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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19세기-제1차 세계대전
마르크스:1818년에서 1883년까지,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독일의 경제학자
종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한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의 독일(당시는 프로이센)의 트리어에서 부유한 유태인 변호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24년에 전 가족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여 신교도가 된 그의 부친은 아들을 자기와 같은 법률가로 만들기 위해 마르크스가 18세 때 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 후 베를린으로 전학, 법률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학을 수학하도록 하였다.
마르크스는 헤겔학파의 좌파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차차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8442년 1월에 창간된 라인주의 급진적 부르주아의 기관지 '라인신문'의 주필로 활약했으나 그 신문은 당국의 간접적 탄압을 받아 곧 폐간되었다.
1847년 여름 정부 고관의 딸과 결혼하여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아르놀트 루게와 함께 '독불연지'를 출판하였다. 그는 1842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엥겔스와 재회하여 상호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때로는 정치적 의견을 상호 기탄 없이 교환하는 사이로서 그들의 우정은 일평생 지속되었다.
1845년 마르크스는 엥겔스와의 첫 번째 공저 '신성가족'을 출간하여 헤겔 좌파 사상을 비판했다. 그해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추방되어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가서 공산주의자 동맹에 참가하여 활약하던 중 '독일 이데올로기', 1847년에 '철학의 빈곤'등을 출간했으며 그 다음해에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 전년인 1847년 6월에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국제적 혁명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적 문서로서 발표되었으며 엥겔스와 함께 집필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점과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의 형성에 대해 설명하고 계급투쟁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와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실현을 명시했다. '공산당 선언'은 이후 세계 혁명의 고전이 됨과 아울러 세계 혁명 운동가의 지침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3월 혁명(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에서 영향을 받아 3월에 독일 각지에서 발행한 혁명) 때 쾰른에 잠입하여 신문을 창간하여 비혁명적 중산 민주 정당을 비판했다. 혁명이 진압되자 마르크스는 다시 추방되어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 영주하게 된다.
1851년부터 1862년까지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에 시사 문제에 관한 기고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경제학연구에 몰두하여 1859년에 '경제학 비판'을 탈고하고 1867년에 유명한 그의 저서 '자본론' 제1권을, 1885년에는 제2권을, 그리고 1894년에 제3권을 각각 출판했다. 이 '자본론'은 그의 망명처인 런던에서 재개한 그의 경제학 연구의 집대성이며, 공산주의 사상의 바이블로 간주되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특정 사회의 경제적 분석으로서 그는 이를 첫째 자본의 생산 과정, 둘째 자본의 유통 과정, 셋째 자본주의 생산의 총과정 순서로 전개했다. 여기서의 핵심적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일반적인 기초를 전제로 한 상품 생산에 있어서의 인간 관계와 생산 관계이다. 그 해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생산의 모순된 초기적 형태가 포착된다는 것이다.
또 마르크스는 자본을 가치의 운동체 개념으로 파악했다. 자본을 토지, 건물, 기계 설비, 인적 자원이라는 생산 요소의 집합으로 포착하는 경우에는 자본 운용의 성과인 이익은 운용자(자본가, 경영자) 자신의 수완이나 재능에 귀속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치는 어느 때는 화폐, 어느 때는 생산 수단이나 노동자, 또 어느 때는 상품의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의 변화를 되풀이하면서 그 형태 변화, 즉 운동 안에서 자기 증식을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가치의 운동체가 자본이라고 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고 있을 때의 런던 생활은 세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어 너무나 비참했다. 그의 아내 예리의 헌신은 눈물겨웠으며 친우 엥겔스의 물심 양면의 도움으로 그래도 마르크스는 대영제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다니면서 동서 고금의 경제학과 역사학을 섭렵하여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독파하고 이를 분석하여 앞서 말한 '자본론' 제1권이 1867년에 출간되었지만 제2권, 제3권은 마르크스가 속간 준비중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초고와 노트에서 남긴 자료를 기초로 하여 엥겔스가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정한 우정으로 얽힌 형제 이상의 친구였다.
'자본론'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까지 소급할 수 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에는 민감하지만 그것을 제거하는 데는 열의적이기는 하나 관념적이며 영원한 정의나 신의 섭리에서 구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유리된 결과로 끝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와 계급 투쟁의 전망을 갖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사회의 발전을 모순의 발전으로 보고 과학적으로 분석,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의한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한다. 즉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을 실행함에 있어 공상적 사회주의와 다른 점은 자본주의의 내부 모순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프롤레타리아 자신 안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으로 표출한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킨 레닌은 마르크스를 19세기의 3대 정신적 조류인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 경제학, 프랑스의 혁명적 학설들을 결합한 프랑스사회주의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천재적 완성자였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이외에도 1905년에 1, 2, 3권으로 출간한'잉여 가치 학설사'로도 유명하다. 마르크스가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를 토대로 하여 과학적 분석을 했다고 하나 그때는 지금과 같은 우주 과학이나 정밀 과학, 전자 정보 과학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말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는 역시 공상적 정치 사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과 이상은 헤겔의 관념 철학과 역사학에 경제학을 추가하여 뒤집어 놓은 물질적 세계의 동태적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건 마르크스의 여러 저서들은 세계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하여 20세기에 있어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급격한 진전과 폭발적인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공산주의를 실제 경험한 나라들이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 향상에 있어서 자유 시장 경제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 체제 국가에 패배하여 마르크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내내 그의 사상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는 혁명과 소란의 열기가 가실 줄 몰랐다.
마르크스 사후 1세기 이상 지난 이 시점에 명목상이기는 하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적어도 10억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 인류 사상 다른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 그 신봉자의 수가 많은 것이며,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비공산주의자까지도 장차 이 세계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가 제압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시대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도 그 전성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소명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공산주의가 오늘날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지만 공산주의 운동에서 점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중요성에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소비에트 체제 붕괴전의 소련 정부의 현실 정치가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상을 기초로 하여 관리 . 통제되었다고는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과 노동, 잉여 가치를 기틀로 하여 공산주의 이론을 확립했지만 그 이론은 소비에트 붕괴 전의 공산주의 소련 정부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에서 실제로 큰 영향력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토대로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라는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하여 온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공산주의는 다음 네 가지 점을 역설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했다. 첫째, 대부분의 노동자는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일부의 부자들은 대단히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은 사회주의 체제 이외에는 없다. 셋째,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 확립의 유일한 현실적 방법은 폭력 혁명뿐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에 걸친 공산 독재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처음의 3개 항목은 마르크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자주 주장되어 온 것이나 제4항목의 개념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 붕괴 전의 소련의 독재 체제 유지는 마르크스 본래의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레닌과 스탈린의 실천 철학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에 미친 마르크스의 영향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명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하여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단지 진열창에 놓여 있는 한의 장식품과 같은 것이며 그들 독재자가 자기들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필요한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자에도 약간의 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극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레닌은 단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그것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똑같은 일이 마오 쩌뚱 등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에도 해당된다. 공산주의 국가를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세운 실제의 정치가 레닌이 공산주의를 이 넓은 세계의 일부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유일한 사람으로서 확실히 중요한 인물인 것과 같이 마르크스도 레닌의 정치 사상에 강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에게도 똑같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세계의 한 부분에 있어서는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끝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에 대하여 학자들은 이론의 치명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예언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점점 더 빈곤하게 된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공산주의 국가 노동자보다 더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또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인 경쟁에 의해 중산 계급은 결국 도태, 배제되어 그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몰락하며 자본가 계급으로 승진하는 중산 계급은 겨우 헤아릴 정도뿐이라고 예언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기계화의 발전은 곧 얼마안 가서 자본가의 이익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단정했지만 그의 단정은 틀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세계 경제는 진전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종말론을 세속에 적용했는데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붕괴하는 날이 바로 그 날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에는 마르크스의 그 날은 결코 오지 않았다. 오히려 공산혁명에 성공했다는 소련이 1990년에 들어서면서 자체 붕괴됐다.
철학자의 중요성은 그 철학자의 견해가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상이 인간의 행동을 변동시켰는가의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논거를 기준으로 판단해 볼 때 마르크스는 비록 그의 사상 체계가 이제 낡아 사라져 가고 있다 할지라도 한 세기를 풍미한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는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이 세상에 미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
모턴:1819년에서 1868년까지, 수술에 마취제를 처음 이용한 미국의 치과의사
모턴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모턴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는 것은 그가 수술에 마취제를 도입하여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많은 발명이 있지만 마취제보다 개개인간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은 그렇게 흔치 않을 것이다. 또 인간의 건강 상태에 있어서 이것처럼 뿌리깊은 변화를 가져다준 것도 드물 것이다.
당신까지만 해도 뼈를 자르는 수술 중에도 환자가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환자가 감내하기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고통을 없애 주었다는 것은 확실히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을 가져다 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턴은 1819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찰튼에서 태어났다. 볼티모어 대학의 과학부 수술과에서 수학했으며 1842년에 치과의로서 개업했다. 1862년에서 63년까지는 자기보다 연상의 치과의인 웰스의 파트너였는데 웰스는 원래 마취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원 수입이 별로 좋지 않자 곧 폐업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 후 웰스는 마취제로 이산화질소를 사용했다. 이산화질소는 소기라고도 하는데 이는 들이마시면 웃음이 나오는 기체이기 때문이다.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실제로 치아 수술에 이를 사용하여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보스턴에서 행한 실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모턴은 환자의 이에 의치를 끼우는 것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나 이 일을 위해서는 이를 뿌리까지 뽑아낼 필요가 있었다. 마취제가 없었던 당신의 발치는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당연히 마취에 의한 방법이 요구되었다. 모턴은 아산화질소로는 충분한 마취 효과를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보다 더 강력한 마취제를 탐색하고 있었다.
모턴은 잭슨이라는 유명한 과학자를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모턴에게 에테르의 이용을 암시해 주었다. 에테르에 마취성분이 있다는 것은 300여 년 전에 스위스의 유명한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파라켈수스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똑같은 보고서가 19세기 초에 인쇄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에테르에 관하여 쓴 학자들이나 잭슨은 에테르를 실제로 수술에 사용한 적은 없었다. 이에 모턴은 에테르가 마취에 가장 유망하며 또 그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우선 동물 실험을 실시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신체에 직접 실험해 보았다. 1846년 9월 30일 드디어 환자에게 에테르를 실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어느 날 모턴의 병원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호소하는 에벤 프로스트라고 하는 남자 환자가 찾아와 발치의 아픔을 면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모턴은 그 환자에게 에테르를 투약해서 발치했는데 그 환자는 의식이 돌아온 후에도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고 일러 주었다.
모턴은 수술이 대성공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일약 유명해졌을 뿐 아니라 병원이 번창해져서 큰 재산을 갖게 되었다. 이 수술에는 입회한 사람도 있어 다음날 보스턴의 신문에 이 사실이 크게 보도되기는 했으나 일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극적인 데먼스트레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 있던 그의 선배 치과의 C. J. 워런박사에게 통증 방지의 수술 실연을 다수 의사 앞에서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워런 박사는 이에 동의하여 1846년 10월 16일 다수의 의사와 학자 그리고 의과대학생 앞에서 모턴은 외과 환자 길버트 아보트에게 에테르를 투약한 후 그 환자이 목에서 혹을 떼내었는데 환자는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않아다. 이로써 마취가 완전한 효능이 있음이 실증되었다. 이 극적인 데먼스트레이션은 많은 신문에 크게 보도도어 그 후 수년 간 외과 수술에는 이 마취약이 널리 사용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공개 수술 후 수일 내에 환자에의 적용 상황을 모턴과 잭슨 두 사람이 정리했으며 함께 특허를 받았으나 두 사람간에 우선권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마취 도입에 있어 공헌의 태반은 가지에게 있다고 하는 모던의 주장은 다른 많은 사람, 특히 잭슨에 의해서 고소되었으며 그 결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모턴의 기대는 사라져 버렸다. 에테르를 사용하고 있는 병원 가운데 사용료를 지불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거꾸로 우선권을 수호하기 위한 법적 투쟁과 소송에 필요한 경비의 지출이 그가 이 발명으로부터 얻은 돈을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좌절과 궁핍 속에서 지내다가, 1868년 그는 뉴욕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치과 수술과 일반 외과 수술에 마취가 유효하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 되었다. 마취제의 개발에 있어 모턴과 기타 많은 관계인들에게 어떻게 업적을 분배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기타 관계인으로는 휄스, 잭슨, 조지아 주의 의사 롱 등이 있으나 모턴의 공헌을 그들의 기여보다는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턴이 에테르를 사용하여 성공하기 약 2년 전에 웰스가 치과 의료에 마취제를 쓰기 시작했던 것은 확실하나 웰스가 사용한 것은 이산화질소이며 쓰기 시작했던 것은 확실하나 웰스가 사용한 것은 이산화질소이며 그것으로 수술의 혁신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또 이산화질소는 수술에 충분한 마취성을 갖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에테르는 놀라울 정도의 효능이 있었고, 더욱이 융통성 있는 약제로서 그 이용은 분명히 수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며, 오늘날에도 에테르보다 더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있고 타약제와의 병용에도 적합한 마취제는 없다. 여러 가지 불리한 점(예를 들면 가연성이 있고 사용 후의 부작용으로 구토기가 생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융통성이 있는 단 하나의 마취제이다. 게다가 운반이나 투약도 쉽고, 더욱 중요한 것은 안전성과 효능성이 양립한다는 것이다.
