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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5: 1-7
요셉이
본문에서 모세는 ① 요셉이 자기를 그 형제들에게 알린 사실을 기록합니다(1-3).
② 요셉이 그들을 일반적으로 위로한 사실에 이어서 특별한 방식으로 위로한 사실을 기록해 나갑니다(4-7).
1. 본문 1-2절은
"①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 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②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입니다.
여기서는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히는 과정을 살피게 됩니다.
1) 요셉이 형제들에게 근엄하고 냉혹한 표정을 지을수록 더욱 강렬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독하게 경고하는 동안 참아왔던 요셉의 강한 사랑은 그 만큼 더 강렬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실 요셉이 이전에도 아무런 가혹한 마음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2) 한편 그의 억제 못할 감정은 이렇듯 눈물을 몰고 왔습니다.
그가 한결 같은 평안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그의 다정다감한 정이 더욱 찬양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영웅적인 미덕이라는 스토아 학파는 어리석습니다.
이 같은 강한 감정을 지닌 요셉은 거룩한 절제 뿐 아니라 고상한 도량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는 분노와 증오를 물리쳤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모해했던 자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3) 마침내 요셉은 큰 소리로 모든 사람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형제들을 부끄러워 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생각해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형제들의 죄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또한 형제들의 수치가 온전히 잊혀지게 한 것은 결코 적지 않은 관대한 처사였습니다.
증인들을 물러나게 한 것은 형제들을 거리낌 없이 위로하고 싶어서였습니다.
4)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립니다.
그리고 나서도 그는 그들의 죄를 들어서 벌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도 혹독한 말을 삼가 했습니다.
그들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습니다.
5) 요셉은 자기가 "요셉"인 것을 그 형제들에게 실토하는 과정에서 방성 대곡 하였습니다. 이 마당에 있어 그가 "방성대곡"한 것은 일국의 최고 지도자로서 실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눈물이 많습니다.
또한 그것을 나타낼 만한 시기(時期)가 이르면 오히려 천진난만하게 되는 자입니다.
울만한 시기에 크게 울 수 있는 지도자는 굳어지고 엉크러진 일들을 해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 아래서 사는 요셉에게서 이런 점을 보게 됩니다.
2. 본문 3절은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입니다.
1) 요셉이 형제들에게 분명한 사랑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그의 이름을 듣자 놀랐습니다. 마치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했습니다.
저들 마음에 자기들이 받을 벌을 생각하고 있는 때에는 요셉의 권력이 가공스럽게 보입니다 또 죽음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겁에 질린 것을 보자 요셉은 책망하지 않고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을 안정시키려고 계속 온순한 태도를 취하여 마침내 그들의 기분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참 마음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자들이 슬픔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사실 범죄자가 계속 자기를 변명하고 항의만 계속한다면 더욱 가혹한 문책이 가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자가 죄의식 때문에 두려워 떨고 엎드려 있다면 엄정성도 한계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자가 다시금 용서의 희망을 안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혹성이 올바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요셉과 같이 적당한 때를 아는 내면적 감정을 수양해야 합니다.
2) 요셉은 다시 "내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니이까?" 라고 묻습니다.
요셉은 일찍이 그 부친의 생존 여부에 대하여 확인한 바 있었습니다(43:27-28, 44:17-34).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그 아버지의 생존 여부를 또 다시 묻는 것은 모순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 비평가들은 말하기를 본 장의 저작자는 앞 장의 저작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말합니다.
요셉이 이 장면에 와서는 정서적으로 마음 속을 털어놓는 것 뿐이니 자기 아버지의 생존에 대한 사실을 알면서도 거듭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아버지를 보고 싶은 심정으로 묻는 하나의 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과거에 요셉에 대하여 너무도 큰 죄를 범했으므로(37:18-28)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4-7절은
"④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 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⑥ 이 땅에 이년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⑦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입니다.
1) 본문 4절초두에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어떤 말보다도 감동적입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을 자기 품으로 친절히 초대합니다.
한편 그는 가장 정중한 말을 씀으로써 그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줍니다.
그는 너무도 말을 자제했기 때문에 그들을 온화하게 책망하고는 다시 위로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위로가 목적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그들을 시기 적절하게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절망해 버리고 말 처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가 지금까지 완고하게 굴었던 것과는 달리 그들에게 다시금 죄책을 상기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공포심이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지만 않는다면 죄의식이 남아있는 것은 좋은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그들의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의 형제들이 지나치리만큼 겁을 먹었으므로 요셉은 자기 의도를 그 만큼 더 충실히 갈파합니다.
자기는 그들을 해치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말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자기를 미리 보내셨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먼저 애굽에 보내어 함께 살 길을 마련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그리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니까 요셉은 그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도리어 위로합니다.
