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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이사야-29 보수와 보상(이사야 62장 1-3절)
성경말씀은 이사야 62장 1절에서 3절까지 봉독합니다.
[이사야 63장]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농사를 지으면 추수때를 바라보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또 인내함으로서 결실을 보게 되는데, 한 나라의 역사도 처음에 어떤 봄과 같은 그런 때가 있고, 무성하게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또 영글어 열매를 맺히고 언제는 또 저물어 가는..
그래서 창세 이후로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는데, 여러차례 부침(浮沈)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람도 그렇고 민족이나 한 나라도 ‘심는 대로 거두는’ 그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도 어려울 때가 있었는가 하면 그 어려움에서 회복되는 때가 있고, 반면에 에돔나라 같은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 당할 때 그것을 고소해하면서 조롱하고 먼데서 기뻐하고 남들 어려움 당할 때 기뻐하다가, 하나님의 보수하는 날에 무참하게 깨어지는 그런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도 마찬가지이고, 또 그러한 유비(類比), 그러한 어떤 아날로기가 개인에게도 있다는 건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해소될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회복이 안되고 화목이 안되고 그래서 그런 기간에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안 되는 거예요. 자꾸 뭐가..
그래서 지금 여기 이스라엘 백성과도 70년간 해소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70년의 고난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고난의 세월이 다 가고나니까 지불될만큼 지불되고 징벌을 받을 것은 다 받고 하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청산될 것이 다 청산 된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관계회복이 되면서 지난 70년간 예루살렘이 버림받은 땅, 버려진 땅으로 이렇게 저주받은 땅처럼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 성이 왜 이 모양 되었느냐?’ 속담거리가 되어가지고 불신자들이 다른 이방민족들이, 그것은 자기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기다가 그렇게 된것 아니냐?
그렇게 속담거리 비방거리가 되었던 땅인데, 70년 동안 그들이 충분히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맞을만큼 얻어맞고 나니까 더 때릴 이유가 없어진거죠.
그들이 징벌을 받을만큼 받고 나니까 다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관계 회복의 때가 도래한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는 이스라엘 전 역사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고, 또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그런 유비(類比)가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죠.
뭔가 가로막혀 있을 때 하나님이 무슨 손이 짧아서 구원치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해소되지 않은 어떤 죄와 허물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는 것을 바벨론에서 깨닫고 돌아오는 건데,
오늘 본문 63장까지 낮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62장을 조금 소급하면,
62장에는 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쌓였던 여러 가지 해소될 만한 문제가 다 해소되었기 때문에 보상과 같은 말씀이 주어지는 것이고,
63장에는 에돔자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남 고난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조롱하고 희롱하고 했던 에돔자손들이 오히려 더 끔찍한 심판을 당하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62장을 보면,
[이사야 62장]
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새 이름’이란 말은 지금까지 70년 동안은 마치 버림받은 땅, 소시적에 버림받아서 근심하는 여인처럼 소박맞은 어떤 여인처럼 버림받은 땅처럼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이 입으로 말씀하실 새 이름이 주어질 것이다. 그 새 이름이 이른바 ‘헵시바’ 혹은 ‘쁄라’라는 얘긴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친밀하고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 우리 현실적으로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회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최고의 아름다운 관계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게 막 깨어지는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깨어져버리니까 이런 관계도 깨어지고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이 헵시바라는 것은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녀를 기뻐하신다 그런 뜻이 헵시바라는 뜻인데, 놀랍게도 헵시바가 므낫세의 어머니 히스기야의 아내라고 했죠.
그런데 그 여자가 소시적에 버림받았다가 나중에 다시 이름대로 받아들여져서 회복이 되기는 되는데, 회복되었지만 거기에서 태어난 것은 므낫세같은 괴물단지가 태어난 거죠.
거기 어떻든 유비가 있다는 거예요.
그 결과에 대해서 놔두고 므낫세 낳은 것은 놔두고, 어떻든 소시적에 버림받아서 근심하고 있던 여자가 헵시바라는 여자인데, 므낫세의 어머니이고 히스기야의 아내이고 그런 것처럼 그 이름대로 헵시바라가 된다.
