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고고학 - 혼돈
. 거의 대부분의 창조신화는 이 세계가 혼돈(混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오스’는 텅 빈 공간이다. 가이아는 카오스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고, 카오스 다음에 나타난다. 가이아 다음에는 타타르스와 에로스가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다. 카오스의 본래의 뜻은 ‘크게 입 벌림’이고, 반대되는 말이 코스모스(Cosmos)이다. 코스모스가 우주의 질서, 세계의 질서를 말함으로, 카오스는 무질서, 혼돈이 된다. 이러므로 중국의 혼돈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의 신화가 다른 것은 혼돈을 아주 구체적인 생물체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 신화에서나 자연현상은 신이 된다. 태양도 사람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하늘 길을 달리다가 저녁이 되면 서쪽 끝 호숫가에서 쉬고 다음날 아침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나 히브리신화가 혼돈을 개념(머리로 이론적으로 만들어 낸 이념)으로 본 반면 중국신화는 태초의 혼돈조차 신으로 만들었다.
산해경에 나오는 혼돈은 이름조차 따로 있다. 그 이름은 ‘제강(帝江)’이고 새이다. 그러나 이 새는 말만 새일 뿐 우리가 지금 보는 가볍고 날렵한 형상이 아니다.
푸대자루 같이 생겼는데 불덩어리같이 붉은 빛을 띠고 있고 다리 여섯 개와 날개 네 개가 달려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 코 귀 입 등 얼굴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새는 정말 혼돈 속의 어두운 상황처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답답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이 새가 정말 답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새는 다른 재주가 있는데, 바로 춤과 노래를 즐길 줄 알았다. 이목구비도 없고 코끼리 사촌 같은 몸매를 한 제강이 춤과 노래까지 즐긴다니 정말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
춤과 노래는 기록문학이 생기기 이전의 종합예술의 핵심이다. 몰톤의 민요무용설에 따르면 춤과 노래는 모든 예술의 근원적인 형태이며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거의 혼돈 상태나 다름없는 광란의 축제 형태인 오르기(Orgy)에서 가장 격렬한 행위로 표현되는 것이 춤과 노래이다. 태초의 태초, 혼돈의 신 제강에게 그러한 속성과 능력은 당연한 것이리라.
이 혼돈의 신은 ‘산해경’보다 조금 늦게 나온 ‘장자’(莊子)에서는 훨씬 인간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제 혼돈의 신은 이름도 혼돈이다. ‘장자’에 따르면 혼돈의 신은 이제 세계의 중앙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어 있고 그에게는 두 명의 임금 친구도 생겼다.
그들은 남쪽 바다를 다스리는 ‘숙( )’과 북쪽 바다를 다스리는 ‘홀(忽)’이었다. 이들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숙과 홀은 가끔 혼돈이 사는 곳에 놀러 갔는데 그때마다 혼돈은 손님 대접을 잘 하였다. 두 친구는 감동하여 혼돈의 성의에 어떻게 보답할까 상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보았다.
“우리 모두는 몸에 눈 코 입 귀 등 7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잖아. 그런데 이 친구만 그게 없거든.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러니 우리가 구멍을 뚫어주면 좋아할 거야.” 두 친구는 곧 이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혼돈의 몸에 하루에 구멍 한 개씩을 뚫어 나갔다. 7개의 구멍을 다 뚫어 준 이레째 되는 날 혼돈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웬걸?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것은 혼돈이 사라지고 세상의 창조가 완성된 히브리민족 창세기의 7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혼돈은 맑고 순박한 자연의 본질을 상징한다. 구멍을 뚫는 것은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국 이 우언은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어야지 인간이 꾸미고 다듬게 되면 파괴되고 만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은 일찍이 노자(老子)에 의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으로 성립된 바 있었다. 그것이 다시 장자(기원전 369?~기원전 289?)에 의해 우언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장자’의 우언은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신화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혼돈에서 이 세계가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숙과 홀의 본래 뜻은 ‘잠깐’이나 ‘순간’으로 이들은 시간을 상징한다. 혼돈이 숙과 홀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은 혼돈의 시대가 이제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원시사회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없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고, 같은 삶의 형태만 반복하였으므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란 곧 인간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대이다. 결국 혼돈의 죽음은 이 세상의 창조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중국의 신화 이야기를 조금 하고, 미술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중국신화는 중국인의 의식을 구조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화의 해석을 두고, 노장사상과, 유가사상이 갈린다고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아주 재미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댓글을 달아주시니, 고맙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 이사장이 가시고, 또 코로나도 겹쳐 동양고전이 조금 뒤뚱거리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의 넓은 지식을, '북산 일기'를 통해서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전의 퇴계 선생 편지도, 사기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몸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