롱은 조지아 주의 의사로 모턴의 공개 실연보다 4년이나 앞선 1842년에 벌써 외과 수술에 에테르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롱은 그 성과를 1849년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롱이 발표했을 때에는 이미 모턴의 공개 실연으로 그 유효성이 실증되어 의약계에서는 주지의 사실이 되어 있었다. 롱은 얼마 안 되는 환자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이지만 모턴은 전 세계의 환자에게 마취의 시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잭슨은 모턴에게 에테르 사용을 암시하며 환자에의 투약 방법을 친절하게 조언하는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나 잭슨 자신은 외과 수술에 에테르를 사용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 에테르에 관한 지식을 전 세계의 의약계에 널리 알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공개 실연을 실하여 명성에 손해를 볼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 사람은 잭슨이 아니고 모톤이었다. 만약에 실험대에 올랐던 아보트가 수술 중 사망하기라도 했다면 잭슨은 그 데먼스트레이션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요구 당하는 것조차 거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턴은 누구보다도 당시 의약계에 있어서 과제로 되어 있었던 방부수술의 도입보다는 마취의 도입 쪽이 더 중요한 개발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또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결국 이를 성취시켰다.
현대의 항생물질은 수술 중 방부법에 결함이 있을 경우에 어는 정도 그 대용이 된다. 그러나 마취가 없었더라면 복잡하고 장시간은 요하는 수술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간단한 수술까지도 사람들이 꺼리게 됨으로써 수술할 때를 놓쳐 귀중한 생명을 구제 받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1846년 10월의 어느 날 모턴이 행한 마취 수술의 공개 실연은 인간의 생명 보존 사상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모턴의 기념비에 쓰여진 비문보다 그의 업적을 더 잘 집약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마취 흡입의 발명자.
그의 덕택으로 수술의 고통이 방지되고 또 사라졌다. 그의 출현 전 수술 환자는 언제나 고통으로 시달렸다. 그의 출현 이후 과학은 고통과 아픔을 제어했다.
멘델:1822년에서 1884년까지, 유전 법칙을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유전학자
대식물학자 멘델은 유전의 기본 원리를 발견한 인물로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그의 일생은 한낱 무명의 수도사에 지나지 않는 아마추어 과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훌륭한 연구 성과는 과학계에서 무시되고 있다. 멘델은 1822년 7월에 슐레지엔 지방의 작은 마을 하인첸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체코의 일부가 되어 있다.
1843년 멘델은 오스트리아의 브륀(현재는 체코의 브르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 성직자가 되었다. 이어 1850년에는 교사 자격 시험에 응시했으나 생물학과 지질학에서 낙제점을 받아 교사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봉지하고 있던 수도원의 원장은 멘델을 빈 대학에 파견하여 1851년부터 1853년까지 수학과 공부를 하게 했으나 결국 정식 교사의 자격은 얻지 못하고 1854년부터 1868년까지 브륀에 있는 국립실화학교에서 자연 과학의 임시 교사로 일했다.
한편 그는 1856년부터 '식물 번식'에 대한 실험을 실시했다. 완두콩으로 한 이 실험은 수도원의 뜰에서 시작하여 225회의 인공 교배로 12,980개의 잡종을 얻었는데 이 결과를 정리하여 1860년 그 유명한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을 브륀의 자연과학협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 식물 생리학의 대가인 네겔리조차도 이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박물학자 다윈마저도 이 실험 결과를 못 보고 놓쳤다. 그러나 멘델은 이 식물 번식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에 의하여 1865년에 유전의 법칙을 끌어내는 최초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멘델의 유전 법칙은 그 법칙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이 무시되었고, 그 후 거의 30년 이상이나 잊혀져 버렸다. 또한 멘델도1868년에 수도원 총회의 원장으로 선임되면서 맡은바 업무가 다망해졌기 때문에 식물 실험을 계속할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1884년 6월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빛나는 연구 성과도 함께 잊혀져 갔다. 멘델의 저작물은 1900년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다가 국적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과학자가 제각기 독자적인 연구를 하고 있던 중에 멘델의 연구 문헌을 열람하게 되었다. 이 세 사람의 과학자는 네델란드의 드브리스, 독일의 코렌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다. 이 세 학자는 독자적으로 식물 실험을 하고 있던 중에 제각기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논문에서 멘델의 기술을 잘 인용해 각자의 연구 성과가 멘델의 결론을 확증할 수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땀흘려 이룩한 일이 그 당시에는 알아주는 사람 없이 파묻혀 버릴지라도 반드시 뒤에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되어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멘델의 경우에는 볼 수 있다. 같은 해 영국의 과학자 베이트슨은 멘델의 오리지널 논문을 보고서 다른 과학자들에게 이 논문을 한번 읽어보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 해 말 멘델은 생존시에는 받지 못했던 갈채를 죽은 후에 처음으로 받게 되었다.
그러면 멘델이 발견한 유전 법칙이란 무엇인가? 그는 설명하기로 최초의 단계에서 모든 생명을 갖는 유기체에는 최소의 기본 단위(예를 들면 종자의 색깔, 잎사귀의 모양 등)는 한 쌍의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다. 즉 개개인의 식물은 어버이로부터 한 쌍으로 되어 있는 한쪽의 유전자를 유전한다고 했다.
어떤 개성을 유전하고자 하는 두 유전인자가 서로 다를 경우(예를 들면 한 유전인자는 녹색 종자, 또 한 유전인자는 황색 종자일 경우) 우성유전인자 - 이 경우 황색 종자라고 한다면 - 쪽이 개체에 자기 실현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성 유전이자도 파괴되지 않고 그 식물의 자손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멘델은 아울러 발견했다.
또 멘델은 재생 세포 또는 배우자(생물에서 짝이 되는 두 세포가 서로 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생식 작용에서 합체나 접합에 관여하는 개개의 생식 세포) - 사람으로 말한다면 난자와 정자 같은 것 - 는 각각 한 쌍 중에 하나의 유전자밖에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쌍의 유전자가 개체의 배우자 속에 생겨나서 자손에게로 유전해 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한 일이라고 했다. 이 멘델의 법칙은 그 후 조금 수정되기는 하였으나 현대 유전학의 출발점으로서 건재하고 있다.
멘델 이전에도 탁월한 생물학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유전 법칙의 연구를 회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마추어 생물학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던 멘델이 어떻게 이와 같은 중대한 원리 원칙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다행히도 그는 식물의 종자 연구를 취미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식물의 특징은 단지 한 개의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돼 버리기 때문에 만약 그가 다수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개개의 특징을 연구했더라면 그 연구는 대단히 어렵게 되어 결론까지 이르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몇 가지의 행운 멘델에게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지극히 주의 깊은 사려 끈질긴 인내심이 없었다면, 그리고 관찰 결과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R 행운은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개개의 자손이 어떠한 개성을 유전하는가는 예측이 불가능한데 - 이러한 것을 랜덤 요인이라 한다 - 멘델은 단지 방대한 수의 실험을 하며(멘델은 2만 1,000건 이상의 식물 실험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를 분석하여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유전 법칙은 지금까지의 인간의 지식에 또 하나의 중요한 지식을 더해 주었다. 우리들의 생물학 지식은 앞으로 보다 많은 이용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멘델의 발견은 그의 생존 중에는 무시되었으나 그의 사후에 다른 과학자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멘델의 법칙을 뒤에 재발견한 드브리스, 콜렌스, 체르마크 등은 현실적으로는 멘델의 논문을 접하여 읽고 그 원형에 약간의 평가를 한 것에 불과하므로 이들 세 사람의 식물학자가 없었더라도 멘델의 연구 업적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멘델의 논문은 유전학 관련 도서 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이 분야의 학문 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뢴트겐:1845년에서 1923년까지, X-선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
오늘날 일생동안 병원 신세를 한 번도 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 뢴트겐 사진(X선 사진)을 한 번도 찍어 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X선은 질병 치료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며 이로 인해 많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발견한 사람 역시 전 인류의 은인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그 위대성이 빛난다 할 것이다.
뢴트겐 사진 또는 X선 사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뢴트겐이라는 말이 이를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뢴트겐은 독일의 물리학자로서 1845년에 독일의 레네프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일가가 모두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하찮은 일로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하고 곧 스위스의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거기에서 독일의 물리학자인 클라우지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869년에 그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조교 생활을 했다.
1872년에는 뷔르츠부르크 대학으로 옮겼으나 곧 그곳을 떠나 여러 대학으로 전전하다가 1879년에 가서야 기센 대학의 물리학 정교수가 됨과 동시에 동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차츰 과학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895년에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대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8일의 일로서 그는 레나르트(1862년에서 1947년까지, 독일의 물리학자)의 실험을 주시하고 있던 중 X선을 발견했다.
그가 음극선을 가지고 무언가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음극선은 전자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흐름은 진공관의 각 단말에 붙여 놓은 전극관에 고전압을 작용시켜 만들어진다. 음극선 그 자체에는 투과력이 없기 때문에 공중 수 센티미터에서 정지되고 만다. 이 경우에 그는 전류가 통해도 진공관으로부터는 빛이 보이지 않게끔 두꺼운 검은 종이로 음극선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하지만 그가 음극선관에 전류를 통하게 하니 때마침 가까이에 놓아두었던 형광성 스크린에 하나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음극선의 전류를 정지시키니 스크린의 형광도 소멸되었다(이 스크린은 바륨시안화 백금이라고 하는 형광체를 미리 코팅해 둔 것이었다.). 음극선관은 완전히 덮여 있었기 때문에 뢴트겐은 곧 무언가 방사선의 불 가시적인 것이 전류가 통하는 어떤 관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상한 성질을 갖고 있는 이 불가시 방사선을 'X선' 이라고 불렀다. X라는 글자는 수학에서 미지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우연한 발견에 자극된 뢴트겐은 그 동안 하고 있던 다른 연구 일체를 중지하고 X선의성질에 대해서만 연구를 집중했다. 수주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1) X선은 바륨시안화 백금 이외의 각종 화학 물질에도 형광성을 일으킬 수 있다. 2) X선은 보통 광에는 불투명한 많은 물질을 꿰뚫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살은 투시될 수 있으나 뼈에는 X선이 정지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뢴트겐은 음극선관과 형과 스크린 사이에 자기의 손을 놓고 자기 손의 뼈의 그림자를 스크린에서 볼 수가 있었다. 3) X선은 일직선으로 진해하며 파장의 작용으로 굴절되지 않는 것을 알고 X선은 음극선과는 별개의 것으로 음극선이 방전관의 벽에 부딪칠 때 발생하는 새로운 방사선임을 발견했다.
