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항변抗便 외 4편
사공경현
미개한 신사의 나라 골목마다 밤새 내질러 놓은 역겨운 물질을 밟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탄생한 하이힐의 유래를 보더라도, 먹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유기체들의 뒤처리는 원초적 숙제이자 생태계의 골칫거리일진대
세상에는 억센 들풀만 먹고도 거뜬히 살아가는 순한 부류가 있고 바늘 같은 솔잎을 먹고 사는 지독한 놈도 있으며 고급스럽게 뽕만을 고집하는 비단족이 있는가 하면 하물며 땅속에서 흙을 파먹고 사는 어둠의 존재도 있다니
그래도 그들은 양심적이고 선하게 먹고사는 편이다 저 야생을 보라 피 튀기며 남의 생살 뜯어 먹고 사는 불한당 같은 종자가 있는가 하면, 몰래 대롱 꽂아 남의 피 빨아먹고 사는 파렴치한 족속도 있지 않은가 그뿐이랴 모든 포식자 위에 군림하며 희생양의 신체 부위 요기조기를 골라가며 후벼파고 찢고 발라, 구워 먹고 찜쪄먹고 회 쳐 먹는 일 자체를 즐기는 인면수심도 있거늘
그러거나 말거나 남이야 무얼 먹든 먹는 것 가지고 참견하지 마라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우리는 너희 우월한 종들이 무심하게 방기한 뒤를 먹고 사는 지구촌 제일의 미식가이자 신사로다 우리 없는 자존심, 우리 없는 환경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야말로 신이 보낸 헌신의 사도이니라 우리 없는 하루를 생각해 보았느냐 하이힐 정도로는 어림도 없나니 눈부신 날에도 세상은 장화로 넘쳐날 것이로다
그런데 우리 박애주의자 일동은 노파심으로 주문하는 바 우리의 무량한 식욕을 보고 지레 겁먹지 마라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결코 너희 음식을 탐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 또한 우리의 알량한 양식에 대해 절대 눈독 들이지 말지라
꽃길
내 어릴 적
봉숭아 채송화 수줍던 장독대 사이를
코스모스 살랑대는 들길을
토끼같이 겅중겅중 뛰어다녔지
자개구름 반짝이는 하늘에
삐릿 삐릿 삐리리
종달새 맑은 울음
저 멀리 교회 종소리와 함께
푸르르 가슴을 적시었지
그때는 마냥 꽃길인 줄 알았지
무지개 별빛 언덕이길 바랐지만
잡초가 자라는 길 언저리
새 소리조차 날아가 버린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오기도 했지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총총총 징검다리를 건너듯
산을 넘어 예까지 왔네
어릴 적 그 꽃길 보이지 않고
허물어진 초가집 옆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수풀 우거진 언덕에 덩그러니 서 있네
아버지는 색색의 꽃을 심었고
그 벌판을 휘돌다가
벌이 되고 나비가 되셨지
이제는 나도 그 길을 가야겠네
배추꽃을 본 적이 있나요
가녀린 손으로 두 뺨을 감싼 수줍은 소녀예요
청록의 부푼 가슴 안고 다소곳이 자라나
수수하게나마 예쁜 꽃을 피우고 싶은 숙녀랍니다
미소한 나를 지켜줄 늠름한 흑기사는 없나요
푸릇푸릇 눈부시게 차오르던 시절
영문도 모르게 들이닥친 흑기사
앉은 채로 답쑥 안고 보쌈해간 손이 있어
거칠게 나의 겉옷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탐욕스럽게 훔쳐보더니
야수의 눈빛으로 몸을 유린하기 시작했어요
욕조에 끌고 가서 소금물을 먹이고
온몸에 맵고 따가운 불순물을 처바르더니
장독 안에 감금하는 것 아니겠어요
처녀 몸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건가요
육신이 저려 삭아 내리는 나를 보고
잘 숙성하거라 비아냥하니 말입니다
백 년에 한 번 피는 선인장이 있고
일생에 단 한 번 꽃 피우는 대나무도 있다지만
모름지기 생명의 씨앗을 품은 존재이련만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는 신세라니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요
물망초처럼 청초하지도 않아도 되어요
밤에 숨어 피는 달맞이꽃이거나
아침저녁에 지는 나팔꽃도 괜찮아요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호박꽃도 부러워요
눈에 띄지 않는 꽃으로 태어났지만
꽃인 줄도 몰라주어 야속합니다
나도 한번 꽃 피워보고 싶은 존재랍니다
인간의 범위
