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사도행전 11장 19-24절
설교제목 : 위로자 바나바
마음의 풍경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제주도에서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깊이 고민하지 않고, 함께 길을 가는 도반들에게 제주도 풍경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급작스럽게 일을 저질렀습니다. 안요한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주도 여행을 가는 것을 어찌 알고 전혀 예상치 못한 외부분이 식사비를 찬조해주셔서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또한 예상치 못했던 교회가 주중에 후원금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뜻을 세운 곳에 어쩌면 하나님께서 돕는 손길을 저절로 붙여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심을 깨달았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아쉬움이 크지만, 더 좋은 기회를 통하여 좋은 시간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감히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모인 친척들과 그의 식구들에게 설교를 하고 설교 중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이방인인 고넬로의 가족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와의 만남은 구원의 경계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확장되고,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심을 확증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유대인 신도들에 전해졌습니다. 베드로는 할례도 행하지 않은 이방인들과 음식을 나누고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질책을 당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간의 있었던 환상과 고넬료와의 만남을 소상히 보고하였습니다. 자신이 말하기 시작할 때 자신들이 처음 성령을 받을 때처럼 임하였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17)”
이런 베드로의 보고에 거기에 모인 사도들과 신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제도나 전통을 넘어서 살아있는 영적 충동을 통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아주 명백하게 예시입니다. 자발적인 정신적 사건, 성령의 역사가 기존의 교의적 체계를 넘어서 생생하게 살아서 활동한 것입니다.
사도들과 처음교회 신도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제한하지 않았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적용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과 역사에 침투하실 때 우리를 변화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흩어진 무리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은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대상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한다 해도 자아의 구획해놓은 울타리를 넘어서고 열어놓는 것은 여간하여 어렵습니다. 자아의 편견은 스스로가 금그어놓은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운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경계를 넘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과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이기에 그 일은 따르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복음의 역사 자체도 인습과 전통에 의거하여 행동하면 거기에는 전적으로 새로움이 깃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 가운데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 사람들에게 말을 하여 예수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유별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다른 생각과 다른 관점, 차별없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낯선 것들을 제한하지 않고 받아들이려는 이들을 통하여 변환됩니다. 기존의 익숙한 가치체계를 고수하고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배타성을 띠기 쉽습니다. 경계 너머의 사람들을 자신의 기준과 원칙으로 밀어내고 배제하고 평가하려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개인의 삶과 사회에서 필요한 태도가 낯선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진심으로 만나고자 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 삶의 변환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노자의 말처럼 죽음의 무리는 딱딱하고 생명의 무리는 부드럽습니다. 이것은 나이를 많이 먹고 적게 먹었냐의 물리적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끔씩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만나보면 고착화된 사고와 경직된 태도를 갖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시기에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지나치게 딱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삶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기 세계에 갇힌 편협한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방인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들의 이름은 거론되고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전도자들의 용감함이 기독교를 세계 무대로 올려놓았습니다. 이런 이들과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21절에 말씀합니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21).”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고 경계를 넘어서는 자들을 주님의 손이 돕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보입니다. 우리가 기존의 경계를 용기있게 넘어서려할 때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심을 신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로자 바나바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합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이었고,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런 별칭으로 보면 바나바는 성령처럼 따뜻한 사람,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또한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사울을 아무도 만나려하지 않을 때 바나바는 사도들과 사울을 중개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온유하고 사람의 마음을 잘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특별한 사람을 그곳에 잘 보낸 것입니다. 바나바를 소개한 24절을 보면 그를 가리켜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런 바나바로 인하여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착한’이란 말은 ‘아가토스(agathos)’입니다. 착함이란 관계에서 부각되는 행위입니다. 착한 사람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공감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기본일 것입니다. 이런 공감과 배려 위에 성령과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니 그는 마치 자석처럼 그와 접속하면 따뜻함과 위로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4절 후반절에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나바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있는 복음의 증거이자 그리스도의 삶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 말을 하지 않아도 구지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그의 몸짓과 표정, 말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25절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무도 만나길 꺼려하는 사울과 함께 일년동안 안디옥에서 사람들을 세워갔습니다. 그리하여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안디옥교회 신도들이 예수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똑똑한 사람도 많고, 잘나가는 사람도 많고, 예쁜 사람도 많고, 힘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바나바 같은 사람은 점점 적습니다. 자기애적 삶의 방식으로 자신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인 세상에서 위로자 바나바가 그립습니다. 어쩌면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복음이 아니라 위로자 바나바와 같은 삶 자체로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일 수 있은 삶 그자체가 기쁜 소식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강렬하진 않지만 바나바처럼 위로자의 삶으로 차가운 가슴을 따뜻한 불을 지필 수 있는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