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피정에서 (사자 길들이기와 변화) 김 상윤 베드로 신부님
(12월 4일 대림피정에서는 살레시오수도회의 태안반도 피정의 집에 서 오신 김 상윤 베드로 신부님의 강의와 파견미사가 있었습니다.)
서론으로 우리는 잊어버린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것입니다. 오히려 기억하는것 때문에 괴로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까 적으려 하지 말고 마음에 와 닿아서 잊혀지지 않는것만 기억하라는 말씀이겠지요?
<제1강의 --복음입문 사자길들이기>
집지어 사자를 넣어 길들이기 --이 제목은 우리가 무언가 매우 가치있는 것을 획득하여 잘 보관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참 재미있고 인상적인 제목이지요 ?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은 말과 표정입니다. 말의 저장방법은 기억과 글 인데 기억은 단기저장이고 글과 녹음등은 장기저장입니다.
히브리, 이스라엘, 유다는 같은 의미로 연결되며 그리스와 희랍도 같은 의미로 연결됩니다. 우리의 성경은 총 73권으로서 구약46권과 신약27권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구약46권중 그리스어로 되어있는 7권을 제외하고 히브리어로 된39권만을 성서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어로된 신약은 어떻게 인정하는지 논리에 모순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구원관은 오직 믿음(sola fidei)으로서 그리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안한다고 하는데 구원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는 현재와 내세가 성인들의 통공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죽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들이 구원에 이르고 그는 현세에 있는 우리를 위하여 전구합니다. 그리스어로 되어있는 마카베오서에는 죽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있어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서(聖書)와 성경(聖經)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한 한자문화권에서 “아버지”라는 낱글자는 書 이고 “아버지가 오신다”라는 문장은 經 으로 분류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스러운 말씀이 됩니다. 1977년에 나온 공동번역성서는 번역자가 부족하고 교회일치운동 때문에 개신교와 함께 번역하여 성경을 출판하였는데 개신교에서는 크게 양보하여“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표기하는데 찬성하였고 대신 저작권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1977녀 이후의 공동번역성서의 판권은 개신교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서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서신학이 아니라 성서자체를 학문으로 연구한 학자가 가톨릭에는 극소수였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의 고전3개국어와 현대어중에서도 영어 이탈리아어등 6개국어를 해야하는 성서학은 참으로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번역에 일생을 바치신 임승필(1950-2003)신부님이 1979년 사제서품일년후 13년유학하여 성서학박사를 받고 귀국하여 17년동안 성경번역에 투신하여 성경전체번역이 이루어졌고 낱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이전의 성경은 라틴어에서 또는 그리스어나 영어에서 번역되었으나 임승필신부님의 번역은 원전에서 직접번역하는 고귀한 가치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원문대조번역을 26회 걸치고 34회 의 독해를 거친 위대한 작업으로 온삶을 성경번역에 바친분이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고 자음으로만 표시하는데 그 가장 original 한 성서의 원전으로부터의 번역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하여 왕국을 세워 위세를 떨친다음 수세기후에 바빌론에 멸망하여 지도층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나머지 사람들도 바빌론 제국의 여러곳으로 흩어져서 분산공동체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고 여러세대가 지난후 그들의 후손들은 당시의 그리스 문명권에서 모국어를 잊어버려 히브리어로된 성경을 읽기힘들게 되자 12지파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양국언어에 능통한자를 6명씩뽑아 72명이 히브리어성경의 그리어번역을 시작하여 완성한 것이 70인역(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septuaginta )입니다.
Roma 시대의 박해를 거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당시 다마소교황의 비서인 예로니모성인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불가타 (Vulgata)본이 완성되었습니다. 라틴어는 서로마제국이 끝나고 死語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라틴어가 가톨릭 교회의 공식문서로 사용되고 있으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회의 공식문서의 새로운 내용들을 라틴어로 정리하도록하여 요한 바오로법전 (nova canon)을 만들었습니다. 개신교와의 공동번역때 제2경전으로 분류되었던 7권의 구약성경은 가톨릭에서 최근 새로나온 성경에서는 구약성경에 포함됩니다.
