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님의 넷도량인 여기 허공중 보찰(체계불학)에서 공부하면서,
이번에 저도 모르게 미증유님의 글에 댓글을 달다가,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목과 같이 지도(체계불학)와 공부에 대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지도는 아는 것(앎)이고, 공부는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수님께 체계불학(앎)과 그 실천(공부)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지,
아래 교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에 세친 스님께서 정리한 문헌이 그대로 남아있고요,
구전도 아니고 문자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걸 정확히 해석할 경우에는 누구든지 아라한까지 되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 인도불교를 다시보다 11강 1분11초~29초 -
여기에서 교수님의 정확히 해석해 낸다는 말씀을 저는 아는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알아야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는 것이 지도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를 보고 길을 가듯, 알면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와 공부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으로 치환해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도는 아는 것이고, 공부는 실천하여 체득하는 것이지요.
저는 아는 것은 실천체득하는 것이 아니라서 제 말이 아니라 여기고,
더욱이 실천할 수 없는 높은 얘기는
들은 풍월이나 알음알이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교입선은 누구에게 하는 말이고, 사교입선은 맞는 말인가?
선가에는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문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아는 생각)를 내지 말라.
비유로 말하면,
물을 마시려면 물이 어떻다는 그런 망상 부리지 말라. 는 말이고,
물이 어떻다 하지 말고 물을 마셔라. 하는 말입니다.
물은 마시지 않고, 물이 어떻다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망상이니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입차문래 막존지해는 사교입선의 다른 말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선에 들어가는 데는 아는 것은 해가 되는 것이지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잘못 안 가장 큰 병폐는, 교학을 그저 버려야할 알음알이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물이 어떻다 하지 말고 물을 마셔라.
사교입선하라는 이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요?
또 전적으로 옳은 말일까요?
이 물이 어떤지, 마셔야할 것인지 아닌지 알아야 물을 마실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 마실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마셔라 하면 부작용만 속출합니다.
그냥 물이 어떻다 하지 말고 바로 마셔라. 하는 것은 맹목적이고 맹신적입니다.
한마디로 강제적입니다.
될까요?
물 마실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면 폭력입니다.
그러니 사교입선의 말씀은
교학에 어두워 물마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교에 밝아 물마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교를 통하여 마실 마음이 난 사람은 교를 버리고, 물을 몸소 마시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를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내 말이라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몸소 검증해 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 말을 통해 몸소 체득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교를 통하여 선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될지언정, 교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교입선은 부처님 말씀을 버리고 선으로 들어가라. 입니다.
도대체 선이란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교밖에 있다는 것인가요?
선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교외별전이라 합니다.
교밖에 따로 전하여 不立文字문자를 세우지 않고, 以心傳心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 합니다.
무엇이 옳은 말씀일까요?
여기에서 선가의 유명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위산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에서 향엄이 깨친 일이고, 하나는 용담의 촛불을 불어끔에 덕산이 깨달은 일입니다.
향엄과 덕산은 모두 교학의 달통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스승을 만나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간 것일까요?
교를 통하여 선을 깨닫자 교가 버려짐이 아닐까요?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믿음이 아직 서지 않은 사람,
교학을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알아야 생기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이 섰으나 교학에 밝지 못한 사람,
교학을 통해 실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교학은 실천을 통해서만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3. 믿음도 서고 교학에도 밝으나 깨닫지 못한 사람,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깨달음은 실천할 길도 끊어져야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어찌보면 순서입니다.
믿음이 서고, (종교심)
믿음이 선데다, 교학에도 밝고, (도덕성 출리심)
믿음이 서고, 교학에도 밝은데다, 깨달은 사람입니다. (보리심 청정견)
지금 마실 마음도 없는 이들에게 마시라 함은
믿음이 없는 이에게 교학을 가르치지 않고 선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니, 될 것입니까?
