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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곳간, 통증의 안부
- 최재선론3
권대근
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
Ⅰ.
잘 쓴 글인가 아닌가는 일반적으로 책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머리글이 얼마나 전체의 내용을 단적으로 압축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면, 작품의 완성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최재선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의 서평을 쓰기 위해 원고를 펼치는 순간, 탄성을 지를 뻔했다. ‘작가의 말’ 제목 ‘일곱째를 詩댁에 보내며’를 보면서, 이분은 정말 시 없이 살 수가 없구나 하고, ‘뮤즈 블랑’無詩 不樂을 속으로 읊조렸다. 첫인상부터 일단 문학적이다. 솔직히 말해 시가 맛있을 거라는 느낌을 확 준다. 그는 일곱 번째 시집을 자식으로 의미화하고, ‘시댁’媤宅을 ‘詩댁’으로 전이시켰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람도 첫인상이 중요하듯, 글도 발단의 예술이라, 첫인상이 인상적일 때, 독자를 끌어들인다. 정말 신선한 발상이다. 아이캣칭에 성공한 ‘작가의 말’ 타이틀이 뇌 속 인지 시스템 호르몬분비장치에 명령을 내리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다.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세로토닌과 다이돌핀 호르몬 분비가 체내에서 분비되었다.
어느 때보다 사람이 절망이었던 시절, 시는 최재선 시인이 살아가는 생의 언덕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희망이라는데,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비록 한때라지만 사람이 절망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시가 밥이 되지 않지만, 시를 쓰면 입맛이 돈다고 한다. 밥 먹을 힘을 주는 것도 시이고, 살아야 할 이유도, 호흡의 밑천도 시라는 그의 ‘시와 동거론적’ 시관詩觀으로 봐서 시와 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 하겠다. 시를 쓰는 동안 생각이 젊어지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평수가 넓어진다는 최재선 시인, 시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람 냄새를 풍길 수 있었다고 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시의 창고가 비는 것은 절박하게 못 견딘다. 시는 힘으로 쓰지 않고, 배 헐렁헐렁 비우고 절절히 통곡하며 눈물로 쓰는 것이었다. 석양 속으로 새들이 빨려 들어간 저녁, 끓는 물에 시를 올린다.” 모두冒頭의 산문이 이럴 진데, 알맹이인 시는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추론이 가능할 것 같다. ‘석양 속으로 새들이 빨려 들어간 저녁, 끓는 물에 시를 올린다.’라는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도 기가 찬다.
보다시피 최재선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은 산문부터 비유적이다. 자동화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메타포의 원리에 의해 직조한 것이다. 사건을 적어나가는 문장력이 이 정도면 시는 얼마나 형상력이 빛날까, 이런 생각은 시를 읽기 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기대와 설렘으로 마주한 차례 역시 구체어로 된 하나하나의 시제가 주는 느낌이 신선하다. 「강둑에 서서」부터 「문전성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여러 번 읽어도 새롭다. 시의 제목만 보고도 깊은 여운과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독자를 호기심으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평자는 물론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시집의 빛나는 시가 여러분의 시 감상에 더 다채로운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詩댁’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Ⅱ.
최재선 시인의 서정시의 고유한 목적은 자기 표현에 있다. 임어당은 “문장에 파란이 없으면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공자는 “말에 무늬가 없으면 멀리 가지 못한다”라고 했다. 시인은 자기의 사상이나 감정, 자기의 특수한 체험을 전부 시로 표현한다. 그의 글과 말에는 시인이 사무치게 갈구하는 그리움의 숨결이 반영되어 있다. 그의 수필도 시조도 시도 통섭의 곳간에서 흘러나오는 고뇌의 흔적과 고심의 얼룩이 있다. 시 속에 표현한 사물도 주관적으로 윤색한 세계다. 세계의 자아화란 말은 시인이 세계를 자기의 개성에 따라 주관화한다는 뜻이다. 헤겔도 제재의 개별화와 특수화는 시의 고유한 원리하고 했다. 이런 표현론의 가치 기준은 작품이 시인의 실제 감정과 일치해야 한다는 성실성이다. 이런 관점은 최재선 시론의 핵심이다.
톨스토이도 시인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감각을 자신이 어느 정도 강하게 느끼는가에 따라 시인의 성실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대상에 대한 주관적 진술이자 현실성에 대한 진술이라는 점에서 최재선의 서정시는 실존적이다. 최재선 시인의 시에는 시인의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 사이의 거리가 없다. 투사는 최재선 시인이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세계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세계를 자기의 의지나 욕망의 논리로 인간화하고 동화된 상태 속에서 그는 자아와 세계를 인식한다. 최재선 시인의 삶 자체는 세계 속에 자아를 무한히 투사해가는, 세계를 끊임없이 자아화하는 과정이다. 최재선 시인의 시는 이러한 삶의 표현이고, 삶의 편린이다. 허구가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이 인생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시의 기능을 자기실현과 자기표현으로 생각한 시인에게 시적 표현은 인생의 편편을 문학으로 나타내는 통로의 하나다.
