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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 친절] 따뜻한 새해
역사상 가장 친절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흥미롭게도 이에 대한 정설도 논의도 없다. 가장 악랄한 살인마나 최고의 욕심쟁이 등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가장 따뜻하고 착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억지로 찾아봐도 진부한 위인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친절에 관한 책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어린이용 도서를 제외하면 고작해야 「오늘부터 자신에게 친절하기로 했다」는 식의 달달한 위로서나, 「친절을 파는 15가지 원칙」 등 마케팅과 관련된 책이 있을 뿐이다. 현대인에게 친절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거나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정도로 인식되는지도 모르겠다.
친절에 대한 오해
친절은 따뜻하고 착한 태도를 말한다. 정겹고 착한 행동으로 상대를 만족스럽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떠한 의도도 없어야 한다. 돈 받고 하는 친절은 그저 용역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요구할 뿐, 스스로 친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따뜻한 태도는 다른 재화와 맞바꾸는 것이니, 거저는 친절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친절을 보아도 뭔가 속으로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타인에게 너무 잘해 주면서,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부당한 요구에도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정작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면서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궁금하면 주변 친구에게 “나는 너무 착한 것 같지?” 하고 물어봐도 좋겠다.
친절하고 따뜻한 행동 하나하나에 전혀 감정적 손해를 보지 않으려니, 받은 친절과 준 친절 간의 대차 대조표를 마음속에 만들고 있다. 그런데 빌린 돈은 잊어도, 빌려준 돈은 잊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이 죄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자체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오진이다.
현대 사회의 친절
친절에 대한 가장 부적절한 사회적 현상이 ‘친절상’이다. 회사나 기관마다 직원에게 친절상을 준다. 서비스 업종에서는 직원의 친절도를 평가하여 성과급을 매긴다. 학교에서 받은 친절상은 대학 입시 때 가점도 받는다.
친절상을 두고 싸움도 난다. 서로 받겠다고 하면서 주변 직원에게 자신을 추천하라고 종용한다. 다른 사람이 친절상을 받으면 질투심에 이글이글 타오른다. ‘내가 더 친절한데, 왜 쟤가 칭찬을 받느냐!’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라는 칠죄종에 대비되는 칠추덕이 바로 친절인데, 정작 친절을 두고 시기심에 빠지니 이런 모순이 달리 있을 수 없다.
친절, 곧 이타적인 행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연구의 방향은 대부분 똑같다. 이타적인 행동이 사실 행동의 공여자에게 도리어 이득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다. 상식적으로 착하고 친절한 사람은 친구도 많아지고 주변의 보답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절하면 복이 오니 친절하라고 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진짜 착한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친절을 베풀기 때문에 보답받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연구 결과를 보고 ‘아, 따뜻하고 착하게 살면 도리어 이득을 얻는군!’ 하며 생각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그런 연구를 들이대면서 “얻는 것이 있으니 더욱 친절하시오!” 하는 사람도 있다. 목적이야 어쨌든 친절해지면 좋은 일이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고 친절을 행한다면 그저 ‘투자’나 다름없다. 진짜 따뜻하고 착한 사람마저 이리에 밝은 투자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친절을 찾아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세에는 뭔가 바라지 말고 대신 내세의 복이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또한 친절상에 욕심내는 직원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상을 주는 주체가 하느님으로 바뀔 뿐이다.
대인 관계에서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심리적 모듈은 유독 인간에게 고도로 발달되었다. 이는 복잡한 사회 구조를 지탱할 뿐 아니라, 나쁜 사기꾼을 물리치는 강한 힘을 가진다. 반드시 필요한 인지적 능력이다. 그런데 따뜻한 배려나 착한 친절은 타인 지향적 가치다. 절제나 근면, 인내 등 내적인 덕목과는 다르다. 그래서 친절을 행할 때는 이득 · 손해 모듈이 자동으로 켜진다. 분명 뭔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메말라 죽어 가는 풀을 보고 물을 준 적이 있는가? 물을 주면서, 풀이 다시 생생해지면, 물값을 청구할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금전 출납부에 ‘2019년 1월 1일 멸치 일곱 마리’라고 적어 두는가? 이득 · 손해 모듈이 아예 켜지지도 않는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득·손해 모듈은 유독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 활성화되는 특징이 있다. 개에게 만 원짜리 사료를 줄 때는 기분이 좋기만 하지만 친구에게 사 준 5천 원짜리 분식값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한 비용을 꼭 보상받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친절하고 따뜻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막연하지만 선한 마음이 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상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녀석이 나에게 했던 못된 행동도 생각나고, 왠지 친절하게 해 주어도 돌려받지 못하고 손해 볼 것만 같다. 선뜻 정겨운 행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고양이에게 줄 멸치를 산다.
뭔가를 받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친구라는 확신이 들어야 비로소 마음이 움직인다. 그런 것도 없다면 ‘천국 입학시험에 가산점이라도 되지 않을까?’라고 위안을 삼아야 편해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터무니없는 손해를 본 것 같아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왜 저 고마워하지도 않는 배은망덕한 녀석에게 친절을 베푼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불을 뒤척이며 밤잠을 설친다.
친절은 시기에 반대되는 덕목이다. 착하고 따뜻한 타인 지향적 태도와, 남을 부러워하며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시기심이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기심에서 진정한 친절을 베푸는 심리학적 팁을 얻을 수 있다.
시기심이란 스스로 손해를 본 것도 없이 상대에게 미운 감정이 드는 심리적 현상이다. 반대로, 주고 나서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이 친절이다. 혹시 살면서 까닭 없이 남을 시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까닭 없이 남에게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 될 자질은 충분하다.
[행복을 찾아서 – 인내] 오래 참는다는 것
행복 강박증에 시달리는 현대인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된 지 오래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는 물론이고 대중 소설가나 뇌과학자 등도 행복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끝없이 써 내고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 가운데 아홉 권이 ‘심리 에세이’였다. 종교 기관도 마찬가지다. 강론과 설교는 일종의 심리강좌처럼 변해 간다.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상담하고, 끝부분에 성경 구절이 양념처럼 살짝 얹힌다.
행복을 좋아하고 불행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점점 행복은 삶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이 되고 있다. 직장에서는 정기적으로 설문지를 풀고 자신의 행복 점수를 통보받는다. 점수가 낮으면 승진도 어렵다.
행복하게 보이려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성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다.
현대인은 점점 고통을 참고 견디는 일에 질색하게 되었다. 행복이 목표가 된 사회에서 묵묵히 인내한다는 것은 스스로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고통과 실패를 겪더라도 어떻게든 그 위험천만한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애써 미소 짓는다.
실패보다 두려운 것은, 불행을 남에게 들키는 일이다. 흔히 행복하려고 산다는데, 실제로는 ‘행복하게 보이려고’ 산다. 맛없는 음식은 뱉어 버리듯이, 행복하지 않은 삶은 ‘이미 망한’ 인생이다. 현대인의 행복 강박증이다.