1895년 12월 뢴트겐은 X선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당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켜 대소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2, 3개월 뒤에는 수백 명을 헤아리는 과학자가 X선 연구를 시작하기도 했다. 뢴트겐의 X선 발견이 연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과학자 중 베크렐(1852년에서 1908년까지, 프랑스의 물리학자)은 X선과는 다른 방사선인 베크렐선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X선은 고에너지의 전자가 어떤 물체에 부딪칠 때 발생하는 것이지만 X선 자체는 전자를 구성하고 있지 않으며 전자파로부터 구성된다. 따라서 X선은 파장이 대단히 짧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가시광선(광파)과 유사하다. X선은 의과, 치과 등 의료 진단에 주로 이용되지만 방사선 요법에 의한 악성 종양의 파괴 또는 그 성장 저지에도 이용된다. X선은 다른 산업에도 많이 이용되는데, 예를 들면 공업 재료의 두께를 측정하거나 숨겨진 결함을 검출하는 데에도 이용된다. 또 X선은 생물학에서 천문학까지 광범한 과학 연구에 이용되기도 하며 특히 원자와 분자 구조에 관한 대량의 정보를 과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뢴트겐은 X선 발견에 대하여 전적인 공로를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단독으로 이를 연구했으며 그 발견은 예기치 않은 우연의 것이었지만 그것을 훌륭히 추적하여 연구를 마무리하였다. 더욱이 X선의 발견은 베크렐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뢴트겐의 중요성을 너무 과대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X선의 응용은 확실히 유익하지만 후에 패러데이가 전자유도를 발견했을 때와 같이 전 기술을 바꿀 정도의 것은 아니며 또한 X선의 발견이 과학 이론상의 진정한 근본적 중요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외선(이 파장은 가시광선보다 짧다)은 거의 1세기 전에 알고 있었던 이치다. X선의 존재(자외선보다 파장은 약간 짧으나 자외선과 유사하다)는 고전 물리학이 틀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뢴트겐은 X선의 성질을 더욱 깊이 조사하여 X선이 하전 물체에서 방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으며, 이 외에도 습기찬 기체의 적외선 흡수와 뢴트겐 전류의 발견을 비롯하여 빛의 편광면의 자기 회전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도 남겼다. 그는 이런 업적에 따라 1901년에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 후 독일의 뮌헨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23년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에디슨1847년에서 1931년까지, 1,300건 이상의 특허를 받은 미국의 발명가
오늘날 인류에게 일상생활의 편리를 위해 공헌한 사람은 많지만 그 중 에디슨처럼 다방면에 걸친 발명으로 이 세상을 밝힌 사람도 드물다.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은 1847년 오하이오주의 밀랜에서 태어나 정규 학교 교육은 3개월밖에 받지 못했다. 12세 때 열차에서 신문팔이를 했으며 15세가 되었을 때 철도의 전선 기사로서 종사하다가 독자적으로 철도의 통신 장치를 개량할 정도로 일찍부터 전기 계통에 재능을 보였다.
1875년경에 그는 뉴저지 주의 뉴어크에 발명품과 통신 기계 판매점을 개점한 후 다시 멘로파크에 연구소를 개설하였으나 곧 웨스트오렌지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발명품 개발에 전념하였다. 1,300건 이상의 특허를 받을 정도로 많은 발명을 했지만 그의 최초 발명은 21세 때 만들었던 전기식 투표 기록기였다. 그러나 이 기기는 팔리지 않아 이후부터는 시장성이 있는 물품의 발명에 주력했다. 그 결과 조금 뒤에 체커(시세 표시기)를 발명하여 약 4,000달러 어치를 팔아 당시로서는 제법 큰돈을 벌었다.
그가 발명한 것들은 주로 전기를 공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테레타이프등 유선 통신에 관한 것이 많았지만 1879년에 백열 전구와 탄소선 전구를 발명하고 1881년과 82년에 뉴욕에 한 시가에 발전소와 송배전 시설을 성공적으로 건설한 이래로는 발전기와 모터의 개량 응 전기의 동력 이용에 관한 발명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당시 전기의 이용은 소규모 통신용에서 대규모 동력용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였는데, 그의 전구 발명으로 전등이 보급되어 전기 수요가 증가했으며 이로써 대규모 전력 스테이션과 송배전 네트워크의 발전이 촉진되어 이른바 전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1879년에 이룩한 백열 전구의 발명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발명이다. 에디슨이 전기 조명 시스템의 최초의 발명가는 아니다. 그보다 2, 3년 전에 파리에서는 가두 조명용으로 실용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디슨의 발명은 송전 시스템과 일체가 된 에디슨 전구이며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전구였다.
따라서 1882년 에디슨은 뉴욕 시에 가정용 발전을 위해 회사를 창설하였으며 그로부터 가정에서의 전기 이용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가정용 송배전 회사가 최초로 설립됨으로써 거대한 공업의 발전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즉 전력의 이용이 전등에만 한정되지 않고 텔레비전부터 세탁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활용되었고, 또한 에디슨이 세운 배전망에서 전력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산업계에서의 전기 이용을 강력하게 자극하였다.
에디슨은 영화 촬영 카메라와 영사기의 개발에도 공헌했으며 또한 전화와 전신 그리고 타이프라이터의 개량에도 그 공헌은 실로 막대하다. 또한 구술 녹음기, 등사판, 알칼리 축전지 등 1,300건 이상의 발명 특허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그의 놀랄 만한 높은 발명 생산성은 일찍이 멘로파크에 연구소를 설치하고 유능한 연구원을 채용하여 자기를 보조하도록 한 것에 기인한다. 이것은 오늘날 대기업에 있어서 연구소 창설의 시초이기도 하다. 에디슨이 창시한 연구소는 그의 가장 중요한 발명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다. 그는 몇 개의 제조 회사와 상사 회사를 창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제너럴 일렉트릭이다.
에디슨은 기질적으로 순수 과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과학적 발명을 해낸 기술자이다. 1882년에 에디슨은 진공에 가까운 상태에서 두줄의 전선을 접촉시키지 않아도 전류가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 현상을 에디슨 효과라고 했다. 에디슨 효과는 이론적으로 대단히 흥미 있는 것인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발견으로서 열전자관 일렉트로닉스의 출발점이며, 뒤에 이것은 진공관의 개발로 발전되어 전자 공학 산업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에디슨의 발명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축음기이다. 오늘날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전축이나 오디오 기기는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에서 연유된다.
에디슨은 일의 조직자, 그리고 기업가로서의 재능도 대단해서 멘로파크의 그의 연구소는 발명과 그것의 공업화를 일관하여 추진하는 '연구개발 연구소'의 최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에디슨은 토키 영화, 축음기, 알칼리 축전지 등 일상적인 발명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보다는 전기 공업, 다시 말하면 과학 연구에 기초를 둔 공업의 발전이라고 하는 전반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공헌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발명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영광 대신에 중증의 난청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세 아이를 두었으며 1931년 웨스트오렌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에디슨이 사상 최대의 발명 재능의 소유자임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발명품의 대부분은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발명했을지 모를 일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인류에게 유익한 그의 발명품을 모두 다 모아 놓고 본다면 어떠한 사람도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명품을 하나하나 생각해 볼 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면 백열 전구는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현대 생활에서 다른 전구와 대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과학 원리로 만들어져서 지금 널리 이용되고 있는 형광등이 있어 백열 전구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 그렇게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축음기는 확실히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오늘날의 라디오, 텔레비전 시대의 일상 생활을 다소라도 변화시켰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소리를 녹음하는 자기 테이프가 개발된 후에는 축음기도 플레이어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과학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므로 비록 어제의 새 것이 오늘에는 헌 것이 될지라도 에디슨의 발명이 수십 년간 인류에게 커다란 이익과 즐거움을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그의 발명품이 오늘날 별로 유용한 것이 못 된다 해서 그의 업적을 과소 평가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상품들은 대부분 그 원류을 기초로 하여 개량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기억해 둘 것은 에디슨이 한두 개 또는 서너 개의 기계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1,300개 이상의 기계, 기구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에디슨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다."
라고 한 말을 깊이 새긴다면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메이지 천황:1852년에서 1912년까지,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제122대 천황
일본의 역사에서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봉건 정치 체제를 해체하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업을 성취한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과업은 메이지 유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일본 사회의 근대화, 다시 말하면 메이지 유신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간략하게 요약하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정치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토에 있던 상징적 존재인 천황과 에도(지금의 도쿄)에 자리잡고 있던 실권 정부 막부 그리고 지방의 275개의 봉건 영주경인 번주(흔히 다이묘라고 부른다)가 일본을 삼분해서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실체적 중앙 통치권을 행사한 지배 정부는 막부였다. 이 막부의 우두머리를 세이이다이쇼군이라고 부르고, 천황이 이를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나 그 임명에 있어서 천황은 재량권이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통치 체제를 막번 지배 체제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세습제인 도쿠가와 막부의 대장군도 최강의 봉건영주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지방 영주보다는 800만 석의 재정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할령과 하타모토 8만 기라는 근위 무사를 거느린 막강한 재정적·군사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그 지배 체제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275개 지방 영주라고 하는 다이묘는 각자의 영지와 무사 그리고 독자적인 법체계와 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막부와 독립된 위치에서 통치를 행하였으며, 막부는 원칙적으로 각 지방의 영주에 대해서는 그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었다. 간섭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며 그것도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이 두 중앙(막부)과 지방(번)의 관계는 동맹국간의 관계와 유사하며 단지 막부가 힘이 강하여 일본 통치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 정치의 분할 통치 체제를 타파하고 지금까지 실세를 갖지 못한 상징적 존재인 천황을 실세 천황으로 만들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천황을 앉혀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대정봉환을 실현하였으며 그 결과 막부는 소멸되고 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275개의 번은 폐지됨과 아울러 현제도로 대치되어 그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바치는 판적봉환이 단행되었다.
이 두 가지 혁명적 조치로 일본에는 250여 년 간 지속된 봉건 정치 체제인 막번 체제가 해체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중앙 집권 정부가 확립되었다. 이때가 바로 1868년이며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의 일이다. 또 이때에 추대된 천황이 메이지이며 그는 그 전대인 천황인 고메이 사후 즉위하자마자 토막파정치 세력에 추대되어 메이지 유신을 수행했다.
1868년 3월 14일 교토 어소에서 공경 제후 및 백관의 군신을 이끌고 천지 신명에 서약하는 현태로 유신 정부의 기본 방침을 천명했다. 이것을 일본 역사에서는 5개조의 서문이라고 친하였는데 그것은 첫째, 널리 공의를 일으켜 만기를 공론에 의하여 결정한다. 둘째, 상하가 합심하여 경륜을 지속적으로 펴 나라를 번창하게 한다. 셋째, 관과 무는 물론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그 뜻을 수렴하여 언제나 민심을 헤아리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넷째,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여 천하의 공도를 세운다. 다섯째, 지식을 세계에 널리 구하고 황실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이를 번창하게 한다. 이로써 메이지 신정부를 출범시킴에 있어서 천황과 신민이 공동으로 서약한 통치의 기본 방향이 확정된 셈이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16세의 어린 소녀이었다. 이 어린 천황이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근대화 과업을 독자적으로 영도력을 발휘하여 수행할 수는 없었다. 단지 유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당시의 선각자적인 유수한 지사들에 의해 당시 형식적인 왕으로 있던 그는 단일 중앙 집권 정부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일본 천황가의 만세일계의 정통성으로 보아 메이지 이외는 그 당시 추대될 인물이 없었다.
이러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의 일본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구체제가 붕괴되고 새 체제로 변혁되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있게 마련이고 또 그 필요성이 있게 마련이다. 또 거기에는 반드시 대외적 필요성과 대내적 당위성이 국민의 공감을 얻어 점차 일반적 공론으로 승화되며 이 공론을 목숨을 걸고 밀고 나가는 주역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있어서도 시대적 상황과 인물 등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250년 간의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는 일부 개항이 있었다고는 하나 원칙적으로 쇄국주의를 일관해 왔다. 그러던 일본에 1850년에 들어서면서 통상 개항을 강요하는 외세의 압력이 밀어닥쳤다. 이러한 압력은 조야를 막론하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태까지 보지도 못했던 외국의 거함(일본에서는 흔히 흑선이라고 했다)을 들이대면서 개항이냐 아니면 싸움이냐는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때는 1853년 7월 8일 아침, 사령관 페리가 이끄는 미국의 동인도 함대가 에도만 입구에 닻을 내리고 일본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필모어(미국의 제13대 대통령)가 일본 천황 앞으로 보낸 친서를 건네면서 통상 개항을 요구했다. 그 친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강력한 함대와 함께 페리 제독을 귀국에 파견하여 귀국의 유명한 에도를 방문케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우, 둘째 통상, 셋째 석탄과 식량의 공급, 마지막으로 우리측 난파민의 보호입니다.