참된 용서는 위로하기까지 합니다.
그가 그 형들을 위로한 것은 형식에 불과한 말 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참된 것이었습니다.
곧 그 형들이 그를 판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의 일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로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특별히 그가 애굽에 와서 갑자기 최고 지도자로 높아진 사건을 말해줍니다.
낮은 자가 갑자기 높아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적 능력으로 된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말합니다.
삼상2:8절에 말하기를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창 45: 8-15
그런즉
모세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섰던 사실과(8-) 자기 아버지를 초청한 사실과(9-13) 형제들이 요셉과 말하기 시작한 사실을 기록합니다(14-15).
1. 본문 8절은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입니다.
1) 이 부분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말씀입니다.
인간사에서 바른 과정은 인간의 약점에 의해서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선한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될까 하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문을 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선한 목적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만사를 그르칠 뿐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부조리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도를 훼손하려는 짓이 될 뿐입니다.
또 이러한 성급한 생각에서 어떤 경건하고 절제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교리가 잊혀져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치리를 맡고 있어서 아무 것도 그분의 뜻과 권위를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공표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자들은 천박하고 백해무익한 각가지 질문들을 해댈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불경스런 정신이 자제를 받아야 하듯이 정당한 법도는 발설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 속에 분명히 밝혀져 있을 말만 아니라 아는 것이 대단히 유익한 사실들에 대해서 무지를 조장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은 인간이 하는 모든 노력이 하나님 뜻에 의해서만 성취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죄의 저작자가 되거나 악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하여 그 죄에 대한 고발을 면제받게 된다는 말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경스런 격분을 완전히 격퇴할 수는 없지만 혐오하는 것으로도 족합니다. 반면에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해 주는 바를 견지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꾀하든 하늘의 하나님은 인간들의 의중과 수고를 통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을 빌어서 당신 자신의 뜻을 행하십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불경스런 자들에게 모독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서 하나님이 어떤 일은 '도모하시기' 만하고, 또 어떤 일은 되도록 '허용하신다' 고 구별하는 수를 부립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유의 어떤 정도를 인간에게 맡겨서 거기에 대한 통제는 않는다는 방식의 말투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도록 '허용하시기'만 하셨다면 하나님은 요셉을 그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구원의 사역을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쨌든 그런 헛된 이야기 즉 하나님이 '허용'만 하시고 '뜻'하시거나 '작정'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은 요셉이 나중에 다시 좋게 설명한 그것이 잘못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전도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 속에는 악이 거할 뿐 아니라 모든 책임도 그들이 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수난을 이용하시어 놀랍게 역사 하시며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추행에서도 자신의 완전한 의를 이끌어 내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신비하여 우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방탕한 육체가 거기에 거역하려든다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별히 조심하여 이 숭고한 표준을 우리 치졸한 계산으로 끌어내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항상 이 같은 생각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 욕망이 날뛰어 무절제하게 이리저리 사람을 몰고 다녀도 하나님만이 통치하십니다.
또 하나님만이 은밀한 굴레로 인간들의 거동을 통제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자체에는 어떠한 사악함도 달라붙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그분의 길은 인간 범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 또한 가슴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 우리 눈 앞에 그 같은 과정에 대한 가장 명료한 실례가 전개되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 의해서 팔렸습니다. 어떤 이유입니까? 그들은 그를 멸절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대단히 다릅니다.
기근 때에 야곱 집안에 뜻하지 아니하던 식량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장시간 요셉이 죽은 자처럼 되어 있으면 갑자기 무덤을 열어 일으키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처음에는 악인들과 같은 짓을 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놀라운 판단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 이제 요셉이 한 말을 차근차근 검토해 봅시다.
(1) 자기 형제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는 그들의 잘못 위에 망각의 베일을 드리우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면서 거기에 행동까지 곁들여서 수행합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이 놀라운 결과를 초래했다 하더라도 죄인들은 죄책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상 인지 상정입니다.
가룟 유다의 잘못으로 이 세상을 구속하는 사건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들 유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죄책만을 생각하는 처지에서 다소 이탈시키면서도 그들이 행했던 잘못이 하나님 탓이라거나, 또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되었으므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방식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 행동은 그 사건 자체를 놓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의도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 인간들이 빼먹은 의무는 없는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뭔가를 꾸미지는 않았는가, 저들의 분수를 벗어나지는 않았는가 등등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 아내와 자식을 소홀히 합니다. 그들의 필요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라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이상 그들이 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돌보아야 할 가장이 처자를 내동댕이치는 비정은 변명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고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핑계해 봤자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피해를 줄 생각을 한 자들의 악을 막고 그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 위해서 개입하실 때는 언제나 우리들의 세속적인 감정을 바꾸어서 보다 정의롭고 평화적인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2) 따라서 우리는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훌륭한 해석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자기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줄 논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요셉에게 저질러진 범죄의 막중함은 복수의 염원을 폭발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먼저 저들이 품었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놀라운 복으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받은 피해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수치를 가리워 준 그들을 너그러이 포용했습니다.
