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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김연자가 불러서 인기 절정인 노래 제목이 「아모르 파티」다. 이것은‘운명애’라고 번역되는데 “이 사랑이 곧 나의 사랑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우리의 영혼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가 필연적으로 덮쳐와도 그것을 감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는 이 말은 철학적인 말이어서 내용이 심오하고 어렵겠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면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말은 프레드리히 월리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이후 세대인 하이데거, 사르트르, 알베르 카뭐, 미셀 푸코 등으로부터 “수천 권의 책보다 니체의 한 줄이 귀하다.”거나, “니체가 나의 세상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찬사를 받을 만큼 20세기에 영향력이 매우 컸다. 니체 사후 100년간 정치, 사회, 철학, 예술 분야의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니체였고, 그것은 그만큼 다양한 왜곡과 해석들로 우리 앞에 재등장하고 있는데다 그의 외침은 앞서나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영혼과 정신의 소유자면서 회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1844년10월15일 독일 작센주 뢰겐에서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언어와 예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다. 24살에 스위스 명문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으나, 35살되던 1879년 건강이 악화되어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린데다 우울증까지 앓았다. 이 무렵부터 집필활동에 매진하고, 1889년 정신이상 증세로 시달리다 1900년 바이마르에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저서로 28세 때 처음 출간한 『비극의 탄생』을 비롯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 『이 사람을 보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등 모두 10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 책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는 그의 저서나 잡문을 추려서, 서울대학교 출신의 김욱 선생이 가장 최근인 2024년 4월에 편역한 것이다.(2024.9.10)
책은 단편으로 되어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1876년 4월 15일 친구 카를 게르스도로프에게 보낸 보낸 편지에서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고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 했다. 여기에 보면 “그대들은 이웃들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교제에 대해 좋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는 질 나쁜 사랑이다.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에게서 벗어나 이웃에게로 달아나고서는 그것으로 자신의 덕을 만들고 싶어 한다. ‘너’라는 호칭은 ‘나’라는 호칭보다 오래되었다. 너라는 호칭은 신성하게 여겨지지만, 나라는 호칭은 아직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이웃에게로 모여드는 것이다.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싶으면 증인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를 꾀어내 그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해놓고선 그대들도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 그대들은 교제할 때 자신에 대해 이런 식으로 거짓말하면서 자신과 이웃을 속인다. 그것은 단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질 나쁜 사랑은 고독을 감옥으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참지 못하고, 또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이웃이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힘만으로 무언가에 갖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걸어야 한다. 그것에는 분명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단련시키는 고통이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한 걸음, 단 한 걸음도 타협하지 말고 걸어야 한다!
여행자들에게는 여행수칙처럼 종종 인용되는 ‘여행자의 다섯 등급’에 대해서도 말했다. “최하급 여행자는 남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고 장님이다. 다음 등급은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들이며, 세 번째는 관찰 결과를 체험하는 여행자들이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여행자들은 체험한 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최고 수준의 여행자들은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습득한 뒤, 집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 인생을 ‘삶의 여로(旅路)’라고 한다. 이런 다섯 등급의 여행자들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지, 이제 나도 분명히 느낀다.
〇 대중문화는 노예제도의 결과물이다
예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넓고 깊은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내려면 소수를 위해 희생하는 엄청난 숫자의 다수가 필연이다. 이 다수는 개인적인 욕구를 봉합 당한 채 삶의 비루한 노예로 충족되어야만 한다. 그 대가로 소수의 특권계급은 다수의 희생이 제공한 삶에서의 해방을 자양분 삼아 실존이라는 투쟁만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욕구의 세계를 생산해 냄으로써 희생의 다수를 충분히 만족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것이 소수의 예술가들로 쌓아 올린 대중문화의 본질이다. 대중문화는 노예제도의 결과물이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해해야 한다. 문화는 프로메테우스라는 후원자의 간을 갉아 먹는 독수리다.