인내라는 덕목의 추락
사실 지난 수천 년간 ‘인내’는 가장 위대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그 반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쓰이지도 않았다. 그 어원 자체가 ‘우연한 행운’에 가까운 말이다. 주로 뜻밖의 횡재를 했을 때 “행복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행복은 그 지배 영역을 크게 넓혔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기쁨,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안정, 고통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는 상태를 모두 뭉뚱그린 상상의 거대 복합체가 되었다.
예전에는 불행과 이를 참고 견디는 인내는 삶의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입에 쓰지만 꾹 삼키는 약이었다. 의료계에서는 정말 심각한 정신 장애가 아니면, 소소한 불행감은 병으로 치지도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신경이 쇠약’하다는 사람에게 이른바 ‘행복’을 처방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방한 것은 ‘그래도 괜찮아, 당신은 문제없어.’라는 부류의 달달한 위로와 지지가 아니라, 사회적 격리와 요양, 동료와의 대화 금지와 장기간의 침묵, 금욕적인 식이 조절,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이었다. 절제와 인내가 주처방이었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금욕적인 삶과 절제된 노동, 깊은 기도와 긴 사색을 통해서 더 본질적인 영혼의 답을 찾으려고 했다. 삶의 쾌락과 편안한 안락은 오히려 배격해야만 하는 악덕이었다.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었다. 과도하게 세상의 인정을 바라거나 지나친 부를 모으는 것도 옳지 않았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었고, 오히려 경계해야 할 유혹이었다. 미국의 작가이자 연설가인 에드윈 허벨 채핀은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위대함 그리고 절대적 존재와 맺은 관계는, 이루어낸 업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에서 드러난다.”
행복 심리학은 각광받는 신흥 사업이 되어 사회의 여러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분명 선조보다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자유로운 세상에 살지만, 현대인은 끝없는 행복에 목말라한다.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 어떻게든 ‘가해자’를 찾아서 ‘항의’하고 ‘적절한 보상’을 요구한다. ‘나 님’이 누려야 할 행복을 감히 방해한 죄다. 마땅한 대상이 없으면 세상 전체에 화살을 돌리고, ‘이게 나라냐!’며 더 큰 안락과 부와 편안과 자유를 달라고 끝없이 외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종교 활동의 목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이제 죄를 고백하고, 삶의 진리를 찾으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공간이 아닌, 부부 갈등이나 대인 간의 불화가 있을 때 찾는 상담소가 되기도 한다.
우울하거나 불안하면 성가를 명상 음악처럼 틀어 놓고, 마음을 달래는 종교 심리 에세이를 읽으며 스스로 위로한다. 수요가 공급을 낳듯이 종교 기관이 점점 행복 산업의 말단 대리점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오래 참음’을 말하는 성직자는 도무지 인기가 없다. 대중의 바람대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편집자 주)과 ‘욜로’(You Live Only Once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로, 한 번뿐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살라는 뜻 - 편집자 주)를 이야기해야 ‘트렌디’(trendy)한 성직자로 인정받는다. 영원함을 희구하는 성직자가 ‘한 번 뿐인 인생 마음대로 즐기라!’고 하는 괴상한 현상이다.
‘자칫하면 열심히 노력할 뻔했다.’는 식의 책은 더 이상 보답 없는 고생은 하지 말라고, 다시는 성실할 필요 없다고, 다 세상이 너를 이용하려 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현대인이 얼마나 힘들면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 역사상 지금의 우리 사회가 최악의 세상 같지는 않다. 그저 고릿적부터 사람들을 유혹하던 달콤한 이야기일 뿐이다. 성경에도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1코린 15,32)라고 하지 않는가.
오래 참음의 가치
행복 추구권은 헌법상의 권리라고 하지만, 사실 헌법에 행복 추구권을 규정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1980년 8차 개헌 때 처음 들어간 것인데 아마 미국 독립 선언문의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일까? 행복은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기 때문이다. 행복 자체는 영원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얻을 수도, 줄 수도 없다. 좇으면 좇을수록 도망간다. 쾌락도, 부유함도, 명예도, 인정도, 건강도 마찬가지다. 다만 행복을 추구하며 겪는 시련과 인내로 오히려 진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참을 수 있지만, 단 하나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행복한 날이 계속되는 것이다.” 독일의 극작가 괴테가 한 말이다.
인내는 눈에 보이는 영광을 위해 잠시 꾹 참는 것이 아니다.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를 위해서라면 누군들 참지 못할까? 뜻밖의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불운,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일도 견뎌 내는 것이다. 굴복도 아니고 용기 없음도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영혼은 점점 아름답게 빚어지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썼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5,3-4).
[행복을 찾아서 – 겸손] 낮은 자리
“높은 자리에 오르면, 남을 거느릴 것도 생각나고, 원수를 잡아들여 보복할 것도 생각나고, 나를 두려워하며 아첨하는 자들이 나를 기쁘게 할 것도 생각나고, (내가) 어떤 사람을 땅에 내칠 수도, 어떤 사람을 하늘 위로 끌어올려 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나고, 불쌍한 사람이 하소연하면 그들을 도와줄 것도 생각나고, 도움받은 이들이 나를 칭송하고 좋아할 것도 생각나고, 그러면 (칭송을) 겉으로 사양하는 척할 것도 생각나는 것이다”(판토하, 「칠극」 참조).
교만한 현대인
교만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맹위를 떨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도한 느낌, 자신이 이룬 성취나 재능에 대한 과장, 우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성공과 권력, 명성에 대한 끝없는 갈구, 과다한 존경과 특혜 요구, 타인을 지속해서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경향 등이다.
오만하고 교만한 행동은 사회 지도층에게서 흔히 관찰된다. 그래서 약간의 오만함은 마치 유능한 지도자의 어쩔 수 없는 덕목으로 눈감아 주는 일도 있다. 사실 병적인 교만함과 건강한 긍지를 구분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귀엽게’ 볼 수 없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으로 가득한 성품을 정신의학적으로 말하면 자기애적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은 온통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화려하고 멋진 젊은 시절을 추구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선망한다. 내가 잘났으니 자신의 주변도 최고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 최고의 친구를, 가장 멋진 연인을, 가장 보기 좋은 일자리를 찾는다.
도덕적 교만
속물적인 가치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우월성이나 윤리적 결벽도 자기애적 성격의 ‘증상’이다. 엄격한 기준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지만, 이는 남보다 우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매도한다. 관용과 이해는 없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냉정한 평가절하를 마치 자신의 높은 윤리성에 대한 증거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교만이 죄 중의 죄, 죄의 여왕이라고 했고, 16세기 영국의 성직자 헨리 스미스는 모든 죄의 으뜸이 교만이라고 했다. 교만한 사람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느낌과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을 점점 자신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종종 주변을 잘 돕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내가 이렇게 똑똑한 데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라는 왜곡된 오만함으로 가득하다.
정직한 겸손
인간의 성격을 나누는 몇 가지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겸손과 정직이다. 이 둘은 뜻이 다르지만, 사실상 비슷한 가치를 말한다. 정직하면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나 겸손한데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은 별로 없다. 가식을 싫어하고 공정을 추구하며 사치와 향락을 꺼리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다.
