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월. 외부자와 당사자, 포켓몬 고
외부자와 당사자
편백숲길을 통해 원효암을 오르는데 전화가 왔다. 지역의 한 선생님이시다. 11일 천성산 사드 배치 소식을 듣고 전화를 드려 지역에서 같이 논의할 만한 분을 여쭌 적이 있었다. 서로 안부를 나누고, 경황없이 실례를 저질러 죄송했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많이 놀랐다며, 사드도 사드지만 내가 ‘작년부터 살면서 지역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데 더 놀랐고, 마을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나서지 않는 게 옳다’고 조언해주셨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기보다 이런 일을 논의할 만한 단위의 폭이 좁은 게 문제였다. 솔직히 작년 이곳에 내려와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지율스님의 소개를 받고 천성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하니 몹시 거북해하셨다. 그래 나는 누구의 사람도 편도 아니지만 다시 찾아뵙기 어렵겠구나 판단을 했다. 산에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도 지역의 환경단체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지율스님과 내원사의 입장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기 어려운 반목이 존재했다. 둘 중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나로서는 자연 발 디딜 곳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나로서 내 길을 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음알이 없이 나서지 말라’는 말은 역시 섭섭했다. 왜냐하면 천성산 문제라면 나도 분명 당사자인데 나서지 말라는 말은 내부자 안에 또 외부자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현안과 쟁점이 생겼을 때 당사자들이 모여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으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확실히 텃세와 권력이 존재한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진보나 보수나 똑같다. 그런데 기존권력은 스스로를 권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사실 천성산 문제라면 그 누구보다도 내가 당사자고, 그래서 당사자라고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해왔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외부자로 치부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 황교안 총리가 성주를 방문했을 때 성주군민이 사드배치 반대를 하며 격하게 총리를 막았다. 달걀과 물병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자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고, 어제는 성주 대책위에서 외부인이 폭력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부의 프레임에 말려들어 성주 대책위도 외부인 탓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근대사를 점철한 불순세력 마녀사냥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내부자 외부자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다. 정부의 입장에서 진압하려면 우선 분리해야 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숙고해야 한다. 현안의 중요성은 강정, 밀양, 성주를 비롯해 많은 지역문제가 지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실제로 사회문제치고 사회전체가 관계되지 않고 고립된 문제는 거의 없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더 그렇다. 공공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성주의 사드배치 반대운동도 단지 성주만의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성주군민에도 사드배치 자체를 반대하는 국민을 외부인으로 볼 수 있다. 아쉽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성주사드 결사반대’인지 ‘사드 결사반대’인지는 군민들도 명료히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주사드 결사반대’는 여전히 ‘사드 찬성’과도 ‘사드 반대’와도 동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주군민들은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결론에 따라 외부자 내부자를 구분할 수도 있고, 외부자와 내부자의 구분이 무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성주군민 내에서 그 어떤 입장이 확고히 정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민주적인 절차를 생략한 채 통고식 발표를 했다는 것과 사드 레이더 전자파의 유해성이 우선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조차 내부 식민지 문제와 절차 민주주의의 침해라는 공공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부자와 외부자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당사자의 범위가 이미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제의 본질은 내부자와 외부자의 문제가 아니라, 쟁점의 범위와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전술 문제인 것이다.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분이 단순한 구분이 아니다. 권력에 의한 차별이 작동하는 분할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당사자라는 말도 재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사자는 이해당사자의 준말이고, 이해당사자는 개인의 이익과 손해, 특히 근대법의 배타적 소유권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소유할 수 없는 자는 당사자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정부와 권력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당사자는 이해의 유무를 떠나 쟁점과 현안을 공유한 자 모두에게 그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 내 일 남의 일 나누는 것은 배타적 지배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공공의 시각에서 모두가 나의 일이고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분리를 허무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제일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현안에 대해 공감하고 나의 문제로 삼아 고민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내부자가 아니라 당사자다.
포켓몬 고
포켓몬 고라는 게임을 아직 한국에서 정식으로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한국인 100만이 가입했다고 한다. 지난 주말 정책적 착오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포켓몬 고 게임이 가능하다는 속초에는 포켓몬을 하기 위해 주말여행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거리를 배회하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공원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나는 도깨비한테 홀린 삼촌을 생각했다. 구체적 현실과 맥락은 어디로 가고 가상의 게임공간이 되어버린 현실 안에서 사람들이 유령같이 돌아다녔다.