.. 네 땅을 뿔라라 하리니
‘뿔라’는 ‘결혼한 여자’,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고 받아들여진 여자라는 뜻이거든요,
..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쏟아붓고 정성을 기울인 땅이 되면 그것은 결혼한 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내버리면 그저 예루살렘 지난 70년처럼 버림받은 땅이 된다. 그런 뜻이죠.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그러니까 최고의 기쁨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예요.
이게 참 우리 사회에 제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것도 아닌데,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신랑이 신부를 그렇게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늘 최고의 아름다운 관계가 많이 일그러지고 깨어진 것 같아요.
그저 신랑이 신부를 보고도 소가 닭 보는 것처럼 무덤덤하고 아무 감각도 없고 이렇게..
이렇게 사랑의 감정이 자꾸 무디어져 간다는 거예요.
마지막때가 되면 불법이 성함으로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리라 했는데, 그 사랑이 긍휼이나 동정 이런 것 뿐 아니라, 심지어 남녀간에 그런 사랑, 이런 거의 본능적인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사랑이 자꾸 깨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새들 세계를 잘 모르지만, 환경 호르몬 때문에 새들도 짝짓기 철이 도래해도 수컷 독수리가 암컷 독수리보고 무덤덤하게 전혀 관심도 없고 수컷도 수컷대로 놀고..
새들도 동성연애를 즐기고 있는것 같아.
또 암컷들은 암컷대로 놀고..
이런 현실을 발견하고서 생태학자들이 잡아서 부검을 해보니까 수컷 새들이 남성적인 그런 모든 장기가 제대로 발달이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환경 호르몬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만 봐도 인간성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사랑의 감정 이런것들인데, 이런 사랑의 감정이 다 무디어져버리거나 일그러져버리고 성의 장벽이 무너지면 자연 질서가 다 파괴되어버리는데, 아마 이런 것은 설교를 해도 성도들이 거의 감각이 없이 무덤덤하고 저게 무슨 말인가?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나..
이렇게 된 것 같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이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거죠.
마지막때가 되면 점점 불법이 성하고,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과 만물의 피곤함이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그런 전도서의 노래가 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허무라든지 사랑이 깨어진 곳에 채워지지 않으니까 나중에 술을 가지고 한다든지 마약을 한다든지 오락에 빠진다든지, 사람들이 이렇게 다 전부다 그 잘못된 취미라는 것도 사실은 사랑이 깨어져서 잘못되어 변질된 거예요.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애완동물을 기르지마!’ 해가지고 계속 부인이, 남편은 별로 관심없고 애완동물에 온통 관심을 다 쏟으니까 그것 때문에 싸움이 나가지고 부인의 가슴을 찔러버렸다는 뉴스가 나온 거예요.
애완동물 기르는 부인들 조심하세요.
그러니까 남편은 사랑하지 않고 애완동물만 죽고 못살고 하니까 남편이 그 애완동물을 질투한 거야.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게 전부다 애완동물을 지나치게 하는 것도 다 사람 사랑할 사랑이 잘못 깨어져서 이렇게 있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도를 넘어서는 모든 취미는 죄성이라고 봅니다. 죄성..
사람 사랑하는 것이 최고가 되어야 될 텐데, 사람 사랑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에 자꾸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 그저 탐닉하고 하는 것은 다 사랑이 깨어진, 그런 불행 비극들이죠.
그래서 여기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이것이 최고의 아름다운 것이고,
..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최고의 기쁨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한다는 거예요.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8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9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사람이 정상적인 삶이란 것은 농사를 지어서 자기 손으로 농사한 것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고 그것을 먹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 그게 정상이라는 거예요.
저는 너무 어려서 그런 것을 다 겪어보지 못했는데, 한때 일본사람들이 우리 땅을 지배할 때는 일본사람들이 지금쯤 되면 논에 와요.
와가지고 자로 딱 잽니다. 가로 세로 재어서 그 안에 벼 포기가 몇포기 있는지, 한 포기에 이삭 몇개가 있는지, 한 이삭에 몇개 알이 달렸는지..
그것을 계산해서 여기 몇석이 나겠다..
그러니까 얼마를 공출하고 안 굶어죽을 만큼만 남기고 싹다 공출해 가는 거예요.
