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결혼을 앞둔 나는 여러가지로 복잡했다.
그간 혼담이 오갔던 여성들 중 정아는 이대앞에서 P 의상실을 제법 크게 하고 있었다.
나와 사돈간인 미스 양이 S여대 무역학과 2년재학중 가정이 어려워 휴학하고 은행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친구인 정아와 이야기도중 석홍씨가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광주로 내려와서 나에게 전화했다.
그때 광주에서 방위를 받고 있던 나에게 미스 윤이 내려왔는데,정아가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마침 미스 윤이 그 전화를 받아서 "동생이라는 여자가 시민관앞으로 7까지 나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서 같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 보는 내내 내가 오늘 정아를 안으면 미스 윤은 어떻게 되지?하고 갈등을 느꼈고
그럴 경우 미스 윤의 성격으로 보아 가만히 있을 리 없고 나는 아마 감사원에서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그래서 수 없이 망설이다가 영화가 끝나자 그냥 정아를 보내 버렸다.
집에 오자 그녀가 누구냐고 물어서 대학친구 문식이와 그의 애인과 같이 영화구경했다고 둘러댔다.
미스 윤과 데이트하던 시절,나는 감사원에서 마련해 준 독신자 숙소인 삼청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침은 삼청료에서 먹고 점심은 감사원 식당에서 먹었는데 저녁은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세끼 매식을 하다보니 금방 허기졌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번정도 미스윤과 전원다방에서 만나 커피만 마시고
무교동 뒷골목에 있는 한우 등심구이집을 자주 갔다.
그때는 나도 제법 한우 먹는데 익숙해 있었다.그런데 미스 윤은 한우를 생전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2년전인 1973년도에 감사원에 들어가서 조영채 과장이 집으로 초대해 가서 처음 한우등심을 먹어본 것과 같았다.
그런데 미스 윤은 "사람들이 왜 밥을 먹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식사를 하지 않다가
고기를 먹으면서부터 조금씩 입맛을 알아갔다.
솔직히 미스 윤은 눈만 예쁘고 얼굴과 엉덩이만 컸지 몸이 허약했고 팔은 새다리였다.
또 목소리는 열 두세살 소녀의 목소리였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자 신혼집을 구해야 하는데 집살 돈은 커녕 전세 살이할 돈조차 없었다.
결혼비용이라고는 겨우 50만원짜리 계 탄 돈이 전부였으니.요사이 같으면 결혼자체가 불가능 했는데
나는 도대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게 무작정 결혼했다.미스 윤에게 걸혼비용으로
얼마정도 쓸거냐고 물어보자 남들하는 정도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혼인비용으로 120만윈정도 생각하고 있다는데 나는 그 혼수품을 다 가져오면 넣어둘 방조차 없었다.
그래서 내가 꾀를 냈다."우리 그 돈으로 집을 사자.그리고 우리 혼수는 하나도 하지 말고 집을 사자" 했더니
철없는 미스 윤은 그 돈을 가지고 와서 내가 160만원 짜리 홍은동 산꼭대기에 집사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날짜를 12월20일로 잡았다.
그런데 결혼 열흘전 미스 윤이 아파서 서대문 병원에 입원케 되었다.지금으로 보면 위염이었던 것 같다.
이미 청첩장까지 다 돌려 놓은 상태였으니 연기할 수도, 취소할 수 도 없고
그래서 고심끝에 미스윤에게 결혼식장에 기서 가만히 서있다가 나와서 다시 입원하자고 했다.
다행히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지만 돈도 없고 아내가 아파서 신혼여행이라야 완도 고향방문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975년 12월20일 고대 통계학과 백운붕 교수를 주례로 서울 예식장어서 결혼한 우리부부는
곧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로 워커힐로 갔다.
사진사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출신으로 감사윈 공보실에서 근무하던 최고의 사진사였다.
우리는 워커힐에서 사진만 찍고 서울역 2층 그릴에 가서 늦게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는 최고급이었고 그릴은 V.I.P용 특실이었다.
당시 내가 감사원에서 철도청담당이었기 때문에 철도청에서 배려해 준 듯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새마을호 특실을 타고 광주로 가서 무등관광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그런데 무등 관광호텔은 당시 광주시내에는 하나밖에 없는 호텔로
75년 2월 은이가 S대학 불문과에 합격했다고 자기에게 숙녀대접을 해달라며 나에게 첫정을 준 그곳이었다.
나는 멀어진 은이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직행버스로 완도군 군외면 외가집에 들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인사드리고
곧 완도읍 지문식군 집으로 갔다.그들은 나와 대학시절 경은이와 같이 신나게 다녔지만 그들은 결혼했고
나는 짝이 바뀌어 미스 윤과 결혼한 것이다.
당시 지군은 중앙대 법대를 졸업하고 완도읍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했다.
문식이의 처 명희는 우리 부부를 보자 학창시절 같이 재미있게 어울렸던 그녀의 친구 경은이를 생각하면서
의미있는 미소를 띄며 반가이 맞았다.지군의 안내로 완도에서 유명한 해물요리집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고향 고금면으로 가는 배를 탔다.
시댁에는 아무런 선물도 주지 못했다.집사려고 돈을 거기에 다썼으니,
고향집에 가자 나는 아내가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매사를 조심하게 했더니
고향 어른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석홍이 저 놈이 지금부터 벌써 여자에게 꼼짝 못한다"고 야단들이었다
서울집으로 온 우리는 결혼식 때 친구들 하객이 많이 와서 다음해 3월까지
매주 토.일요일에는 집들이겸 하객들 초청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듬해 10월23일 첫째 아들 융이를 낳았으니
그 아픈 와중에도 사랑은 뜨거웠던지 허니문 베이비였슴에 틀림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