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글레디에디터의 역사적 오류로 살펴보는
철인왕((哲人王) 마르쿠스 시대 이야기
[1] 오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최고 융성기를 주재했던 다섯 황제.
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그들이다.
이들의 재위 계승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입양된 후계자들인데 선임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먼 친척관계 정도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흔히 안토니누스 일가라고 부르며
이 호칭은 때로 두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된 후계자)와
콤모두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오현제 시대의 로마 제국은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다키아까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토확장을 이룩했다.
제국은 굳건해졌고 방어태세가 완벽했으며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속주 행정제도가 제국 전역을 포괄했다.
속국들이 하나하나 속주로 재편되었고 이탈리아의 행정제도도 많은 면에서 속주와 동일하게 편성되어갔다.
이 모든 과정과 더불어 제국의 백성들도 언어와 문화면에서 로마화했다.
오현제 시대는 내정이 안정되고 선정이 베풀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취약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권력이 완전하게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해 놓은 '이원집정제'는
1세기에 이미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그 당시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더 이상 통치도구가 아니라 황제 휘하의 귀족집단으로 전락했고
주로 선거에 의해 콰이스토르(재무관)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곧바로 귀족지위를 얻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행정관들의 몫으로 남겨둔 제한된 행정분야는 더욱 협소해졌고
그들의 관할권은 점차 황제가 임명한 그리스 관리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추세를 보였다.
황제 휘하에 행정부서가 완전하게 조직되어 국가관료기구로 인정받게 된 것은 주로 하드리아누스의 작품이었다.
그는 장관직책을 자유민들 수중에서 빼앗아 에퀴테스(기사계급) 출신의 행정관들에게 맡겼다.
이 모든 변화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로운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가져왔다.
이같은 폐해는 강력한 군주들이 중앙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잘 드러나지 않기는 했지만
심지어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치세 때에도 제국 전체의 힘이 약해졌고
그에 상응해 제국정부 자체에 대한 압력이 갈수록 가중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초기적인 몰락의 징후를 보인 현상들로는 특히 제국 중심지구의 갈수록 심해지는 인구감소, 끊임없는 재정난, 속
주 지방행정의 부패성, 모든 계층이 이제는 갈수록 짐만 되어 가고 있는 지방행정관직을 맡기 꺼리는 것 등이 있었다.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난 이후 로마 제국은 급속하게 내전의 혼란에 빠져들어갔으며
193년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2] 막시무스(막시미아누스) 퀸틸리아누스
서기 180년 다뉴브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고대 로마제국의 영웅으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친아들 코모두스 대신에 그를후계자로 내세웠으나
이를 시기한 코모두스가부왕을 암살하면서 막시무스는 하루 아침에 노예신분의 검투사로 전락했다.
이후 로마 최고의 검투사로 이름을 날리던 막시무스는 선왕을 암살한 후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새 황제
코모두스에게 통렬한 복수를 가하며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기록에는 막시미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뒤에도
최소한 6년 동안은 전선에서 사령관으로 계속 근무했습니다. 즉 콤모두스에게 일단 충성했고.
게다가 186년에는 집정관으로그는 코모두스 황제에게 반항하지 않았고 밑에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명상록의 1장부분에 철학자인 막시무스에 관한 언급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막시무스로부터, 자제력과 일괄된 목적의식 그리고, 부정적 상황에서 조차
...긍적적이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냉정한 판단력과 따듯하고 온화한 성품이
...훌륭하게 조화된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모든 의무를 묵묵히 불평없이 수행했다.....
1. 마르쿠스 황제의 죽음에 대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광대한 북방영토를 위협하는 부족을 격퇴하기 위해 원정나갔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아버지가 진중에서 전사하자 아들 코모두스는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을 포기하고
전장에서 급히 로마로 돌아갔다. 코모두스는 명민하지만 극단적인 변덕쟁이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가 된후 로마의 명칭을 콤모디아로 개칭하고, 스스로 헤라클레스라 칭하면서
신이 환생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는 헤라클레스처럼 사자의 모피를 입고 곤봉을 들고 나타나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구경거리를 참관하고 다녔다.