그런 짓을 했고, 그뒤에 다시 지리산에 2만명의 빨갱이가 왔을 때, 빨치산들이 똑같이 했어요.
그러니까 농부들이 뼈빠지게 농사를 지었는데, 자기가 심은 것을 자기가 못 먹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농사지어서 우리가 다 먹고 세금 조금 내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것을 먹고 우리가 농사지은 것 우리 손으로 거두고 먹고 하나님을 찬송하면 그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고 다른 헛된 것에게 경배하고 하는 것 참 아쉬운 일이죠.
62장 10절,
10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해소될 만한 어떤 죄와 허물이 징벌과 그런 징계로서 다 해소되고 나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상급이 보상이 따라 온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시온성 예루살렘성이 70년 동안 그렇게 버림받은 땅이었는데, 다시 회복된다는 얘기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63장은, 63장 6절 까지는 그 동안에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을 때, 그저 깔깔대고 조롱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고 형제가 어려움 당하는 때에, 이것을 기뻐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했던 에돔이 얼마나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을 당할 것인가 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3장]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보스라는 ‘브세이라’ 하는 곳인데, 양을 치는 곳이죠.
..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하나님이죠.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이것은 은유인데, 포도즙을 짜는 틀이 우리나라에서는 익숙하지 않죠. 포도농사를 별로 하지 않으니까..
포도즙을 밟는데, 그 땅에 가면 터어키나 이스라엘 땅에 가면 지금 좀 지나갔죠. 한달 두달 전 그 때 포도를 따가지고 포도를 밟는 통이 꽤 큽니다. 거기다가 트럭으로 포도를 따서 들어붓고 처녀들이 가서 맨발로 밟아요. 남자들이 밟는 것이 아니고 지금 보면 처녀들이 밟는데, 포도를 갖다가 통에 넣고 밟으면 포도즙이 빨간 즙이 치마에도 묻고 그래도 신나게 밟는 거야.
포도주가 그 쪽 여자들 발 씻은 물처럼..
요즈음은 그렇게 안 하죠. 옛날에 재래식은 그렇게 했단 말이죠.
남자들도 밟고 했는데,
포도주가 터지면 피가 튀어오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악한 민족들을 비참하게 심판했을 때 그 피가 막 튀어올라서 옷을 다 적신 것이, 마치 포도즙을 밟는 포도를 밟는 것처럼 이렇게 은유된 얘기죠.
대 심판을 그렇게 말한 거예요.
..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분노의 포도’라는 책이 있죠. 소설이.. 존 스타인벡이 쓴 책이죠. 분노의 포도.
그런 말이 그 쪽 지방에서 나오는 말이죠. 우리는 포도를 최근에 재배했으니까 그런 속담이 없죠. 분노의 포도, 진노의 포도주..
그래서 에돔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짓이겨서 심판할 때는 이렇게 비참하게 온 옷이 선혈에 다 젖을만큼 심판하신다. 그런 얘기를 이사야 34장에서 보고 왔죠.
오바댜서 역시 그렇고, 에스겔서 35장, 예레미야 49장 역시 에돔 자손에 처절하게 심판당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는 예언자가 하시는 말 같은데,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12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하고 예언자가 하나님을 찾는, 출애굽에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하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것도 신명기에 보면 그렇게 예언되어 있거든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살찌면 하나님을 발로 찰 것이다..
그 때 내가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길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온 세상에 흩어지고 먼 땅에 포로되어 가서 고생할 때에 노래 하나를 가르쳐놔라.
그 노래를 가르쳐 놓으면 그 먼 이역땅에 가서 그 노래를 흥얼흥얼하다가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전심으로 그 때 돌아와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예언들이 신명기에 예언되었었는데 여기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보니까 먹고 배부르고 편안하고 사회 보장이 완전하게 되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안 찾는 거예요.
어려워야 하나님을 찾아요 인간들이..
먹고 배부를 때는 싸가지 없이 하나님을 모른 척하고 있다가, 죽을 판 되니까 임사호천(臨死呼天) 이라고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지금 미국이나 영국이 하나님을 안 찾아요.