(문화에 대한 이런 신선한 비평은 그 어디에서도 나는 본 적이 없다)
〇 허울을 벗지 못하는 뱀은 소멸한다
허울을 벗지 못하는 뱀은 소멸한다. 새로운 의견을 방해받는 정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의견이 중단된 정신은 더 이상 정신으로 활동할 수 없다. 기존의 주장을 바꾸는 것은 옷을 바꿔 입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정신적 청결이 요구된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허영의 요구로 자신의 주장을 버릴 때가 있다. 사람들은 신념이 위대한 정신의 특성이길 바라지만 실상은 회의, 비도덕성, 불안한 신앙처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야말로 위대한 정신의 속성이다. 카이사르, 나폴레옹, 호메로스, 아리스토파네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한참을 음미하며 읽힌다)
니체는 동료 ‘파울 레’로부터 이름답고 지적인 여성 ‘루 살로메’를 소개받았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먼저 니체가 살로메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거절당했고 셋은 오직 철학만으로 동거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니체는 다시 그녀에게 청혼했다. 이에 살로메는 레와 함께 그 집에서 도망쳤다. 살로메는 레와 동거하며 자유롭게 지성인들과 사궜다. 이번에는 레가 살로메에게 청혼했지만, 그도 거절당하고 살로메는 언어학자 안드레아스와 결혼했다.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은 니체는 슬픔에 빠져 자신의 『선악의 저편』에서 “당신이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라고 썼다. 그렇게 결혼에 실패하고 니체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〇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라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리된다. 만약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가 정치인이든 상인이든 혹은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〇 amor fati 『즐거운 학문/이사람을 보라』
‘운명애’는 앞으로 이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는 더 이상 추한 것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수단이다. 우리의 영혼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가 필연적으로 덮쳐오더라도 이를 감내할 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또 생각하고 있다. 나는 조금 더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내겐 아직도 생각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사건을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것, 나는 이것을 배우고 싶다. 만약 이런 방법에 익숙해진다면 나는 평범한 사물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〇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이 그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고독과 함께 지냈다. 나는 침묵마저 잊어버렸다. 식인종의 나라에서 고독한 자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를 먹어치우고, 대중과 함께 있을 때는 대중이 그를 먹어치운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망설이지 말고 택하라.
〇 교회라는 동물원
국가와 사회는 구경거리로 전락한 인간이 어슬렁거리는 동물원이다. 그곳에서 한때 야수였던 인간은 병들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움츠린 그림자로 자기 자신을 향한 악의에 가득한 눈으로 엎드려 있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삶을 향한 충동이 들끓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안의 충동을 증오하느라 고통스럽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심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오늘날의 인간은 행복에 대한 의심 때문에 행복을 거부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인간은 기독교인이 되고 말았다.
종교와 교회가 인간을 망쳤다. 하지만 종교는 아직도 그들이 인간을 개선시켰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〇 살아남은 자들은 고통을 아픔이라 부르지 않는다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의 생애와 또한 민중의 삶을 살펴본 후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도록 하자. 앞으로 엄청나게 성장할 저 수목들은 과연 다가올 폭풍우를 피해야만 하는 것일까. 외부로부터의 분리와 반대, 어떤 종류의 증오와 질투, 불신, 냉혹, 탐욕, 난폭과 같은 개념이 없었다면, 인류는 도덕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 거대한 여린 새싹은 퍼붓는 빗속에서 더욱 강인하게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연약한 인간을 말살해버리는 외부의 고통도 결국 살아남게 될 인간에겐 영양제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코 고통을 아픔이라 부르지 않는다.