지난날에는 인간의 기본적 성격을 다섯 가지 요인으로 나누기도 했다. 외향성, 순응성, 성실성, 신경성, 개방성이다. 이러한 요인의 상대적인 조합으로 한 사람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대규모 연구를 통해서 여섯 번째 요인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로 겸손과 정직이다. 마치 그 이름처럼 다른 성격 요인에 묻혀 자신을 숨겼던 성격 요인이다.
겸손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적 덕목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태도가 군자의 조건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겸손의 가치는 급락하고 있다. 신속하고 명확한 자기과시가 겸양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겸손의 가치가 너무 ‘겸손’해져 버린 세상이다. 모두 자신을 자랑하기에 힘쓴다. 돈과 지위를 드러내는 사람이나 청빈과 소박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전제되었다면, 두 가지 모두 정직한 태도는 아니다. 억지로 높은 위치에 올라 타인을 내려다보려고 한다. 높은 자리는 늘 북적이는데 낮은 자리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겸손한 나를 위해서
미국의 정신 분석가 하인즈 코헛은 자기애적 소망이 깨지는 고통의 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애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 고통의 순간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그 불편한 순간을 감내하지 못하고, 당장 자신의 허약한 마음을 위로해 줄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선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거짓된 자기를 만들어 낸다. 과장된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속인다. 부풀려진 자기상을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 숨으려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다른 덕목과 달리 독특한 특징이 있다. 말 그대로 ‘겸손’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칭찬해 주기도 어렵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요.’라는 주장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니 칭찬할 수도, ‘올해의 겸손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상을 줄 수도 없다. 양보하기 시합에서 모두를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겸손한 사람이라면 이런 글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겸손의 미덕을 공개적으로 떠드는 글을 쓰고 있지만, 이야말로 정말 교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은 나서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자리는 피하고 은밀하게 양보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하다.’라는 사회적 평판을 날름 빼앗아 간다.
겸손이라는 가치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주변에서 정말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을 만나서 기쁜 마음이 든다면, 드러나지 않게 도와주어야 한다. 워낙 드러나기 싫어하는 사람이니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상을 주는 것은 무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본인도 모르게, 뒤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스스로 드러내고 자신을 알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현대 사회다. 허세와 교만, 자기 자랑과 오만으로 넘실댄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도 보석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다. 낮은 자리를 자처한 겸손한 이들이야말로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스스로 겸손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게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행복을 찾아서 – 근면] 추락하는 근면의 가치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코헬 2,24).
성실과 근면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가치이자 동시에 현실적으로 유리한 행동 전략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워라밸’(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 - 편집자 주)을 따지고 ‘저녁 있는 삶’을 부르짖는 세태가 한심스럽다.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때가 불과 수십 년 전인데 말이다.
현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9-11).
부디 다시 심기일전하여 부국강병을 위해 근면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남 탓만 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보면 걱정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러면 왜 현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는 것일까?
나태의 역설
나태는 칠죄종의 하나다. 그 자체가 누구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영혼을 갉아먹는 정신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근로 시간으로 전 세계 1, 2위를 다투는 한국인이야말로 나태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에서 우리 민족을 당해 낼 민족은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부지런한 국민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삶을 분주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이 근면일까? 잠시도 주변을 돌아볼 시간 없이 다음 갈 곳으로 바삐 움직이는 것만이 건강한 성실함일까? 나태란 단지 부지런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태가 우울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아예 나태 대신 우울을 칠죄종에 올리기도 했다. 정신의학적인 면에서 나태는 단지 느릿느릿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 무기력에 더 가까운 용어다.
당신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현대인의 시간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한 회사의 과장이자 한 집안의 아버지이고, 봉사 단체의 총무이면서 동호회의 회장이고 동창회의 임원이다. 겸업도 하고 세 겹벌이도 한다. 다이어리는 여러 일정이 들어서다 못해 여러 개의 일정이 포개지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현대인을 게으르다고 비난할 것인가?
하지만 현대인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한다. 자녀의 학예회에서 업무에 관련된 카카오톡을 쉬지 않고 날리고, 회의에 참석해서도 다른 업무를 고민한다. 정작 사무실에서는 집안일을 걱정한다. 모처럼 친구와 등산을 하면서는 온통 사업 이야기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순간조차 비워 두지 못한다. 눈과 귀는 스마트폰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배변하는 순간마저도 온전히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우울과 나태의 주된 증상은 바로 무의욕증과 무쾌감증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것도 즐겁지 않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무엇이라도 가져와서 한 번뿐인 ‘순간’에 욱여넣는다. ‘쓰레기’ 같은 정보로 시간과 정신을 가득 채운다.
헐레벌떡 자녀의 학예회에 오면 무슨 소용인가? 연신 회사 일로 카카오톡을 주고받는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회사에 있는 것만 못하다. 솔직히 말하면 자녀의 학예회에 별 관심이 없다. 등산도 마찬가지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 것도 아니다.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야근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진정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허전함을 채워 줄 무엇인가로 시간을 채워 넣는 것이다.
분주한 게으름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큼 사람에게 좋은 일은 없다.” 「공동 번역 성서」 코헬렛 2장 24절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고’가 아니라 그러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다. ‘수고한 보람으로 더 수고하고 더 수고해서 끊임없이 세계 1위가 될 때까지 계속 수고해라.’라고 하지 않았다. 수고한 삶이 정작 본인을 위한 시간을,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보낼 시간을 빼앗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분주한 게으름이다.
어느 날 가족 모임이 귀찮아서 야근을 자청했다. 하지만 사실은 긴 저녁을 먹고 ‘인터넷 서핑’을 하느라 야근 시간을 허비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비싼 택시비를 내고 퇴근했다. 가족 모임에 가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 공연히 인상을 북북 쓰면서 귀가했다. 술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출근을 했다. 어제 야근을 했으니 쉬어야 한다면서, 연신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렸다.
도대체 뭐가 근면한가?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기만 했을 뿐이다. 가족 모임도 가지 못한 채 야근도 했고 머리 감을 시간도 없었으니 남들에게는 부지런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도시의 빌딩을 가득 채운 현대인은 모두 “나는 바쁘다. 나는 성실하다.”를 외치면서 정작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치고 있다.
그러면서 이유 없는 억울함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보상이 보잘것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근면한 것이 아니라 근면한 척하고 살았을 뿐이다. 도망치기만 했는데 무슨 보상이 있을까.
게으른 성실
우리는 종종 상상한다. 만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일단 형편없는 직장에 사표를 날릴 것이다. 지루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가족들과 한 번뿐인 삶을 즐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사실 우리 조상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 아닌가?
행복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그리 대단치 않다.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이제 ‘게으른 성실’의 삶을 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풍족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자원은 바로 ‘시간’이다. 필요 이상의 근면한 삶은 가장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와 권력을 다 얻었지만 결국 헛되고 헛되다는 이야기는, 아마 굶주리고 헐벗은 동시대인에게는 그다지 크게 공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게으른 분주함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정말 유익한 이야기다. 자신의 시간을 팔아 물질을 얻는 것이 지난날의 근면이었다면, 이제 소중한 시간을 얻는 것이 새로운 근면의 기준이다. 현대인보다 풍족한 삶을 훨씬 일찍 맛본 코헬렛의 현자가 말하듯이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코헬 1,2).