또 마실 마음은 있지만 마실 수 없는 이들에게 마시라 함은
믿음은 있지만 교학을 실천하여 밝아지지 못한 사람에게 선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니, 될 것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이 이미 서고, 교학을 실천하여 교학에도 밝은 이에게 선으로 들어가라고 해야 선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전생공부에서 찾고 싶습니다. 본주제와 어긋나므로 각설합니다.)
교학은 스스로 물마실 마음이 나게 합니다.
마시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처님 말씀이 잘못이라면, 즉 사교입선이 맞다면 선이 나오기 전에는 깨달은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왜 선에서는 교학이 버려야할 알음알이로 전락한 것일까요?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덕산 스님이나 향엄 스님과 같은 분들의 예화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교의 달통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큰소리치며 주석을 쓰고 장광설을 펼칠 수 있는 대가들이었습니다.
여기에 해결점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나 용담의 촛불을 불어끔 등은 모두,
붓다의 양단을 쳐버리는 중도로부터, 용수의 중관과 삼론의 중도와 통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니 소위 화두라 하는 것도 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부처님 가르침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교입선이 아니라 통교입선이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교를 통하여 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선도 부처님의 근기따라 설하시는 대기설법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지요.
부처님의 내 말을 무조건 따를 것이 아니라 몸소 검증해 보아야 한다.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선만 그렇겠습니까?
초기 부파 대승의 초기 중기 후기와 금강승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 즉 교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계당정리라, 이치에 부합하면 불설이듯, 붓다의 말씀에 부합하면 다 불교이니,
선도 밀교도 다 불교이고, 불교는 부처님 말씀대로 몸소 검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를 통해 공부에 들어가므로, 교학인 지도를 버릴 수 없습니다.
물맛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진짜 물맛을 보라하여도, 물맛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도 안챙기고 길을 가시려고요?
아마 길을 아는 스승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한, 일생을 헤매다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께서도 스승 없이 깨닫는 것은 만에 하나도 드물다 하셨겠지요.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도는 언젠가 공부하여 되어야할, 체득해야할 정견입니다.
그리고 이게 공부의 선제조건입니다.
교를 통해 공부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교를 버리고 들어간다 하여도, “교를 버리는” 그것은 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교를 통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교입공부(捨敎入工夫)가 아니라 통교입공부(通敎入工夫 )인 것입니다.
교를 통해 공부에 들어가면 교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저절로 버려집니다.
그러므로 사교입선이 아니라 통교입선이고, 사교입밀이 아니라 통교입밀이고, 사교입위빠사나가 아니라 통교입위빠사나입니다.
교를 버리고 공부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교를 통하여 공부하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도 선은 반야교라고 해야 맞다고 하시니, 당연한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직지(直指)란 반야(지혜)교를 통해 선에 들어갑니다.
교를 통해 실천하면 교가 저절로 사라집니다.
왜냐면 체득하여 자기 것이 되면 즉 물맛을 보면, 물맛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모든 공부는 교를 통하여 들어갑니다.
그리고 물맛을 이미 보면, 물맛의 생각이 버려지듯 교는 저절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맛을 본 사람이 왜 물맛에 대해 생각하는가?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 답합니다. 그가 전에는 물맛을 보았지만, 지금 물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견의 중요함과 사견의 폐해
모든 공부는 이와같이 교를 통하여 들어가므로,
지금 아직 실천 체득하지 못할 말씀이라도 그것은 정견가운데 들어갑니다.
지도는 정견이니,
지금은 아니라도 반드시 가야할 길을 나타낸 것으로, 반드시 실천하여 체득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도는 정견이고 정견은 다른 말로 제대로된 알음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된 알음알이를 그저 지식이고 실제 공부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버려야 할 무엇으로 본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입니다.
(도리어 제대로된 알음알이는 정견으로, 반드시 갖추어야할 공부인의 선행조건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교해바다가 너무 광대무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대무변한 교해바다를 일목요연한 체계로 담아내야 실천가능한 정견을 갖추게 되니, 그것이 바로 체계불학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잘못된 사견을 가진 사람들을 보니, 문제가 아주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 안만 아니라, 불교 밖을 생각하니, 그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견에 떨어져 길을 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 뿐아니라, 무엇이 바른 말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입니다.