영국에 내노라하는 교수들 전부다 하나님이 없다 그런 것을 떠들어야 지성인 대접을 받는 그런 나라가 영국이예요.
교회는 계속 문을 닫고 있고 무슨 불교나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 이런 것들이 부흥일로에 있고 이슬람도 부흥하는데, 기독교만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배가 부르니까..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울 때 자녀를 7명 8명 9명 10명 씩 낳았는데, 세상에 지금 먹을 것도 많고 입을 것도 많고 방도 여러개이고, 산부인과도 있어가지고 다 준비되었는데, 애를 안 낳겠다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까요.
우리가 너무 편리가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불과 40년 50년 전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살았던 그 어려운 세상을 너무 멀리 잊어버린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어릴 때 우리 어른들이 살아왔던 그 삶을 몇페이지 글에다가 요약을 할려고 해요. 잊어버리기 전에..
그래서 정월달부터 12월달까지 어떤 일들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한번 쭉 이렇게 정리를, 그냥 머리속으로 대충 정리하니까 끔찍한 일이예요.
그런 삶을 우리가 겪어봤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세상 살아가다가 어려움은 전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호강에 받친거야.
이렇게도 편한데, 놀랍게도 온 세계에 애기를 안 낳는 종교가 기독교예요.
모든 다른 종교는 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하나님 뜻대로 할려고 하는데, 놀랍게도 성경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가 애기를 안 낳거나 못 낳거나 이렇게 된 거예요.
63장 15절입니다.
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하고 예언자가 자기들이 자기 조상적부터 잘못해온 것을 쭉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제 정말 옛날을 추억하면서 하나님 이제 돌아오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거죠.
18절 같은 구절도 이사야서 제2부라고 하는 부분이 후대 기록설을 증거하는 그런 구절이죠.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얼마 살아보지도 않고 다윗때 겨우 점령했던것 아닙니까? 다윗 이전까지는 여부스가 그냥 버티고 있었으니까..
다윗왕때 겨우 들어가서 조금 살아보지도 안했는데 그저 성소가 유린당했다.
유린하였다는 것이 과거로 나오죠. 과거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린되었다는 사실이 과거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이것이 이사야서 제 40장부터 66장까지가 후대기록설, 다시 말하면 앞에 있는 그 이사야가 쓸 수 없는 구절이라는 거죠.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나이다
[이사야 64장]
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5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가지고 예루살렘이 황무지가 된 것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
..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이런 생각을 예언자가 지금 갖고 있다는 거죠.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하면서 신앙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려고 하는, 그야말로 이 소수 내지는 한두 사람의 소수가 그래도 깨어있어서 하나님 음성을 들어서 예언자적 사명을 다할려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백성을 깨우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죠.
64장 10절, 12절도 역시 이사야서의 후대기록설을 반증하는 그런 구절인데, 잘 보세요.
10절,
10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11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불에 탄 후에 기록한 것이란 말이죠.
..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이렇게 예언자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이왕에 긍휼을 베푸실 것이면 그 긍휼과 사랑과 은혜와 구원이 속히 나타났으면 좋겠다 하면서 예언자가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어요.
왜 깨닫지 못했느냐? 율법을 모르니까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죠.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살인 안했고 간음 안했고 담을 넘어서 도둑질 안 했고 하면 자기들이 착한 줄 알고 있죠?
나도 그랬거든요.
그러면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율법을 모르니까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자기들이 죄인된 것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심지어 바벨론에 포로잡혀 갔어도 우리가 여자가 낳은자 중에 누가 깨끗하겠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나라가 망할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이죠. 사람들이..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잡혀가서 성경을 읽어보니까 율법을 읽어보니까 자기들과 자기 열조가 정말 죽을 짓만 골라가면서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구약을 만약에 우리 성도들에게 오늘날도 복음시대라 하지만 구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안 가르치고 안 배우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죄인된 것을 잘 모릅니다.
지금도 여전히 율법을 제대로 읽어봐야 하나님이 얼마나 조금마한 것도 말 한마디 한 것도 하나님이 신경을 써요.
아람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롱할 때 아합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 신은 산의 신이고 평지에 나오면 꼼짝 못한다. 그런 말은 너무 무식한 말 아녜요? 그렇죠?