이렇게 참된 사랑은 형제의 잘못을 감추는데 슬기롭습니다.
그래서 분노와 적개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참된 사랑은 이러한 방법을 아낌없이 이용합니다 3) 요셉은 자기 앞에 펼쳐진 사건 전체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 선택 받은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형제들이 행한 잘못을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임무를 성실히 다하려는 염원으로 그들이 당면한 궁핍뿐이 아니라 그들 앞에 놓인 공포와 불안까지도 덜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자기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을' 위한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자기가 남은 자들을 보존시키며 놀라운 구원을 예비할 사명을 맡은 자라고 본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가 바로에게 아버지와 같다고 말한 것을 공연한 자랑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 그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 사건의 결과가 그렇게 엄청나게 되었고 그것은 우연도 인간 수단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예정으로 높은 보좌가 마련되었고, 그 보좌 덕에 자기 아버지와 그 식구들을 부양할 능력을 갖게 된 것을 말하려 했을 뿐입니다.
2. 본문 9-15절은
"⑨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⑩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⑪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⑫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⑬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⑭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⑮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입니다.
1) 명령을 내리면서 요셉은 아버지에게 깊은 신뢰를 주기 위해 자기 권력을 말했습니다. 노인들은 신중하기도 하지마는 대개는 지나치게 꾸물거립니다.
더욱이 야곱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것이 대단히 곤란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 같은 출발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이미 베푸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저들이 조상들로부터 들은 것 모두 다 말하지 않을까?
즉, 그들은 이방 땅에서 나그네와 종이 될 것이라는 예언(창15:13)을 상기시켜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그저 안락을 약속해 줄 뿐 장차 저들이 겪은 재난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야곱이 그 예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어떤 신성한 착고가 야곱을 막지 않았던들 기근이 끝난 다음에도 그가 애굽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자발적으로 남아 있었다면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그는 나중에도 가나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그리로 가져오게 명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자녀들에게도 빨리 돌아가라고 권고하지 않고 애굽에서 정착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애굽에 매력을 느껴서나 가나안 땅이 지겨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이삭이 예언해 준대로 이 폭정 밑에서 자기 자손과 후손들이 견디어낼 채비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처음에 왔을 때는 단지 거기서 환대 받는 것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점차로 아브라함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되살려 냈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이 마지막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1) 요셉은 그 형들더러 아버지에게 속히 가서 애굽으로 내려오도록 말하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오는 일은 급속히 해야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속히"란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13절에도 역시 "속히"란 말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급속한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안 다음에는 행동을 화급(火急)히 취해야 됩니다.
(2) 또 요셉이 그 형제들로 하여금 그 당면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로 확신하라고 거듭 다짐하듯이 말합니다(8-13). 그런 점에서 요셉은 그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3) 또 요셉은 이제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또한 그 "형들과 입맞추었고" 또 함께 끌어 "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본문은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때에야 요셉의 용서하는 마음을 확실히 알고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울음은 종종 진실성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들도 눈물로 간구 하기도 하고 눈물로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있고 이루어 가심이 있습니다. 곧 그분의 일하신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아래 구원의 서정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택하신 모든 자들을 부르심과 끌어 안으심이 있습니다.
그 분 안에 그분의 교회가 있고 모든 은사들과 직임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 은사들과 직책을 따라 부지런히 활동하는 것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들까지 있습니다. 그 은사와 열매들을 다시 그분께 돌려드리는 각양 감사와 찬송이며 경외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모아져서 우리의 예배가 있습니다.
이런 예배에 우리의 일상 생활이 함께 있습니다.
창 45: 16-28
요셉의 형들이
모세는 바로가 요셉의 부친 야곱을 초청한 사실과(16-20), 요셉이 그 형제들을 보낸 사실과(21-24),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그 부친에게 보고한 사실(25-28) 등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6-21절은
"(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 복이 기뻐하고
(17)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 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 내를 태우고 너희아비를 데려오라
(20)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
(21)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쌔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입니다.
1) 모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건 전, 후 사실에서 앞서 있던 일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부르러 보내기 전에 그의 형제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문은 이미 왕궁에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 왕으로부터 허락이 없었더라면 자기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살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앞에서 넌지시 암시했던 것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왕이 이미 기꺼이 요셉을 지극히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제일 좋은 곳을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가 살 거처로 주겠다고 제의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다른 진술에서 보면 그 왕이 살아있는 동안은 이스라엘인들이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 8절 이하에 폭정과 학정 시작은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즉위한 후부터입니다.