심하게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서 더욱 심각합니다.
잘못 아는 견해에 빠지면 벗어나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얘기해주어도 남의 말은 귀에 안들어오고,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불이 출세해도 못건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길을 못 갈뿐더러 이상한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잘못된 지도를 갖고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자신이 사견에 떨어졌다는 것은 쉽게 자각이 되지도 않으니, 고쳐지지 않는한 갈수록 병만 깊어집니다.
불교만이 아니라 불교 밖의 종교에는 더욱 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아주 크게 잘못된 견해만 사견이 아니라, 아주 작은 잘못된 견해도 다 사견입니다.
잘못된 종교, 잘못된 사상, 잘못된 철학만 아니라, 잘못된 마음가짐 등도 다 사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금의 현시대를 보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사견이 판치는 시대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바르게 가지 못하는 것도 이것이 한 이유가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견을 갖으면, 길을 갈 수 없을 뿐더러 귀한 시간을 잘못된 길을 가는데 허비하고,
마침내는 자신을 망치고, 남에게 전하면 남도 망쳐서,
그 폐해를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업 또한 작은 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에 정견을 갖추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방향을 잘 잡아 길을 가고,
길을 감에 있어서, 길의 곳곳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지도가 바르다면 지도보고 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가 잘못되면 만사가 헛고생입니다.
심한 경우, 첫걸음부터 잘못이라 차라리 길을 안가는 게 낫습니다.
이것이 지도의 소중함입니다.
지도의 중요함은 이렇한데, 제가 구태의연한 생각으로 알음알이라고 너무 잘못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은연중에 있던 잘못된 인식이라 할 것입니다.
이번에 미증유님 덕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저의 잘못된 인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다.
체득해야 비로소 나의 말이라 할 것이다.
제가 댓글을 달면서도, 저의 댓글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제가 몸소 그렇게 된 것, 즉 체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기는 알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아는 것이 제가 체득하기 어려워 저와 너무 먼 얘기처럼 여겨지면, 그것을 그저 알음알이 정도로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이것은 알음알이가 아니라, 정견(지도)이라고 할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내안의 미운 오리새끼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백조였던 것이지요.^^
천대받던 알음알이라는 내안의 미운오리새끼가 사실은 정견이라는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내안의 백조였다는 것입니다.
달리말해 사교입선의 교는 정견으로 선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교입선의 사교의 의미는 선에 들어가지 전에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과 같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즉 선가에서도 교는 선의 입문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교인데, 저는 알음알이로 보았으니, 선가의 사교입선의 의미도 저는 잘못알았다 할 것입니다.
물론 이미 보였듯이 교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통하는 것입니다.
버릴 교가 없는데 어찌 버린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교는 선으로 들어가기전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인 것이고,
선의 화두가 이미 반야의 가르침인 교인데, 어찌 교가 버리는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직지 화두라는 반야의 교를 통하여 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교는 정견으로 체득은 아니지만, 반드시 갖추어야할 지도같은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필수적으로 챙겨야할 지도와 같은 것이 바로 교학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된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 교학입니다.
교학 없이 길을 감은 지도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선을 하든 밀교를 하든 위빠사나를 하든 모두 교학이 필수라 할 것입니다.
실천가능한 교학은 미운오리새끼가 아니라 백조입니다.
공부에 들기 전 챙겨야할 지도입니다.
아니 공부내내 들고 갈 지도인 것입니다.
저는 백조를 미운오리새끼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이 사견이 아니고 무엇이 사견일까요?
잘못본 것이니, 사견 맞습니다.
저의 사견을 고백하고, 저의 백조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백조를 알음알이 취급하여 나와 동떨어진 그런 것으로 보고 미운오리새끼처럼 너무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재삼 새겨야할 말을 나와 무관한 알음알이로 보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목전의 일이 아니더라도, 전체 지도를 보는 정견을 갖추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전체 지도를 보지 않으면, 지도를 갖지 않은 것과 같아 아예 길 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일평생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도, 내가 왜 사는 지도 모릅니다.