신중하게 선발된 적과 대결하여 그들을 칼로 찔러죽인 뒤 승리를 자랑했다.
영화에서 처럼 황제가 되기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막시무스를 제거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자리를 막시무스 장군에게 넘겨주려는 계획도 없었으며,
철인왕((哲人王) 마르쿠스는 오히려 자신의 아들인 코모두스를 후계자로 정해놓은것으로 나와았다.
(이때, 두 사람의 대(大) 스토아 철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노예로 에픽테토스이고, 또 한 사람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2. 막시무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음모는 실제로 있었는가?
영화중반에 나오는 막시무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은 없었지만
마테르누스라는 용감한 사병이 도둑떼들을 모아 소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감옥을 열고, 노예를 해방시키고,
갈리아와 에스파니아 지방의 부유하지만 무방비한 도시들을 약탈했다.
속주의 게으른 총독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약탈을 방관하거나 방조하다가 황제의 엄명을 받고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마테르누스는 포위되어 진압당할 위기에 처하자 최후의 안간힘을 썼다.
그는 부하들에게 소부대로 분산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키벨레신 축제의 소란을 틈타 로마에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코모두스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이 도둑의 야망이었다.
그는 매우 능숙하게 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에 변장한 그의 군대는 이미 로마의 길거리를 메웠다.
그러나 이 기발한 음모는 어떤 공모자의 질투 때문에 거사 직전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3. 황제의 누이 루실라(=루킬라)에 대해
영화에서 처럼 막시무스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은 실제 역사에서는 매우 다르다.
오히려 황제(코모두스)를 죽이기위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황제가 원형경기장의 어둠침침한 주랑을 돌아 궁전으로 돌아가고 있을때 자객 한 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뛰쳐나와 칼을 뽑으면서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하고 외쳤다.
근위병들이 곧 자객을 체포하여 배후를 밝혔다. 그 음모는 궁중 안에서 꾸민것이었다.
황제의 누이이며 루키우스 베루스의 미망인인 루킬라는 제국 제3위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황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동생인 황제를 죽이고자 암살자를 고용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음모를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원로원 의원인 두번째 남편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루킬라의 수많은 애인들 중에는
그녀의 광기와 애정에 봉사하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또는 야심에 찬 남자가 많았다.
결국 음모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고 파렴치한 공주는 처음에는 추방되었다가 결국 끝내 죽음을 당했다.
4. 영화속에 나왔던 막시무스 장군은 실제로 존재했는가?
막시무스와 비슷한 사람이 코모두스가 지배했던 시절에 있었다. 퀸틸리아누스 집안의 두형제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였다.
이들은 지극히 형제애 때문에 후세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두 사람은 학문도, 직업도, 관심도, 취미까지도 모두 같았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의 단편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형제는 평생동안 일심동체로 살았다.
두 안토니누스 황제는 이들의 덕망을 높이 평가하여 형제를 같은 해에 집정관으로 승진시켰으며,
나중에 마르쿠스황제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그리스의 민정을 맡도록 하는 한편 군사지휘권도 주어,
이들은 게르마니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잔혹한 콤모두스는 이러한 형제를 함께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5. 코모두스의 죽음에 대해..
영화에서 처럼 코모두스와 막시무스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시합을 하다 죽지 않고,
그의 애첩 마르키아와 시종장 에클렉투스, 그리고 근위대 대장 라에투스는 자기들의 동료나 전임자들의 운명에 놀란 나머지
미치광이 폭군이 변덕을 부리거나 백성들의 급작스러운 분노가 일어나 그들이 당할지도 모를 파명을 예방하기로 결심했다.
마르키아는 그가 맹수 사냥을 마치고 피곤해진 때를 틈타 그에게 포도주 한 잔을 올렸다.
