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주 엘버슨 인근, 버크스 카운티(Berks County) 남동부에 위치한 호프웰 퍼니스 국립 사적지(Hopewell Furnace National Historic Site)를 찾아가기 위해 GPS에 목적지를 입력했지만, 정확한 위치가 잡히지 않아 결국 구글 지도를 보며 꼬불꼬불한 시골 도로를 따라 운전해야 했다. 길은 좁고 굽이져 있어 순간순간 긴장감이 들었고,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배일 정도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오랜 시간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오며, 초여름 같은 봄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 찾은 이곳은 자연이 풍부하고 고요한 준평원의 시골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도착한 이 사적지는,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었다.
200년 전 미국의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며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참 의미 있는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평소 아미시 타운이 좋아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를 자주 찾곤 하지만, 이 호프웰 퍼니스 국립 사적지는 아미시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30분, 필라델피아에서는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용한 시골 풍경 속에 숨겨진 이 역사 유적지는, 관광지의 화려함 대신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과 깊이 있는 역사적 울림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주차장에는 방문객 차량이 띄엄띄엄 보였다. ‘아, 오늘은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조용히 감사의 마음이 올라왔다.
이곳은 19세기 미국 농촌 철광 농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역사 공원으로, 숯불을 사용하는 냉풍 용광로(cold-blast furnace)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복원된 주요 구조물로는 용광로 건물(용광로, 수차, 용광로 기계, 주조 공장, 숯 공장)을 비롯해 제철소, 회사 상점, 대장간, 헛간, 그리고 여러 노동자들의 주택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시설이 당시의 생활상과 산업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마치 200년 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호프웰 퍼니스(Hopewell Furnace)는 1771년경, 당시 펜실베이니아에서 가장 저명한 제철업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버드(William Bird)의 아들 마크 버드(Mark Bird)가 설립한 제철 공동체다. 이곳은 1820년부터 1840년 사이에 가장 번창했으며, 남북전쟁 기간 동안에도 전쟁 물자 수요가 증가하면서 한때 상당한 생산량을 회복하기도 했다.
철 생산이 미국 산업 발전의 핵심이었던 시기에 호프웰 퍼니스는 지역 경제와 국가 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은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방문객들에게 당시의 생활상과 산업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유적지로 남아 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제철 기술이 목탄 연료 용광로에서 무연탄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호프웰과 같은 소규모 제철소는 경쟁력을 잃고 점차 쇠퇴했으며, 결국 1883년을 끝으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1938년, 이 부지는 사적지 법에 따라 호프웰 빌리지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며 국립공원 제도의 초기 문화유산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의 호프웰 퍼니스는 복원된 14개의 구조물과 분류된 구조물 목록에 등재된 52개의 건물, 그리고 대부분이 숲으로 뒤덮인 총 848에이커의 넓은 부지로 이루어져 있다.
호프웰 퍼니스 국립 사적지는 호프웰 빅 우즈(Hopewell Big Woods)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 면이 프렌치 크릭 주립공원과 맞닿아 있다. 남쪽에는 과거 제련소가 천연자원으로 활용하던 토지를 보존하기 위해 지정된 43번 주립 사냥터(State Game Lands 43)가 위치해 있어, 이 지역 전체가 자연과 역사 보존의 중요한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 '열풍 무연탄 용광로(hot-blast anthracite furnace)'는 1853년, 제철 공정을 현대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기존의 숯 대신 펜실베이니아 북동부에서 채굴한 무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며 새로운 제철 기술을 도입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호프웰이 워낙 외딴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필요한 무연탄을 운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 용광로는 가동된 지 불과 몇 년 만인 1857년에 폐쇄되고 말았다. 짧은 운영 기간이었지만, 당시 제철 기술의 변화와 산업적 도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철 생산을 현대화하기 위해 호프웰의 소유주는 1853년 무연탄을 사용하는 새로운 용광로를 건설했다. 용광로 상단에 설치된 '브리지 하우스(Bridge House)'와 '벨로우즈 하우스(Bellows House)'에는 증기 엔진과, 가열된 공기를 투명한 관을 통해 용광로 내부로 밀어 넣는 송풍 장치가 갖춰져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된 기술이었다.
그러나 무연탄 기둥의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고, 구조적 결함까지 겹치면서 운영 비용이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외딴 지역이라는 한계로 인해 무연탄 운송 비용까지 높아지자, 결국 이 용광로는 1855년경 심각한 고장을 겪게 되었고 지속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짧은 시도였지만, 이 무연탄 용광로는 19세기 중반 미국 제철 산업이 겪었던 기술적 도전과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숯 집에 보관된 '숯(charcoal)'은 철광석을 제련하는 데 필요한 고온을 만들어 내는 핵심 연료였다. 작업자들은 시간당 약 15부셸의 숯을 삽으로 퍼 올려 용광로에 넣었고, 이 숯 집은 최대 3만 부셸의 숯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양이면 숯 생산이 어려운 겨울철에도 용광로의 불길을 끊기지 않게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호프웰 주변 언덕에서 갓 생산된 숯은 마차에 실려 이 건물의 ‘냉각 창고(cooling shed)’ 아래로 운반되었다. 그곳에서 숯은 자연 온도까지 식혀 화재 위험을 줄인 뒤, 사용 시점까지 숯 집 안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제철소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교한 연료 관리 시스템이었다.
호프웰 주변의 언덕 곳곳에는 지금도 수백 개의 숯 하트(Charcoal Hearth)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과거 숯 제조공들이 며칠씩 머물며 나무를 숯으로 굽던 자리로, 제철소 운영에 필수적인 연료를 생산하던 핵심 공간이었다.
