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의전원 입시 몰두… 전공 대학원 진학 급감
"균형있는 과학발전 막아"
서울 소재 A사립대 생명과학부 3년을 마친 김모(23)양은 올 1학기부터 휴학 중이다. 대신 매일 아침 강남역으로 직행해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입시 학원을 다닌다. 오는 8월 있을 의전원 시험(MEET)에 대비해 그는 학원에서 하루 14시간씩 머물며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대학 3년 동안 그의 평균 학점은 4.5만점에 4.21로 최상위급이었다.
그는 "과(科) 동기생 50여명 중 70%는 의전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고 40%는 실제로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3학년까지 계절 학기 통해 학점 대거 이수→4학년 1학기 휴학→8월 의전원 시험→2학기 복학 후 잔여 학점 취득→졸업 후 의전원 직행'이라는 공식이 이공계 우수 학생들의 일반적인 행태라는 것이다.
◆고3 의대 입시의 재판(再版)
지난 12일 오전 의전원 입시 학원이 밀집된 강남역 사거리, B학원을 들여다봤더니 평일인데도 강의실마다 20대 수강생 80~90명이 빈자리 없이 꽉 차 있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수강생 이모(28·대학 졸업생)씨는 "자습실 자리를 잡으려고 새벽 4시 반에 왔다"며 "수업 분위기가 고3 때보다 더 치열하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영업 중인 10여개 의전원 입시 학원에는 대학생 약 1만명이 등록한 것으로 학원가에선 추산하고 있다. 서울메디컬스쿨 강신창 원장은 "수강생의 80%는 생물·생화학 등을 전공하는 이공계생"이라며 "다들 학점이 좋은 학생이고 재수도 불사한다"고 말했다. 고교 졸업생들이 의대(醫大) 가려 치렀던 입시전쟁을, 4년 뒤 이공계생들이 학원을 전전하며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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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의전원 입시학원에서 수강생들이 생물 수업을 듣고 있다. 한 강의가 3~4시간씩 이어지는데도 수강생들은 고3 수험생처럼 강사의 말 한마디라도 놓 칠세라 받아 적기 바빴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의전원이 우수 이공계생 싹쓸이
5년 전 의전원 제도 도입 이후 각 대학 이공계는 갈수록 황폐화되고 있다. 이공계열 대학생들이 대거 '의사 입시'에 몰려가면서 의전원이 우수한 기초과학 인력을 싹쓸이해 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 소재 사립 명문 C대학 생물학과의 지난해 졸업생 32명 중 14명이 의전원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 대학 생명과학부 전체로 보면 졸업생의 38%가 의전원 또는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갈아탔다.
2005~2008년 사이 전국 4년제대학 생물학과 졸업생 800명이 의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체 의전원 입학생의 35%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때문에 기초과학계에는 생물학 전공 우수 졸업생 씨가 마르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포스텍과 카이스트도 지난해 각각 96명과 63명의 졸업생이 의·치전원으로 진로를 바꿨다. 의전원 입학생 중에는 정부와 대학이 이공계 발전을 위해 마련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가톨릭대 의전원의 경우, 올해 47명의 입학생 중 '이공계 장학금' 수혜자는 27명에 달한다(한나라당 박영아 의원실 자료).
◆이공계 대학원엔 지원자 급감
이공계 우수 졸업생의 의전원 직행은 해당 대학원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공계 명문으로 꼽히는 서울 D대학의 경우, 올해 생물학과 대학원에 지원한 학부 졸업생이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지난해에도 대학원 지원자는 3~4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이공계 명문 대학에서도 공통으로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카이스트·포스텍 3개 대학 생명과학 분야 졸업생의 대학원 평균 진학률은 2004년에서 2008년 33~34%를 유지하다가 의전원 모집 정원이 늘면서 2010년에는 16%로 급락했다.
연세대 생명시스템대 권영근 교수는 "이공계 대학이 '예비 의사 양성소'로 변질한 느낌"이라며 "기초과학·원천기술 학문의 우수 인력 공동화(空洞化)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공계 교수들 사이에서는 학부생을 얼마나 많이 의전원에 보내느냐가 '좋은 대학'의 지표가 됐다는 탄식도 나오고 있다.
내년에는 학부 2년을 수료한 학생을 대상으로 약학전문대학원(정원 1200여명) 모집이 시작된다. 서울대 강대희 연구부처장은 "2년 마친 학생들마저 중도에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이공계는 우수 인력이 남아나질 않는다"며 "균형 있는 과학 발전을 위해 의·치의·약학 전공 인력 양성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