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화 다시 피는데/아명철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와 경칩(驚蟄) 사이, 사방은 세월에 편승한 ‘코로나19’라는 점령군이 인류를 절망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사람의 피난처도 바꾸어놓았다. 옛날의 피난처는 깊은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숨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펜데믹’과의 전쟁에서는 피난 갈 곳이 없다.
모양성 홍매화도 피난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꽃을 피우고, 사람들도 자기 집에 갇혀 은거하고 있다.
부모자식 간이나 형제자매 간을 막론하고 누구라 할 것 없이 5명 이상 만남이 허용되지 않는다. 설에도 각자 집에서 마스크를 한 채 은신해 있다가 가만히 고향집 부모를 찾아뵙는 자식들의 풍속도. 우리 아들딸들도 큰아들네 식구를 필두로 차례로 다녀갔다.
“어, 매화가 꽃망울 터뜨렸네!” 산책길에 먼저 매화를 발견한 아내의 일성(一聲)이다.
아직도 우수의 날씨는 쌀쌀하지만 눈 속에서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는 ‘감염병의 세계 유행’과 상관없이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지난겨울의 모진풍상을 이겨내고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땅속에서 잠자던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놀라 뛰어나오는 경칩이 내일 모래다. 경칩부터는 기온이 비교적 빠르게 오르고, 땅속의 얼음이 녹아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벌레들이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는 절기이다.
봄을 맞이하는 나의마음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지나가는 순간인데, 가는 것은 순간과 영원을 간택하지 않아도 그냥 가고 마음은 무겁게 남는다. 그 간택이 경중을 막론하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는 세월을 다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이 수용은 허공 같아 마음에 직결된 것이며 본래 나의 심량인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쑥꾹새 울음소리 구슬프게 들려온다. 가까이에서 우는데도 멀리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더욱 처량하다. 산새소리, 시내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거칠고 따가운 소리들, 이 모든 소리들이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의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를 가르침의 소리로 가다듬는 안목을 나는 지금까지도 기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 입으로는 곧잘 소동파의 오도송(悟道頌)을 노래하면서도 정작 나의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에는 게으름에 따르는 무명(無明)이다. 마음의 빗장을 푸는 열쇠는 모두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얼마나 읽고 생각해야 새소리 물소리, 봄이 오고가고 홍매화 피는 소리가 모두 깨달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까.
나는 지금 무엇을 알아가고 무엇을 지향(志向)하고 있는 걸까? 어차피 우리의 삶은 깨달음의 연속이기에 앎이 깨달음으로 연결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매화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피고 지고를 거듭한다. 그러나 나는 아는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데 둔하다. 알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다. 이러한 행위는 부질없이 시간만 소비하는 앎에 얽힌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화는 필 때도 말이 없고 꽃이 질 대도 말이 없다. 꽃피우고 꽃이 짐이 자연이 듯 나 또한 마음가짐을 자연의 흐름에 맡겨야 할 것이다. 채울 것도 없지만 익숙하지 못한 비움을 배우는 것도 둔하다. 그러나 비움의 심량을 넓혀가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