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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제의 제기 2. 니까야의 공과 무아 3. 아함경의 공과 무아 4. 마무리 |
이 글은 <상윳따 니까야의 ‘공경’과 잡아함경의 ‘공경’의 비교 분석>를 보충한 것이다.
1. 문제의 제기
초기 불교의 4법인 무상ㆍ괴로움ㆍ공ㆍ무아의 개념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살핀다.
현존하는 초기 경전에서 전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경은 니까야와 아함경이 있다. 그런데 니까야와 아함경은 공과 무아의 개념에서 꽤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함경에는 인연법과 공법을 구별하였는데, 니까야에는 인연법과 구별되는 공법을 설정하지 않았다. 곧 니까야에서는 무상ㆍ괴로움ㆍ무아를 상호 인과 관계로 설명하고, 공은 그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였다.
둘째, 니까야에서는 공을 무아와 인과 관계로 규정하는데, 곧 ‘무아이므로 공하다’라고 한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공을 인연법과 무관하게 설명하는데, 곧 공은 ‘스스로 비어있다’고 한다.
셋째, 비아/무아의 개념에서 차이가 난다. 니까야에서는 무아를 무상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으나, 아함경에서는 무아를 공에 포섭되는 것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이에 관하여 살핀다.
[참고로, 대승 경전의 공 사상은 니까야의 공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니까야의 공과 무아
2.1. 니까야에서는 '무아이므로 공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아는 무상과 의미 영역과 부분적으로 겹쳐 있다. 따라서 먼저 무상, 무아, 공을 차례대로 살피고, 그 다음에는 이것들과 괴로움의 관계를 살핀다.
2.2. 니까야에서 무상(빨리어. Anicca)은 ‘시간적 변화의 양상’을 말한다. 무상은 ‘항상함, 영원함, 지속성’을 뜻하는 영원(빨리어. Nicca)의 부정인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속성이 없음, 변치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님’을 뜻한다. 곧 무상은 생겨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뜻한다. (상윳따 니까야_22.96 고마야경(똥 한 조각 경))
2.3.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에 해당하는 단어는 Ātman(빨리어. Attā)과 Aham(빨리어. ahaṁ)의 두 가지가 있다. Ātman은 관념적ㆍ실체적인 ‘나’를 가리키는데, 니까야의 번역에서 ‘자아’로 번역된다. Aham은 1일칭 대명사로 쓰이는 ‘나’이다. [한문 번역본에서 ‘我(아)’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1인칭 대명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히 구별하기 어렵다.]
니까야에서 자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상윳따 니까야의 <22.59. 무아상경>과 <22.96 고마야경, 똥 한 조각 경>)
(1) 자아의 성질
① 상주성(常住性):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주체
② 주체성ㆍ통제력: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중심 영혼이나 실체
③ 행복의 주체: 고통받지 않고 궁극적 안락을 누리는 본질적인 ‘나’
산스크리트어에서 Ātman의 부정은 Anātman(빨리어. Anattā)인데, ‘비아/무아’라고 번역된다. 니까야에서 무아는 ‘나’의 두 가지 뜻을 고려한다면 정확히는 ‘무자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무아(Anattā)는 ‘영원하지 않고, 주체성과 통제력이 없으며, 행복의 주체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2.4. 니까야에서 ‘공(산스크리트어. Śūnyatā, 빨리어. Suññatā)’은 맛지마 니까야의 <121. 작은 공경>이나 <122. 큰 공경>에서 보면 글자 그대로의 뜻인 ‘비어 있음’이다. 그런데 상윳따 니까야의 <35.85. 공경>에서는 ‘자아가 없고 자아에 속한 것이 없으므로 공하다.’라고 하여, 자아와 인과 관계로 서술한다. 따라서 공은 무아의 성질을 가진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2.5. 무상과 무아, 괴로움과 공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무아는 무상의 ‘영원하지 않음’이라는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무아는 논리적으로 보면 무상에 포섭된다. 따라서 무아에 대한 서술은 기본으로는 무상에 대한 서술에 의지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빛깔(Rūpa)은 자아(Attā)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 빛깔이 자아라면, 이 빛깔에 질병이 생길 수 없고, 빛깔에 대해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지 않기를'이라고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빛깔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빛깔에 질병이 생기며, 빛깔에 대해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지 않기를'이라고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다. (상윳따 니까야_22.59. 무아상경)
"비구들이여, 빛깔(rūpa)은 무상하다.