인간의 범위는 생각보다 매우 광범위하다고 알려져 있다 생각을 할 줄 알고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면 일단 인간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특징이다 개체마다 다른 생각의 차이만큼이나 천차만별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슬기로운 자라는 호모사피엔스는 포유류에 속하는 특정한 동물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인격’을 갖추면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인간류는 허다하며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국가는 일단 직립보행하고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외양을 갖추면 인간으로 인정한다 나아가 호적을 등록하고 존엄할 권리와 도덕과 규범 준수라는 의무까지 부과한다
이 세상을 한시적인 학교로 생각한 조물주는 애초에 인간의 범위를 확장해 놓았다 잡다한 인간류가 섞여 살며 부대끼면서 공부하라는 취지다 세상에서는 호모사피엔스 중간 정도의 진화 과정에 있는 부류를 ‘인간’이라 부르고 그 이상 수준의 인간을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인간’ 이하 단계의 인간을 ‘짐승 같은 인간’, 그 하위 수준을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조물이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준 이하의 인간들에게는 인두겁이라는 투명한 가면을 씌워 놓았다 하여 도둑이나 강도 강간 사기범 같은 부류는 짐승 같은 인간으로 분별된다 짐승들도 목숨을 다해 새끼를 보호하는데, 자식을 죽이는 아비가 있고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도 있다 이러한 패륜과 살인자 등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 범주에 속한다 한편, 살신성인이거나 대자대비하거나 세상의 빛이 된 고매한 인격을 가진 최상위 수준에 있는 소수의 사람을 ‘성인’이라 칭하며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로 인식한다
인간은 오랜 세월 진화를 계속해 왔으며 상위 수준으로 거듭 발전하기 위해 광범위한 인간류의 복마전에 던져진 고립무원의 존재와 다름없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정신 바짝 차리고 인두겁에 휘둘리거나 인간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지라
캔버스 기상도
만백성 굽어살피느라 바쁘기도 하련만 예술을 아는 분이라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리신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이제는 업이 되었다 매 순간 영감의 표현이지만 눈치 빠른 이들에게 당신의 기분을 넌지시 암시하는 수단으로도 삼으신다
그는 백성이 우러르는 크나큰 궁창을 캔버스로 여기셨다 간단한 스케치나 크로키로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큰 물난리 이후에는 그 색감과 형체 등 조형미가 오묘하고 깊어졌다 새벽에 기침하시어 기분이 좋은 날에는 주황색 계통의 밝은 색조를 사용하신다 어떨 때는 역광 기법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태기도 하는데 그날 일과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흡족하실 때는 더 진하고 화려한 색채를 구사하신다 이때는 보는 이의 마음이 평화롭도록 주로 가로무늬를 넣으신다
정사에 시달려 좀 쉬고 싶을 때는 주로 흰색을 사용하신다 바탕색을 파랗게 깔고는 엷은 흰색을 뭉실뭉실 피워 올리거나 가볍게 새털을 날리기도 하고 반짝이는 조개를 촘촘히 모자이크 하신다 특별한 날에는 아끼는 동물의 모양을 그려 넣기도 하는데, 장난기라도 발동하시면 노골적으로 하트 모양을 날리기도 하신다
기분이 아주 좋은 날에는 상식과는 달리 무채색을 즐겨 이용하신다 주로 검은색과 회색 계열의 어두운 색감을 칠하신다 삶에 지쳤거나 부끄러움에 잠긴 자라도 편하게 올려 보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이에 더하여 빗줄기를 그려 넣기도 하고, 기분이 아주아주 좋을 때는 산봉우리 사이에 일곱 색깔로 커다란 아치형 다리를 그려 놓으신다 시련과 낙담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눈짓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시려는 의도다
그에게 무슨 난해한 고민거리가 있을 때는 색이나 형체를 무시한 초현실주의 화풍을 취하신다 이에 반해 평범한 날에는 고전적 기법으로 주로 자연을 표현하신다 그러나 만일 캔버스가 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그가 무언가에 꼬여 있거나 심기가 불편한 날이다 관료들이 옷깃을 여미며 살금살금 눈치를 봐야 하는 날이다
----애지 여름호에서
사공경현司空京鉉, 1957년 경북 군위 출생, 2022년 {애지}로 등단, 수필집 {무임 하차}(2017년) 발간
이메일 주소: v404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