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는 묵시록의 예언처럼 세계가 멸망하는 심판의 날, 선택된 사람들이 순간이동한다는 설이다.
사전적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때 구원 받는 사람들을 공중으로 들어올린다는 뜻을 가진 명사라고 한다.
자동차의 운전자, 비행기의 조종사, 핵 발전소의 기사 등이 일하던 중 갑자기 증발해 각종 충돌 사고와 화재, 폭발이 일어나 대환란이 일어난다는 주장도 폈다.
서울만 해도 3백만명 이상이 증발되고 예수를 믿는 수억의 인구가 천국을 향해 휴거되는데, 증발한 사람은 천국 간 사람이지만 지상에 남은 사람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666 바코드를 심어지고 지옥의 불길 속에서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천국의 위치는 오리온 성좌에 있고 1천 광년이 걸리는 거리지만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1만 평방 마일의 흡입 장치가 준비되어 있어 버튼만 누르면 삽시간에 예수빋는 성도들이 휴거된다.
휴거론은 시한부 종말론 혹은 재림설로 요한 계시록과 묵시록에 기록된 예언을 합쳐 만들어진 설이다.
미국 19세기말부터 휴거 설이 나왔으며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돌다가 정리되었고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책으로 출판이 되고 선전물도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미국 기독교 계열의 신자들 중에서는 휴거를 믿는 사람이 꽤 많아졌는데 이때 당시 하와이에 이민 간 한국 교포들이 매개체가 되어 한국으로 수입된 것이 휴거의 원류라는 설이 있다.
한국에서 휴거가 본격적으로 유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에 '다미선 교회'라는 단체의 대표인 '이장림' 목사에 의해서였다.
이장림 목사는 감리교에서 공부를 해 목사가 되었고 성실하고 학식도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미국에서 출간된 기독교 관련 서적을 연구,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면서 평판과 영향력을 갖추게 됐다.
본래 휴거의 영어 원문 표현은 'RAPTURE'인데 이걸 번역하여 한자어 휴거로 쓴 사람이 이장림 목사였다.
이장림 목사는 1986년 퍼시 콜레 목사의 저서 [내가 본 천국]을 보게 된 이후로 휴거설에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이 책은 이후 한국에서 '휴거'라는 영화를 만든 홍의봉이 번역해서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퍼시 콜레는 한국에 방문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고 이장림 목사는 그 시점에서 휴거에 완전히 매료되어 미국의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휴거, 말세, 요한 계시록 등을 해석한 책을 쓴다.
그것이 1988년에 출간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 [하늘 문이 열린다], 1989년에 낸 [경고의 나팔]이었다.
그리고 1990년 경, 신광성결 교회의 협동 목사로 재직하다가 서울 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의 '다미선 교회'를 설립한다.
1991년, 걸프 전쟁이 터져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이장림 목사는 1992년 10월 28일날 휴거가 찾아온다며 시한부 재림설을 설파하고, 전국에 말세의 예언이 떠돌며 종교적 혼란이 찾아왔다.
이장림 목사는 휴거를 부정하는 자는 휴거하지 못하고 지옥에 가거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신봉자들에게 막대한 헌금을 거두어들였다.
종말론에 빠진 신봉자들이 이장림 목사에게 막대한 돈을 바치며 학업과 직장을 포기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고, 일부에서는 휴거시 몸이 가벼워 진다며 낙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2년 9월 12일, 부산에 거주 중이던 30대 여자가 경상남도 마산의 고압선 철탑에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그녀의 유서에는 10월 28일 휴거를 앞두고 세상이 싫다, 남편과 가족들에게 666 바코드가 시행되면 신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당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은 휴거 소동과 관련된 최초의 자살 사건으로 경찰 당국이 전격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92년 9월 24일, 경찰은 이장림 목사를 체포하여 사기 혐의로 가두려 했으나, 그 전에 체포 과정에서 이장림 목사가 보유한 수만달러 어치의 미국돈이 발견되면서 외환관리 관계 법령 위반으로 감옥에 가둔다.
그 후 조사 과정에서 이장림 목사가 수십억원 어치의 재산을 다미선 교회 운영 과정에서 쌓아두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국민들에게 알렸고, 그 재산 중 휴거 이후 1993년이 되어서야 현금화할 수 있는 채권이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렸다.
스스로 10월 28일 휴거를 주장하면서 신도들의 헌금으로 1993년 5월에 만기되는 34억짜리 환매체를 사들인 것이다.
휴거가 없다는 게 입증된 증거였다.