고통받아도 왜 고통받는지 모르고 그냥 삽니다.
심한 말로, 개나 돼지같은 삶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지도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지도를 갖게 되면, 다음 세가지 일이 생김니다.
즉, 정견을 갖추지 못하고, 사견을 갖게 되면 다음 세가지 일이 생김니다.
첫째, 가는 방향이 잘못됩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동으로 갈 것을 서로 갑니다.
그러면 일생을 자기가 잘못알아 잘못가게 됩니다.
남에게 그것을 말해 남도 그렇게 되면 남도 잘못가게 만듭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사견은 첫걸음 즉 방향부터 틀렸습니다.
사견자는 첫걸음부터 거꾸로 가거나 옆길로 가기에 바로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견 즉 지도를 알면 내가 가는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견의 첫번째 폐해이자, 먼저 정견이 바로서야 하는 이유의 첫 번째입니다.
둘째, 순서를 어기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정견이 바로서면 순서를 어기지 않고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견의 두 번째 폐해는 순서를 어기고 길을 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부작용이 속출하게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마구니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정견이 바로 서야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법화경의 말씀처럼 중간에 화성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일불승을 말씀하십니다.
삼승 즉 성문 연각 보살은 부처님의 성불인 일불승에서 보면, 길을 끝가지 다 간 것이 아닙니다.
성불의 길이 있는데, 안가면 미완인 것입니다.
스스로 보살의 길을 가 부처가 되는 것이 일불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아승지백겁의 보살행을 합니다.
석가모니불의 그 복덕으로 지금 우리가 불법을 만나 공부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성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성불의 수기를 내리십니다.
성문이나 연각은 말할 것도 없고 보살조차도 모두 성불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법화경의 법문 초장에 아만이 남은 아라한 등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물론 실제 아라한이 그럴 리가 없지요,
교만은 번뇌인데, 번뇌 없는 아라한이 아만이 있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설화인 것을 이 한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도 누차 대승경전은 설화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편의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설화가 더 전달의 힘이 크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경을 볼 때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당정리이니, 진리에 부합하면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은 특히 대승경전은 있는 그대로 믿으면 우치한 사람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다 설화라 한다면 그것도 우치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바로 실천 가능하고 실제를 설하신 경들이 많습니다.
대승경전에도 있지만(예를 들어 아마타경 등의 극락세계는 영적세계로 없는 세계가 아니라 하십니다),
초기경전이 그렇다고 볼 것입니다.
무엇이든 한가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끝가지 길을 가게 하는 것도 지도의 중요성이니,
역으로 끝까지 길을 못가게 하는 것이 사견의 세번째 폐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정견이 바로 서야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정견과 체계불학(지도)
저의 잘못은 한마디로 지도를 경시한 잘못입니다.
무엇보다 체계불학이 생각나며 정신이 번쩍 들자, 등에서 식은 땀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지도는 정견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정견이 바로 서고서야 되는 것이지요.
사견으로는 방향부터가 잘못되어 거꾸로 가거나 가다가 옆길로 새기나 중도에 그치기 마련입니다.
지도를 보고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 지도를 보고 갑니다.
그와 같이 지도인 체계불학을 보고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체계불학이 처음과 중간과 끝을 다 갖춘 정견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님께서 불교는 연역의 종교라고 하셨고, 붓다의 깨달음(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으로부터 세계관 진리관 수행관이 다 나왔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체계불학은 바로 정견학이라 생각합니다.
체계불학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시 살아나, 세계관 진리관 수행관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정견은 바로 실천가능한 앎입니다.
아니 실천의 영역속에 들어온 앎입니다.
도성제인 팔정도의 정견이기 때문입니다.
정견이 바로서고서야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체계불학이라는 정견으로 모든 사견을 깨뜨려 부수고, 바르게 길을 갈 수 있는 것이고, 정견이야말로 바른 길을 가는 첫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지도불학인 교수님의 체계불학은 달리 말하면 실천가능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앎의 불학이고, 더 간단히 말하면 정견학이라 생각합니다.