강이 저토록 유유한 건
붙잡은 것 없이 흐르기 때문
우리 차마 흘려보내지 않고
묶어두려 했던 것 강뿐이었겠나
풍성한 잎 다 내려놓고서야
나무는 이름 字 木으로 쓰고
바람은 얽힌 매듭 하나 없이
방목한 행색으로 부유하더라
구름의 주소는 빈칸으로도
머물 곳 염려한 기색 없더라
강이 저렇게 편안한 것은
쟁여놓으려 한 것 없기 때문
우리 강처럼 흐르지 못하고
더부룩하게 체한 날 하루였겠나
- 「강둑에 서서」 전문
최재선 시인은 마음을 텅 비우고 고요함에 들기를 좋아한다. 사색에 즐겨 빠진다는 것은 그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욕심 없이 비움의 철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시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욕심과 거리 두기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인위를 배제하고 무위자연이 될 것을 추구한 노장사상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행보는 구도자적이다. ‘유유함’에서 ‘부유함’을 찾고, ‘더부룩하게 체한 날이 하루였겠나’하는 자기반성의 어구 속에 녹아있는 욕심의 두께를 정량화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투명하다. 최재선 시인의 시 핵심은 자기성찰,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그림자의 인격화에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시에서 비유가 매력적 요소라면, 인간적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향기는 외부의 번득임이 아니라 내부의 번득임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최재선 시인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비움의 미학을 시라는 따스한 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는 강둑에 서서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강이 저토록 유유한 건 붙잡은 것 없이 흐르기 때문”이라 인식하는 까닭은 집착이나 욕심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풍성한 잎 다 내려놓고서야 이름 자 목木을 가졌다고 하고, 구름의 주소는 빈칸이라니, 이보다 더 생생한 비움의 현장이 어디 또 있으랴. 강물도 바람도 구름도 나무도 우리네 인생의 다른 이름이다. 저들이 저렇게 편안한 것은 ‘쟁여놓으려 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니, 마치 이 시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수필을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시를 감상하는 데 있어서 쾌미는 ‘우리’라는 어휘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다. 기승전결, <기>의‘흘려보내지 않고’ 앞에, <결>의‘흐르지 못하고’ 앞에 ‘우리’라는 글자를 위치시킴으로써 그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사물 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집착적이고, 소유적인가를 드러낸다. 이 시는 사물의 허상과 진상, 세계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탐색하는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길 위에서 오로지 홀로 흐른다
삭발한 바람 그림자같이 따라붙고
사람 사는 마을과 동떨어진 언덕
허공 벽 삼은 마른 억새 가부좌 튼다
제 몸에 걸친 것 다 내려놓고
마침내 성자가 된 겨울나무
명성은 열을 잃고 중심 하나 남을 때
앙상하게 빛나 오롯해지는 거다
꽁꽁 얼어붙어 꼼짝하지 않은 강
추위 불평하지 않고 속으로 흐르나니
감사는 내 안에서 따스해지는 거다
우리의 기도가 만날 나에 대하여
해주시옵소서의 일방적 갈망 아니었더냐
바라고 원하옵나니 반복체 아니었더냐
- 「경전」 전문
최재선 시인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를 꼽으라면, ‘경전’을 들 수 있다. 이 시 「경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것을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제목 「단 하나만으로도」와도 관련성이 많은 시다. “제 몸에 걸친 것 다 내려놓고/ 마침내 성자가 된 겨울나무/ 명성은 열을 잃고 중심 하나 남을 때/ 앙상하게 빛나 오롯해지는 거다” 욕심 다 비우고 성자가 된 겨울나무다. 명성은 열을 잃고, 중심 하나만 남을 때 오롯해진다는 대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중심 하나만’ 챙기면 된다는 경전의 메시지는 뜨거운 반성적 성찰에서 향기를 낸다. “해주시옵소서의 일방적 갈망 아니었더냐/ 바라고 원하옵나니 반복체 아니었더냐”는 화룡점정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떠나서 생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통절한 자기반성의 성찰대에서 자기의 드러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비워내기를 통한 무욕의 소중함을 시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 속에는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이 있다. 또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겪으면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된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악마처럼 웅크리고 있다. 무의식의 열등한 부분인 이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불러내는 것이 시다. 시인은 시를 통해 그림자의 인격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시인이 그려내는 문학의 주제는 자기실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사색과 성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일이다. 시인이 성찰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착한 심성이 그 원천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재선 시인의 「경전」은 몰려드는 내면의 기도를 접하고, ‘겨울나무’라는 제재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시다.