신약의 4복음서의 첫째권인 마태오복음의 첫부분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는 사람에 관한것이므로 사람이 마태오복음의 상징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첫부분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나옵니다. 광야에서 가장강한 동물은 사자이므로 사자가 마르코복음의 상징입니다. 루카복음에는 즈카리아와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가 제사에서 최고의 제물이므로 루카복음의 상징은 소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말씀이 사람아 되시어 ...”로 시작하여 신학적 하느님의 이야기가 나오므로 하늘높이 나는 독수리가 요한복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따라 사도들은 인도 등 먼곳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본국에 태어날 후손들을 위하여는 복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16장으로 4복음중에 가장 짧아서 제일먼저 쓰여진 원복음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Q문헌이란 없는 문헌으로서 마르코복음보다 먼저 쓰여진 문헌이 있다고 가정한것이라고 합니다.) 마르코는 아람어를 사용한 베드로의 통역관이었으며 바오로의 1차와 3차 전도요행의 동반자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공통분모이며 마르코 복음은 로마인과 이방인을 위하여 썼고 주제는 “회개“라고 할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일으키고 기운차게 하며 사랑으로 이끄는, 글자가 아닌,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제2강의 --변화>
강사이신 김 상윤 베드로 신부님은 2002년 9월에 서품되셨는데 그해 2월의 4순절 때 수도원에서는 공동보속을 식사량을 줄이는 것으로 정하였고 개인보속은 별도롤 자유로이 정하도록 하였는데 김 베드로 신부님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것으로 정하여 당시 대림동 공동체의 주방이 식사후설거지가 매우 불편하였는데 그것을 하기로 정하고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그 일을 40일 동안하기로 시작하셨습니다. 절반이상이 지났을때부터 다른동료들이 식사가 끝난후 재빠르게 그 일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결국 23일밖에 할수 없었습니다. 4순절이 끝날 무렵 모두 기피하던 설거지는 더 이상 그렇지 않고 서로하려는 일로 바뀌었던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1) 지속성 ...자신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함 ...나로 시작
2) 민감성... 타자가 그것을 마음담아서 보며 느끼는 것....너로시작
3) 동질성 ... 함께 하게 되는 것 ...즉 변화입니다. ...우리가 됨 ...그래서 우리로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 무언가 변화를 꿈꿀 때 ~ 나의 첫 번째 개수대는 어디인가를 찾아서
거기에 끊임없이 손을 넣고 일하는 것
이것을 민감하게 보고 느끼는 것,
변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진행하고 있는가?
그것을 민감하게 마음담아 보는 것 ....에서 변화는 실행됩니다.
* 영적 성장의 비밀
우리가 생활안에서 감동받는일이 있는데 그후 시선의 중심이 자기에게로 옮겨지면 (이기적인 본성은 노력해야만 이차적이 됩니다)갈등이 생기고 좋은 감정으로 되는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무관심하니까 편할 것 같으나 평화가 없어집니다. 즉 보이는 형제를 안 사랑하면서 안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할수 없다고 생각되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내면 꼬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회개와 정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상대를 수용하며 평화와 사랑을 얻게됩니다. 그러나 다시 갈등으로 가는데, 이때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이 작용하여 다시 감동과 수용의 단계로 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갈등 포기가 안보이는 경우도 있으며, 반대로 수용 감동이 거의 없기도 합니다. 갈등이 심화되는 상태에서 나의 관심과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검사해보아야 합니다. 이 순환과정(cycle)은 신앙생활과 인간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더 잘 하고 사랑을 나누고,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소박한 마음으로 이 순환과정을 잘 지내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화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루어지며 공동체가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향해서 갑니다. 대림시기에 기다리는 과정이 즐거워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하여 생각하며, 우리의 시간들이 기억안에 저장되며, 이러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로 남아있는 기억들이 행복이기를,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성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첫댓글 서기님의 요약을 읽으면 강의를 다시 한 번 더 듣는 것 같습니다. 순간순간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반응은 안 나오지만 훨씬 차분하게 곰곰 되새길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유병숙님의 수고로 다시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사자 길들이기란 어떤 추상적인 가치를 획득하여 보관하는것이 아니라, 신부님이 나누어 주신 프린트에 의하면, 우리가 마르코 복음을 완전 이해하고 정복하여 우리 마음의 튼튼한 집에 간직하며 복음의 메세지를 포용하고 유익을 얻는것 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좋은 강의를 해주신 김 베드로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하시는 일 늘 성공적이시기를 빕니다. 포함시키지 않은 노트가 있어서 추가 수정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