[행복을 찾아서 – 사랑]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사랑이란
인간이 가진 많은 감정의 정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물론 분노나 슬픔, 불안, 짜증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연구가 많다. 당연한 일이다. 우울 장애나 불안 장애 등 마음의 병과 관련되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진다. 겸손이나 회복 탄력성, 인내, 공감 등이다. 조만간 인간의 감정과 관련한 미스터리가 전부 풀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조금 성급한 이야기다. 가장 기본적인 긍정적 감정이자 행동인 ‘사랑’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것이 없는데 말이다. 남녀 간이나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제법 알려졌지만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다. 흔히 ‘카리타스’라고 하는 사랑이다.
독일의 정신 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존경, 책임, 보살핌, 건강한 호기심’이 사랑의 요체라고 하였다. 어떤 이익이나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다른 이에게 온전하고 따뜻한 관심을 주는 선한 행동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행동은 도무지 이성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속옷을 달라고 하는데 겉옷까지 주는 행동이 아름답기는 하겠지만, 그러다가는 곧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오른뺨을 맞았는데 왼뺨을 대다가는 양 볼이 만두처럼 퉁퉁 붓고 말 것이다.
사랑과 탐욕
그저 도통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초월적 경지일까? 그렇다면 오히려 실망스럽다.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높은 수준의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주기도 어렵고, 받는 일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위대한 사랑은 겨우 성경에서나 읽을 수 있는 ‘상상의 일’이라니, 결국 우리 삶에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로마의 시인이었던 아우렐리우스 클레멘스 프루덴티우스는 사랑을 통해서 탐욕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랑은 우리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부정적 감정, 곧 욕심을 잠재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쌓아 두려고 하는 어두운 본성을 이기는 밝은 힘이다. 분명 존재하며 오늘도 세상 어디선가 행해지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탐욕이다. 물질과 관계에 대한 강력한 욕망은 풍족한 사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있다.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망, 더 돋보이려는 갈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오히려 갈증은 더 심해진다.
한 번뿐인 인생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만족하게 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목적으로 허비된다.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무엇보다도 많은 은행 잔고와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를 달성하는 것이 삶의 목표일까? 경주라도 하듯이 모두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지만, 이내 경기는 끝나고 결국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높이 쌓아 둔 것은 흩어지고 반짝거리는 이름은 잊힐 것이다.
사랑의 첫 번째 미스터리
프롬은 더 많은 것을 얻어 내고 꼭꼭 쌓아 두려는 성격을 착취형 성격과 저장형 성격이라고 했다. 탐욕으로 가득한 성격이다. 욕심은 모든 사람이 가진 보편적 본성이지만 그러한 본성에 지배당하면 정신은 점점 피폐해진다.
건강한 영혼을 얻으려면 세상과 하나가 되어 필연적 고독과 분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사랑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고 이를 나누어 주려는 마음, 따뜻한 공감과 이해에 바탕을 둔 조건 없는 사랑이다.
사랑의 첫 번째 미스터리가 바로 이것이다. 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하는 마음인데, 도리어 자신의 영혼을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만들어 주는 역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개인과 세계 전체의 관계를 결정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다.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핵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다. 내가 주는 것이지만, 도리어 내가 받는다.
그렇다면 스스로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언어도단이다. 이기적인 동기가 들어서는 순간, 자신을 스스로 치유하는 사랑의 힘이 사라져 버린다. 다른 사람을 위한 건강한 관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국 거짓된 탈을 쓴 ‘세련된 탐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살찌우는 강력한 정신적 힘이지만, 의도한 목적이 전제되지 않을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사랑의 두 번째 미스터리
사랑의 두 번째 미스터리가 바로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도움’이다. 흔히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 협력을 말한다. 인류가 이루어 놓은 높은 수준의 문화는 협력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협력은 상호 호혜성이 근본 바탕이다. 주는 만큼 받는 것이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협력은 양자에게 이익이다.
하지만 협력은 사랑이 없어도 가능하다. 개미도 협력하고 박쥐도 협력한다. 심지어 나쁜 짓을 하는 범죄자도 서로 협력한다. 악한 일을 위한 협력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지는가? 그런데 사랑이란 무조건 주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주는 사람은 결국 손해만 볼 텐데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주관적 경험과 무관한 도덕성의 보편적 기초가 존재한다고 했다. 각자 자신의 욕망과 성향을 가진 다양한 군상 속에서 이를 관통하는 이성적 판단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나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게 하려고, 나는 다른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받기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황금률이다.
무조건적인 따뜻한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교환을 통해 얻을 수 없다. 주고받기를 약속하는 순간,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전제 조건이 깨져 버린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풀어 주길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받기만 바라는 사람이 가득한 곳에서 누가 먼저 주려고 할 것인가?
방법은 단 하나다. 스스로 먼저 주는 것뿐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니 받지 못해도 괜찮다. 아니 조건 없는 사랑이 ‘횡행’하는 세상이라니…. 도무지 실현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기대하지 못한 것을 받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도 좀 미심쩍은가? 뭐 상관없다. 어차피 처음부터 대가 없이 주기로 한 사랑이 아닌가?
[행복을 찾아서 – 절제] 딱 필요한 만큼
‘블랙홀’은 사실 뻥 뚫린 구멍이 아니다. 중력이 너무 강해 빛을 포함한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시공간의 영역이다.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외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경계를 흔히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바흠은 농부다. 땅을 원했지만 가진 것이 없다. 어느 날 악마가 제안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장 먼 곳까지 가면 그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바흠은 흥분했다. 걷기만 하면 모두 자신의 땅이 된다니.
다만 제안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바흠은 악마와 계약을 맺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도 지평선 너머로 여전히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끝없이 멀리 걷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돌아오려 했지만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지쳐서 쓰러져 죽었다. 그에게 필요한 땅은 자신이 묻힐 만큼의 땅뿐이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라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의 내용이다.
삶의 지평선
우리는 지평선 너머를 볼 수 없다. 이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다. 블랙홀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이른바 ‘시간의 지평선’으로 경계가 그어진다. 시간의 지평선 너머의 일은 지금 있는 곳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완전히 미지의 세계다.
너무 어려운 개념일까? 우리는 날마다 시간의 지평선을 넘는다. 오늘 먹은 밥으로 어제의 내가 배부를 수 없다. 경계에서 뒤로 돌아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있다. 그는 자신의 공부량이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시험일이 한참 지난 뒤에야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시험에 합격할 수는 없었다. 시간의 지평을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쌓고 배우고 모으고 집착하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무조건 참는 절제?
흔히 식탐과 반대되는 선을 절제라고 하지만, 비단 식탐만 다스리는 것이 절제는 아니다. 물욕과 색욕, 권력욕 등 절제가 다스려야 하는 원초적 욕망은 수없이 많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불행과 슬픔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동서양의 현자들은 늘 절제와 중용을 강조했다.
