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鎭海). 바다를 짓누르다. 참 살벌한 지명이다. 일제강점기때 명명됐다. 그 시절, 일본은 군수물자 부릴 군항(軍港)을 물색했고 진해만에 시선이 꽂힌다. 수심 깊고 잔잔한 그 바다는 천혜의 묘박지였다. 배후지도 필요했을 터. 계획도시를 세운다. 그게 지금의 진해다.
진해만은 여전히 군항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바다는 군항의 삼엄한 긴장감이 없다. 누이 등처럼 푸근하다. 크고 작은 반도와, 곶과 섬은 다투지 않는다. 그저 어울려 나른하고 평화롭다. 그 바다를 묵묵히 품은 진해만 생태숲이 무더기로 단풍을 올렸다. 노릇하게 익은 노각나무며, 발그레한 복자기며, 붉게 단 화살나무며 사방이 가을빛이다. 헐거워진 숲으로 볕이 쏟아진다. 도토리는 물물이 나가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가을이 깊어 가고 진해만 생태숲은 야위어 간다.
11개 테마숲에 작은 수목원
숲 아래쪽 길섶 붉은 남천 열매 지천
온실 주변엔 달짝지근한 계수나무 향 진동
학습관 2층 실내 산림욕장 놓치면 후회
가을 야생화 털머위 곳곳에 활짝
■진해만 생태숲 곰메라 불리는 웅산이 있다. 진해만, 더 정확히 진해만에서도 행항만의 진산이다. 정상은 거대한 바위. 높이가 10m쯤 된다. 시루 얹어 놓은 형상이라 시루봉이다. 명성왕후가 순종 출산 후 전국 명산에서 치성을 올렸고 시루봉에서도 행했다. '진해시사'는 그렇게 적었다.
그 기슭에 진해만 생태숲이 들어앉았다. 굴거리나무숲, 해송숲, 가시나무숲, 녹나무숲…. 11개 테마숲과 작은 수목원으로 구성됐다. 자연림에다 약간의 손을 보태 2009년 개장했다. 면적은 126㏊. 넓다. 다 돌아보려면 족히 서너 시간이다. 생태숲은 길과 길로 이어졌다. 코스랄 게 따로 없다. 몸이 길에 오르면 길이 몸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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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진해만의 오후. |
생태숲 아래쪽 길섶으로 남천이 지천이다. 열매가 알알이 붉다. 상록 이파리와 보색 대비 이뤄 빛깔이 분명하다. 생태숲 온실 주변은 계수나무 향으로 그득하다. 바람에 얹혀온 향은 은근하고 달짝지근하다. 빛깔로, 향기로 가을 알리는 계수나무는 찬바람 불면 여느 이파리보다 먼저 노랗게 물든다. 그러고는 심장 닮은 이파리 살랑여 그 향을 허공에 뿌려댄다. 누가 말했다. '계수나무의 달콤한 향기로 가을이 시작되고, 메타세쿼이아 단풍으로 가을은 진다'고. 김영선 숲해설사는 달고나 향이라 했다. 입 안이 문득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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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파리와 보색 이뤄 더 붉은 남천 열매. |
녹나무숲은 정작 아름드리 녹나무가 드물다. 다들 앳되다. 곡절이 안타깝다. 재작년 어느 날로 거슬러간다. 진해 기온이 영하 15도 밑을 기었다. 예기치 않은 한파는 생태숲 나무 500그루에 냉해를 입힌다. 난대수종이 많아서였다. 피해는 유달리 추위 타는 녹나무에 집중됐다. 동사한 나무를 잘라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 나무에서 맹아지가 돋았다. 맹아지는 느닷없이 생겨난 가지다. 가늘고 키 낮은 생명이 어쩐지 비장하다. 생명은 이토록 여린 듯 질기다.
생태숲 단풍은 작은 수목원에서 절정을 맞는다. 복자기가 유난하다. 가을볕에 핏빛으로 들끓는다. 그 그늘은 선연한 진분홍빛이다. 그러고 보니 그늘은 제 주인 좇아 단풍물이 든다. 노각나무 것은 노랗고, 화살나무 것은 붉고, 굴참나무 것은 옅은 갈빛이다.
생태숲 길섶 등수국이 오래 남는다. 연보라꽃이 일제히 뒤집혔다. 가짜꽃이다. 진짜꽃은 너무 작아 곤충 유인할 힘이 부친다. 해서 그보다 큼직한 푸른빛 가짜꽃을 피운다.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한여름에 가짜꽃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어 그들을 호출한다. 그리고 이맘때 색을 바꿔 고개를 떨군다. 얼굴은 가지가 삭아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아래로만 향한다. 소임 끝내고 조용히 물러난, 떨군 고개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도토리가 어디선가 툭툭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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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문화체험관 앞 생태습지. |
굴거리나무숲 벤치에 앉아 잠시 단풍 삼매경에 빠진다. 냉기에 차렷자세 취하는 굴거리나무 이파리와 노르스름한 노각나무 이파리와 가죽질 억센 동백나무 이파리가 저마다 겨울 채비를 서둔다. 날숨과 들숨을 깊게 들이키고 내뱉는다. 허한 속이 넉넉하고 따뜻하다. 용서 안될 일이 없지 싶다. 그래서였을 게다. 법정 스님이 가을을 이상한 계절이라 호명했던 게.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 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엊그제만해도 상쾌했던 바람이 어느덧 처량하다.