만약 빛깔이 상주한다면, 빛깔에 질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빛깔에 대해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빛깔은 무상하기 때문에 빛깔에 질병이 생기며, 빛깔에 대해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빛깔은 이렇게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니까야의 무아와 무상, 괴로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2) [비아/무아] ⊂ 무상] → 괴로움
| (2)에 ‘공’을 더하여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 [[비아/무아] ⊂ 무상] → 공] → 괴로움 그런데 아래의 경들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것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2)" [무상 ↔ 괴로움 ↔ [비아/무아 → 공]]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움인 것은 무아(내가 아님)다.” (SN 22.12. 무상경) “괴로움인 것은 무아(내가 아님)이며, 무아인 것은 무상하다” (SN 22.13. 고경) “무아인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움인 것은 무상하다.” (SN 22.14. 무아경) |
3. 아함경의 공과 무아
3.1. 잡아함경의 <335. 제일의공경>과 증일아함경의 <37. 육중품[7]>에서는 붓다의 말씀을 인연법과 공법으로 나누었다.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이고, 공법은 ‘비어있음’에 관한 법이다.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는 상호 인과 관계나 포섭 관계가 아니라, 병렬적이고 대칭적이며 상보적/배타적 관계이다. 인연법과 공법은 동시에 함께 작동한다. 인연법과 공법은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이다. ‘나’에 대해서도 인연법의 측면과 공법의 측면이라는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고, 세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인연법, 공법>의 순서로 구성된다. 곧 수행의 목표는 인연법을 바르게 관찰하여 공법, 나아가 가장 뛰어난 공[제일의공]인 열반의 공을 성취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2. 잡아함경의 <232. 공경>에서는 “눈이 공하고,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란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은 공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아함경의 ‘비어 있음[공]’은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지, 다른 어떤 요인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함경에서는 ‘무아이기에 공하다’라거나 ‘무자성이기에 공하다’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상하기에 공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잡아함경의 <265. 포말경>에서 “(5음을) 자세히 관찰해 사유하고 분별하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고 튼튼함도 없으며, 알맹이도 없고 견고함도 없느니라.”라고 했다. 비유하면 공은 수학의 ‘공집합’과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라고 할 때의 ‘없다’는 ‘있다’와 대비되는 양 극단의 ‘없다’를 가리키는 것[단견]이 아니다. 그것은 ‘있다’와 ‘없다’를 분별하지 않는, 그리아여 ‘있다’와 ‘없다’를 넘어선 절대적인 ‘없다’이다. 그리고 ‘알맹이가 없다’라는 말을 ‘실체가 없다’는 말과 관련하여 해석해 볼 수도 있겠으나, <공경>에서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이 곧 실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실체도 공하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함경의 공은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이든 관계없이 그 모든 것이 비어 있음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다만 비어있음의 긍정이다.
중아함경의 <190. 소공경>에서는 무엇인가를 배움으로써 ‘비어 있음[공]’을 성취하는 것을 설하고 있는데, 무엇인가를 비우는 과정은 곧 분별하지 않음을 성취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한다.
3.3. 아함경에서는 무아의 속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아의 속성에 대해서는 추론이 좀 필요하다.