하지만 단지 욕심을 잠재우려고 절제해야 한다면 참 난감한 일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딱 필요한 만큼’만 욕심을 내도록 빚어졌다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가장 적절한 수준의 욕심’을 가졌다면 절제도 필요 없다. 원하는 만큼이 가장 적당한 수준이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이가 먹던 라면을 한 젓가락만 먹겠다고 하다 곧 새로 라면 봉지를 뜯는 자신을 발견한다. 백만 원만 벌면 좋겠다고 하던 사람은 곧 천만 원을 바란다. 아늑한 원룸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사람이 펜트하우스를 마다할까? 그러니 수많은 경전이 한목소리로 ‘절제’를 부르짖어도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손만 내밀면 얻을 수 있는데, 다만 ‘절제는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민 손을 도로 넣을 수는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실은 ‘절제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판을 욕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제를 욕심내는 지혜
‘시간의 지평’은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개념이다. 아무리 수익률이 좋은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차익을 실현하지 않으면, 곧 주식을 팔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해마다 두 배씩 오르는 주식이 있다면 신날 것이다. 재산을 모두 주식에 몰아넣는다. 무조건 두 배씩 오르니 도무지 다른 곳에 돈을 쓸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면서 백 원만 생겨도 모두 주식을 사둘 것이다. 그러면 금방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평생 노숙자로 살다 죽은 것이다. 죽음 뒤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평선 밖의 일이다.
우격다짐으로 욕심을 억누르는 절제는 오래가기 어렵다. 욕심은 늘 절제심을 이긴다. 만약 가혹하게 자신을 연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저 ‘욕심을 참는다.’는 자기만족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어떡하란 말인가? 밤마다 치맥의 유혹에 넘어가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며, 쓰지도 못할 돈을 죽어라 모으는 것도 그냥 받아들여야 할까?
절제는 바로 시간의 지평선을 고려하여 지혜롭게 욕심내는 것이다.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작은 지평으로 이어져 있다. 시간은 뒤로 흐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평선 뒤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10대는 20대에 무슨 일을 겪을지, 중년은 노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결국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주어진 시간의 지평 안에서 지혜롭게 욕심을 부려야 한다. 절제를 욕심내는 것이다.
지평선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삶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시간의 유한성에서 시작한다. 누구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략은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50년 이후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의 가치는 지수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며 점점 무한대로 치솟는다. 그 끝에 최종적인 시간의 지평선이 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내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삶의 지평선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전 재산과 맞바꾸어 가장 소중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지평을 넘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지금 지평선의 끝에 다다른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그 답은 모두 다르겠지만, 아마 요즘 욕심내고 있는 그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적이 있는가? 미끈한 스포츠카도 좋고, 아름다운 외모나 세상의 칭찬도 좋다.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돈도, 가족들과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집도 좋다. 그것을 이루고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할 요량인지 헤아려 보고, 남아 있는 불확실한 시간의 지평과 무게를 달아보자. 주상 복합 아파트를 사려고 30년 동안 죽도록 일만 해야 한다면, 50세 중년이 선택할 일은 분명 아니다.
절제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분명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의 지평 안에서 지혜롭게 시간을 쓰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무엇이든 그것이 딱 필요한 만큼만 원하게 될 것이다. 딱 필요한 만큼만.
[행복을 찾아서 – 순결] 순결한 영혼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정갈한 밥상과 누구도 누워 보지 않은 깨끗한 침구는 마음마저 새롭게 한다. 방금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밭을 처음 걷는 기분,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 책을 펼칠 때의 정서다. 의학적으로 ‘청결함’이란 오염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심리적으로 ‘깨끗함’이란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할 때의 느낌을 말한다.
순결을 좋아하는 인간
사람은 모두 순결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주를 팔면서도 깨끗함을 강조하고, 과일을 팔면서도 햇과일임을 광고한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공장에서 여러 사람과 기계의 손을 탄 소주, 비료와 농약을 여러 번 받았을 과일이다. 풀잎 끝에 떨어지는 ‘이슬’과 묘하게 오버랩을 시킨다고 해서 소주가 순결할 리 없다. ‘처음처럼’ 마신다지만, 이내 처음과 달리 인사불성이 되어버린다.
순결의 의미는 간단하다. 혼인하기 전 성관계를 한 번도 맺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흔히 마음의 순결이나 때묻지 않은 영혼을 뜻하는 순결(Innocence)을 떠올리지만, 원래는 좀 더 노골적이다. 본질적으로 순결(Chastity)은 정조를 말한다. 결혼한 부부 사이 말고는 어떤 성관계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고 어울리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순결함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자신의 배우자가 순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신이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만큼이나 강렬하다. 그 두 가지 모순이 만들어 내는 갈등은 관계를 종종 파탄으로 이끌게 된다.
성녀 콤플렉스
육감적인 이성에게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고귀하고 순결한 배우자를 기대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소망에 대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돈나 콤플렉스’라고 하였다. 깊은 정욕을 품으면서 동시에 순결한 이성을 바라는 마음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실현 불가능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돈나 콤플렉스에 빠진 남성은 바라지 않는 여성과 사랑을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여성을 바란다.”
프로이트는 남성을 지칭했지만, 사실 남녀 모두 똑같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는 양가적인 태도로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을 소망하는 무의식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인류학
인간은 아주 독특한 혼인 제도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일부일처제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일부일처제는 아주 독특하다. 오랫동안 같이 살고, 같이 키우며, 같이 늙어 간다. 자녀를 양육하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제대로 키울 수 없다. 서로에게 충실한 배우자를 원하는 마음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순결한 대상을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십대 후반이면 대부분 혼인했다. 사춘기가 조금 지나면 짝을 만났는데, 따라서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혼인 이후에 다른 짝을 만나는 것은 결혼의 횡문화적 규칙, 곧 상호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혼인 이후에도 다른 이성과 만남을 허용하는 문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시대에 따라 순결의 본질적 가치가 바뀔 리는 없지만, 순결함이 가지는 의미는 바뀌었다. 순결을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이야 뭐라 할 것이 없다. 하지만 과연 상대의 육체적 정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스스로 건강하게 만드는 일일까? 과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순결의 비극
순결에 집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타인의 순결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왜 너는 성녀가 아니냐고, 왜 성자처럼 살지 않았냐고 나무라고 혼내는 것 말이다. 본인도 몹시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마돈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깊이 상심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대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이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이러한 집착은 이내 의심으로 이어진다. 상대의 지난날을 캐내려 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부정의 증거를 찾아 헤맨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상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간신히 짝을 찾았건만, 행복해야 할 삶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적 열등감과 억압된 성욕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투사된다. 순결하다는 확신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동시에 마음속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증거를 찾아 헤맨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이아고는 말한다. “그러나 아내를 의심하며, 동시에 그 아내를 숭배하는 남자는 얼마나 불행한지요. 그는 의심스러운 아내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돈나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이다. 유년기의 가장 완벽한 여성은 바로 어머니였지만, 사실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의 아내였다. 최초의 여성에게 느낀 깊은 배신감은 성인기의 사랑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물론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아. 내가 그의(또는 그녀의) 첫사랑이 아니었다니.’ 상심은 우울로, 우울은 분노로, 분노는 복수로 이어진다. 마돈나 콤플렉스에 집착하는 사람이 가끔 스스로 문란한 삶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순결의 의미
시대가 바뀌었으니 순결 같은 것은 철 지난 도덕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순결은 언제나 옳은 가치다. 현대 사회와 맞지 않는다거나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로 대충 넘어가기는 곤란하다. 깨끗함과 순수함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시대가 지났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정조로서의 순결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애써 감추고 싶은 신경증적 방어에 불과하다. 순결을 강조하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순결하지 않은 자에게 돌을 들어 내리치라고 하던가? 순결하지 않은 자와는 상종도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살금살금 뒤를 캐어 보라고 하던가?