코모두스는 잠을 자려고 침실로 갔다. 그러나 그가 독약과 술 기운으로 괴로워하고 있을때
레슬링을 직업으로 삼는 건장한 청년이 침실에 들어가 아무 저항 없이 그를 목졸라 죽였다.
그의 시신은 감쪽같이 궁전 밖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물론이고 궁정 안에서조차도 황제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3] 30 년 전 글래디에이터 Gladiator"거의 동일한 내용의 영화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세 번째 소개한 책인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이 영화가 시작되는 기원후 180 년은 기번이 아래와 같이 말한 시대이다.
"만일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또 번영했던 시기는 어느 시기였는가를 질문받는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아마 도미티아누수 황제의 사망(96 년)부터 코모두스 황제 즉위(180 년)까지의 시기를 들 것이다
(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 현제(賢帝) 시대이다).
이때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써 지도된 절대권력 밑에 통치되고 있었다."[로마제국의 쇠망, 1 권, p 123]
처음으로, 영화와 역사가의 견해가 다른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인 아우렐리우스 황제
(121 - 180; 참고로 삼국지의 유비는 161 - 223 이다)와 코모두스의 관계이다.
기번은 코모두스를 망친 것은 아루렐리우스의 편애, 과중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이유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제 겨우 14 - 15 살밖에 되지 않은 그(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을 황제 권력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시켰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 원로원과 군의 환호속에서 즉위하였다.
그가 행복한 젊은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 때 그 주위에는 단 한 사람의 배제해야 할 경쟁자도 없었거니와 벌줄 적대자도 없었다."
[P 131] 이 아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또한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코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코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를 완전한 후임자로 임명한 후에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것이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황인 마르쿠스의 사후까지 코모두스는 대병단의 지휘와 콰디족 및 마르코반족을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P 132]
또한 기번은
영화의 주인공의 하나인 황제의 딸 루실라(Lucilla)에 대해서 영화와 전혀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183 년 어느날 밤, 코모두스가 자기의 숙소인 내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柱廊)을 막 벗어나고 있을 때, 잠복하고 있던 한 자객이 검을 빼어 들고 습격하였다. ...
코모두스 황제의 누님이며 루키우스 벨루스의 미망인인 루실라가 제국의 서열 3 위의 지위에 있는 것이 미흡하여
참지 못한데다가 황후인 파우스티나에 대한 질투심까지 결부되어
이처럼 자객을 무장시켜 동생 [코모두스]의 생명을 노리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무서운 음모에 대하여 현재의 남편이며,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충성스러운 인물이기도 한 클로리우스 폼페이아누스[이 사람은 영화에 나오지 않으나
여기 언급되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아 남은 사람이다]에게 이 행동을 상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그녀의 정부들 중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야심가들도 있었는데
이런 자들은 그녀의 바람기뿐만 아니라 보다 광기어린 집념에까지 기꺼이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음모자들은 물론 엄벌을 받았다. 그리고 파렴치한 루실라도 처음에는 유형에 처해졌으나 뒤이어 사형을 받았다."[p 133]
즉, 루실라가 먼저 코모두스를 암살하려 하였으며, 영화와 달리 코모두스보다 먼저 죽었다.
물론 코모두스가 좋은 황제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중 막시무스[Maximus]가 있다. 이 사람과 영화의 막시무스는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폭정에 쓰러진 무고한 희생자 중에서도 가장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퀸틸리아누스가의 형제들인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 두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형제애는 그 이름이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빛을 보게 되어,
후세에까지 향기로운 회상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 막대한 재산을 이어 받았는데도 두 사람에게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이 형제가 협력해서 쓴 한 논문('농업론'이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지만,
일생동안 무엇을 해도 두 사람은 완전히 일심동체였다. 이들의 덕행을 존중하고 그들의 화목한 우애심을 기뻐한
두 안토니우스 황제[임주(任註); 아우렐리우스의 전임황제와 아우렐리우스]들은 한날 한시에 두 사람을 모두 집정관으로 임명하였었다.