페리의 내항을 계기로 일본 조야는 시끄러워졌다. 그것은 1871년 한말의 대원군 섭정 시대에 신미양요를 계기로 조정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과 일부 젊은 세대의 개항론으로 국론이 시끄러웠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할 것이다. 페리 제독은 위의 네 가지 요구 조건 중 통상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요구 조건을 관철하고 돌아갔으나 그는 이듬해 1854년 2월 13일 에도 만에 대진용을 이끌고 다시 보습을 나타냈다. 그는 미일 통상조약 초안을 가지고 왔으나 통상 부문에 대한 일본의 변함 없는 반대 의사를 확인하고 영사 파견에 대한 동의를 얻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상 조약의 교섭을 재개한다는 의사를 안기고 불러갔다. 그러나 페리 제독의 내항과 통상 개항의 요구를 계기로 일본 사회는 긴 잠에서 깨어나 세계의 흐름에 눈을 떴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적 문제에 대한 대응과 전략에 중앙 정부격인 막부의 무능이 드러남에 됨으로써 지난 250여 년 간 쇄국 정책을 일관해온 막부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교토에서 칩거하던 천황도 소리를 내게 되고 지방의 영주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천황 고메이는 강한 양이론에 섰으며 각 지방 영주들은 제각기 양이론과 개항론으로 편이 갈라졌다. 막부는 그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일본 역사에 있어 이때처럼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의 중심이 흐트러져 대외적 대응에 있어 갈팡질팡할 때가 없었다. 이제야 일본 정치에 있어 강력한 정치적 리더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봉건적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강력한 일원적 중앙 집권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 정치 체제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공감하는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인재들은 막부의 고관 현직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 또 지방 봉건 영주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방 봉건 영주에 속해있던 하급무사이거나 중류층 출신의 신진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막부를 타도하는 길만이 일본을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는 토막파의 선봉자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조정(천황)과 막부를 한데 묶어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공무합체파도 생겨났으나 결국은 토막파가 승리하여 메이지유신은 성공을 거두고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업은 완수되었다.
토막파의 주류는 규슈 남단에 사쓰마번의 하급 무사에 속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지금의 시고구의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토막파의 무혈 개성을 이룩하게 한 도쿠가와 막부의 중신 카쓰 가이슈를 많은 메이지 유신의 4걸이라고 부른다. 이들이야말로 일본 사회를 근대화로 바꾸어 놓은 핵심 인물이며 메이지 천황은 이 사람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다.
이들 메이지 유신의 4걸 중 사이고와 오쿠보는 사쓰마번의 하급 무사급의 서민 출신이고 각각 1827년 생과 1830년 생으로 비슷한 연배에 속하는 젊은이들이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초슈번, 또 한 사람의 주역인 이와쿠라 도모미는 넓은 의미의 초슈 출신으로 중류 출신(문사)이었으며 각각 1833년 생과 1825년 생들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국내외 정세에 밝은 재사로서 1835년 생이고, 메이지 유신에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인 카쓰 가이슈는 토막파인 위 다섯 사람과는 달리 도쿠가와 막부의 막신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막부의 직할 무사단인 하타모토 출신이다. 카쓰 가이슈는 1923년 에도 출신으로 어릴적에 4년 간 홍복사에서 좌선 수양했고 그 뒤 화란학에 눈을 떠 공부한 후 화란학 학원을 개소, 후진들을 양성하고 대포와 철포의 포대 설계를 하며 일본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 후에 막부의 우두머리 아베에게 천거되어 관운이 트인 재사로서 당시의 정부인 막부 신료 중에서 도미 경헙을 갖는 등 세계 정세에 밝고 국제 감각을 가진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위 다섯 사람의 존왕토막파와 중앙 정부격인 막부의 뛰어난 카쓰 가이슈의 단수 높은 책략과 묘수가 엮어 낸 정치 예술이었다. 사이고를 비롯한 유신 4걸은 모두 나이가 30대 전후의 젊은 엘리트로서 일본국 미래의 정치 비전이 확고하고 그 비전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불사르려는 의지가 강철같았다. 또 이들 모두가 일본국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던 번 출신이라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중에서도 토막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동원을 불사했던 주된 역할을 한 번은 사쓰마와 초슈였다. 그러나 초슈와 사쓰마는 원래부터 사이가 썩 좋지 않던 번이었다. 사쓰마 번의 대표격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한때 공무합체파로서 막부의 초슈 정벌의 참모이기도 했다. 그러던 사이고가 토막으로 돌아서서 초슈번과 결탁하게 된 것은 그 동안 존왕·양이로 들끓던 시기가 지나가고 그 뒤 시대적 변화를 요구하는 전국 각지의 민중의 움직임이 웅번 초슈와 사쓰마가 서로 손잡아 구정권 막부에 대체되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원을 품고 있던 두 적수가 그렇게 간단히 화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두 번의 결정적인 화해의 전기가 찾아왔다. 그 첫째는 1864년 9월 막신 카쓰 가이슈와 사쓰마 번의 대표 사이고와의 회담이다. 카쓰는 초대면의 사이고에 대하여 당시 막부의 내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이미 정권 담당 능력을 상실한 막부를 제외하고 웅번 연합의 힘으로 외세의 압력에 대처할 것을 역설하였다. 사이고는 이때 비로소 열강의 외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막번 체제를 초월하는 새 일본국의 건설이 필요함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라이벌로 여겼던 초슈 번에 대한 생각도 수정하게 되었다. 또 사이고는 막부를 주축으로 하는 공무합체 노선의 실현 불가능함을 카쓰로부터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회담은 사쓰마번이 토막으로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번의 화해의 전기는 도사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가 선중팔책에 입각한 새 국가 건설의 구상의 실현을 위하여 두 웅번을 설득한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팔액은 1867년 6월 그가 나가사키에서 상경하던 중 배 안에서 작성한 것인데, 그는 지금까지의 번 체제를 초월한 의회론적 신 국가의 구상을 사쓰마번의 사이고와 초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에게 설명하고 이를 위하여 종전의 막번 체제를 타도해야 한다며 두 번의 결맹화가 불가피함을 설득했다. 여기에는 또 한 사람 나가오카 신타로가 있다. 사카모토는 사쓰마번과 친교가 깊었고, 나가오카는 초슈번과 밀착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화해 공작을 개시하여 드디어 1866년 1월 22일 역사적인 삿초동맹을 사쓰마번의 대표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초슈번의 대표인 기도 타카요시 회담에서 체결하였다.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은 다음과 같다.
1) 정권을 조정(천황)에게 봉환할 것
2) 조정과 정부는 상하의 의정국을 설치하고 만기(정치상의 제문제)를 공의에 의해서 결정할 것
3) 천하의 인재를 등용할 것
4) 외교는 공의에 의해 결정할 것
5) 불후의 헌법을 제정할 것
6) 해군을 확장할 것
7) 친병(천황이 친히 거느리는 군사) 직할군을 설치할 것
8) 외국 화폐와의 교환을 제도화할 것
그런데 이 이전에 사카모토의 출신번인 도사는 막부에 대하여 맨 먼저 대정봉환을 건의했으며 막부는 시류를 감안하여 그 건의를 바로 거절하지 않고 이에 대신하는 공무합체(천황과 막부의 협력 체제)를 성립시켜 그 주도권을 계속 확보할 속셈이었다. 사카모토는 대정봉환이 막부의 반대나 또는 간계로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사쓰마와 초슈 두 번의 연합을 통한 무력 토막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삿초 동맹의 체결로 이것이 실현된 셈이었다.
토막파의 대정봉환 요구가 막부에 의해 지지부진 진척이 없자 드디어 토막이 시작됐다. 1867년 12월 9일 사쓰마, 도사 등의 번병 중심으로 조정의 어소에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 정치를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일본은 왕정과 막부의 두 개 정부가 탄생했다. 그 모임에서 토막파들은 대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임과 반납지를 결정하고 막부가 이에 순응할 것을 통고했다.
이에 대해 막부는 쿠데타군 토벌을 발표하고 진군을 개시했다. 양군은 교토 부근의 도바 후시미 부근에서 충돌하였으나 삿초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그 세를 몰아 마침내 막부의 수도 에도를 공략하려 할 때 사카모토 료마의 새 국가 구상론과 정치 철학에 깊숙이 젖어 있던 막신 카쓰 가이슈가 막부의 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고, 막부의 대표로서 왕정토막군의 사이고 다카무리와 담판하여 무혈로 성을 열어줌으로써 250여 년 간의 도쿠가와 정권은 멸망하고 천황 정부가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되었다.
한편 지방 봉건 영주가 지배하고 있던 번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메이지 원년인 1868년부터 2년에 걸쳐 판적봉환(지방 영주들이 그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조치)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진척이 지지부진하자 왕정 복고의 대목적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메이지 유신 주역들인 사이고, 이와쿠라, 기도, 오쿠보등이 협의하여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명실공히 250여 년 간 존속되어온 막번 통치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전국 통일 중앙 집권 정부가 창건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일본은 근대화 과업을 성취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부국 강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개항 정책) 오늘의 일본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도 이러한 기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선각자적 개화파도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힘보다는 조정 통치권자의 쇄국 척화 세력이 너무나 강했고 또 외세 의존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이 국론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또 일본에서와 같은 무능한 왕정을 몰아내고자 하는 끈질긴 세력도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에 합병되는 비극을 맞게 되는데 이는 일본의 개화파가 한국의 쇄국파를 집어삼킨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을 구상하고 약진시킨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무사 애국의 마음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돌진한 거물 사이고 다카모리, 자기와 국가를 동일화하여 새 국가 건설을 주야로 생각하며 행동한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와쿠라 도모미, 국가라는 건물 해체의 대설계자로 국내외 정세를 읽고 국가의 새 좌표를 설정한 카쓰 가이슈. 1860년대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대선각자적 정치가가 없었는지 한탄스럽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어느 주구도 자기의 공적에 의해서 축재를 시도하거나 또 자기의 지위를 자손에게 세습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급 무사에서 몸을 일으켜 메이지 혁명을 성공시켜 일본을 구미 열강에 뒤지지 않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사명감을 끝까지 갖고 있었다. 메이지 새 정부의 원훈들의 이러한 모범정신은 오늘날에도 일본의 밑바닥에 유유히 흐르고 있다.
라이트 형제:1871년에서 1948년까지, 비행기를 발명한 미국의 형제 엔지니어
라이트 형제 중 형인 윌버 라이트는 1867년 인디애나주 밀빌에서 태어났고, 동생인 오빌 라이트는 1871년 오하이오주의 데이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다 고교 교육은 받았지만 졸업 증서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둘 다 기계 조작에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어 유인 비행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1892년 두 사람은 거리의 허름한 소공장을 매입하여 자전거의 제조와 수리를 시작했지만 꿈은 원대하여 비행 연구라는, 그들에게 있어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자금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비행에 관한 도서, 예를 들면 오토 릴리엔탈(1848부터 1896년까지. 독일의 항공 기술자, 활공기를 만들어 운행하다 추락사), 옥타브 샹트, 그리고 새뮤엘 랭글리(1834년부터 1906년까지. 미국의 물리학자, 최초의 동력 무인 비행에 성공) 등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그리하여 1899년에는 그들 자신이 직접 비행하기 위해 문제 해결에 몰두하였다. 4년 남짓의 연구 끝에 드디어 1903년 12월 그들 나름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비행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까닭으로 라이트 형제만은 이에 성공할 수 있었느냐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성공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세 사람이 함께 모이면 문수(지혜를 맡은 보살)의 지혜가 생긴다는 격언.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는 그야말로 완전한 협력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최초부터 동력이 붙은 비행기에 매달리지 않고 어째서 뜨게 되는지를 배우는 것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다소 역설적이기도 하다. 즉 우선 비행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뜨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느냐라고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글라이더를 사용해서 연구했던 것이다. 1899년 이 형제들은 연과 글라이더로써 실험 연구에 매달렸다.