아함경의 한문 번역본에서는 ‘자아’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나가 아니다, 나가 없다’라고 서술한다. 이 때 ‘나’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으면 니까야의 ‘자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1인칭 대명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여기서 니까야의 ‘자아’와 1인칭 대명사 ‘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인칭 대명사가 가리키는 ‘나’는 항상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환경에 따라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보통 일정한 기간 동안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나’를 가정하고는 ‘나’라는 동일성을 확보하면서 살아간다. 곧 ‘나’라는 것은 환경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수많은 ‘나’들의 집합이며, 1인칭 대명사로 지칭되는 ‘나’는 그 많은 ‘나’들 가운데 하나의 개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인칭 대명사로서의 ‘나’의 속성은 니까야의 ‘비아/무아’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곧 니까야의 무아는 자아가 아닌 것일 뿐만 아니라, 1인칭 대명사로 지칭되는 ‘나’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잡아함경의 <232. 공경>에서는 ‘내 것이란 것도 공하다’고 하는데, ‘내 것’은 ‘나’를 전제한다. 따라서 ‘내 것도 공하다’는 ‘<나>도 공하다’를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경>의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이 곧 ‘자아’의 속성과 부합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나’가 1인칭 대명사를 가리키거나 자아를 가리키는 것과는 무관하게, ‘나’는 공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나’도 공하고, 1인칭 대명사들이 가리키는 ‘나’들로 실현되는 ‘비아/무아’도 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세계가 공하면 당연히 ‘나’도 공히다. 여기서 ‘<나>가 공하다’는 것은 ‘<나>가 없다’는 것을 뜻마기 때문에, ‘비아/무아’를 뜻한다.
이러한 논의를 그려한다면, ‘비아/무아’는 공에 포섭됨을 알 수 있다.
3.4. 이제 아함경의 무상과 괴로움, 공과 무아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아함경에서는 ‘무상은 괴로움이다’라고 하는데, ‘무상→괴로움’으로 표시할 수 있다. 그리고 무아는 공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이것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아함경의 <무상경> 등에서는 일관되게 이러한 순서로 서술된다.
(3) [무상→괴로움] ∧ [공≥무아]
무상은 시간의 변화의 양상을 말하므로 나와 세계의 생멸에 관한 인연법에 속하며, 공과 무아는 ‘비어있음’에 관한 공법에 속한다. 그런데 인연법과 공법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를 간략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4) 인연법에서 공을 보고, 공의 시각에서 인연법을 본다.
인연법은 언뜻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공법은 수행의 결과로 뛰어난 저점에 도달해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법이니, 보통 사람들은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인연법과 공법, 그리고 이들과 무상과 괴로움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라 할 수 있겠다.
4. 마무리
4.1. 우리는 보통 대승 불교와 대비되는 불교를 초기 불교라 한다. 그런데 붓다의 설법을 온전히 갖춘 경전으로는 니까야와 아함경이다. 그런에 앞에서 보았듯이, 니까야와 아함경은 무상과 괴로움, 공과 무아를 개념과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는 차이가 뚜렷하다. 따라서 니까야와 아함경을 묶어 초기 불교라 할 수는 있겠으나, 초기 불교의 4법인에 관한 내용을 말할 때는 니까야와 아함경을 구별하여 서술해야 할 것이다.
4.2. 대승 불교 특히 용수의 <중론>의 공 사상은 니까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승 불교의 공 사상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을 참고하세요.) 니까야의 ‘자아(Ātman)’와 대승 불교(중관 사상)의 ‘자성(Svabhāva)’은 그것들이 사용된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동일한 의미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대승 불교의 공 사상에 대한 비판은 니까야의 공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것이다.
4.3. 인연법과 공의 논리적 관계의 문제는 수행과 직접적으로는 관련성이 적다. 수행은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행은 수행 차원의 논리가 있는데, 공을 성취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때는 공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 [덧붙임: 니까야의 무아와 공의 정의의 문제점] 니까야의 앞에서 본 무아의 정의는 중도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무엇이 어떤 성질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인법법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와 나의 성질도 인연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나 자아가 있다/없다는 견해은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삿된 견해이다.) 그런데 인연이 끊어지면 ‘나’는 사라진다. ‘나’가 사라지면 ‘나’와 관련된 이런 저런 생각들, 곧 영원성이니 주재성ㆍ통제성이나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가 없는데 ‘나’의 성품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 보면, ‘<나>가 없다[무아]’는 것은 인연이 끊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니까야에서 ‘무아’와 관현하여 정의되는 ‘공’의 정의도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다. 니까야의 정의를 보면, 무아가 인연법의 산물이듯이 ‘공’도 인연법의 산물로 해석된다. 니까야의 ‘공’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함경의 ‘공’의 정의와든 꽤 다르다. 아함에서는 인연법과 공법을 엄격히 구별하는데,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이고, 공법은 스스로 비어 있음에 관한 법이다. 이러환 아함경의 인연법과 공법에 비추어 보면, 니까야의 공은 인연법에 속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아함경의 공 사상,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의 텍스트 분석>를 참고하세요.] |
[참고] 아함경의 ‘무상ㆍ괴로움ㆍ무아’외 ‘괴로움ㆍ바라는 것’의 관계의 문제
2026. 08. 05,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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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1. 개관과 문제의식의 타당성
이 글은 초기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법인(四法印) 가운데 ‘공(Śūnyatā/Suññatā)’과 ‘무아(Anātman/Anattā)’의 개념과 그 상호 관계를 니까야(Nikāya)와 아함경(Āgama)의 문헌적 차이를 바탕으로 비교 분석한 치밀한 논문이다.