정견이 바로서야 비로소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시급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정견학인 체계불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계의 현실에서 보아도,
역경사업이 막을 내렸고, 연구불학도 궤도에 섰으니, 체계불학으로 꽃을 피워서 교수님 말씀대로 모든 불자가 바른 신행과 수행의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체계불학은 그래서 또 실천가능한 앎의 불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구하는 것은 앎에 이르는 과정이고, 앎은 실천 가능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교수님께 무엇이 지도이고 무엇이 공부냐고 여쭙는다면,
“三藏을 아는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공부고, 三藏을 아는 것이 지도”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보면, 체계불학을 잘 실천하면,
하사도의 욕계의 인간과 천신, 색계의 천신, 무색계의 천신,
중사도의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
상사도의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부인들과 남방불교의 성자라는 분들과 동아시아의 선사라는 분들, 티벳의 고승이라는 분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아실 것입니다.
체계불학은 지도이기에,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갖추게 하고,
순서를 어기지 않고 가게 해주고, 가고 있는 자기 위치를 정확하게 점검하게 해주고,
도중에 멈추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가는 방법과 길을 안내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교수님의 체계불학이 아직은 그 초안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체계불학이 완성되면, 실천가능한 앎의 불학이 완성됨이고, 앎의 불학이 완성되면, 그 앎대로 길을 가면 될 것입니다.
물론 보리도차제론이 그 전범이지만,
교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에게는 선불교의 전통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고, 이것은 깨달음의 공부가 뛰어나고,
초기불교의 전통이 전해진 미얀마 태국은 지계와 선정과 삼매의 공부가 뛰어나며,
티벳의 공부는 교학이 뛰어나다고 하십니다.
이로써 볼 때 티벳불교는 지도에 가장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모든 교학은 실천을 위한 교학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교수님의 체계불학은 이시대의 교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회통하는 역사상 최초의 남방 티벳 동아시아의 전통을 아우르는 교학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체계가 방대해서 홀로 감당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인데, 이걸 시도하신 것은 교수님이었기에 가능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자꾸 세계최고를 말하게 됨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소리입니다.
전 세계 어느 불학자가 이런 마음을 낸 이가 있습니까?
종까파 스님은 스님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일생 숱한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신 위대한 수행자이고 고승이십니다.
또한 그것은 티벳의 전통이 770년(AD427~1197)이나 지속된 나란다의 전통을 계승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누구도 홀로 이루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없는데 오직 이건 아니다 하는 비판적 사고에서 이런 시도를 하고자 마음을 내었다는 그 자체가 전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불학의 전체가 보이지 않으면 꿈도 못꾸는 일입니다.
이렇게 전체 불교가 한눈에 보이는 경지에 이른 불학자가 전세계에 몇이나 될까요?
다음은 그 불학의 경지가 홀로 이루기에는 아무리 출중한 자질을 타고 났더라도,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로나 정확함으로나 넓이로나 제가 아는 한 없지 않나 싶습니다.
물으면 어떤 질문을 하여도 자판기에서 물건 나오듯(적절한 비유가 없어 죄송합니다), 넓고도 정확하고도 깊이 있는 말씀이 바로 나오시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강설하실 때는 폭포수 쏟아지듯 나오십니다.
이미 무수한 반복으로 정확해지고 깊어지고 체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세계 불학자중 어느 누가 이렇게 홈을 열어 대중과 격의 없이 열린 마음으로 정성껏 소통하신 분이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외에도 인격적인 면모 등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고, 다재다능에다 달변 등등 참 한 인간이 이렇게나 많은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이로써 볼 때 전생부터 얼마나 노력하시는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까마득한 분이십니다.
아무튼 교수님 덕분에 저는 불교의 두서 없는 혼돈이 사라졌고, 아주 일목요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배우기만 하면 되니, 누구말대로 무임승차한 기분입니다.