의심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잘 믿는다. 그러니 잘 속기도 한다. 행복한 과거도 많겠지만,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슬픈 과거도 많을 것이다. 반면에 늘 의심하고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사랑해 본 적도, 사랑받아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둘 가운데 누가 더 순수하고 순결한 영혼일까?
순결은 과연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적으로 가진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것이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신의학적으로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행동이든 마음이든 그 순결함의 방향이 향하는 곳을 보는 것이다. 곧 내적 열등감과 관음증적 소망에서 비롯한 결벽증적 결과인지 또는 따뜻한 사랑과 온전함을 향한 건강한 의도의 결과인지 보는 것이다.
상대를 위한 마음에서 소담스럽게 차려진 정갈한 식탁과 포근한 잠자리를 위해 햇빛에 말리고 정성스럽게 빨아 정돈한 이부자리가 있다. 반대로 오염과 더러움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겉만 깨끗하게 차려진 식탁과 결벽증적 의심과 불안에 휩싸여 소독과 세탁을 여러 번 한 침구가 있다. 과연 어떤 식탁에서 먹고, 어떤 침실에서 잠이 들고 싶은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할 듯하다.
[행복을 찾아서 – 용서] 만인이 만인을 욕하는 사회
모두가 모두를 욕하고 비난한다. 크고 작은 집단으로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너는 틀렸다고 저주를 퍼붓는 세상이다. 점잖은 사람도 키보드만 잡으면 날 선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작은 잘못은 큰 잘못이 되고, 순간의 실수는 본디 글러 먹은 본성으로 비화한다. 세상에는 착한 나, 선한 우리 편과 나쁜 놈, 악한 너희 편만 있는 것 같다.
정말 삶이란 선과 악으로 나뉜 두 종류의 사람 또는 집단이 싸우는 거대한 아마겟돈(하르마겟돈; 묵시 16,16)일까?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보통 사람은 모두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다만 그 옳음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악한 것인 줄 예상하면서 일을 벌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도소에서 영화 ‘어벤저스’를 보여 주면, 죄수들은 악한 무리에 감정 이입을 할까? 그럴 리 없다.
옳고 그름에 관한 입장
터무니없이 주장하면서도 뻔뻔하게 우기는 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까지 강퍅하지 않다. 잠깐 우기다가도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하네.’라고 자성하고 금세 주장을 꺾는다. 그런데도 거친 갈등과 충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각자가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옳고 그름은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옳고 그름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정(情)이다. 우리의 도덕관념은 기본적으로 감정에 좌우된다. 사리에 맞게 주장하더라도 그 과정이 냉정하면 ‘저런 냉혈한!’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인간이다. 법에도 규정에도 모두 ‘정’이 있다.
인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정을 갖고 있다. 첫째, 가족과 친족에 대한 돌봄이다. 처자식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나 자녀를 돌보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을 보면 우리는 공분한다. 어떻게 가족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타인에 대한 동정이다. 불쌍하고 어려운 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동냥은 못 하더라도 쪽박은 깨지 않는 마음이다. 셋째, 호혜성이다. 받았으면 갚아야 하고, 주었으면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이다. 주고받음이 공평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분개하고 화를 낸다. 넷째, 사기꾼 처벌이다. 거짓말이나 협잡꾼을 미워하는 이유다.
기준은 명확하다. 이것만 잘 지키면 크게 문젯거리가 될 일도, 타인에게 원한을 살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옳음의 우선순위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고 하자. 그런데 치료제는 부족하다.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다. 의사는 감염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헌신적으로 치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감염된 것이다. 순서를 기다리면 약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자녀를 돌보는 것도, 환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도 모두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충돌하면 어떤 가치에 손을 들어 주어야 할까? 진료소에 이름을 올린 순서대로 치료한다면, 딸은 곧 죽는다. 그렇지만 딸에게 약을 주면, 누군가가 대신 죽을 것이다. 그도 한 집안의 귀한 자식일 것이다.
당연히 순서대로 약을 주는 것이 옳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재산을 팔아 아프리카의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가? 자녀에게 대학 등록금을 주지 않고, 불우 이웃 돕기에 희사할 수 있는가? 반대로 딸에게 약을 주는 것이 옳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당신의 자녀, 당신의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직장보다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어떤 결정도 불완전하다.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고, 누군가에게 욕먹을 일이 생긴다. 인간 세상에 무조건 옳고 무조건 바람직한 일은 아주 드물다. 다만 자신의 ‘옳은’ 기준에 따라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피할 도리는 없다. 숙명이다.
도덕의 여섯 가지 기준
사람들이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은 각각 다르다. 대략 여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돌봄, 둘째 공정, 셋째 충성, 넷째 권위, 다섯째 정결, 여섯째 자유다. 모두 중요한 가치지만 우선순위는 다르다. 당신은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돌봄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의사가 딸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정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서대로 치료할 것을 요구한다. 충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여긴다. 세상에 더 필요한 사람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법과 규정을 따르라고 한다. 주민 투표도 좋다.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의사의 개인적 자유 의지에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정답은 없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소홀히 한 채 응급실에서 토막 잠을 청하는 의사를, 주말도 없이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는 소방관을, 평생 외롭게 철책을 지키는 군인을 칭찬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땀 흘려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의 가치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미움과 원한의 편협함
절대 잊을 수 없는 원한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러기를 수십 년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나에게 저지른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원한은 원한으로 굳어지고, 평생의 고통으로 남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입은 상처와 비슷한 사건을 볼 때마다, 그 고통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댓글 창은 저주로 가득하고, 청와대 청원은 분노로 타오른다. 사형을 요구하는 글에 수십만 개의 ‘동의합니다.’가 달리고, 추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수만 명이 군집한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집단적으로 뭉치고 격화되어 거대한 분노의 장으로 변한다.
한쪽에서는 딸에게 치료제를 먼저 주었다고 욕한다. 다른 쪽에서는 딸에게 치료제를 주지 않았다고 욕한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 또는 세상에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했던 상처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이러한 트라우마(사고 후유 장애)는 손쉽게 투사된다.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하면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욕한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사과하면 꾸며 낸 연기라며 비난한다. 그렇게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어 세상에서 추방하고 돌을 던진다. 이 땅에서 ‘천하의 죽일 놈’으로 비난받는 이의 대부분은 이런 가치 충돌의 희생양이다.
