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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10
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원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다섯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요단 동편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쪽 지파가 차지했고, 요단강을 건넌 후에는 유다 지파와 요셉 자손의 두 지파, 즉 에브라임과 나머지 므낫세 반쪽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여호수아에게 아직까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일곱 지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일은 자기 생전에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수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땅을 분배받지 못한 나머지 일곱 지파는 땅(기업)을 취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체를 하게 되자, 여호수아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먼저, 길갈에 있던 하나님의 회막
을 실로로 옮겨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지파별로 3인씩을 선정하게 하여 아직까지 기업으로 나누지 못한 땅의 지적도를 그려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려온 지적도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각 지파에 분배함으로 자신의 숙원 사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을 분배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속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분배하면서 각 지파 사이에서 서로 누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요셉 지파).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작은 지파들은 상실감과 박탈 감에 빠져 '될 때로 되라'고 하는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도전적인 자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고한 글에서 21세기에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안일주의라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교회가 세상의 유흥, 사치, 향락, 음란의 문화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최대의 과제로 삼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썩어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영적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21세기의 교회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영적 전투는 바로 안일주의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넉넉해지면서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기를 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못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앞으로 주 5일 근무를 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비상입니다. 금요일이 주말입니다. 이제 토요일과 주일, 연이어 이틀을 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놀러 나갑니다. 그리고 휴양지에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이제는 컴퓨터 온라인망을 통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게 신앙 생활의 전부가 될 것입니다. 절대로 희생이나, 헌신이라는 말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죠지 바나/Geroge Barna] 가 말한 "주전자 속의 개구리(frog of kettle)"처럼, 현상유지 의식 안에 안거하여 편리와 기득권을 즐기는 동안에 실상 그의 영혼은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에 안주하려는 의식에 포로가 되어 있는 한, 미래를 향한 가슴 설레는 도전과 창조적 가능성으로의 전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해야 할 일을 상실한 인간만큼이나 절망스러운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위대한 일을' '여기서부터' 시작하겠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한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꿈이요, 비전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미래적인 투영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인해가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목표와 비전을 바라보고 또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평안함과 넉넉함에 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소원을 우리가 잊고 산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넉넉하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은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다음 세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우리 자신의 사명과 목적-비전-을 상실하게 되면) 다음 세대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는 사사기의 3세대처럼 큰 위기가 닥쳐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림을 그려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분배를 중단하고 길갈에 있던 하나님이 회막을 실로로 옮겨왔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맨 처음으로 진을 친 곳입니다(4:19). 요단 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도착하여 요단강 가운데서 가져온 열 두개의 돌을 세우고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기념하도록 했으며,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음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는 영적 자존심을 굳게 세운 역사적인 장소가 된 곳입니다. 또한 길갈은 하나님의 회막이 있었던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길갈에서부터 출정하였다가 전투가 끝나면 다시 하나님의 회막이 있는 길갈로 돌아와 그들이 세워놓은 열두 개의 돌을 보면서 가나안을 맨 땅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영적인 무장을 다시 다지고 전쟁에 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길갈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곳이요, 전투의 작전 본부요,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는 보급소요, 지친 육신이 안식하고 새 힘을 얻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이스라엘은 길갈을 중심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길갈에 있던 하나님의 회막을 실로로 옮겨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의 무너진 영적 기강을 새롭게 세워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로는 벧엘과 세겜의 중간 위치에 있어 가나안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모이기에 편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소에 하나님의 회막을 세움으로 오랜 정복전쟁으로 지쳐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힘을 넣어 주고 땅을 분배받는 일이 단순히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직 까지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일곱 지파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목표를 세워주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실로에 회막을 세우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심으로 그곳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이 백성들에게 공급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서 비전을 새롭게 세워주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자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굳게 세워야 합니다.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며,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교회가 건물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기를 힘쓰고 교회가 항상 성도들로 북적거리도록 해야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은 주일과 평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기도하러 모이고, 전도하러 모이고, 청소하러 모이고, 봉사하러 모입니다. 그런 모임들이 교회에 늘 있으니까 교회가 항상 생동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교회가 가까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런데 왜 가까이 있는 교회에 나오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까?