〇 쇼펜하우어는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다
나는 지쳤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흥분제 때문에 지쳐 버린 셈이다. 도처에서 낭비되는 정력, 노동, 희망, 청춘, 사랑, 끊임없는 환멸에도 지쳤다. 낭만적인 여성들, 광신적인 방만한 신앙, 우리의 승리를 빼앗은 이상주의적 허위와 진심이 사라질 양심에 대한 혐오로 지쳐버린 것이다. (…)
나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철학을 할 것이다. 나는 병든 육신에 복수하기 위해, 이 병든 삶에 복수하기 위해, 나의 철학을 만들었다. 철학이란 스스로 얼음 구덩이와 높은 산을 찾아 헤매는 것을 말한다. 생존에 포함한 모든 의문을 탐구하는 것,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구속된 모든 영역을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 철학을 통해 깨달은 진실은 무엇인가? 오류란 맹목이 아니라 비겁이었다는 것, 이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에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허락하지 않은 모든 것을 갈망하는 욕망이 나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허락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어떤 시적인 수사학이나 보조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정직해야 한다. 몽상가는 자신의 진리를 부인하지만 철학자는 타인의 진리를 부인한다.
쇼펜하우어는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글을 읽어줄 독자는 오직 자신뿐이었으며 누구도 기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도 기만하지 말라. 그대 자신은 더욱 기만하지 말라!’는 규칙을 신봉한 철학지였다.
〇 나는 이 시대의 부산물이 되고 싶다
본래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 즉 입법자이다.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이래야만 한다!”그들은 인간이 가야할 ‘어디로?’와 ‘왜?’를 규정짓고 싶어 한다. 그들은 창의적인 손으로 미래를 파악한다. 현재 존재하는 것과 과거에 존재했던 것은 모조리 그들의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고, 망치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의 창조는 곧 입법이다. 그들의 진리를 향해 내뱉는 의지는 힘에 대한 의지와 같다.
철학자는 위대한 사상가일 뿐 아니라 참된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학자들이 단 한 번이라도 인간으로서 존재한 역사가 있는가. 그들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성립하는 모든 개념 및 의견, 과거를 몽땅 책 속에 집어넣으려고 발버둥 친다. 이런 인간들에게 최초의 사물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철학자는 모럴리스트(일이나 행동의 가치, 혹은 속으로 품은 내용)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사여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 나는 바그너(독일 음악가 혹은 정치가?) 만큼이나 이 시대의 부산물이 되고 싶다. 나를 가리켜 스스로 ‘퇴폐주의자’라고 규정짓고 싶다. 철학자는 자신의 사상에 의해 밖으로 내던져진 후에 위에서, 또는 아래에서 습격당하듯이 얻어맞는다. 그는 스스로 천둥을 잉태하고 있는 폭풍이다. 강단 철학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써야 한다. “그대는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않았도다!”
〇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헤매며 끊임없이 외쳤다.
“나는 신을 찾노라! 나는 신을 찾노라!”
시장의 무신론자들은 미치광이를 재미있는 노리개쯤으로 여기며 그를 조롱했다. “신이 집을 나갔나?”어떤 장사꾼이 농담 삼아 떠들었다. 그러자 누군가 “신이 우리 집 막내 놈처럼 길을 잃어버렸다는 건가?”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도 숨바꼭질을 좋아하나 보지? 어쩌면 우리가 무서웠는지도 몰라! 신은 배를 타고 떠났는가, 아니면 그냥 걸어갔는가?”하고 외치며 미치광이를 둘러쌌다.
미치광이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다 큰소리로 외쳤다.
“신이 어디로 갔냐고? 내가 알려주지!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〇 동정심은 인생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다
창조는 영원한 진보다. 동정심은 이 창조의 순환을 망가뜨린다. 동점심이 개입해 버리면 이상을 거부하는 자들을, 나아가 방해하는 자들까지 용서하고 이해하고, 그렇게 훼방꾼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범죄로 이어진다. 이상에 반하는 자들은 우리의 적이다. 이상적인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실천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인간이 인류의 적이다. 당신은 내가 너무 잔인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나는 내 인생 전부를 희생시켜야만 했다.
〇 생명을 뛰어넘는 사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영겁의 시간이 먼저 있었고, 인간은 그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존재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인간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식하는 지성이란 결국 인간의 생명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논리의 성립이고, 바꿔 말해 인간의 생명을 뛰어넘는 사명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될 것이다.