사회적 용서
용서를 위해서는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일률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용서할 만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일임에도 용서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던 깊은 상처를, 유령처럼 굳어진 오랜 기억을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들 힘든 시기를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가 그 모든 것을 배상하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눈물을 흘리며 싹싹 빌 때, 짐짓 너그러운 태도로 ‘나는 관대하다.’를 외치며 용서해 주는 것을 누가 못하겠는가? 상대와는 상관없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내리는 위대한 내적 수용의 과정이자, 자기 치유의 과정이 바로 용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마태 18,22) 말이다.
[행복을 찾아서 – 순종]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할 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 고착과 전복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는 흔한 믿음이 있다. 역사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 삶 또한 이러한 끊임없는 투쟁과 도전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의존적인 인간
의존이라고 하면 뭔가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약물 의존이나 게임 의존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렇다. 자유를 좋아하고 의존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의존적인 사람이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모두 의존적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만들어진다. 아플 때는 의사에게 의존하고, 공부할 때는 교사에게 의존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나이가 들면 자식에게 의존한다. 부부는 서로 의존하며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
복잡한 사회 구조와 다양한 문화를 만든 인간은 완전히 의존적인 삶을 산다. 자유나 독립은 선언적인 의미일 뿐 문자 그대로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가는 기인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자유란 사람과 어울림에 실패하여 생긴 반작용으로서의 자유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혼자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투쟁의 시작
인간이 무리 생활을 한 것은 적어도 육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친척 중에서 독립생활을 하는 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장류는 무리를 지어 서로 돕고 살아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서로 협력하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며 살아왔다. 이전 세대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지혜를 전수하며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 대부분은 높은 수준의 평등 사회를 이루고 사는데, 심지어 남녀의 차이도 별로 없다. 기능과 역할에 따른 성별 분업이 있고, 경험과 지혜에 따른 연령 분업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회다.
사실 구석기 시대에는 계급 투쟁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았고 부족 간 전쟁도 없었다. 싸울 일이 없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것은 뭔가 원하는 것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먹을 것이 없어지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면 되는 세상에서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약 일만 년 전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유야 어쨌든 많은 사람이 좁은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한곳에 머물러 지냈다. 계급이 생기고 차별이 생기고 빈부가 생겼다. 타고난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인생의 여정이 달라진 것이다. 투쟁이 시작되었다. 투쟁이 시작되면서 무리에 대한 건강한 의존, 곧 믿음을 이용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의존의 역설
신석기 혁명으로 말미암아 인구는 증가했지만 인류의 삶은 척박해졌다. 인간 상호 간 감염을 통한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풍진, 페스트 등은 모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질병이다. 태어난 아기의 절반이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이후에도 40퍼센트의 성인 남성은 전쟁 중에 죽었다. 삶이 척박해질수록 계급과 집단 간의 경쟁과 싸움이 심해졌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과 투쟁했다.
모든 사람은 모두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 강한 의존심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되었다. 서로서로 이용하는 세상이라면 순진하게 의존하는 것은 현명한 전략일 수 없다. 실제로는 의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상대를 배신하고 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의존에 빠지지 않으려는 모순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의존보다는 조금 더 ‘좋은’ 의미가 있다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리 높은 가치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순종의 동의어는 복종과 순응이고, 반의어는 거역과 반항이다. 거역과 반항은 당하는 쪽에서 보면 나쁜 일이지만 성공만 하면 큰 이익을 주는 행동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순종’이라는 가치에 대해 ‘물론 좋은 태도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과 같은 애매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건강한 순종
심리학적으로 의존은 다른 이의 돌봄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행동하면서 이른바 ‘착한 아이’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정도가 심하면 의존형 성격이라고 한다. 그저 자신을 보살피고 일상의 결정을 대신 내려 줄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의존성 성격을 가진 사람이 유일하게 적극적인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의존할 대상을 열심히 찾아다닐 때다.
하지만 순종은 조금 다르다.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관심이다. 생태학적으로 적극적 생존 전략이자 타인 지향적이며 환경에 따른 유연한 전략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를 찾아 조언을 구하고 현명한 이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다.’(1사무 15,22; 이사 1,19 참조)는 것이다.
늘 순종적이고 착한 당신. 험난한 세상에서 이른바 ‘호구’가 되어 살게 될 슬픈 운명일까? 그러나 정확하고 사려 깊은 결정을 분별할 힘만 있다면 순종하는 태도는 뜻밖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
오랜 지혜를 따르고 조언을 경청하는 태도는 늘 복심을 품고 역변할 자세를 가진 태도보다 건강하다. 순간순간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조금은 견디고 참는 것도 필요하다. 여름 내내 실컷 고생하고도 바로 알곡이 익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순종과 어리석은 의존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순종은 지혜를 구하고 따르는 것이지, 눈과 귀를 닫고 그저 하라는 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열린 자세로 여러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로 오랫동안 따를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순종이다. 고민 끝에 한 번 결정하고 믿기로 하면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이 순종이다. 귀한 것은 금방 얻을 수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상황에서도 일단 믿었으면 가을까지는 기다려 보는 지혜다.
[행복을 찾아서 – 지혜] 지혜
지혜란 세상에 관해 깊이 깨닫고 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백과사전처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장기나 바둑을 잘 두는 것처럼 꾀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지혜란 과연 무엇일까?
지혜를 찾아서
서울대학교의 모토는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다. 우리나라 대학교인데 라틴어로 모토를 삼은 것이 좀 이상한가? 사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할 당시에 총장은 미군정청 고문관 해리 엔스테스였다. 그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유명한 표어를 따서 교훈을 만들었다. 대충 외국 것을 따서 만들었다는 풍문도 있는데, 정말일까?
예수회에서 설립한 서강대학교의 모토는 ‘오베디레 베리타티’(Obedire Veritati)다. ‘진리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연세대학교의 교훈은 ‘베리타스 보스 리베라비트’(Veritas vos Liberabit), 곧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다.
서울대학교와 같은 해에 개교한 호주 국립대학교의 모토는 ‘나투람 프리뭄 코뇨쉐레 레룸’(Naturam Primum Cognoscere Rerum)이다. ‘먼저 자연의 본질을 깨달으라.’는 뜻이다. 외국 것을 대충 가져다 썼다는 소문은 ‘진리’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에 국내외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교니까 지혜를 모토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그러나 진리나 지혜라는 단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사랑보다는 빈도가 약간 적지만 소망이나 믿음, 심지어 구원보다도 자주 등장한다. 동양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군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가지 덕목을 가져야 하는데, 네 번째 덕목이 비로 지혜다.
공부하는 행복
모든 것을 금전으로 환원하는 세상이라, 공부도 원하는 직업을 얻거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처럼 되어 버렸다. 취업이 잘되는 전공이 인기다. 이른바 ‘문사철’은 대학에서도 찬밥 신세다. 심지어 대학교수도 태연하게 자신이 하는 연구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라고 말하는 시대다. 돈으로 노벨상을 사겠다는 듯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만들고 사업도 벌인다. 진리는 과연 세상의 경제적 복리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재치 있는 꾀 정도로 지혜를 폄하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속기 쉬운 세상이니, 머리를 요리조리 잘 굴려서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불리는 재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정말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평생 출세도 못하고 배를 곯다가 모함받아 죽었으니 말이다.
