 당시에는 ‘에임스 브라더스’나 ‘브라더스 포’, ‘레터맨’ 등 남성 중창단이 유행을 이끌던 시절로 이에 영향을 받아 ‘블루 벨스’, ‘멜로톤 4중창단’, ‘봉봉 4중창단’, ‘자니 브라더스’ 등이 쏟아져 나왔다. ‘포 클로버스’도 같은 맥락의 그룹이었으나 일종의 조인트 그룹으로 각자 솔로 활동을 하면서 가끔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는 이색적인 팀이었다.
‘포 클로버스’는 최희준을 위시하여 경기고,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유주용(자칭 ‘한국의 프랭크 시나트라’였다), 경기중·고, 서라벌예대를 나온 위키 리(본명은 이한필)는 ‘바비 다린’의 창법을 흉내 냈고, ‘페리 코모’를 닮은 부드러운 목소리의 박형준은 서울공고, 외국어대 서반어과 출신의 ‘학사가수’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그룹보다 엘리트 집단으로 인식돼 조금은 남다른 대접을 받기도 했고, 그 결과 1963년 ‘패티 페이지’ 내한 공연에 찬조 출연할 정도의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각자 너무 바쁜 스케줄로 ‘포 클로버스’로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 했다.
‘포 클로버스’ 멤버의 ‘위키 리’는 친구이자 권투선수였던 작곡가 김기웅의 권유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김기웅의 작품 <종이배>와 <저녁 한때의 목장풍경>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그가 정작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노래가 아닌 말 솜씨였다. 그는 동아방송 DJ로 시작해 TBC-TV <쇼쇼쇼>의 후라이보이의 대를 이은 MC이자 KBS-TV의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사회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가 하면 유주용은 아버지가 유명한 공학박사로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었고, 누이가 가수 겸 배우 ‘모니카 유’였다. 그는 영화배우 못지않게 잘생긴 외모로 여성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가수로서 히트곡은 <부모> 이외에는 이렇다 할 노래가 없다. 그리고 <첫사랑의 언덕>의 박형준은 다른 멤버에 비해 지명도가 약간 떨어졌지만 특유의 미성으로 여성 팬들이 많았다. 이밖에도 학사가수로 서울대 건축가를 나온 <애모의 노래>, <웨딩드레스>의 한상일(지금은 제주도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과 가수 출신으로 나중에 동아방송의 PD를 지낸 강수향이 있다.
한편, <가을편지>의 최양숙과 <대머리 총각>의 김상희는 여자 학사가수였다. 1961년 <황혼의 엘레지>로 데뷔한 최양숙은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샹송 가수로 <호반에서 만난 사랑>, <기다리겠어요> 등을 불렀다. 김상희는 고려대 법대 출신 가수라 하여 화제를 모았고, <단벌신사>, <경상도 청년>,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등을 불렀으며, 진행자로도 활약했다. 김상희는 2004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에서 문화훈장을 수상하여 이미자, 패티 김에 이어 3번째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16. 양아치 문화를 선도한 정원, 자니 리, 트위스트 김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에 걸쳐 미국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와 샌프란시스코의 노스비치에 새로운 집단 비트족(Beat Generation)이 등장했다. 미국 문학사에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뒤를 이은 세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기성의 도덕, 질서, 정신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 반항아 집단이 형성됐는데, 제임스 딘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청바지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면서 반항의 상징이 됐다.
그 시절 쇼 무대 의상은 정장이 주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정원, 자니 리, 트위스트 김이 등장했는데, 속칭 ‘양아치 클럽’으로 모두 부산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정원은 국내 최초의 리듬 앤 블루스 가수였다. 레이 찰스처럼 흐느끼는 창법으로 노래하는 그는 청바지에 반항적인 이미지와 노래 <허무한 마음>으로 대단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러나 방송에 적응을 못해 연말 가요제 시상식에서 방송국 직원과 싸운 것이 발단이 되어 방송과는 결별한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싸움에는 항상 앞장섰으며 ‘깡패’ 또는 ‘양아치’라는 나쁜 이미지를 달고 다녔다. 주류 방송 가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춤을 모방한 남진이 스타로 커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봐야 했다. 정원은 이에 환멸을 느껴 가요계를 떠나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가 고향 후배 나훈아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술집을 운영했고, 역시 나훈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91년 <인생은 본전>이란 신곡을 발표한 바 있다.
자니 리(본명은 이영길)는 중국 만주에서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1·4후퇴 때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피난 온 부산 고아원에서 자랐다. 이때 덴마크인 양아버지가 그의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고 가수 자니 마티스를 닮았다 하여 ‘자니’란 예명을 지어준다. 1952년 양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미국 아이들의 인종차별에 울분을 참지 못해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고 불법 입국자라는 낙인까지 찍혀 부산으로 되돌아온다.
귀국 후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부산 부두 옆에 있던 미군 클럽 ‘시멘스클럽’에 나가 팝송을 부르기 시작했으나 굶기를 밥 먹듯 해 폐결핵에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그러다가 1958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스카라극장 조명기사의 도움으로 쇼 무대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부산에서 사귄 트위스트 김과 함께 무대에 올라 냇킹 콜, 폴 앵카, 닐 세다카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의 히트곡 <뜨거운 안녕>은 지금도 중년 세대의 애창곡일 만큼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시절 자니 리와 정원의 인기는 막상막하였다. 그래서 주위에서 이들 중 “누가 더 노래를 잘하냐?”며 경쟁을 부추겼으나 두 사람이 같은 무대에 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니 리가 최근에 재조명된 것은 전인권, 김장훈, 권진원 등의 노래로 리메이크된 구전가요 <사노라면>의 오리지널 가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정원, 자니 리와 더불어 1960년대 극장 쇼의 인기 스타로 군림했던 트위스트 김(본명은 김한섭)은 엄밀하게 말해 가수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트위스트 춤으로 극장가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다. 당시는 TV가 없던 시절인지라 극장 쇼에 트위스트 김이 나타나면 그의 춤 솜씨를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가 알려진 것은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의 똘마니(실제 트위스트 김이 신성일보다 나이가 많다) 역으로 보스를 위해 죽음까지 맞는 의리파 양아치 연기를 훌륭히 해내면서다. 영화에서 그는 청바지를 입고 나와 청바지 유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국산 청바지가 나오질 않아 대개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청바지로 멋을 내던 시대였다. 특유의 문어다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추는 그의 트위스트 춤은 모방이 불가능한 전매특허였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춤이라면 퇴폐적으로 보던 경향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는 춤을 문화 트렌드로 이끈 인물이었다. 이들 부산갈매기 3총사는 당시 우리 문화의 이단자로 ‘양아치 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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