산에 가서 싸웠기 때문에 아람 사람이 졌다는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평지에서 싸우면 여호와 신은 산의 신이기 때문에 꼼짝 못한다. 그런 말을 하는 이방인이 몰라서 한 소리인데, 그런 말 한마디 한것도 하나님이 신경을 써요.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산의 신이고 골짜기 신의 아니라고?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인간들이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하나님이 신경을 쓰시는데, 너무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모르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전혀 자기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한다는 거예요.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살아있었는데, 율법이 오니까 나는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구약성경을 제대로 읽어 가르쳐서 배워야 내가 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는 아무 소망이 없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성품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 타락했고 너무 부패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어떻든 예언자 하나라도, 그러니까 여러분 의인, 소돔과 고모라라든지 예루살렘 성이 망할 때 소돔은 의인 10명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10명은 고사하고 하나도 없는 겁니다.
제일 괜찮은게 롯인데, 롯도 타락해가지고 완전히 그저 소돔 사람 다 된거야.
롯이 구원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중보 때문에 구원 받은 거지, 그 소돔과 고모라를 엎으시는 중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신지라 그 롯과 그 가족을 내어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어요.
다시 말해 여기 의인이라는 것은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은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의인, 최소한 그 정도의 의인의 하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이 망할 때도, 나중에 우리가 예루살렘 망하는 것을 예레미야서 공부할 때 살펴보겠는데, 너 좋다 예루살렘 넓은 거리를 빨리 왕래하면서 살펴봐. 거기서 진리를 구하며 공의를 행하는 자 딱 한 사람만 찾아와.
그러면 내가 그 한 사람 때문에 내가 이 성을 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깨닫지 못하면 아무 존재할 가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몇천명 몇만명을 모아 놓았다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그렇다면 그것은 숫자예요. 숫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이 시대에 제2이사야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실제 실명은 누군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깨달았어요.
하나님 말씀을 들어가면서 깨닫고 백성들을 하는 짓을 보면서 깨닫고 성경을 보면서 깨닫고 깨달으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게 되고 또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그러한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이사야서가 분량이 크고 예레미야서도 두터운 책이죠.
그래도 역시 거기에 가장 아픔과 슬픔이 있는 그 곳에 오히려 우리가 깨닫고 배울것이 많다는 거야.
맨날 교회에서 우리가 복음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잘 되고 복받는 것 그런 것만 그저 달콤한 것만 늘 들어서 실제 하나님의 상한 심령,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교회가 전혀 이해 못한다는 거예요.
지금부터 우리가 이사야서 이 부분은 사실은 예레미야서 그 뒤에 읽어야 사실 이해가 되는 부분인데, 이사야서 책이 한테 붙어있으니까 이렇게 합니다만, 바벨론 포로가기까지 실제 히스기야 때부터 시드기야 왕까지 그 어간에 가슴아픈 이야기들은 열왕기하서와 함께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애가서까지 우리가 공부할 때, 그때 아마 참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파하셨다는 사실을.. 슬퍼하시고 진노하시고 그런 것을 읽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 가서 70년 동안 호되게 교육을 받고 그리고 징계와 징벌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은혜 베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예언자가 깨달았어요. 여러분 그것을 깨닫고 나서 기도해야지, 막무가내 자기 소망 가지고 막 하나님께 졸라댄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뭐가 가로막혀 있는지 항상 해소될 것이 해소되어야 되고, 처리될 것이 처리되지 않으면 아무리 주여 삼창 아니라 밤새도록 철야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항상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뭐가 가로막힌 것이 있는지 꼭 살펴보고, 정말 투명하게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그렇게 우리 삶을 우리 속사람을 다듬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가서 70년 동안 복역을 하고 나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여호와의 손에서 그들이 배나 받았다 하시고,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씀을 듣고 예언자가 그 말씀을 듣고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그 민족을 위해서 부르짖는 기도와,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후에 주어질 영광과 그 보상을 보여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받을 때 남의 고난을 즐거워했던 에돔 백성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심판받을 것인지 이런 것도 우리에게 보여 주셨나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율법과 함께 역사를, 역사와 함께 예언서를 잘 읽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혹은 아파하시고 애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명철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