그 노고와 공덕에 오늘도 합장합니다._()_
배울 때마다 합장하게 됩니다._()_
고마워서 합장하고, 일깨워주셔서 합장하고, 듣지 못한 소리를 듣게 해주셔서 합장하고...
그렇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감사하고, 도반님들께도 감사하고, 오시는 분들께도 감사합니다._((()))_
ps) 작금의 세계 불교계에는 체계불학(지도)의 완성이 절실합니다.
교수님이 못다한 지도 완성! 언제될까요? 누가 계승하여 완성할까요?
지도가 완상되면 불교내의 모든 사견이 점차 없어질 것입니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하여 실천을 위한 앎인 교학이 일어날 것입니다.
깨달음의 선학이 교학의 도움을 받아 보약먹고 일어서듯 바로 설 것입니다.
쓰다보니 또 말이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附) 읽다가 너무 엉망이라 수정을 하였습니다.
물론 수정하여도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두서 없고 엉망인 것 보다는 낫기에 수정합니다.
저의 잘못을 자각한 글이고, 사견과 정견의 중요함과 사교입선이 아니라 통교입선 즉 사교입공부(捨敎入工夫)가 아니라 통교입공부(通敎入工夫)라는 새로운 자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워드 페이지로 10쪽이나 되므로 읽으신 분은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미쳤다는 생각입니다.@@
첫댓글 청정님의 글을 오늘 다시 꼼꼼히 읽어 보니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었네요.
길긴하네요. 그래서 처음에 제대로 못 읽은 것 같습니다.;;
사교입선을 오해하여 교학공부를 하지 않는 풍토에 대한 반성...통교입선( 통교입공부)에 대한 자각의 말씀
이었습니다
타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불자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견해가 너무 달라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미증유님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체계불학의 소중함을 또 생각해봅니다.
오늘 다시 읽어보니 청정님께서 한소식하신 마음을 써내려가신 기쁨이
오롯이 전달되는 듯 합니다.
늦었지만 그 기쁨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
도반님, 무척덥군요^^
도반님처럼 공감하시는 분들이 있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나누는 기쁨이 너무 크기에 저도 좋고,
공감하시면 공감하시는 분들에게도 좋으니, 더욱 좋습니다.
좋고 좋으니 또한 좋고 좋습니다.^^
늘 공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기를...
무더위에도 행복하시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_((()))_
선가에서 흔히 말해지는 '사교입선'이란 말에 대해, 교수님께서 "버릴 '교'를 알아야 '교'를 버릴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유튭에서 처음 들었을 때,
교학공부의 필요성을 어떻게 저렇게 쉬운 말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깨달음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청정님의 글을 읽으면 교수님에 대한 이해가 저와 90% 일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공감의 마음이 배가되고 신심도 나고 happy day가 되는 것 같습니다.ㅎㅎ
특히 체계불학에 대한 저의 관심을 자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큰 소득이 되었습니다.
청정님 평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_((()))
그러셨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도반님은 무언가 배우는데 있어 편견없이 그대로 수용하시는 힘이 있습니다.
스펀치같은 흡수력이라고 할까요?
말하자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보다도 교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더 잘 아시는 것입니다.
도반님 말씀 들어보면,
그래도 제가 교수님의 말씀에 많이는 어긋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혹여 이건 좀 다른데, 이건 아닌데 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위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늘 지금을 사니, 여기가 삼세고 여기가 삼계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될 날이 있겠죠?
도반님, 행복하시고 날마다 공부하기 좋은 날입니다._((()))_
청정님 교수님 가르침을 제가 더 잘 알거라는 말씀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좋은 마음이신 것은 알지만
낯부끄러워 입에 담기도 좀 그렇네요.;;
좋은 생각 의견 있으시면 올려주시구요.
늘 감사합니다.
🙏🙏🙏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올리면 도반님은 그에 관련된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안그렇거든요.
그리고 저는 지난날 틈틈이 책을 읽어 불교에 대한 제반 지식이 쌓여서 나름 표현을 하지만,
도반님은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교순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저보다 잘 알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