그 다음에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호크로 완성한 글라이더(1인승)를 운반하여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별로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1901년 다시 2호기를 만들어 시험했으며, 1902년에는 세 번째의 시험을 실시하였다. 이 3호기 글라이더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기술 혁신이 강구되어 있었으며, 이 3호기로써 라이트 형제는 1,000회 이상의 활공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동력 비행기의 제작에 착수하기 전에 이미 이 형제는 세계 최고의 노련한 글라이더 조종사가 되어 있었다. 이 활공 비행의 경험을 계속 축적한 것이 성공에의 제 3의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이때까지 비행기의 제작을 시도해 본 많은 사람들은 주로 지상에서 이륙할 때의 연구에 머리를 썩히고 있었지만, 이 형제는 비행기가 상공 높이 올라가서부터의 컨트롤이 최대의 문제란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비행 중에 기체의 안정 유지와 제어에 유효한 설계에 관하여 가장 많은 시간을 걸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기체를 삼축으로 제어하는 방법의 연구에 성공함으로써 완전한 조종 운전을 달성하였다.
또, 이 형제는 날개의 설계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하여 종래의 문헌이나 데이터에는 별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독자적인 풍동(인공적으로 기류를 일으키게 하는 터널형의 장치, 즉 항공기의 공기 역학적 성질의 실험용)을 만들어 200종 이상의 여러 가지 날개를 만들어 실험했다. 이러한 실험으로부터 날개의 형태에 따라 날개에 걸리는 공기 압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수치표를 작성했다. 이로부터 얻은 지식이 비행기 날개의 설계에 이용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은 업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형제가 역사상 시의에 알맞게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성공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력 비행의 계획이 만약에 19세기 전반이었더라면 실패는 불가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증기 엔진은 출력에 비하여 중량이 너무 많았다. 그 때문에 라이트 형제가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때에 이미 효율이 좋은 내연 기관이 개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내연 기관을 비행기 엔진으로 하기에는 동력에 대한 중량비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당시의 제조업자의 기술로는 그 이상의 중량 대 동력의 가가 낮은 엔진의 설계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형제는 기계공의 조력을 얻어 독자적인 것을 설계했다.
이 두사람은 그 엔진의 설계에는 별로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더욱이 어느 전문 메이커보다 성능이 좋은 엔진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 형제의 탁월하고도 우수한 자질은 실증되었다 할 수 있다. 그 위에 그들은 독자적인 프로펠러를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03년 그들이 사용한 것은 60%의 효율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초의 비행은 1903년 12월 17일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의 근처에 있는 어떤 언덕에서 행해졌다. 그 날 이 형제는 각각 두 번의 비행을 실시했는데 최초에 비행한 동생 쪽이 12초간 36.6m, 다음 형의 비행은 50초간 약 260m이었다. 이들은 이 비행기를 플라이어 1호로 명명하였고 그 제작비는 1,000달러 이하였다. 날개의 폭이 12.2m, 중량 340Kg, 엔진은 77Kg으로 12마력을 낼 수 있었다. 이 비행기의 현물은 지금도 워싱턴 D. C의 국립항공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 비행 실연의 목격자는 다섯 사람으로 다음날 몇몇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지방 신문은 이 비행을 완전히 무시하여 한 줄의 기사도 실지 않았다. 유인 비행이 실제로 행하여진 것이 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런 일이 있은 날로부터 5년 뒤였다. 그리하여 키티호크에서의 비행을 끝낸 라이트 형제는 데이턴에 돌아와 2호기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리고 1904년 그 2호기로서 105회의 비행을 실시했으나 어느 곳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음에 완성한 플라이어 3호는 더욱더 실용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계량에 노력하여 1905년에 제작되었다.
그리하여 데이턴 근처에서 몇 번이나 시험 비행을 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비행기가 발명되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06년에 '헤럴드 트리뷴'의 파리판 기사가 송부되어 있는데 그 표제가 'Flyer or Liars?'. 즉 '나는 나는사람이냐 거짓말쟁이냐'였다.
그러나 1908년 이 형제는 일반 대중의 의문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형은 비행기 1호를 가지고 프랑스에 가서 거기에서 데먼스트레이션 비행(시위 비행)을 연속적으로 실시하고 다시 이 비행기를 상품화하기 위해 회사까지도 설립했다. 한편으로 미국에 잔류하고 있던 동생도 똑같이 일반 공개를 시작했으나, 불행하게도 1908년 8월 17일 그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으며 이 사고로 승객 1명이 사망하고 동생은 한쪽 다리와 늑골 2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으나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곧 미국 정부는 국방성을 통해 비행기 구입을 위한 계약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1905년의 재무성의 예산에 군용 비행기 구입용으로서 3만 달러가 계상되었다.
그 후 잠시 동안 라이트 형제는 특허 분쟁으로 경쟁 상대로부터 피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이에 대한 판결은 1914년 라이트 형제의 승소로 끝났다. 그런데 겨우 성공을 거둔 형이 장티푸스에 걸려 1912년에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어 큰 빛을 못 본 애 생애를 마쳤으니 이보다 더 애석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동생 오빌 라이트는 항공기 회사에 대한 그의 재정상의 권리를 팔아 넘기고 비행기 제작에서 손을 뗀 채 1948년까지 생존해 있었다. 형제가 다 같이 생애를 독신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자손은 없다.
하늘을 날려는 연구와 기도는 옛날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비행기를 실제로 발명하는 데 있어 그 중심적 역할은 당연히 라이트 형제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항공기의 이용 면에서 본다면 비행기의 발명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세기적 발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항공기는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광대한 지구 공간을 좁혀 세계를 협소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벨의 전화 발명이 지구인의 의사 소통을 시간적으로 좁혀 놓은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태워서 날 수 있게 한 이 형제의 성공은 우주로의 여행도 곧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년간 인간은 하늘을 나는 것을 꿈꾸어 왔으며, 몽상 소설이나 또는 동화, 그리고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읽은 하늘은 나는 융단은 단지 인간의 소망을 담은 꿈에 불과하여 결코 현세에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그러므로 라이트 형제가 인류에 공헌한 업적은 인류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꿈과 동화 같은 이야기를 현세에 실현해 주었다고 것에 있으며, 우리들이 오늘날 지구를 옛날의 1년권에서 1일권 내로 왕래하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엄청난 편리와 쾌적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으로, 그 원조인 라이트 형제에게 우리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레닌1870년에서 1924년까지, 공산 국가를 창시한 러시아의 혁명가
러시아 공산 혁명의 지도자, 구소련 건설자로 널리 알려진 레닌의 본명은 브라디미르 이리치 울랴포프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미 17세 때에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오랫동안 제정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혁명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계속한 사람이다.
그는 1870년에 심비르스크(오늘날에는 그의 영예를 위해 울랴코프스크라고 부르고 있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제정 러시아의 관리였으나 그이 형 알렉산드르는 반제정 과격파로서 황제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레닌도 23세 때부터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으며 미래를 꿰뚫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그는 제정 러시아의 붕괴와 공산 혁명의 성공을 간파하고 있었다. 1895년 12월에 그는 혁명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차르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3개월간의 감방 생활을 겪은 뒤에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3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에서 혁명 동지인 여성과 결혼하 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저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제정 러시아의 사회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면서 차츰 공산 혁명의 제조건이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나름대로 점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보게 된 것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식민지 재분할과 자본의 수출이 심화되고 있었고, 러시아도 제국주의의 일익이 되기는 했으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불균형하여 공업과 농업과의 격차가 너무 커 노동자 계급과 농민의 태반이 무권리 상태로 궁핍에 신음하면서 제정의 현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 점에서 러시아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판이한 정세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레닌은 스위스에 망명 중이었는데 그때 그는 '제국주의'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그 책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 단계에서 적응.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세계대전에 의해 자본주의의 취약한 부분에 파열이 생겨 제국주의 l국가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러시아 혁명에로 전화시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적중하였다. 세계대전에 참가한 제정 러시아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국민 생활의 혼란과 절망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이에 대처하는 니콜라이 2세(1868년에서 1918년까지, 러시아 최후의 황제)의 정치적 무능과 궁정의 부패는 국민의 격분을 사서 마침내 1917년 3월에 민중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를 축출하였다. 이것이 소위 3월의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이다.
니콜라이 정부가 타도된 후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평의회)를 만들었고 이것은 각 계층으로 파급되어 급기야는 농민 소비에트도 생기게 되었다. 이 농민 소비에트와 인텔리 층에 기초를 둔 사회혁명당 멘셰비키가 3월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는 볼셰비키는 3월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임시 정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3월 혁명이 시작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4월에 스위스에서 적국 독일을 거쳐 귀국한 레닌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소위 '4월 테제'(1917년 4월에 레닌이 발표한 볼셰비키의 혁명 전략)를 발표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을 호소했다. 이에 머물지 않고 그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에로의 이행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 혁명을 주도했다. 볼셰비키는 그의 방침을 밀어붙여 7월에 무장 시위 운동을 감행했지만 실패하였고 부득이 레닌은 다시 잠시 동안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9월에 접어들면서 7월에 성립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연립 정권이 케렌스키 정권은 코르닐로프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 세력과 대치하게 된다. 또한 평화를 희구하는 민중을 무시하고 전쟁 계속 정책을 취한 케렌스키 정권 밑에서 전쟁 반대, 임시 휴전을 표방한 볼셰비키는 더욱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케렌스키 정권이 점차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어 가고 있는 틈을 타서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에서 만들어진 볼셰비키는 권력 획득을 위한 무장 봉기를 결행하고 드디어 11월 7일에 성공함으로써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었다. 이로써 러시아의 새로운 역사적 발걸음이 시작됨과 동시에 현대 세계의 새로운 정치 체제가 출발하였다.
러시아의 새로운 수장이 된 레닌은 당초 일체의 타협을 배격하고 즉시 완전한 사회주의경제로의 급격한 변혁을 실행하려 했으나 만약 그것이 생각하는 대로 잘 진전되지 않으면 모처럼의 혁명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어 그는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를 혼합하는 제도를 확립하여 수년간 소비에트 연방(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에 시행했다.
그는 집권 후 얼마 되지 않은 1922년 5월 뇌일혈을 일으켜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에 5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관속에 향료를 채워 방부 처리한 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영묘에 안치되었다.
레닌은 뭐니 뭐니 해도 러시아에 공산 정부를 세계 최초로 수립한 행동인으로서 그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유물 사상을 이어받아 이것을 현실 정치에 실천한 최초의 마르키스트다.
1917년 1월이래 공산주의 세력은 세계 속에 확대를 계속하여 한 때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은 공산 세력 하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에 와서는 구소련, 동구 등 공산 정권 붕괴로 많이 줄었다). 그는 저서를 통한 영향력도 대단한 정치인으로서 레닌의 사상은 현실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상반되지 않지만 그가 강조하는 점은 마르크스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레닌은 혁명의 전술에 강한 의심을 갖고 끊임없이 공산 혁명에 있어 폭력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계급 투쟁에 있어서도 역사상 폭력 없이 문제가 해결된 바는 없다." 이것이 그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때때로 언급한 바 있었으나 레닌은 거의 이 문제에 부심 하면서 매달리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폭력을 기틀로 한 위력 의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어떤 제재도 있을 수 없다. 법률도 없지만 지배도 절대로 없다."
고 말했다. 레닌의 독재에 대한 사고 방식은 사실 그의 경제 정책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 정부의 가장 뚜렷한 특색은 경제 정책보다는 정치력을 무제한으로 보존하려는 기술을 가지려고 한 점이다. 레닌 시대이래 세계 어디에서도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된 국가에서는 그것이 전복된 예는, 최근의 탈 이념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한 나라도 없었다. 국내에서의 여러 가지 힘이 되는 제도, 가령 신문, 은행, 교회, 노동 조합 등은 모두 엄격하게 통제하여 공산주의 정부는 내부 붕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 그 어느 운동보다도 역사적 의의가 대단히 큰 운동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적어도 이 운동에서 마르크스와 레닌 중 누가 더 큰 영향력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볼 때 명확한 대답을 하기는 곤란하다. 단지 마르크스는 레닌에 앞서 생존했고 레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레닌보다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레닌의 실무적, 정치적 재능이 러시아의 공산화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만약 레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공산주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기회는 더 오래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강력하게 조직된 반대 세력에 직면하여 결과적으로 공산화는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닌의 중요성을 판단함에 있어 그의 집권기간이 비교적 짧은 것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소련의 독재 체제를 확립한 사람은 가장 냉혹한 후계자 스탈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레닌에 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레닌은 전 생애를 통하여 맹렬하고도 유능한 공산주의 일꾼이었다. 그는 다산적인 능필가로도 유명하며 자기의 저서를 취합하여 55권의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혁명이라는 과업과 그 사명에 모든 것을 바쳤으며 전 생애를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억압의 배제를 걸었으나 그 성과는 세계의 많은 곳에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레닌 혁명 후 70여 년간 세계를 휩쓸던 공산주의의 열풍도 또한 그가 믿었던 자본주의 필망의 역사적 당위성도 결국은 자본주의 열풍의 도도한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시도했던 소련의 공산화는 소련 인민에게 가난과 억압만을 남겨 놓은 셈이다.