2) 이렇게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과 그들의 부친 야곱에게 후의(厚意)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바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의인 요셉에게 감동된 것을 원인으로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외국인에게도 자신의 빛을 드러내셨습니다.
2. 본문 22-23절은
"(22)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23)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비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비에게 길에게 공궤할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입니다.
1)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여행에 풍요한 물자를 제공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곧 돌아올 줄 알면서 그들에게 돈과 옷을 실어보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그것은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의 부인들을 생각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기 싫어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사람마다 뭔가 눈에 보이는 징표가 없이는 정작 귀에만 들려지는 전갈이 별로 신빙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입니다.
또 요셉은 자리에 없는 자들도 희망을 가지게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더욱 확실히 보여주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사는 자답게 구체적이고 확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욱 더 고려해야 할 점이 더욱 생각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요셉이 자기 동생 베냐민에게 관심을 많이 쏟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제롬은 '옷 두벌'(한글 개역 성경은 '다섯벌')을 '갈아 입을 옷'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른 해석자들은 제롬의 생각을 따라서 그 뜻을 '여러 종류의 의복'을 말한다고 봅니다.
우리로서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는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옷은 잔치 때나 입는 좋은 옷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관습이 여러 가지 종류의 옷을 갖춘다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이렇게 요셉은 그 형제들을 보내면서 "양식"과 "옷"을 주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자기 부친을 위하여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과 "곡식"을 보냈습니다.
흉년 때에 이와 같은 선물은 그야말로 죽을 사람들을 살리는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극도로 낮아졌던 요셉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살려주는 풍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 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3. 본문 24-25절은
"(24) 이에 형들을 돌려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가지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제들끼리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권고한 것은 분명합니다.
(라가즈) 라는 히브리말은 떨림이나 두려움을 뜻하고 법석을 피운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나중에 나온 뜻이 더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에게서 피해를 받았어도 곧 평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남들도 서로 화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평안케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간에 서로 다투지 말라고 충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로 자기를 변명하다 보면 남을 비난하게 되고 분노하는 중에 싸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에게서 이 같은 친절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말다툼이나 싸움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제자들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또한 평화를 조성하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서 미리미리 다툼을 일으킬 만한 모든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이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가르쳐 준 바는 주의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변명하거나 비난하거나 분을 내거나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대개 실제 자기는 변명하고 다른 사람을 악질적으로 비난합니다. 여기에 분노와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다툼이 전쟁을 초래하지 아니하도록 서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4. 본문 26-28절은
"(26)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 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 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입니다.
이 부분은 요셉의 형제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아비 야곱에게 정황을 보고하고, 또 야곱이 나타낸 반응입니다.
1) 사람은 생각지도 않던 기쁨을 당하면 기색(기절)하는 수가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야곱이 일종의 무아경에 들어가 숨이 막혔다고 봅니다. 모세는 다른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들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희망과 공포 속에서 요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어떤 불가사이한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 상태에 빠지면 사람은 흔히 숨이 끊어진 듯이 무감각 상태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즐거워서 생긴 일이 아니라 야곱의 심중에 닥쳐온 복잡한 혼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최상의 기쁨과 함께 만감이 교차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모세는 곧 이어서 야곱이 기운이 소생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야곱이 정신을 되찾아서 그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요셉에 대한 자기 사랑이 세월의 풍파에 시들지 아니했으며 살아서 요셉을 다시 보지 못하는 이상 자기 삶은 아직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야곱이 계속 슬퍼하면서 무덤에 내려가서도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즐거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계시와 관련된 지도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여기서 한 두 가지 덧붙이고 마치겠습니다.
(1)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에 돌아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생존한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 때에 야곱은 그 아들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기색"하였다고 합니다.
"기색"하였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야팍) 인데 힘이 빠졌다는 뜻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그런 소식은 가히 숨이 넘어갈 만한 충격과 최상의 기쁨이었습니다.
(2) 특별히 28절 초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기록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승리를 내포합니다(32:28).
그는 오랫동안 요셉의 문제로 극도로 비관에 잠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비관은 이제 승리하는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이 "족하도다" 라고 한 말은 요셉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아들들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이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이방에까지 비추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부요는 그의 전 가족의 부요가 되었습니다.
그것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혜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그의 모든 가속들이 화목하게 되도록 복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지도자로 주셔서 야곱의 나머지 여생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하나님의 교회가 남아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교회에 하나님 자신 곧 자기 복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