피해자 김모씨의 경우 이장림 목사의 휴거론에 속아서 집과 전 재산을 팔아서 총 19차례에 걸쳐 6억 5천만원을 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장림 목사는 조사를 받던 중 휴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회의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토로 했으며 그게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2년 10월 28일에 임박해서는, 신자들에게 휴거가 되지 않았다고 실망해서 난동을 부리지 말고 차분히 삶에 정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러나 1992년 10월에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많은 수의 신봉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남긴다.
휴거가 찾아온 이후 자신이 순간이동해서 사라지고 나면 남은 재산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정해두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666 바코드를 받지 말고 항거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경찰은 그것을 세상을 하직하려는 사람들이 남기는 편지라 판단, 일종의 유서로 보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휴거 소동에 다시 개입한다.
부산에서는 휴거 홍보 전단을 뿌리는 것만으로 풍기문란행위로 보고 경범죄로 입건하는 등 강경책을 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거에 관한 유인물과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1992년 10월 26일, 다미선 교회 본부에는 신봉자 1500명이 모였고, 다음날 27일에는 충청북도 제천의 한 종교 집단에서 출입구에 '우리가 먼저 갑니다. 장렬히 순교하세요.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집단 출가 생활을 하고 있던 전라남도 완주 산골의 신봉자들이 간편한 옷차림 외 소지품을 전부 태우고 지상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행사를 치뤘다.
1992년 10월 27일 24시, 유인물에 휴거가 오는 날이 10월 28일 자정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1992년 10월 28일 0시로 착각한 구경꾼이 다미선 교회 본부에 몰려들었다.
그 중 상당수가 신봉자의 가족이나 친구였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 당일. 다미선 교회 본부에서는 경찰과 구경꾼들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한 출입증을 발급. 신봉자들은 출입증을 목에 걸고 본부에 나타났는데, 기자와 구경꾼들에게 이 출입증이 천국행 티켓이라고 말했다.
다미선 교회 측은 휴거 순간의 소동을 우려하여 자진해서 경찰에 병력 배치를 요구.
경찰 4개 중대, 구급차 3대, 소방차 3대, 조명차 2대가 배치되었고 휴거 당일에 각종 종교 단체에 배치된 경찰 병력은 전국적으로 15000명에 이르렀으며, 당일에 한하여 철야 비상 경계에 돌입했다.
종교 단체의 상당수가 휴거가 찾아오면 신봉자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교회에 주어서, 휴거 이후의 재앙을 헤쳐나갈 때 자금으로 쓴다는 계약을 맺기도 했으며, 단체에 따라서 재산과 남은 가족 관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다미선 교회 본부에선 출입구에 꽃으로 된 3미터 크기의 커다란 아치를 만들어 장식, 주차장에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중계횽 대형 텔레비젼을 설치했다.
밤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휴거 신봉자들이 각 종교 단체에 모여 들었고 특히 경기도 의정부, 전라북도 완주 등지의 종교 단체에서는 모든 신봉자가 하얀색 옷을 입고 모였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신봉자들 스스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라고 주장하며 휴거를 기다리는 종교 행사를 시작.
구경꾼, 경찰은 물론이고 국내 TV 방송사, CNN과 아하시 TV 등 외국 방송사까지 모여서 큰 관심을 끌었다.
경찰 추산으로 휴거 당일 모여 든 신봉자의 수는 전국에 155개 교회에 8200명으로 집계됐다.
휴거 현상은 경기도 수원의 한 조직에서 처음으로 전해졌는데 밤 8시경, 신봉자 한 명이 평택에서 예수님이 공중재림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말을 한 뒤. 목사가 신도들에게 평택에서 예수가 꽃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공중에서 재림했으며, 공중들림이 일어났다고 말을 하자 신봉자들이 열광하여 환호하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신봉자들은 서로 감격에 차 악수를 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눈 뒤 하나님 아버지 어서 오세요라고 부르짖으며 온 몸을 흔들고 격렬히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그날 평택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행사 시작 시간이 늦어져 신봉자 세 사람이 모였을 뿐. 예비가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10월 28일 밤 9시 경, 서울 마포구의 다미선 교회 본부는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한다.
이장림 목사가 구속 수감된 상태였기에, 미국 담당인 장만호 목사가 행사를 거행.
본부에 운집한 신봉자들은 미국, 일본, 캐나다에서 온 사람 500명을 포함해 총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20~30대 젊은 신봉자 50명이 건물을 둘러치고 경비를 맡고 700명 이상의 군중과 취재진들을 막아선 상태에서 행사는 시작됐다.