스탈린:1879년에서 1953년까지, 소련의 정치가,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의 원명은 이오시프 비자리오 노비치로서, 1879년 카프카스지방의 그루지야주의 고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모국어는 그루지야어로서 러시아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어른이 되고 난 후에야 러시아어를 배웠기 때문에 그루지야 사투리의 악센트를 가진 러시아어로 말했다.
스탈린은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신발 수선공으로 술을 즐기고 아들을 자주 구타하였으므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는 스탈린이 11세가 되었을 때 죽었다.
어렸을 때 스탈린은 티플리스에 있는 신학교 다니던 중, 1899년에 파괴 사상적인 글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곧 그는 지하 조직의 마르크스 운동에 참가하였으나 1903년에 파벌간의 불화로 볼셰비키파 쪽에 가담하였다.
운명의 1917년이 가까워옴에 따라 그는 지하에서 뛰쳐나와 실제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 일파의 구성원이 되어 활약하다가 적어도 여섯 번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판결 형량은 언제나 가벼웠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그의 행동이 언제나 이중 스파이의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형을 감량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는 대단히 적절한 별명인 '스탈린'(강철같은 사나이라는 뜻)을 사용하고 있었다. 1917년 공산 혁명 때 스탈린은 결코 주역을 맡지는 않았으나 그 후 활발한 행동으로 1922년에는 공산당의 서기장이 되었다. 이 직책에 취임한 후로부터 그는 행정 관리면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레닌 사후에 발생한 내부의 세력 다툼에서 그가 성공하게 되는 주인이 되었다.
레닌이 트로츠키(1879년에서 1940년까지. 스탈린과 대립하여 1927년 공산당에서 제명 당함)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레닌이 유서에 스탈린은 너무나 성격이 냉혹하기 때문에 서기장의 지위를 박탈해야 된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레닌의 사후인 1924년에 스탈린은 레닌의 유서를 삭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나아가 공산당 정치국의 두 번째 주요 멤버인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레닌 비서. 스탈린 노선 반대자)와 함께 트로이카 방식 (삼두 정치)으로 당 운영을 하기로 했다. 이 세 사람은 단결하여 트로츠키와 그 일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상의 내부 항쟁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스탈린의 다음 공격 목표도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두 사람이었으며 마침내 그 목표도 달성되었다.
반좌익파(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그 지지자들)와의 세력 싸움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반좌익파의 정치적 공약 중에서 몇 가지만은 채택하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그리고 조금 후에 곧 그는 옛날의 맹우, 공산당의 우파 지도자에게 그 공격 목표를 돌려 이번에도 승리를 획득함으로써 1930년에 이르러 그는 소련의 유일한 독재자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절대적 권위의 자리에 앉은 그는 1934년부터 격렬한 숙청 공작을 연속적으로 단행하였다. 1934년 12월 일 그는 공산당의 고위 간부이며, 자기의 조언자였던 세르게이 키로프를 암살한다. 키로프의 살해는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서 주된 목적은 앞으로 계속되는 숙청의 구실(측근자도 잘못이 있으면 죽인다는)을 만드는 데 있었다.
그 이후의 수년간을 통하여 1917년의 혁명기간 중의 공산당 지도자 또는 레닌 치하의 지도자 태반이 스탈린에 의해 반역죄의 혐의로 차례차례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그것도 인민 재판에 붙여져 대중 앞에서 자기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소위 자기 비판의 형식으로 처형되었다.
1938년 최초의 숙청자 중 최고위에 해당하는 야고다는 스스로 반역죄를 고백하여 처형되었으며, 그의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니콜라이 예조프도 똑같이 숙청 당했다. 1930년대 중엽 숙청은 공산당과 적군의 군부 전체에 확대되었다. 숙청 작업은 처음부터 반공산주의자와 반혁명주의자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자에 대한 숙청은 레닌 치하에서 대부분 끝난 상태였다. 스탈린의 피의 숙청은 정확히 말해서 공산당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스탈린은 차르 제정 지지자가 행한 것 이상으로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이 보다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1934년의 공산당 전국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회의 구성원 3분의 2가 그 뒤에 계속된 숙청에 의해 죽음을 당했음이 이를 증명한다. 이 사실을 보더라도 스탈린의 본래의 숙청 동기는 국내에서 자기 이외의 독립된 권력의 확립을 배제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명목상의 민주 헌법을 공포했을 때가 피의 숙청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스탈린이 제도화한 경제 정책 중에는 농업의 강제 공여화가 있다. 이 정책은 농민에게는 극히 인기 없는 것으로서 많은 농민이 이에 저항했다. 이로 인해서 1930년대 초기부터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수백만의 농민이 처형되었거나 도는 아사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정책을 힘으로 추진하는 길밖에 없었다.
수차의 5개년 계획도 힘으로 행하여졌으니 확실히 비능률적이긴 했지만 5개년 계획 중공업화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방대한 양의 자원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이 전쟁으로 인해서 세계 제2위의 공업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1939년 8월 히틀러와 스탈린은 유명한 상호 불가침 조약이란 것을 맺었다. 이로부터 2주도 지나지 않아서 히틀러는 서쪽에서 폴란드에 침입하였으며 이에 맞서 2,3주 뒤에는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하여 그 나라의 동반부를 지배하게 됐다. 그해 말에는 독립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위협했다. 이 3개국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여 소련에 합병되고 말았다.
핀란드는 이러한 소련의 위협을 거부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다. 이러한 약소 국가를 합병할 때의 소련의 상투적인 수단은 '예상되는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방위상 소련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영토이기 때문'이라고 스탈린은 변명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군이 완전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한번 점령한 영토 중 한 군데라도 반환하겠다고 제창한 일이 없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스탈린의 후계자도 똑같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도 소련군은 동부 유럽 나라들을 그대로 점령하여 그 지역에 철저하게 소련에 의존하는 공산 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섰지만 소련군이 그 나라에는 침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 스탈린은 다른 동유럽 공산 제국이 유고슬라비아의 예를 따르지 않게 하지 위한 방지책으로서 동유럽 제국에 숙청 제도를 실시했다.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시작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일이다. 냉전을 유발시킨 책임의 일단을 트루먼 대통령(1884년에서 1972년까지,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을 비롯한 구미 지도자에게도 돌릴 수 있겠지만 그 진정한 책임의 무게는 스탈린에게 더 실려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1953년 1월 소련 정부는 어떤 의사 집단을 소련 정부 고관의 암살을 계획한 죄과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는 스탈린이 다시 한번 철저한 숙청 계획을 은밀히 수립하고 있다는 감을 모든 사람에게 던져 주었다. 그러나 그는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크렘린에서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그 유해는 붉은 광장이 있는 광대 장려한 묘에 레닌과 함께 나란히 매장되었다. 그 후 수년간 스탈린의 이름은 급전 직하로 떨어졌다. 특히 1956년 2월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의 연설 이후에 두드러졌다.
스탈린의 가정 생활은 별로 유복하지 못했다. 1904년에 결혼했으나 3년 후에 부인이 결핵으로 사망했고 무녀 독남인 야코프는 제2차 대전에서 독일 군에 생포되어 독일 군이 상호 교환을 제의했으나 스탈린이 이를 거절하여 결국 야코프는 독일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를 보더라도 스탈린이 얼마나 냉혹한지 잘 알 수 있다.
스탈린은 1919년에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두 번째의 부인도 1932년에 주고 말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자살했다고 하나 스탈린의 냉혈성으로 보아 그가 죽였거나 또는 자살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기도 했다. 두 번째의 결혼에서 두 아이를 두었는데 그 중 아들은 소련 공군의 조종사가 되었으나 뒤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1962년에 사망했고 딸 스베틀라나는 소련을 탈출하여 1967년 미국에 귀화했다.
스탈린의 사람됨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특징은 철저한 냉혹성이다. 애정이나 동정, 연민 따위는 그에게 한 점도 없었다. 그는 또한 편집광에 가까울 정도로 의심이 깊은 성질의 소유자였다. 반면 정력적이면서 완고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거의 사반세기 동안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스탈린은 사상 최대의 나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탈린은 생존 중에 수백만 명의 생명을 빼앗았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냈다. 스탈린이 감행한 숙청의 결과로 몇 사람이나 죽음을 당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세계 여론은 적어도 2,0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아인슈타인:1879년에서 1955년까지, 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독일 태생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대의 과학자이며 전시대를 통하여 최고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그의 상대성 이론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이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1905년에 완성한 특수 상대성 이론과 1915년에 완성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 그것이다. 이 두 이론을 한데 묶어 아인슈타인의 인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두 이론 모두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해서 여기에서 그 해설을 할 생각은 없으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해 극히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격언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그러한 철학적인 상투적 문구의 반복은 아니며 언제나 과학적 관측은 상대적이라는 방향에서 매우 정밀한 수학적 기술이며 어떤 시간과 공간의 주관적 개념도 관측자에 따라 그 상위성이 명백한 것인데도 아인슈타인 이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주관적 인상의 배후에는 정밀한 측정기에 의해 객관적으로 그 측정이 가능한 참다운 거리와 절대적 시간이 존재하는 것으로 늘 믿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아인슈타인 이론은 절대 신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과학 사상에 일대 혁명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예는 그의 이론이 시간.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얼마나 철저하게 수정하도록 하는가를 실증하고 있다. 먼저 우주선을 생각해 본다. 초당 10만 km의 속도로 지구를 떠나 운행하는 우주선 X호가 있다고 했을 때 이 속도는 우주선 안과 지구상의 양쪽에서 관측하면 그 측정치는 일치한다. 다음에 또 하나의 우주선 Y호를 앞선 X호와 똑같은 동일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고 다만 이때 속도는 X호보다 빠르게 했을 때 지상의 관측자가 우주선 Y호를 측정해 보니 Y호는 초당 18만 km의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져감을 알 수 있었다. Y호상의 관측자도 같은 측정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우주선은 동일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두 우주선의 속도 차는 초당 8만 km이며 빠른 쪽의 우주선은 그 비율로 느린 쪽의 우주선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두 우주선으로부터 관측하면 두 우주선상의 관측자는 두 우주선 사이의 거리가 초당 8만 km가 아니라 10만 km의 비율로 벌어진다는 관측 결과를 예측했다.
위에서 본 결론에 대해 독자 중에는 바보 같은 결론이며, 혹시나 말의 표현에 뭔가 트릭(속임수)이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뭔가 중요한 세부점이 생략 또는 축소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결과는 우주선의 구조적 세부에도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추진에 사용된 원동력에도 관계가 없다. 또한 관측상이 오류도 없을 뿐 아니라 측정기에도 하등의 결함이 없다. 일체의 속임수는 물론 없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앞서 말한 결론은 시간과 공간의 기본적 성질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귀결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고도의 이론이며, 현실적으로 다년간에 걸쳐 사람들은 상대성 이론을 일종의 상아탑의 가설 정도로 생각하고 전연 실용적 가치가 없다며 외면하고 있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고 난 다음에서야 이와 같은 상대성 이론의 현실적 무용론을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됐다.