교회가 가까이 있어서 좋다는 것은 언제나 찾아 들어가 기도할 수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 교회는 언제나 열려 있지 않습니까?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들어가 기도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대 도시의 교회를 가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부흥하는 교회를 빼 놓고는 예배시간 외에는 문을 잠급니다. 도둑이 하도 많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싶어도 갈 곳 없습니다. 이것은 홍수 중에 마실 물이 없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밤마다 보면 십자가가 지천인데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굳게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도 못 들어 가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 문이 열렸는가? 닫혔는가 보다 바로 사람의 마음이 열렸는가? 닫혔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24시간 개방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들어와 찬양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는 셀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너무 적어서 말입니다. 물론 바빠서 못 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먼 곳으로 교회를 다니던 성도들이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교회를 꿈꾸며 이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이제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님은 송악교회를 축복하셔서 성전을 아름답게 지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땀흘려 지은 성전을 찾지 않는다면, 이것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교회보다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가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게 되는 꿈을 꾼 것이 바로 학교를 오가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하며 보내던 청소년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킬로가 되는 비포장 길을 자전거로 통학을 했는데, 교회는 아랫동네 산밑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개울을 건너고 아주 좁은 밭길을 지나쳐야 했는데, 저는 많은 날들을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하고, 방과후에는 그곳에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습니다. 어릴 적 교회당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자라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꿈을 꾸는 곳입니다.
청소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꿈을 키워 가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교회에서는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사탄이 쳐놓은 온갖 죄악의 그물이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청소년들이 방과후에 하나님이 가꾸어 주시는 꿈들을 품고 키워 가는 안전한 축복의 장소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며 함께 재잘거리고 마음껏 뛰어 놀면서 풍성한 꿈을 가꾸어 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항상 교회를 밝게 가꾸고 늘 찾아와서 기도함으로 이곳에 하나님의 거룩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힘겨운 일을 만나 꿈을 잃고 낙심한 성도들이 있습니까?
소망을 잃어버리신 분은 없으십니까?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힘입는 것만이 치유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로 인하여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사랑의 손길이 그의 몸에 닿음으로 그가 새 힘을 얻고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처럼, 오늘 이 시간 우리 송악교회에 속한 성도들마다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찾아 나와 엎드리는 순간마다 하늘의 위로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림을 그리십시오. 새로운 축복의 그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그림, 소망의 그림을 그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이 세상을 향해 힘있게 전진할 수 있는 목표와 비전을 세우는 축복이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비전이 분명한 지도자만 있어도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또 한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분배받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여호수아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도자가 비전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일곱 지파는 무슨 이유였는지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가나안을 차지하는 일을 지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비전의 상실이라고 말씀드린바 있기에 그곳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백성들이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잃고 방황할 때에 지도자마저 깨어있지 못하고 현실을 헤쳐나갈 혜안이 없다면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수아라는 비전 있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지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많은 양떼를 거느리고 있는 지도자라면 어디에 넓은 초원이 있고, 넉넉한 물이 있는지를 읽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들이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살을 찌우며 행복해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도자의 눈이 어두우면 그를 따르는 양들은 늘 비틀거리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비근한 예가 바로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의 영적인 혼탁함을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회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아니하더라(삼상3:1)".
그것은 바로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그쳤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엘리는 바로 앞에서 자기의 자식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보지 못할 정도로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의 시대는 블레셋의 침공과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으로 인해 암흑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지도자에게서 꿈이 사라지는 것은 재앙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회개와 갱신이 일어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의 통일을 이루는 한 축이 되지 않았습니까? 꿈이 사라진 지도자와 이제 막 꿈을 꾸기 시작한 지도자,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열정적인 비전을 가진 한 사람의 지도자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저의 가장 큰 고민도 바로 그것입니다. 저의 귀와 눈이 엘리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니 사무엘처럼 열정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게 맑은 영과, 뚜렷한 비전을 보여 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해 주셔야할 기도제목입니다. 기도의 영이 막히지 않고, 늘 맑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셔서, 하늘의 뜻과 비전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영안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나아가서 여러분들이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열정적인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되어 우리 송악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원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떤 꿈과 비전을 소유해야 하는가? 주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향해야 할 푯대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을 분배하여 그 땅에 충만하게 거함으로 가나안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
특별히 오늘날 우리 송악교회가 이루어 나가야 할 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저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바로 지역 사회를 복음화 하는 꿈입니다. 이 지역을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 지역에 하나님의 거룩의 영이 흐르는 축복의 동산으로 가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최고의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이며, 동시에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무가치한 없는 우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을 마음을 주셔서 이 시간도 교회에 나와 앉아서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품고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게 하시는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우리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 갖가지 우상과 물질과 교만의 노예가 되어 오늘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어리석게 행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우리 주변에 많습니까?
우리는 이제껏 핑계할 것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목표와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자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펭계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중요한 목표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보다는 앞설 수 없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어떤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이 지역 사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대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나타나는 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심을 따라 완전히 복음화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면 우리를 흔드실 것입니다. 흩으실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사도행전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하나님의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땅 끝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그 때를 위해 우리 교회도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흩으실 지 모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정신을 똑바로 차립시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살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송악교회 목사, 권사, 집사, 교사로 세우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붙잡고 계십니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립시다.
그리고 지체하지 말고 나가 그 땅을 정복합시다. 할렐루야!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