〇 인간의 4가지 착각
인간은 교육을 통해 착각을 배웠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교육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게 착각한다. 둘째, 상상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고 교육받았고, 현재까지 그 공상에 머물러 있다. 셋째,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교육받았고, 그 결과 동물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넷째,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 교육받았고,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4가지 착각이다.
〇 철학과 예술의 전제는 고통이다
모든 예술과 모든 철학은 삶이 지속되든, 혹은 여기서 중단되든 단순히 삶을 치료하는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철학과 예술의 전제가 고통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고통이 있다. 하나는 삶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고통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에서 빚어지는 고통이다. 이 고통들은 예술과 철학으로부터 안정과 침묵, 잔잔한 파도소리를 원할 뿐 아니라, 때로는 도취와 경련, 마비를 원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것으로 자신의 삶에 복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〇 고통은 항상 원인을 묻지만 쾌감은 원인을 묻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에게 쾌감을 주거나, 혹은 고통을 줄 때만이 타인이 나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고통을 준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인식’하는데 쾌감보다 고통이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항상 원인을 묻는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반대로 쾌감은 원인을 묻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의 쾌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낀다.
〇 우리는 너무 빨리 결정하고 있다
현대는 고민이라는 형식을 증오한다. 현대인은 인간의 고민을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는 너무 빨리 결정하고 있다. 고민이나 사색은 그저 걸어가면서 해치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점차 품위를 상실하고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단지 기계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기계가 자리잡았는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성능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품위가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가치’를 판단한다. 그는 두 개의 의자에 한쪽 다리씩 올려놓고, 단번에 ‘그렇다’와 ‘아니다’를 반복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간성은 이 같은 오류다.
〇 내가 천민이므로 너 역시 천민이어야 한다
(복고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이 말은 지금도 유용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모든 혁명은 이 한 줄의 구호로 시작되었다. 불평불만처럼 쓸모없는 물건도 없다. 불평불만은 약함에서 생겨난다. 나의 열악한 환경을 타인 탓으로 돌리든, 사회 탓으로 돌리든,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리든 열악하다는 상황은 변함이 없다. 누구를 원망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평불만은 무가치하다. 그런데도 인간이 불평불만에 집착하는 까닭은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싶어서다. 이 조그만 복수가 상처받은 그의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비방은 더러운 복수심이다. 그들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타인이 이룩한 결과를, 자기보다 위에 있는 자들을 흔들어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세상이 평등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복수로는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원인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〇 기분이 우울하다면 추한 것과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집착한다. 아름답지 못한 모든 것은 추하다고 느낀다. 슬픔과 우울과 무기력은 자기 자신이 추해졌음을 확인한 결과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지는 무엇인가? 바로 자신에 대한 감탄, 스스로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것으로 자신의 본능을 가장 아름답게 느낀다는 뜻이다. 인간이 추해지는 단 하나의 과정은 자신의 본능을 두려워할 때뿐이다. 자신의 본능에서 멀어지는 것이 추함이며, 추해지면 퇴화한다. 자기 다워지지 못 하는 것이 바로 퇴화다.