■생태숲학습관 그리고 목재문화체험장 굴거리나무숲 아래로 생태숲학습관이 자리했다. 2층에 마련된 실내산림욕장을 놓치면 아쉽다. 편백나무와 소나무 체험실에 들어서면 피톤치드가 덮친다. 둘의 이파리를 증기로 가열한 체험실이 알싸하다. 편백나무 것은 박하향 짙고, 소나무 것은 한결 시원하다. 둘 모두 병원균과 해충에 저항한 흔적이다. 이 식물성 살균물질은 침엽수 것이 더 짙다. 활엽수보다 양분 만드는 기능이 약해 병충해 방편이 더 필요해서다. 그리고 패일수록 향은 더 강해진다. 상처 많은 꽃잎이 가장 향기롭다는 정호승 시인의 문장은 숲에선 더이상 문학적 은유가 아니다. 당연한 이치로 작동한다.
목재문화체험장으로 길을 잡는다. 학습관에서 놀면 가면해도 20분이면 거뜬히 닿는다. 솔바람이 맑다. "솔향도 좋지만 솔바람 소리가 더 좋아요. 옛사람들은 바람 세기 따라 슬성이라 했고, 송운이라 했고, 송도라 했죠." 숲해설사 설명이다. 슬성(瑟聲)은 비파 뜯듯 구성져, 송운(松韻)은 운율 타듯 유장해, 송도(松濤)는 파도치듯 들이부어 이름지어졌다. 걸음 멈추고 귀 열면 들리는 소리 모음이다. 이날은 송도의 날이었다.
목재문화체험장은 나무 이야기로 꽉 찼다. 나이테 코너에서 스피커 음에 붙들린다. "나이테는 나침반이 아닙니다. 잘못된 상식입니다." 귀를 의심했다. 나이테 동심원 폭이 넓으면 언제나 남쪽이라던 교육을 어디서 받았더라. 의심없는 단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가물하다. 그런데 아니란다. 몇 번을 들어도 틀렸단다. "나무는 계절별로 세포분열이 다릅니다. 봄과 여름엔 나이테가 선명하고 띠 색깔이 연합니다. 춘재라 합니다. 가을과 겨울엔 촘촘해지고 색깔이 진합니다. 추재라 합니다. 활엽수는 바람 불어오는 방향으로, 침엽수는 바람 불어가는 방향으로 그 폭이 넓어집니다. 바람과 햇볕과 지형의 영향을 받아 폭이 결정됩니다." 폭으로 동서남북 가늠할 수 없다는 게 골자다. 확인해본다는 걸 깜빡했다.
나이테는 겨울을 견뎌야 생겨난다. 춘재와 추재가 번갈아 만들어지고 합해져 한 해의 나이테로 탄생한다. 두어 달 지나면 생태숲 나무는 제 속에 한 겹을 더 새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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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잎 올린 가을 야생화 털머위. |
목재문화체험관 목재 덱(deck) 아래쪽에 털머위가 숨어 피었다. 이 녀석은 가을 야생화다. 줄기에 하얀 솜털을 지녔다. 10월 중순께 샛노란 꽃잎을 벌려 12월 중순까지 핀다는데, 성급하게 나부댄 몇몇 녀석은 꽃잎이 처졌다. 가지 끝에 서성이는 가을볕 무게를 이기지 못한 몰골이 처연하다. 가을이 흘러나간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TIP
■진해드림파크
2002년 계획을 수립해 2009년 개장한 산림 휴양 시설이다. 진해만 생태숲, 목재문화체험장, 광석골 쉼터, 청소년 수련원으로 꾸려졌다. 주차장은 목재문화체험장 앞과 진해만 생태숲 온실 앞에 마련됐다. 진해만 생태숲에서 조망하는 진해만 경치가 꽤나 운치 있다. 숲 해설 문의는 생태숲학습관(055-548-2694).
■찾아가는 법
자가용:낙동강 하굿둑을 지나 성산삼거리에서 창원 방면으로 좌회전한 후 20분쯤 달리면 진해만 생태숲 온실 주차장에 닿는다. 진해구청에서 5분 거리.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진해 방면 버스를 타면 된다. 1시간 30분 걸림. 오전 6시~오후 10시 출발, 20분 간격. 5천100원. 진해 교통 문의는 생태숲학습관, 목재문화체험장(055-548-2687), 진해구청 안전녹지과(055-548-4671)로 하면 된다.
■먹을 곳
황토방 가는 길(051-972-1133)은 한우 소머리 전문점이다. 국밥이 맛있다. 고기는 김해 주촌 도축장에서 직거래로 들여온다. 진해만 생태숲 둘러본 후 부산 돌아오다 들러봄직한 맛집이다. 한때 번호표 뽑고 줄 섰던 집이다. 진해에서 녹산농협 조금 못미쳐 위치. 소머리국밥 7천 원, 가마솥 전통 추어탕 8천 원. 연포탕 1만 6천 원.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