상대성 이론의 결론의 하나(시간과 공간은 서로 결부되어 4차원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물질과 에너지는 동등하며, 양자의 관계는 E=MC2이라고 하는 공식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빛이 속도를 나타낸다. 초속 3,000만 km라고 하는 광속 C는 대단히 큰 수이지만 C2(C*C)는 더 큰 수이다. 따라서 물질 중에 극히 소량일지라도 부분적인 변이가 있으면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이다. 물론 E=MC2이라고 하는 공식으로 원자탄이나 원자핵 틀랜트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자 에너지의 개발은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맡은 중요한 역할을 다한 결과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공헌이 보다 더 중요하고 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39년에 그는 당시이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원자 병기 개발의 가능성을 지적함과 아울러 이 병기를 독일보다 빨리 미국이 개발해야 하는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소위 맨해튼 계획이라는 것이 수립, 추진되어 세계 최초로 원자탄의 개발을 보게 된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가열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지금까지 발명,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마음을 끄는 과학 이론이라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이론이 있다.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중력 효과는 통상의 의미에서의 물리적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출발점으로 하고있으며, 오히려 우주 공간 자체의 변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 공간의 변형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 또 공간이 구불구불 휘어 있다는 것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이 이론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론을 명확한 숫자상의 공식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명백한 단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여 그의 가설이 테스트되도록 하였다. 그 후의 관측,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개기 일식 중에 행하여진 관측에서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정확성이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다른 과학 이론과는 많은 점에서 상이하다. 우선 최초로 주의 깊은 실험을 토대로 하여 유추하면서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화가 취하여진 수학적 우아성이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나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가 한 것처럼 이론을 끌어낸 것이다.(이 점이 현대 과학의 기본이 되고 있는 실험중심주의와는 상반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미와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연구를 했으나 엄격한 실험 테스트를 통해 확고하게 살아 남을 만한 수학적 이론을 찾으려 고는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온갖 테스트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두드러진 연구 성과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며, 모든 과학 이론까지도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단순히 근사한 타당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론적으로나 실험적으로 어느 하나 실증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금후의 실험에 의해서 이 이론의 완벽한 기록에 흠을 더하는 일이 있을는지는 모를 일이나 일반 상대성 이론에 한해서는 어느 과학자가 끌어낸 연구 성과보다 최종적인 진리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게 될 것임을 틀림없다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하지만 또 하나의 과학적 업적이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한 층 더 높여 주고 있다. 즉 아인슈타인은 그 때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중요한 물리 현상으로 생각되던 광전 효과에 곤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연구 논문에서는 광자 또는 빛의 입자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서 가정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간섭 실험으로 빛은 전자파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파와 입자는 정반대의 개념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여겨졌다.
아인슈타인의 가설은 종래의 고전 물리학 이론에 급진적이고도 역설적인 매듭을 제시하는 것이 되었다. 그의 광자 법칙은 그 후 중요한 실제 응용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광자에 관한 그의 가설은 그 후의 양자론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양자론 전체에 그 영향이 파급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중요성 평가에 있어 자주 뉴턴과 비교되는데 뉴턴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이해하기가 쉬우며, 그의 특징은 이해하기 쉬운 점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렇게 난해한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뉴턴의 사상 중에는 당시의 일반적 과학 사상에 거센 반성을 일으키려 하는 점이 있었으나 그 이론에는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상대성 이론은 패러독스(역설)로 가득 차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징은 그의 생각이 아직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 말하자면 아직 테스트되지 않은 가설이었을 때 이와 같은 명백한 모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오히려 그 모순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며 패러독스를 일일이 해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올바른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낼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또 세밀히 살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턴의 이론보다 기본적으로 옳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을 뉴턴보다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가? 그것은 첫째로 현대 과학 기술의 기본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은 뉴턴의 이론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현대 기술의 대부분의 것은 뉴턴이 한 것을 그대로 하면 같은 것이 되지만 아인슈타인의 그것은 그렇게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려고 라면 많은 협력자가 있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개발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 이론은 단 한 사람 아인슈타인이라는 탁월한 천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그를 다른 사람보다는 한 단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이런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1905년 6월 그가 스위스 특허국 직원(당시 26세)으로 물리학의 기존 이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새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을 내놓았을 때다. 물체의 속도가 빛에 가까워지면 뉴턴의 운동 법칙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 대하여 그는 공간과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설명해서는 사물의 움직임을 올바로 볼 수 없다고 했고, 또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과 걸어가는 사람에게 시간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그는 파악하고 있었다. 관측자가 보면 움직이는 상대의 시간은 늦게 간다. 절대적 개념의 고정된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걸어가는 사람이 나이를 더 천천히 먹는다고 이론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빛의 속도에 비하면 영에 가까운 일상 생활에서는 그런 현상을 단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론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뉴턴이 살아 있으면 당신의 이론을 받아들일 거라고 보는가?"
라고 묻자 그는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 이론은 틀림없다. 내가 보는 세상은 뉴턴이나 갈릴레이가 생각하던 시대(세상)와 전재부터 다르니까."
라고 대답했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의 울름에서 태어났다. 스위스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처음에는 스위스 국적으로 편입됐다. 1905년에 취리히 대학으로부터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아직 학자로서의 지위는 변변치 못했다. 그러다가 특수 상대성 이론과 광전 효과 등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특히 상대성이론의 논문으로 그는 2, 3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창조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논문은 대단히 논쟁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다. 다윈을 제외하면 현대 과학자 중에서 아인슈타인보다 더 논쟁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과학자는 없다 할 것이다.
1913년에 베를린대학 교수로 임명됨과 동시에 카이저 빌렐름 물리학연구소장과 프로이센 과학원의 회원이 되었다. 이러한 지위에 오르게 된 그는 모든 시간을 연구에만 쏟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2년 후 일반 상대성 이론의 명확한 체계화에 성공하여 1921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만년에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어 여러 면에서 과학자 중에서 가장 이름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부터 독일에서의 그의 지위가 불안정하게 되어 1933년에 미국으로 이주, 뉴저지주의 프린스턴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1940년에는 미국국적을 취득하였다. 강력한 히틀러 독재권력 체제가 유능한 과학자를 몰아내고 그 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을 패망시킨 결정적 요인을 제공했으니 역사에도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첫 결혼에 실패했다. 첫 부인 밀레바 마리크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지겨웠던지 그는 노벨상을 타게 된다면 그 돈을 몽땅 그녀에게 주는 한 이 있어도 이혼하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이 최근 뉴욕에서 경매에 부쳐진 아인슈타인의 편지에서 드러났다. 첫 부인과 이혼한 후 두 번째로 맞이한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얻어 유복한 가정을 꾸려 나갔으나 1955년에 그의 나이 75세로 일기로 프린스턴에서 사망했다.
아인슈타인은 항상 주변의 인간 세계에 관심을 갖고 때로는 정치문제에도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는 과학자였다. 횡포한 전제적 정치 체제를 철저히 배격했으며, 시오니즘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시온이란 말은 예루살렘의 언덕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의 아명이기도 하다. 유대인이 그들의 고지 팔레스타인에 잃었던 조국을 재건하려는 운동이 시오니즘이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에 지금의 이스라엘 공화국이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되었으니 아인슈타인의 염원은 달성된 셈이다. 그는 전국 후 1952년에 유대인들로부터 이스라엘 대통령으로 추대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55년 4월 18일에 사거했다.
그는 세련되고 풍부한 유머 감각을 가졌으며, 도한 적당한 겸손마저 갖추고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뉴턴의 묘석에 있는 비문이 아인슈타인에게 더욱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Let mortals rejoice that so great an ornament to the human race has existed.(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인간들이여, 이처럼 훌륭한 인류의 장식품이 존재했음을 기뻐하자.)
맥아더:1880년에서 1964년까지,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육군 원수
맥아더 원수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금실로 꼰 끈과 견직물로 장식된 조금은 낡은 감을 주는 독특한 군모와 색안경 그리고 시거 파이프를 문 모습일 것이다. 특히 군모는 맥아더 원수의 인물과 성격 그리고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명확하게 상징하고 있는 물품이라 할 수 있다.
그 군모는 실은 미국 육군의 제모가 아니다. 1935년 미 육군 참모 총장을 그만두고 필리핀 육군 원수에 취임할 당시 필리핀 대통령 케손(1878년에서 1944년까지, 미국 영유하의 필리핀 독립 준비 정부의 대통령. 재임 1935년에서 1944년까지)이 원수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맥아더 원수는 그 필리핀 육군 원수모로 쓰고 다녔으며 미육군의 제식 군모는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장군, 패튼 장군, 기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명한 미 육군 장군들의 군모 모양새와 비교해 보면 원수의 군모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있다. 그렇다면 왜 미 육군의 장교이면서 미국의 순모를 쓰지 않고 필리핀 군모를 애용했을까. 그것은 그 모자가 원수라고 하는 최고위장군의 것으로서 맥아더 원수 단 한 사람만을 위해서 특별히 디자인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지휘관에 필요한 자질은 통어력인데, 맥아더 원수의 경우는 바로 이 모자가 말하듯 '타에 비교할 수가 없다'라고 하는 자기 통어력이 근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통어력의 전형은 한국전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어서 당시 미국의 합동참모본부까지도 우려를 표명했지만, 맥아더 원수는 인천 상륙과 서울 공략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정치적 효과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작전 계획으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그는 이 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였다. 실로 한국의 운명을 되돌려 놓은 20세기의 최고의 군인이요. 한국에게는 위대한 은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맥아더 원수가 이 책에 실린 이유는 붉은 색으로 칠해질 뻔한 우리 나라 지도를 파란색으로 지킨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주 리틀록의 미 육군 기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아서 맥아더는 당시 육군 대위였다. 소년 시절에는 부친의 승진과 전임에 따라 병영을 전전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금도 캠프 생활을 보내는 군인 가정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자녀들의 교육 문제이지만 당시에는 더욱더 불편한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교육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지만 어린 시절 가장 열심히 훈육을 받은 것은 그의 모친으로부터였다. 어머니 메리는 남부 버지니아 여성답게 기질이 강한 편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면서도 훈육에 힘썼는데, 특히 맥아더에게 강조한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주책없이 지껄여대지 말라'는 두 가지 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의 능변은 유명하다. 1944년 7월 대일본 진공 작전의 주코스를 어디로 하느냐에 대해서 하와이에서 루스벨트(1882년에서 1945년까지) 대통령이 니미츠(1885년에서 1966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제독 등 해군 수뇌와 더불어 맥아더 원수와 회담할 때 맥아더 원수는 장장 세 시간 이상이나 자기의 주장을 당당하고 강한 어조로 언변을 구사하여 마침내 대통령은 원수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탁월한 웅변술은 어린 시절 그의 모친이 염려할 정도로 이미 발휘되고 있었던 것 같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두뇌의 예민성으로 통하기 쉽다. 그 예민성 때문이지 맥아더 원수는 1903년 6월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더구나 4년간이 평균 성적이 98.14점으로 미국 사관학교 창설이래 공전의 성적이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성적을 깨뜨린 졸업생이 없다고 한다. 이것이 맥아더 원수에게 강한 자신감과 자존심을 불어넣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원수는 자기의 능력과 장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승진이 빨랐다. 맥아더는 1911년 대위가 되고 1913년 9월 참모본부로 피명되었다. 당시 참모본부원은 38명으로 맥아더 대위는 최신임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사관학교 및 육군대학 졸업자였지만 맥아더 대위만이 육대 출신이 아니었다. 맥아더 원수는 그 이후에도 육대에는 진학하지 않았으며 육대를 졸업하지 않고서 원수가 된 것은 맥아더 원수뿐이었다.
맥아더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였으며,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이 결정되자 맥아더 소령은 미국의 전주 출신 병사들로 1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이는 전 주민이 유럽 전선에 처음 참전한다는 자긍심을 높일 수 있게 하는 계획이었으므로, 이 안을 당시의 윌슨 대통령(미국의 28대 대통령)에게 진언하였다. 그 때 맥아더는
"모든 미국 시민은 미국으로부터 유럽을 향한다. 대서양에 걸쳐지는 무지개처럼."
이라고 말했다. 이 맥아더의 말에 윌슨 대통령은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대통령은 즉결로서 통칭 레인보(무지개)사단의 창설을 결정함과 동시에 맥아더를 소령에서 대령으로 두 계급 특진시키고 사단 참모장에 임명했다.