내가 볼 때는 도깨비한테 홀려 들판을 싸돌아다니거나 논바닥을 뒹구는 것이나, 포켓몬의 가상괴물을 잡겠다고 도시와 공원을 누비는 것이나 하나 다를 바 없었다. 일종의 집단 주술에 걸린 듯 사람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본질은 같다, 현상만이 다를 뿐. 하지만 한편으로 치명적인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일단 도깨비와 포켓몬은 가상의 상징이며 매혹이다. 도깨비와 포켓몬은 사람을 홀린다. 홀림으로 해서 다른 것을 못 보게 하고 그것만을 상대하게 한다. 현실이 배경이 되고 환상이 현실이 되는 현실전도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 도깨비한테 홀려 논바닥에 뒹굴고, 포켓몬 괴물에 홀려 자동차에 치이거나 길바닥에 넘어진다. 도깨비가 전통사회 애니미즘적 사유 안에 정념의 투사물로서 만들어진 존재라면, 포켓몬 괴물은 전자정보사회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예쁘게 디자인한 캐릭터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도깨비가 자율과 우연의 산물인 반면, 포켓몬은 자본의 의도와 필연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점이다. 자본이야말로 최종적 권력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포켓몬 고은 게임 설계자의 의도에 의해 조정되는데, 특히 기존게임과 달리 현실에서 사람의 실제 참여를 유도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롭다. 때문에 테러와 마케팅 등의 다양한 용도로 변형할 수 있다는 게 포켓몬의 가공할 가능성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위기의식은 그 거리에 선 사람들의 뇌를 장악하고 있는 게임의 프레임이 너무나 막강해 현실의 다양한 맥락을 무시하게 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게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게임은 어느 정도 현실 차단 혹은 도피적 기능이 있다. 바둑만 해도 바둑에 일단 몰입하면 주변에 주의를 거의 주지 않게 된다. 이런 집중과 몰입-그리고 스릴까지 더해서-이야말로 게임이 주는 참맛일 것이다. 인간이 발명한 게임은 가상공간, 상징, 규칙에 의해 작동한다. 그 안에는 게임 참여자의 사회적 약속-깊은 약속-이 작용한다. 어찌 보면 대뇌피질의 상징계를 마음껏 활용하는 인간만의 놀이이지만 사회문화적인 의미는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암묵적 승인에 의존할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아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치명적 본질이라는 것은 현실의 소외 문제다. 포켓몬 고 이전의 게임은 현실에서 소외된 게임자가 게임의 가상공간에 들어가는 구조라면, 포켓몬 고는 게임자와 게임 공간이 현실 공간을 덮어쓰며 적극적으로 현실공간을 재점유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필연적으로 현실공간의 소외현상이 벌어진다. 속초의 시장과 거리와 공원이 게임의 가상공간으로 돌변하자 속초는 무의미해진다. 속초가 선택된 이유는 이미 게임이 가능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게임 참가자들은 게임을 끝내고 속초의 관광을 즐기겠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우리는 낯선 공간에서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고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야생의 사냥꾼처럼 포켓몬을 잡으러 가상공간에 뛰어든 사람들은 포켓몬 사냥에만 열중한 포켓몬 사냥꾼일 뿐이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주의력은 오직 신체의 자위를 위해 희미하게 작동할 뿐이다. 속초 사람들과 문화와 자연 등의 풍광은 배경으로만 희미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즉 게임의 시간 동안 속초는 완전히 의미가 없고, 게임자는 게임 속 공간을 질주할 뿐이다.
한편 내가 두려워하는 다른 한 가지는 랑시에르가 말한 감성의 분할-랑시에르가 쓰는 ‘분할’이라는 의미에는 구분, 나눔, 지배, 통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현상이다. 산에 와서 나는 사람들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많이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며 등산을 하고 있었다. 대개 건강과 친목을 목적으로 등산을 한다. 건강과 친목이 아마 등산의 포켓몬이다. 산악자전거인들은 오직 자연을 배경으로 지형지물의 스릴을 만끽하기 위한 스포츠 공간으로 산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런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만나는 일이 의외로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들 몸의 감각은 매순간 자연에 직면하고 자연에 반응하지만 그들의 주의는 문화적으로 의미부여 된 몇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다. 즉 자연과의 만남이 무의식적 자동으로 소모되고 좀처럼 의식의 영역으로 조명되지 못한다. 자연과 사람 사이에 감각의 분할에 의한 차단과 단절이 존재한다. 자연을 감각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졌다. 내가 지난주 양산시에서 등산로변을 제초한 것에 대해 깜짝 놀란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천성산 깊은 산을 걸어도 도심한복판의 공원과 같이 느슨하게 편하고 싶어 할 만큼 우리 감성이 무뎌졌다. 자연을 교감하고 감각하고 인식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직 각자의 포켓몬에 빠져 있다. 그러니 자연에 대한 의식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서바이벌게임이라는 게 유행해 산속에서 가상의 총싸움을 하는 어른들을 본 적 있다. 숲속에서 총싸움은 아이들 때나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어른들이 그런 놀이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었다. 포켓몬 고 게임은 분명 서바이벌 게임에 비하면 진화한 게임일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감성의 지배와 왜곡은 더 심화되었다.
자연이 한낱 인간의 배경으로 전락하다니. 참으로 무섭고 서글픈 일이다. 아무 곳에나 나타나는 포켓몬 괴물을 아무데서나 뒤쫓는 수많은 아무개들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국방부도 싫고 구글도 싫다. 도깨비가 존재하지 않듯 포켓몬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한 사람을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