〇 책장을 넘기는 데 만족하지 말라
(…) 이른 아침, 또는 한밤중에 모든 것이 상쾌해졌을 때 자신의 힘이 저 차가운 본능 속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것, 나는 이것을 죄악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손으로 책을 뒤적거릴 때를 제외하곤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의 지식은 뒤적거린 책에 대한 느낌일 뿐이다. 학자는 이미 생을 마감한 생각에 집착한다. 그가 내놓은 비평은 매장된 시체에 대한 감상이다. (이런 신랄한 비평을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〇 도덕은 자아를 배척한다
인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삶을 경멸하기 위해 영혼과 정신을 날조했다. 삶의 전제인 성性을 더러운 것으로 가르쳤다. 성장의 기본 덕목인 이기심을 수치로 비하했고, 쇠퇴의 전형적 징후인 희생에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모순과 상실과 개성과 이웃을 신념으로 둔갑시켰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퇴화인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퇴화가 아니다. 우리의 시작이 이미 퇴화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퇴폐적인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자기기만을 윤리로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가르치는 도덕의 근본은 배척이다. 그것도 자아의 배척이다. ‘나는 언젠가 파멸한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는 파멸해야 한다’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〇 민주주의는 퇴폐주의의 보편화이다
(…)
민주주의는 결국 새로운 노예제도의 탄생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을 새로운 제도에 알맞게 사육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를 지배하는 몇몇 인간들은 지금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예와 부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들의 교양이 보편화되어 그들의 욕구에 맞게 우리는 교육받고, 기능하고, 복종하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나는 반드시 말해야겠다! 민주주의는 전제적 지배자에게 면죄부가 될 뿐이다. 그들의 민주주의 덕분에 더 이상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수탈을 감행할 것이다.
〇 (자화상) 어떤 면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에 불과하다
나의 아버지는 36세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연약했다. 마치 떠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 삶은 단지 아름다운 회상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생명이 이어져가던 바로 그 나이에 나의 생명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아직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1879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겨우 서른다섯이었다. 결국 나는 바젤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여름 내내 생모리츠에서 그림자처럼 지냈으며, 내 평생 가장 우울했던 다음 해 겨울에는 나움부르크에서 완전한 그림자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에 불과하다. 나의 삶은 그의 삶의 지속인 것이다.
〇 비록 아주 조그만 행복일지라도 『우상의 황혼/반시대적 고찰』중
행복은 아주 작은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다. 먼 데서 들려오는 바람이 음악처럼 느껴질 때 인간은 행복하다. 음악이 없었다면 인생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인은 신마저도 천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주 조그만 행복일지라도 날마다 찾아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불쾌와 갈망과 궁핍의 시기에 찾아오는 저 거만한 기쁨보다 훨씬 소중하다.
〇 어리석은 사람들
― 어떤 인간은 산의 정상에서 아래만 쳐다본다.
― 사람들은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가난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 우연을 믿는 승리자는 없다. 우연이라고 변명하지 않는 패자도 없다.
― 남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반복하라. 그들은 당신의 무지에 특권을 부여할 것이다.
― 인간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조롱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 『선악의 저편/바그너의 경우』중
〇 짧은 지혜들
― 나쁜 습관은 천재를 평범하게 만든다.
― 산에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곳이 산임을 잊는 것이다.
― 모든 진리는 구부러져 있다. 시간도 하나의 원이다.
― 깨끗이 빨아 입은 누더기는 비록 깨끗하긴 하지만, 여전히 초라하다.
― 인간 사회에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는 자는 더러운 물로 몸을 씻는 법도 익혀야 한다.
― 복수란, 어리석은 짓을 최대한 빨리 회복시키는 것이다. 비유컨대 레몬의 신맛을 없애기 위해 꿀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 레몬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바로 꿀이기 때문이다.
― 적들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적에 대한 감사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적개심으로 적개심을 이길 수는 없다. 적개심은 우정으로 끝이 난다.
― 우리는 수면에 대해 좀 더 경건해야 한다. 수면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잠들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공정한 눈을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와 똑같은 수많은 눈동자를 인정하고 이전에 그냥 지나친 모든 인생을 헤아릴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〇 인생 다시 한번!
인간은 가장 용감한 동물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동물을 지배했다. 그는 승리의 노래로 모든 고통을 정복했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은 너무나 비참해서 이겨낼 수 없었다. (…) 만용은 가장 뛰어난 살인자였다. 그는 동정도 죽여버렸다. 인간이 인생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처럼 만용은 괴로움의 깊이를 헤아리고 침묵한다. 만용은 가장 뛰어난 살인자다. 그는 죽음마저 죽일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이것이 그대가 말하는 인생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2024.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