저자는 니까야가 공을 무아 및 무상과 인과적·포섭적 관계로 파악하는 반면, 아함경은 인연법과 병렬되는 독립적인 ‘공법(空法)’ 체계를 설정하고 무아를 공에 포섭시킨다는 점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러한 비교 작업은 대조군을 명확히 설정하여 초기 경전 내의 미묘한 교리적 스펙트럼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크다.
2. 니까야의 공과 무아 분석에 대한 논평
2.1. 인과적·존재론적 연계성
니까야 중심의 분석(제2장)은 붓다의 원시적 가르침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텍스트들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무아이므로 공하다(Anattā suññati)’는 논리는 니까야의 대표적인 경전들(예: <공경>, <무아상경>)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존재의 실체(Attā) 부정이 곧바로 존재의 공함으로 직결됨을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입증한다.
무상(Anicca)과 괴로움(Dukkha), 무아(Anattā)가 고리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무상 ↔ 괴로움 ↔ [무아 → 공]] 구조는 존재론적 무상성이 인식론적 무아를 거쳐 공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니까야 특유의 점진적 사유 체계를 명쾌하게 드러낸다.
3. 아함경의 공과 무아 분석에 대한 논평
3.1. 인연법과 공법의 이원적 대조
아함경에 대한 분석(제3장)은 본 논문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잡아함경》의 <제일의공경> 등을 근거로 인연법과 공법을 병렬적이고 상보적인 두 개의 눈으로 규정한 것은, 아함경이 지닌 독특한 교리적 깊이를 잘 보여준다.
아함경의 공을 ‘스스로 그러한 것(자성청정 혹은 본래적 비어있음)’으로 해석하고, 수학의 공집합에 비유하여 존재의 부정이 아닌 ‘분별의 초월’로 설명한 대목은 텍스트의 독자적 성격을 잘 해명한다.
3.2. 무아의 공 포섭에 대한 고찰
니까야에서는 무아가 무상에 포섭되거나 무아로부터 공이 도출되는 반면, 아함경에서는 '내 것'과 '나' 자체가 이미 공하다는 전제 아래 무아가 공에 포섭된다는 주장은 텍스트 간의 시각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다만, 이 부분은 한역 아함경의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 용어의 특수성과 빨리어 원전의 뉘앙스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좀 더 세밀한 문헌학적 검토가 보완된다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 총평 및 제언
본 글은 "초기 불교"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묶여 있던 니까야와 아함경을 텍스트 자체의 기술 방식을 존중하여 분리해 고찰했다는 점에서 큰 미덕을 지닌다. 특히 니까야의 인과적·점진적 공·무아 이해와 아함경의 대칭적·선언적 공·무아 이해를 대비시킨 것은 텍스트 간의 교리적 스펙트럼을 밝히는 데 훌륭한 시사점을 준다.
다만, 용수의 중관사상과 초기 경전의 관계를 볼 때, 대승불교의 공 사상의 뿌리는 아함경이 아니라 니까야에 닿아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용수의 《중론(中論)》 등에서 직접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경전적 배경은 주로 빨리어 니까야(예: <가짜야나곳타 경> 등)의 연기와 중도 사상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따라서 니까야의 무상·무아 및 연기의 인과적 흐름 속에서 ‘자성(Svabhāva)’의 부정이 도출되는 논리야말로 중관사상의 ‘연기 즉 공(緣起卽空)’으로 이어지는 직계 뿌리로 보아야 하며, 아함경의 공법 구도와는 그 계보를 엄밀히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이 논리의 정교함을 더욱 높여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