맥아더 원수는 지휘관은 훌륭한 관리자임과 동시에 부하들이 항상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럽 참전은 자기의 지휘력을 실천할 수 있는 최초의 실천장이었다. 그는 부하들로부터 우러러 보이고 또 병사들의 눈에 잘 띄는 두드러진 존재가 되기 위해 우선 군모는 철사를 떼어내 그 형태를 조잡하게 하여 약간 비뚜름하게 쓰고 와이셔츠, 넥타이 대신에 터틀넬 스웨터를 입었으며 머플러를 느슨하게 목에 감고, 그리고 권총 대신에 승마봉 한 개를 손에 쥔 모습으로 언제나 제일선에 서곤 했다.
한국에서 지휘관이 이러한 모양으로 하고 다니면 즉각 군기 문란으로 군사 재판에 회부될 법도 한데 미군에서는 도리어 그의 인기가 폭발했다. 거기에다 맥아더 대령은 미 육군의 으뜸가는 수재이며 장신의 미남자이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멋쟁이 스타일로 탄환 속을 누비며 선두에 서서 지휘를 하니 부하들은 기뻐했고 신문 기자는 열중하여 찬미 기사를 타전했다. 더구나 대령은 용감했다. 두 번이나 상해를 입었으나 여러 차례 훈장을 수여 받아 미 육군사상 공전의 훈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맥아더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레인보 사단장이 되었다.
미 군사 제도에서는 전시와 평시의 계급 제도가 상이하다. 전시에 승진했어도 평시가 되면 강등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2차 대전의 유명한 장군인 아이젠하워나 패튼은 제1차 대전 말기에 대령이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강등되어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맥아더 소장의 경우는 준장으로 한 등급만 강등됐을 뿐이었다. 그는 1919년 6월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발탁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9세로 가장 젊은 육사 교장이었다.
맥아더 교장은 그때
"소수의 프로 군인이 싸우는 시대는 지났다. 오늘날의 지휘관은 내외 정세를 파악하는 유연한 두뇌를 갖고 동료들과 잘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며 교과목에 정치, 경제학을 추가하는 것을 비롯, 집단 스포츠의 강화, 일반 대학으로부터의 강사 초빙 등 대담한 개혁을 실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업적에 대하 성과가 인정되어 맥아더는 1925년 정식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다시 1930년 8월 중장으로 올라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부관에는 45세의 아이젠하워 소령과 패튼 소령이 있었다. 맥아더 참모총장의 임기는 1934년에 끝나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 전년에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 중장을 대장으로 승진시킴으로 동시에 이례적으로 참모총장의 임기를 1년 연장시켰다.
1935년 가을 맥아더 대장은 객선 프레지던트 후버호로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로 향했다. 이 여행은 당시의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그에게 필리핀 군 편성과 동군의 총사령관 취임을 의뢰해 왔기 때문이었다. 맥아더 대장과 필리핀과의 관계는 각별했다. 부친인 아서 맥아더가 여단장에게 군사령관에 이르기까지 필리핀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고, 맥아더 대장 자신도 1928년경에 단기간이기는 하나 필리핀의 미 군사고문단장으로서 근무한 일이 있었다.
케손 대통령은 맥아더 대장을 극히 예우하였다. 마닐라 호텔의 최상층을 숙소로 지정하고 대통령의 급료보다 많은 연봉 3만1,500달러를 지급했으며, 모두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원수의 칭호와 특별히 군모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필리핀 정부의 파격적인 대우에 부응하기 위해 맥아더 대장은 1937년 12월 정식으로 미 육군에서 퇴역하고 생애 후반을 필리핀 정부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미 육군 현역 시대의 맥아더는 근무에 정진하였고, 청렴했으며, 일반적으로 비사교적이었다. 맥아더는 육사 교장 시대가 끝날 무렵에 돈 많은 이혼녀 루이스 브룩과 결혼했으나 1929년에 헤어졌고, 1937년 4월 마닐라로 향하던 여객선에서 알게 된 진 페아크로스 양과 재혼했다. 이때 원수는 57세, 신부는 38세로 다음해 1938년에 외동아들 아서 2세가 태어났다.
맥아더 원수에게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의 특이한 참모 용병술이다. 원수는 참모진에 항상 원수와 군신관계에 가까울 정도의 심복성이 짙은 사람만 중용 한다는 평을 들었다. 이것은 원수가 충실 근무에 힘쓰는 부하에게는 각별한 처우를 했기 때문이지만 한편 매사에 자신이 있고, 또한 어떤 분야에서도 자기가 최고의 능력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원수로서는 참모도 일류의 인물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일 관계도 긴장되기 시작하여 1941년 7월 26일로 맥아더는 육군 소장으로 복적하였고 그 다음달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 극동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군 제14군이 린가엔 만에 상륙한 다음날인 1941년 12월 23일 맥아더는 미-필리핀 연합군에 대하여 바탄 반도 철퇴를 명령하였으나 이 명령의 실행이 늦어져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미비군 약 2,300명이 충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사하게 되었다. 이 죽음의 행진으로 전후 당시 일본 사령관 혼마 중장이 전범 처형되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공복과 질병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병사들을 강제 행군시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2년 3월 11일 맥아더는 필리핀을 탈출한 후 오스트레일리아에 신설되는 남서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할 것을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명령받았다. 맥아더 원수는 오스트레일리아 도착하자마자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
라고 외침으로써 그의 마음속에는 필리핀 귀환이라는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후 맥아더는 그 사명감에 입각하여 일본 반격 루트를 뉴기니아 - 필리핀 코스 외에는 없다고 완강히 주장했으며, 결국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
는 그의 말과 같이 필리핀에 재 상륙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술 면에서도 맥아더 원수의 정석성은 뛰어 났다. 맥아더군이 공격하면 어떠한 전장에서도 일본군은 이미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긴 상태였으며, 보급로도 차단 당하여 지하와 산지에 잠복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맥아더군은 공중 정찰, 함포 사격과 공폭, 좌우 측과 배후를 다 살피는 안전한 상륙, 화포와 전차를 선두로 한 횡대 전진이라고 하는 빈틈없는 전술만을 채택했다. 이러한 맥아더 원수의 전술은 유효했고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맥아더 원수에게는 찬사와 훈장만이 주어질 분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미 육군사뿐만 아니라 세계 전사에 있어서도 가장 완전한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서 기록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일본 점령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있을 때 한국 전쟁을 맞이하여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다시 한번 발휘함으로써 그 영광은 또다시 빛났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맥아더 원수는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하고 있었다. 대통령 출마를 권고 받기도 했지만 원수는 일찍이 필리핀군 육성과 그 후 필리핀 탈환의 사명감에 불타 싸워 그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일본 점령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일본을 지배한 군국주의 근절이라는 사명감을 느끼고 일본을 통치했다. 그리고 어쨌든 이 사명감은 성취되었다. '군대가 없으면 군국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원수의 생각을 기본으로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과 군비를 방기한 신 헌법을 수락하게 하고, 전범 재판과 전쟁 지도 인사 추방 법률 및 제도를 민주적으로 개혁하게 함으로써, 일본은 사상적으로나 조직 면에서 위험한 군국주의적 요소를 제거당했다 할 것이다.
원수는 1935년이래 죽 떠나 있던 모국에 겨우 눈을 돌려 대일 강화조약 조인 후 은퇴하여 고향 밀워키로 돌아갈 뜻을 표명했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군이 대한민국 공격을 감행하자 70세의 맥아더 원수의 가슴에는 또다시 새로운 사명감이 끓어올랐다. 아시아 공산주의 세력의 일소가 그것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비열한 제국주의적 공산주의를 타도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자기에게 부여된 최후의 사명임을 자각하고 있던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다.
맥아더 원수는 한반도 반공을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마치 필리핀 린가엔 만에 상륙하여 수도 마닐라를 지향하던 유명한 'I Shall Return' 작전의 재현이었다.
인천항은 진흙 층이 두텁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타이밍이 빗나가게되면 상륙이 대단히 어려운 곳이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난색을 표했지만 맥아더 원수는 인천 상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승인을 받고 9월 15일 미명에 이를 감행했다. 이 상륙 작전은 기대한 대로 성공했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 정부의 서울 귀환을 성취시켜 주었다. 이는 마치 마닐라를 함락시킨 후 말라카냥 궁전에서 오스메니야 대통령에게 필리핀 정부 복귀를 축하한 정경과 흡사했으며, 역사를 한번 더 걷는 심경의 맥아더 원수에게는 제2차대전 때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것처럼 북한 김일성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그의 다음 목표였다.
맥아더 원수는 합동참모본부에 북한 내에서 추격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트루먼(1884년에서 1972년까지, 미국의 33대 대통령. 재임기간 1945년에서 1953년까지) 대통령은 '한국 전쟁은 태평양전쟁과 다르다. 그때처럼 직접 미국이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때의 동맹국인 중국과 소련이 적측에 서 있다. 전쟁 확대의 명분도 뚜렷하지 않으며 준비도 충분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전쟁이 확대되면 잘못하면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원수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이미 UN군의 진격 한계를 중국 국경으로부터 3, 40마일 남방으로 정하면서 추격을 계속하여 10월 19일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맥아더 원수의 항복 권고를 거부했고 중공군 개입의 위험성은 한층 농후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정세의 급박성을 고려하여 맥아더 원수에게 자기와의 회담을 제의하였고, 두 사람은 10월 15일 태평양상이 고도 웨이크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맥아더 원수는 중국군 개입에 관해서는 대통령의 생각과는 달리 낙관론을 강조하고 설령 개입한다 해도 보급의 곤란성 때문에 고작 5,6만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0월 20일 한국군과 UN군은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25일 전후해서 중공군과의 접전이 보고되고 수일 후에는 중공군 2개 사단의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여전히 중공군의 대량 개입은 믿지 않았고 워싱턴 정부에는 소병력의 개입이 추측된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잇따라 맥아더 원수는 11월 5일 중국 국경이 압록강 철교의 폭격을 명령했다. 합동참모본부는 당황했다. 지난달의 국경 진군과 압록강 철교 폭격 등은 명백히 본국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다. 합동참모본부는 중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12월 3일 미 국방성에서는 맥아더 원수의 처우에 대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군사는 정치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 군인이 국가의 진로를 결정할 수는 없다. 맥아더 원수를 위험한 존재로 간주한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그의 해임을 주장했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원수 해임이 미군 사기와 국민 감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하여 원수를 포함한 전군 지휘관에게 외교 정책에 관계되는 언동에 신중을 기할 것을 주의시키는 데 그쳤다.
맥아더 원수는 대통령의 의도에 반항할 의사는 없었지만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추방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확고한 신념은 버리지 않았다. 중공군의 대량 개입으로 UN군은 패퇴를 계속하여 12월 하순에는 중공군이 북위 38도선에 접근하였다.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원수에게 UN군은 일본으로 철퇴시키라고 명하면서 일본 방위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한반도에서의 명백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이에 대하여 지금이야말로 미국은 UN과 합동으로 중공과의 전쟁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고 회답했다. 그러면서 중국 대륙 연안의 봉쇄, 함포와 폭격에 의한 산업 지대의 파괴, 장 제스군의 한국 파병, 중국 대륙에의 상륙 작전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한 회답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원수의 해임을 결정했다.
원수의 뛰어난 두뇌, 용기, 애국심, 부하와 주위를 끌어들이는 매력, 투철한 사명감, 그리고 강한 신념 등 어느 것 하나 지휘관으로서 탁월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지나치게 많은 영광과 오랫동안의 정상의 지위 등은 개인과 조직의 명운을 혼동시하는 과신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원수의 해임을 정식 통고했다. 그때 맥아더 원수는 숙소인 동경의 미 대사관저에서 점심 식사 중이었다. 부관이 해임보고를 받고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부인에게 말했다.
"지니, 이제야 가까스로 미국에 가게 되었소."
그 후 맥아더 원수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무개차를 타고 수십만의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개선했다.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리하여 한평생 영광으로 점철된 맥아더 원수는 1964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반세기,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이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6년. 이제 와서 다시 한번 원수와 한국이 운명을 연결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국민들로서는 맥아더 원수가 해임 직전에 워싱턴에 제안한 것을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이 좀더 대공 강경 정책을 견지하고 소련과 중고의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실세를 현실적 입장에서 보다 세밀하게 분석했더라면 맥아더 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공으로서는 필시 한만 국경선상에서의 휴전 성립을 수락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렇게 되었다면 그때 우리 나라는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통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맥아더를 그리워하면서 그때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