예배가 시작된 무렵 건물 불빛 속에서 나방 한 마리가 날아올랐는데, 신봉자 중 하나가 '나방이 휴거되고 있다'고 외쳐 주변 신봉자들이 나방을 보며 '할렐루야'를 외쳤다고 한다.
1992년 10월 28일 밤 10시 경, 예배 광경을 야외 TV로 지켜보던 구경꾼들 중에서 고교생 이모군이 형이 휴거에 미쳐있고 교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며 울분을 토하며 난동을 부려 TV를 부셔버린다.
이모군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TV 중계가 불가능해진 다미선 교회 본부 측은 야외 스피커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중계했다.
CCTV 화면에 붉은 조명등이 잡혔는데 누가 그것을 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불기둥이다!'라고 소리쳐 주위가 술렁이는 사건도 있었다.
신봉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노래와 기도 문구를 부르짖었다.
1992년 10월 28일 밤 11시 20분 경, 휴거에 빠진 애인을 돌려달라며 주장하던 정모씨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자 나체로 시위를 하며 인근 도로 30미터를 행진하기도 했다.
자정을 앞 둔 11시 50분 경.
다미선 교회 본부의 신봉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울부짖고 온 몸을 흔들며 열정적인 기도에 돌입했다.
부산의 한 조직에서는 신봉자들의 3분의 1 이상이 휴거 직전에 들리는 신비로운 나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
문제의 휴거는 찾아오지 않았다.
신봉자들은 바닥에 주저 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몇몇 신도들은 믿음이 부족한 자신들을 용서해달라며 울부짖었다.
신봉자들이 통곡을 하며 실망한 가운데 다미선 교회 본부의 예배를 주관하던 장만호 목사가 휴거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늘 예배를 할 수 있는 게 다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하며 사태를 수습했고 그렇게 휴거 소동은 끝이 났다.
1993년 5월, 이장림 목사는 26000불 몰수령에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다미선 교회는 공식 해체된다.
1994년. 이장림 목사는 출소 후 가진 첫 설교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완전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나 이장림 목사는 이름을 '이답게'로 바꾼 뒤 아직도 종말론에 빠져 있는 추종자 100여명을 거느리고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새하늘 교회' 건립, 과거의 시한부 종말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21세기인 지금 현재, 2012년에 휴거가 온다는 주장이 계속 되고 있다.
사전적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때 구원 받는 사람들을 공중으로 들어올린다는 뜻을 가진 명사라고 한다.
자동차의 운전자, 비행기의 조종사, 핵 발전소의 기사 등이 일하던 중 갑자기 증발해 각종 충돌 사고와 화재, 폭발이 일어나 대환란이 일어난다는 주장도 폈다.
서울만 해도 3백만명 이상이 증발되고 예수를 믿는 수억의 인구가 천국을 향해 휴거되는데, 증발한 사람은 천국 간 사람이지만 지상에 남은 사람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666 바코드를 심어지고 지옥의 불길 속에서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천국의 위치는 오리온 성좌에 있고 1천 광년이 걸리는 거리지만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1만 평방 마일의 흡입 장치가 준비되어 있어 버튼만 누르면 삽시간에 예수빋는 성도들이 휴거된다.
휴거론은 시한부 종말론 혹은 재림설로 요한 계시록과 묵시록에 기록된 예언을 합쳐 만들어진 설이다.
미국 19세기말부터 휴거 설이 나왔으며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돌다가 정리되었고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책으로 출판이 되고 선전물도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미국 기독교 계열의 신자들 중에서는 휴거를 믿는 사람이 꽤 많아졌는데 이때 당시 하와이에 이민 간 한국 교포들이 매개체가 되어 한국으로 수입된 것이 휴거의 원류라는 설이 있다.
한국에서 휴거가 본격적으로 유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에 '다미선 교회'라는 단체의 대표인 '이장림' 목사에 의해서였다.
이장림 목사는 감리교에서 공부를 해 목사가 되었고 성실하고 학식도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미국에서 출간된 기독교 관련 서적을 연구,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면서 평판과 영향력을 갖추게 됐다.
본래 휴거의 영어 원문 표현은 'RAPTURE'인데 이걸 번역하여 한자어 휴거로 쓴 사람이 이장림 목사였다.
이장림 목사는 1986년 퍼시 콜레 목사의 저서 [내가 본 천국]을 보게 된 이후로 휴거설에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이 책은 이후 한국에서 '휴거'라는 영화를 만든 홍의봉이 번역해서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퍼시 콜레는 한국에 방문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고 이장림 목사는 그 시점에서 휴거에 완전히 매료되어 미국의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휴거, 말세, 요한 계시록 등을 해석한 책을 쓴다.
