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다, 수풍석 뮤지엄* 외 4편
정 복 선
그래, 몸이 물이고 바람이야
당신을 이룬 뼈대는 산맥의 모습이지
어느 한 별이 수십억 년 전
밤이고 낮이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왔을
그 처음 스토리를 떠올렸어
태초에 목숨 건 사랑과 모험을
가만 귀 기울여 봐, 느껴 봐,
달은 가깝고 빠른 공전에 하루가 짧았었다는
선캄브리아시대로부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까지
화산폭발과 대륙이동 지각변동을,
30억 년간 형성된 한반도에서
대지의 의기를 뿜어내는 바람이
땅의 피리소리와 하늘의 피리소리로 서로 화답함을**,
오늘의 화두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당신이 바로 뮤지엄, 몸이라는 자연사박물관이지
이미 소멸했을지도 모를 행성의 한 조각이자
이내 돌아갈 한 빛이야
* 재일 한국인 건축가, 화가인 이타미 준(유동룡, 1935-2011)이 제주도에 건축한 박물관.
** 『장자』 내편 제물론에서 남곽자기와 안성자유의 대화에서 가져옴.
담다, 커피 잔
커피를 내리네 사월의 뜰을 바라보네
꽃나무들은 저리 움푹진푹 봄날을 건너네
나비, 벌, 새들에게 활짝 대청마루 열어둔 채
그득한 잔물결에
가뭄에 퍼덕이던 물고기의 아픈 지느러미도
살랑거리네
당신이 낮달을 질러가는 매서운 새일지라도
지금, 풍덩 다이빙하고 싶을 것이다
정글의 만 가지 음향音響 속으로
이따금 잔盞을 딱 한 개씩 사온 건
세상의 모든 우물과 사막과 오아시스를
하나씩 건너보려는 일
문득 고른 코펜하겐 잔盞에
먼 숲의 콘체르토concerto를 따른다… 마신다……
푸른 장미꽃, 덩굴 사이로 바람이 오고가며 숨 쉬는,
밤이면 지고 차오르고 다시 저무는
무상無償무상無常의 달빛연주를,
하나의 잔盞은 언제나 별서別墅의 연못으로 어딘가에,
담다
-오디션, 오디세이Odyssey
청춘들이 꽃구름처럼 몰려오고 몰려간다
비구름 번개구름 되어 그토록 갈망하는
낯선 곳에 다투어 쏟아지려 하네
기타를 친다, 흐르다가 부딪거나 저어가거나
뭉쳤다가 부서지고 겅중겅중 춤추며 자지러질 듯
신神이 매어 놓은 저 수평선, 그 현絃에 목숨을 튕긴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이 눈부신 잔치마당 뒤에서
어둠속 정체, 그 무엇이라도 끌어안고
철썩, 밀물썰물로 누군가의 꿈에서 깨어난 듯
이타카Ithaca 너머 태양계 너머 항해하려는 보이저호들이여!
담다, 보랏빛 시인
그 소박한 이름 보랏빛으로 물들었네
널리 소문나지 못한 슬픔
열렬한 시 사랑에 진정성 있는 통화의 목소리,
마지막 꽃밭에서 그의 얼굴은 쓸쓸하다……
수국꽃같이 어우러지고 싶었던 이
비로소 옛 시인들과 더불어 유유히 만행漫行할까,
그가 사랑한 차이코프스키 비창교향곡 희망절망의 리듬으로
여주 남한강에서 두물머리를 지나서 한강, 강화도를 휘돌아
두둥실, 반야용선에 탄 한 사람 뒤를 돌아보네
무량억겁 파도 속 비단 스카프 한 점
담다, 청우산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준비도 없이 허투루마투루 밤길 떠나왔다
스스로 불 밝히고 걸어온 줄 알았다
청우산 자락에 기항寄港한 지도 오래,
산사태와 물난리에 나무뿌리 잡고 숨 가다듬는 동안
비바람에 글라디올러스 꽃대 무참히 꺾여버린
시행착오에도 산새들은 어딘가에 알을 낳아 품었듯이
딱따구리, 검은등뻐꾸기, 물까치들 소리 계곡을 넘나들듯이
다시 심은 수선화 자목련 모란꽃…… 들이
차례로 연등燃燈을 켜듯이
오천축국五天竺國을 순례하며 절절히 그리워했으나
신라에 끝끝내 돌아오지 못한
혜초 스님의 법등명을 이제야 이해할 듯하다
무엇이 내내 밝혀주었던가
저 산맥 속,
청우산靑雨山이 담고 있는 집을, 나를,
*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 혹은 자주 자귀의 법주 법귀의(自燈明 自歸依 法燈明 法歸依/ 自州 自歸依 法州 法歸依). 자기 자신을 등불(피난 섬)로 삼고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피난 섬)로 삼아 의지하라는 뜻. 부처의 유훈(遺訓) 중에서.
정복선 약력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성신여대대학원 졸업. 1988년 『시대문학』 등단. 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 등 8권, 시선집 『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 영한시선집 『Sand Relief』, 평론집 『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 한국시문학상, 한국꽃문학상대상 등 수상, 서울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