진리, 곧 지혜를 추구하는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다.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찾아내고 일반 법칙을 추론하며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고귀한 행위다. 돈이 되지 않아도, 경제적인 이득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런 것이 정말 중요하다면 명문 대학교의 교훈은 ‘경제적 이득과 세상에서의 성공’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지혜
진리를 찾는 지혜 따위는 그냥 학자에게 맡겨 놓으면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체질이 아니다. 책은 읽기만 해도 졸음이 온다. 그러니 진리는 머리 좋은 사람에게 맡기고 응원만 하겠다는 심산이다. 좀 미안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성보다는 감성이 중요한 것 아닌가? 뜨거운 가슴이 있으니 부족한 지혜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도 없이 펜대만 굴려서 뭘 하겠냐는 항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평생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던 학자였다. 그의 별명은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였다. 물론 천사만 연구한 것도 아니고, 천사 자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학문부터 다양한 연구를 통해 스콜라 철학의 문을 열었고, 세상 만물의 질서를 세운 대학자였다. 그래서 학자, 교수, 학생의 수호성인으로 꼽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부만을 잘해서 유명한 성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신에게 다가서는 거룩한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게 이성은 곧 하느님이었다. 신앙을 위해서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 자체가 살아 있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진리에 눈감는 일 자체가 신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었다.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가리켜 ‘고대의 위대한 박사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모든 이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성인. 이성과 신앙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동시에 둘을 조화시켜 각각의 권위와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한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자연의 질서를 찾는 일은 창조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성스러운 일이었다. 옛 지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으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지혜를 추구하는 태도에 담긴 가치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토마스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오랜 지혜를 담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자연의 세계에서 직접 관찰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삶 자체가 바로 대학이었다.
진리를 향한 행복한 본능
공부가 타고난 천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복잡하게 얽힌 현상 속에서 규칙성을 찾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의 숨은 원리를 추정하며, 처음 보는 세상의 일에 깊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인류의 본성에 해당한다. 재미없이 암기만 반복하는 학교 공부를 연상한다면 따분한 일이겠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를 시험공부와 비교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세상의 현상을 보고, 오랜 지혜를 담은 책을 보며 연구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주 행복한 일이다.
어려운 신학적 진리만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찰스 다윈은 따개비 연구를 무척 좋아했다. 신학자 아이작 뉴턴은 미적분과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도덕적 진리나 신학적 발견만큼이나 위대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신에 대한 경외심은 그 근원이 다르지 않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돈이 되지 않는다. 명예를 얻기도 어렵다. 어쩌다 명예와 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낚시의 즐거움이 큰 물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진리 추구의 기쁨도 그 과정 중에 찾을 수 있다. 지혜를 얻는 행복이야말로 영원한 ‘진리’다.
[행복을 찾아서] 행복
잡히지 않는 행복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진실, 행복은 도무지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진리를 노래하고 있다. 자명하지만 동시에 허탈한 진리다. 행복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건만, 좀처럼 얻을 수 없다니 말이다.
사실 인간이 누리려는 권리 가운데 상당수는 ‘정말로’ 실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질병에서 자유로운 권리, 곧 건강권이 그렇다. 어느 정도는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다.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태어난 아기의 절반이 곧 죽었다. 운 좋게 유소년기를 넘겨도 기아와 전염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손주를 보는 일은 일부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고, ‘노인’으로 죽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록 일부 사회에 한정된 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천수를 누린다.
자유권도 마찬가지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지만, 지난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성이 투표권이나 재산권을 얻은 것은 불과 반세기 남짓에 불과하다. 개인의 자유는 타고난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거주와 집회, 결사, 종교 등 자유권을 인류가 얻어낸 것은 아주 근래의 일이다.
과거보다 분명 자유롭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전보다 과연 더 행복해졌을까?
행복 추구권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다양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존엄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자유권, 생존권 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른 권리는 그 자체로 권리인데, 행복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이것은 추구권이다.
행복은 권리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권리, 곧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 밑’으로 떠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으나, 행복 자체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행복 추구권은 1987년 제9차 개헌에서 새로 삽입되었다. 아마도 미국 독립 선언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자유권과 생명권, 그리고 행복 추구권을 명문화했다. 행복은 국가나 사회가 대신 줄 수도 없고, 다만 행복을 향해 나아갈 기회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과정으로서 요리, 결과로서 요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행복은 사실 행복의 결과에 불과하다. 본디 행복은 완전한 삶을 위한 미덕을 잘 지키는 도중에 얻는 선 자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감정적인 편안함과 쾌락을 지칭하는 말로 변했다. 정신의 결과가 행동인데, 이제 행동 없는 정신적 활동만으로도 감히 행복이라고 부른다.
솜씨 좋은 요리사가 영양가 많은 재료로 정성껏 조리하면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솜씨 좋은 요리사’와 ‘좋은 재료’ ‘정성껏 조리’와 같은 과정은 삭제되어 버렸다. 맛있는 음식, 곧 감정적 행복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행복 추구권이란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권리와 같은 것이다. 물론 재료도 주지 않고 조리 기구도 없다면 곤란하다. 그러나 식재료와 조리 도구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형편없는 재료와 무성의한 조리 과정을 조미료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공통된 조급함이다. 긴 준비 과정은 생략하고, 왜 결과로서의 행복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따진다.
감정적 행복의 일시성
결과로서의 행복은 오래갈 수 없다. 불안한 상황을 벗어날 때 느끼는 안도감이나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주어지는 기쁨은 이내 사라진다. 도파민의 효과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졸업장을 받고 기뻐하는 졸업생은 도대체 무엇이 기쁜 것인가? 단지 종잇장에 불과한 졸업장을 손에 넣어서? 그럴 리 없다. 고생 끝에 마친 학위 과정 자체를 자축하는 것이다.
행복은 긴 과정을 통해 조금씩 연마하는 실천 과정이다. 자기 실현의 자유를 위해 우리 선조들은 오랫동안 투쟁했다.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를 위한 권리다. 제도적 불평등을 없애고, 기본적 자유를 얻어 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자유, 평등, 건강 등의 권리를 얻었다. 우리 사회를 사는 행복하지 않은 현대인, 그중 8할은 분명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
행복을 찾아서
세상을 바꾸면 행복할 수 있을까? 운명을 바꾸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개인으로서는 할 수도 없고 허락된 일도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지금의 자신, 그리고 일회성의 인생뿐이다.
인생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행복 요리법에 대해서 옛 현인들이 이미 잘 알려 주었다. 친절과 인내, 겸손, 근면, 사랑, 절제, 순결, 용서, 순종, 소망, 지혜 등이다. 늙음과 죽음, 불안, 우울, 분노, 질투, 자기 비하, 시기, 방종 등 여러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지난 2년 동안 본지에 실린 이야기는 고금의 귀한 이야기, 선인이 남긴 오랜 지혜를 다시 풀어 쓴 것이다.
하지만 100가지 좋은 이야기도 본인이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시편 128편에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 손으로 직접 행복을 찾아 떠날 때다.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일을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이 짧은 글이 마음의 고통으로 삶에 지친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다면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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