그후 마르쿠스 황제는 다시 그리스 속주의 민정과 군사권을 이들 두 사람의 공동관리로 위임했는데,
여기서도 이들은 게르만인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정심이 많았던' 코모두스 황제의 잔인성은 마지막 죽음에 있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p 134]
막시무스가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둔 것이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진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코모두스에 의해 사형당했다.
영화에서 막시무스의 자식과 부인이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은 노예나 로마 시민이 아닌 경우에 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의 체제에서 아무리 폭군 코모두스라 하여도 장군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재판 없이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친위대를 시켜 원로원 의원에게 자살을 명한 것은 역사책에 나온다.
로마인이 법 체계를 존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코모두스가 결정적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투기장의 우리에서 100 마리의 사자가 단번에 내몰려 나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손에서 던져진 100 자루의 투창은 그 사자 무리가 투기장 안을 날뛰며 돌아 다니는 사이에
단 한 자루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를 맞혀서 한 마리 남김없이 사체로 만들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몸뚱이도, 코뿔소의 가죽도 그가 던지는 창끝을 막아낼 수 없었다. ...
그러나 하층계급의 일반민중들조차 이것을 너무 지나친 행위라하여 분노와 치욕감을 느낀 것은,
자기 황제가 하필이면 일개 검투사로 분장하고 등장해서 국법이나 습관도 천한 직업으로 낙인찍어 놓은
그런 직업인의 흉내를 마치 자랑스러운 듯이 연출했을 때였다.
... 황제는 투기사 역을 담당하여 실로 735 회나 싸웠다."[p 142]
실제로 코모두스는 상당히 훌륭한 검투사였다.
영화의 막시무스가 앞에서 설명한 그 막시무스라면 코모두스에게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0 년 전의 영화에서는 위의 사실을 위해 마지막의 황제의 싸움을 투창으로 하는 것으로 꾸몄다.
물론 그 영화에서도 코모두스가 죽지만 비겁한 승부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악인을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날이 갈수록 비겁한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일까?
코모두스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더니 드디어는 자기 측근에게 죄를 씌워 죽이기 시작하였다.
코모두스의 죽음에 대해서 기번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윽고 그의 가족들조차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운명도 끝장이 났다. 동료나 선임자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애첩(愛妾) 마르키아, 시종무관장 에클렉투스, 근위대 장관 레투스, 이 세 사람이
포악한 군주의 바보같은 변덕으로 혹은 갑작스런 국민의 분노로
언제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지 모를 죽음의 운명을 저지하기로 결의하였다."[p 144]
시종무관장과 근위대장과 더욱이 애첩까지 황제의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것은 실제로 황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반(離叛)한 것이다.
"때는 마침 황제가 동물사냥으로 기진맥진하였을 때였다. 포도주 한 잔 권하는 기회를 마르키아가 이용하였다.
[독약을 먹였다] 황제는 침실로 물러났으나 점차 독과 취기가 온몸에 퍼져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기(力技)를 직업으로 하는 건장한 젊은이 한 사람이 침실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시내는 물론 궁중에서도 황제가 죽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사체가 비밀리에 황궁으로부터 밖으로 운반되어 나왔다.
바로 이것이 현명한 군주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온갖 권력을 휘둘렀고, 재위 13 년간에 몇 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폭력으로 억눌러 온 대상이던
이 폭군을 쓰러뜨리는 일은 이처럼 매우 간단했던 것이다.
(디오-카시우스, '로마사' 제 73 권 22 절, 헤로디아누스, '로마사' 제 1 권, '황제열전' 제 7 권 제 17 절)[p 144]
적어도 코모두스는 경기장에서 죽지 않았다.
여하튼 코모두스는 자기 아버지에 비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영화 제작자는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4]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5]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코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