그것이 1988년에 출간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 [하늘 문이 열린다], 1989년에 낸 [경고의 나팔]이었다.
그리고 1990년 경, 신광성결 교회의 협동 목사로 재직하다가 서울 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의 '다미선 교회'를 설립한다.
1991년, 걸프 전쟁이 터져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이장림 목사는 1992년 10월 28일날 휴거가 찾아온다며 시한부 재림설을 설파하고, 전국에 말세의 예언이 떠돌며 종교적 혼란이 찾아왔다.
이장림 목사는 휴거를 부정하는 자는 휴거하지 못하고 지옥에 가거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신봉자들에게 막대한 헌금을 거두어들였다.
종말론에 빠진 신봉자들이 이장림 목사에게 막대한 돈을 바치며 학업과 직장을 포기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고, 일부에서는 휴거시 몸이 가벼워 진다며 낙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2년 9월 12일, 부산에 거주 중이던 30대 여자가 경상남도 마산의 고압선 철탑에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그녀의 유서에는 10월 28일 휴거를 앞두고 세상이 싫다, 남편과 가족들에게 666 바코드가 시행되면 신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당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은 휴거 소동과 관련된 최초의 자살 사건으로 경찰 당국이 전격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92년 9월 24일, 경찰은 이장림 목사를 체포하여 사기 혐의로 가두려 했으나, 그 전에 체포 과정에서 이장림 목사가 보유한 수만달러 어치의 미국돈이 발견되면서 외환관리 관계 법령 위반으로 감옥에 가둔다.
그 후 조사 과정에서 이장림 목사가 수십억원 어치의 재산을 다미선 교회 운영 과정에서 쌓아두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국민들에게 알렸고, 그 재산 중 휴거 이후 1993년이 되어서야 현금화할 수 있는 채권이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렸다.
스스로 10월 28일 휴거를 주장하면서 신도들의 헌금으로 1993년 5월에 만기되는 34억짜리 환매체를 사들인 것이다.
휴거가 없다는 게 입증된 증거였다.
피해자 김모씨의 경우 이장림 목사의 휴거론에 속아서 집과 전 재산을 팔아서 총 19차례에 걸쳐 6억 5천만원을 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장림 목사는 조사를 받던 중 휴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회의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토로 했으며 그게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2년 10월 28일에 임박해서는, 신자들에게 휴거가 되지 않았다고 실망해서 난동을 부리지 말고 차분히 삶에 정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러나 1992년 10월에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많은 수의 신봉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남긴다.
휴거가 찾아온 이후 자신이 순간이동해서 사라지고 나면 남은 재산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정해두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666 바코드를 받지 말고 항거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경찰은 그것을 세상을 하직하려는 사람들이 남기는 편지라 판단, 일종의 유서로 보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휴거 소동에 다시 개입한다.
부산에서는 휴거 홍보 전단을 뿌리는 것만으로 풍기문란행위로 보고 경범죄로 입건하는 등 강경책을 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거에 관한 유인물과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1992년 10월 26일, 다미선 교회 본부에는 신봉자 1500명이 모였고, 다음날 27일에는 충청북도 제천의 한 종교 집단에서 출입구에 '우리가 먼저 갑니다. 장렬히 순교하세요.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집단 출가 생활을 하고 있던 전라남도 완주 산골의 신봉자들이 간편한 옷차림 외 소지품을 전부 태우고 지상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행사를 치뤘다.
1992년 10월 27일 24시, 유인물에 휴거가 오는 날이 10월 28일 자정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1992년 10월 28일 0시로 착각한 구경꾼이 다미선 교회 본부에 몰려들었다.
그 중 상당수가 신봉자의 가족이나 친구였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 당일. 다미선 교회 본부에서는 경찰과 구경꾼들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한 출입증을 발급. 신봉자들은 출입증을 목에 걸고 본부에 나타났는데, 기자와 구경꾼들에게 이 출입증이 천국행 티켓이라고 말했다.
다미선 교회 측은 휴거 순간의 소동을 우려하여 자진해서 경찰에 병력 배치를 요구.
경찰 4개 중대, 구급차 3대, 소방차 3대, 조명차 2대가 배치되었고 휴거 당일에 각종 종교 단체에 배치된 경찰 병력은 전국적으로 15000명에 이르렀으며, 당일에 한하여 철야 비상 경계에 돌입했다.