숯 제조는 하루 24시간 불을 관리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작업자들은 나무를 원형으로 쌓아 흙과 잔가지로 덮은 뒤, 내부에서 천천히 태워 거의 순수한 탄소 연료인 숯으로 변환했다. 이 과정을 ‘콜링(calling)’ 또는 ‘콜로나이징(colonizing)’이라고 불렀으며, 나무 속의 수분과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7~14일이 걸렸다.
나무에 수분이나 불순물이 너무 많으면,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는 데 필요한 '약 3,000°F(약 1,650°C)'의 고온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숯의 품질은 제철 생산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용광로 근처에는 최근에 작은 숯가마가 새로 설치되어, 매년 열리는 숯 만들기 시연 행사에서 당시의 전통적인 숯 생산 과정을 재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 시연은 19세기 제철 산업의 노동과 기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교육 자료가 되고 있다.
채굴공들은 철광석, 석회암, 그리고 숯이 실린 수레를 밀어 올려 브리지 하우스 내부의 용광로 꼭대기까지 운반했다. 이곳은 제철 공정의 핵심 지점으로, 용광로 상단에서 원료를 투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현장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조셉 E. 워커는 그의 저서 『호프웰 마을: 19세기 제철 공동체의 역동성』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브리지 하우스 아래의 주조소에는 호프웰 퍼니스를 대표하는 **냉풍 용광로(cold-blast furnace)**가 자리하고 있었다. 용광로가 가동될 때면, 이 건물 안에서는 모래를 쏟아 붓는 기계의 굉음과 수십 명의 인부들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뒤섞여 활기찬 작업 현장을 이루었을 것이다. 위쪽에서는 필러들이 수레에 실은 원자재를 교량 위로 옮기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이 주조소는 1964년과 1965년에 걸쳐 19세기 초의 모습으로 정교하게 복원되었으며, 오늘날 방문객들은 당시 제철 산업의 현장을 거의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
용광로는 가동되는 동안 항상 내부가 원료로 가득 차 있도록 유지되었다. 작업자들은 일정한 온도와 화력을 유지하기 위해 30분마다 충전 작업을 반복했는데, 한 번의 충전에 약 15부셸의 숯, 400~500파운드의 철광석, 그리고 30~40파운드의 석회석을 추가했다. 이 정교한 비율과 주기적인 투입은 용광로의 불길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일정한 품질의 선철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당시 제철소의 리듬은 바로 이 충전 작업의 반복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광로는 한 번 가동이 시작되면 24시간 내내 불길이 유지된 상태로 운영되었다. ‘블라스트(Blast)’ 상태에서는 내부가 항상 원료로 가득 차 있어야 했고, 불이 꺼지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강렬한 열기와 지속적인 고온 작업으로 인해, 용광로 내부를 보호하던 '사암 내화재(lining)'는 약 10~15개월이 지나면 점차 타고 마모되기 시작했다. 결국 내화재가 손상되면 용광로를 멈추고 내부 라이닝을 전면 교체해야 했으며, 이 과정은 제철소 운영에서 필수적인 정비 주기였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과 정기적인 보수 작업은 19세기 제철 산업이 얼마나 고된 노동과 정교한 기술 관리 위에 유지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입자 주택과 하숙집-
호프웰 퍼니스는 철 생산에 필요한 숲, 물, 광석 등 천연자원 가까이에 자리한 외딴 시골 지역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제철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특히 12시간 교대 근무를 하는 직원들에게는 작업장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때문에 퍼니스 경영진은 근로자들을 위해 여러 채의 세입자 주택(tenant houses)과 숙소를 마련해 임대했다. 전성기에는 무려 14채의 세입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제철 공동체가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그중 4채만 남아 있다.
• 세입자 주택 2채
• 복층 구조의 주택 1채
• 그리고 독신 남성 노동자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하숙집 1채
이 건물들은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으로, 호프웰 퍼니스가 단순한 산업 시설을 넘어 하나의 자급자족 공동체였음을 잘 보여준다.
아이언마스터 맨션(Ironmaster’s Mansion, ‘Big House’)
아이언마스터 맨션은 호프웰 퍼니스 공동체의 사교·행정·주거 기능이 모두 집중된 중심 공간이었다. 이곳은 용광로 소유주 가족의 거주지이자, 제철소 운영을 총괄하는 중앙 사무실, 손님을 맞이하는 접대 공간, 그리고 때로는 독신 노동자들을 위한 하숙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저택은 총 4층, 19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오래된 부분은 1770년대 후반에서 1800년대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세기 동안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규모가 확장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웅장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사과 과수원(Apple Orchard)
호프웰 퍼니스 사과 과수원의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지만, 1788년 이전부터 이미 사과나무가 심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식민지 주민들은 새로운 땅에 정착하면 가능한 한 빨리 과일나무 몇 그루를 심거나, 더 큰 과수원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과는 저장성이 좋고 활용 범위가 넓어, 초기 정착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호프웰 퍼니스 국립 사적지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전통 사과 품종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25가지가 넘는 전통 및 토종 사과 품종이 열리며, 방문객들은 선착순으로 사과를 수확할 수 있다. 수확 시기와 양은 해마다 다르지만, 이 전통은 과거 제철 공동체의 농업 문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주는 소중한 경험이 되고 있다.
당시에는 단순히 “손에 들고 먹는” 디저트용 사과뿐 아니라,
• 사이다 제조용 • 식초 생산용 • 말려서 저장하는 용도 • 요리용 등 다양한 목적에 맞춘 여러 품종이 재배되었다. 사과는 그야말로 식민지 시대 농가의 필수 자원이자 생계 기반이었다.
글/ 사진 손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