종교 단체의 상당수가 휴거가 찾아오면 신봉자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교회에 주어서, 휴거 이후의 재앙을 헤쳐나갈 때 자금으로 쓴다는 계약을 맺기도 했으며, 단체에 따라서 재산과 남은 가족 관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다미선 교회 본부에선 출입구에 꽃으로 된 3미터 크기의 커다란 아치를 만들어 장식, 주차장에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중계횽 대형 텔레비젼을 설치했다.
밤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휴거 신봉자들이 각 종교 단체에 모여 들었고 특히 경기도 의정부, 전라북도 완주 등지의 종교 단체에서는 모든 신봉자가 하얀색 옷을 입고 모였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신봉자들 스스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라고 주장하며 휴거를 기다리는 종교 행사를 시작.
구경꾼, 경찰은 물론이고 국내 TV 방송사, CNN과 아하시 TV 등 외국 방송사까지 모여서 큰 관심을 끌었다.
경찰 추산으로 휴거 당일 모여 든 신봉자의 수는 전국에 155개 교회에 8200명으로 집계됐다.
휴거 현상은 경기도 수원의 한 조직에서 처음으로 전해졌는데 밤 8시경, 신봉자 한 명이 평택에서 예수님이 공중재림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말을 한 뒤. 목사가 신도들에게 평택에서 예수가 꽃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공중에서 재림했으며, 공중들림이 일어났다고 말을 하자 신봉자들이 열광하여 환호하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신봉자들은 서로 감격에 차 악수를 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눈 뒤 하나님 아버지 어서 오세요라고 부르짖으며 온 몸을 흔들고 격렬히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그날 평택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행사 시작 시간이 늦어져 신봉자 세 사람이 모였을 뿐. 예비가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10월 28일 밤 9시 경, 서울 마포구의 다미선 교회 본부는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한다.
이장림 목사가 구속 수감된 상태였기에, 미국 담당인 장만호 목사가 행사를 거행.
본부에 운집한 신봉자들은 미국, 일본, 캐나다에서 온 사람 500명을 포함해 총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20~30대 젊은 신봉자 50명이 건물을 둘러치고 경비를 맡고 700명 이상의 군중과 취재진들을 막아선 상태에서 행사는 시작됐다.
예배가 시작된 무렵 건물 불빛 속에서 나방 한 마리가 날아올랐는데, 신봉자 중 하나가 '나방이 휴거되고 있다'고 외쳐 주변 신봉자들이 나방을 보며 '할렐루야'를 외쳤다고 한다.
1992년 10월 28일 밤 10시 경, 예배 광경을 야외 TV로 지켜보던 구경꾼들 중에서 고교생 이모군이 형이 휴거에 미쳐있고 교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며 울분을 토하며 난동을 부려 TV를 부셔버린다.
이모군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TV 중계가 불가능해진 다미선 교회 본부 측은 야외 스피커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중계했다.
CCTV 화면에 붉은 조명등이 잡혔는데 누가 그것을 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불기둥이다!'라고 소리쳐 주위가 술렁이는 사건도 있었다.
신봉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노래와 기도 문구를 부르짖었다.
1992년 10월 28일 밤 11시 20분 경, 휴거에 빠진 애인을 돌려달라며 주장하던 정모씨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자 나체로 시위를 하며 인근 도로 30미터를 행진하기도 했다.
자정을 앞 둔 11시 50분 경.
다미선 교회 본부의 신봉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울부짖고 온 몸을 흔들며 열정적인 기도에 돌입했다.
부산의 한 조직에서는 신봉자들의 3분의 1 이상이 휴거 직전에 들리는 신비로운 나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
문제의 휴거는 찾아오지 않았다.
신봉자들은 바닥에 주저 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몇몇 신도들은 믿음이 부족한 자신들을 용서해달라며 울부짖었다.
신봉자들이 통곡을 하며 실망한 가운데 다미선 교회 본부의 예배를 주관하던 장만호 목사가 휴거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늘 예배를 할 수 있는 게 다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하며 사태를 수습했고 그렇게 휴거 소동은 끝이 났다.
1993년 5월, 이장림 목사는 26000불 몰수령에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다미선 교회는 공식 해체된다.
1994년. 이장림 목사는 출소 후 가진 첫 설교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완전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나 이장림 목사는 이름을 '이답게'로 바꾼 뒤 아직도 종말론에 빠져 있는 추종자 100여명을 거느리고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새하늘 교회' 건립, 과거의 시한부 종말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21세기인 지금 현재, 2012년에 휴거가 온다는 주장이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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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시기입니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카페일도 싫어지네요,,
약값이 매일 들고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먹을것(식품,반찬거리)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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