별빛 하나
휘어지지 않고
떠 있는 허공
눈 떼지 않은
바람 무릎 꿇고
온 땅 낮아지며
단 하나만으로
고스란히 채워
오지게 푸진 밤
-「단 하나만으로」
시집의 제목으로 놓인 시다. 예전에는 the best thing을 추구했다면, 요즘은 only one thing를 추구한다. 하나, 단 하나 one thing, just thing, 그 하나만 끈질기게 잘 해나가면 다른 모든 일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의미일까. 이 시는‘단 하나만으로’의 의미를 풀어내는 것이 쾌미다. 그 화두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시집이 던지는 메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단 하나만’ only one thing을 자신의 일과 삶에 적용하는 것은 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현명한 일일 것이다. 모든 일이 똑같이 다 중요할 수 없다. 최고의 가치는 가장 중요한 일에 숨기고 있다. 제대로 된 인풋 하나가 대다수의 아웃풋을 만들어낸다. 성공에 있어서 파레토 법칙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하나를 찾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없어서는 안 될 인생의 단 하나, 바로 그 하나가 무엇을 의미할까. 핵심에는 ‘단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바로 그 하나가 탁월한 성과를 끌어내는 시작점이라 말한다. ‘단 하나’의 개념을 일상의 일부로 만들려면 ‘단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별빛 하나/ 휘어지지 않고 떠 있는 창공/ 눈 떼지 않는/ 바람 무릎 꿇고’에서 떠오르는 원형 이미지는 무엇일까.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기도하는 사람일 것이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눈 떼지 않음’이며, ‘온 땅이 낮아진다’라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인한 승리의 모습이요, 깨우침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무릎을 꿇음’으로써 시적 화자는 어지럽고 흐트러진 마음이 정돈되고, 욕심과 근심을 비워낼 수 있고, 세상에 겸손해질 수 있게 된다. 단 하나, ‘기도’의 삶 하나만으로도 ‘오지게 푸진 밤’을 열 수 있다는 것이 화자의 메시지다. 왜냐하면, 기도는 본질적으로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밤의 시각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푸진 밤’은 신의 은총이나 은혜가 너무 많아서 넉넉하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모자라고 부족하고 불안한 시간이었다면, 기도로 얻는 밤은 빛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밤일 것이다.
말이 등을 내어주기까지
누군가의 몸무게를 셈하기 전
마음의 무게를 헤아린다
자신을 타는 도구로 여기지 않고
동행자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등 기꺼이 낮춰 준다
말도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아
힘이 되는 말은 등에 올려
그 힘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말도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아
말의 등에 올라 고삐 죄고
풀어야 할 때 알아야 한다
- 「말의 등」 전문
이 시는 입에서 나오는 말과 사람이 타는 말의 동음이의어의 언어유희를 활용하여 관계 미학을 묘파한 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과 관심의 공동체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두가 공동체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책임은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지는 ‘부담’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관심과 ‘배려’다. 책임지려는 정신은 나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의 아픔도 이해하고 포용하며 인정하는 미덕이다. 내가 먼저 책임지는 솔선수범 위에 주인 정신의 미덕을 발휘한다. 어린 왕자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을 길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이런 관계 미학을 ‘말은 자신을 타는 도구로 여기지 않고/ 동행자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등을 낮춰준다,’라고 표현하였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질이 ‘차이’를 결정짓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도 타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말’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진실하게 인식하게 한다.
위의 작품 「말의 등」은 보이지 않는 말의 중요성을 말과 그 말을 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 다루고 있다. 말 없는 말이지만, 말은 자신의 등에 탈 사람의 몸무게를 셈하지 않고 마음의 무게를 헤아린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자기 이익만 좇아가는 행위가 바로 배신이다. 배신은 ‘배려’할 줄 모르고 말의 입장에 대해서는 언제나 인간 중심주의, 배타주의를 고수하고 말의 이야기를 귀여겨듣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배려는 말을 먼저 생각하는 낮은 자세로 완성된다. 낮은 자세를 취하면 상대방인 말도 낮은 자세로 등을 내어준다는 시인의 지론은 만연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경종이다. 인간 중심주의는 정말 협소한 가치다. 말도 엄연한 생명체다. 이 시는 언제나 자기보다 어렵고 힘든 상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주려는 삶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배려’의 본뜻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은 부는 게 아니라
말 줄곧 걸어오는 것이다
바람이 슬금슬금 하는 말
그저 말 건넨 방향으로
머리카락 좀 끄덕이고 나면
알아들었느냐는 어투로
시비 따위 걸지 않는다
바람 멎지 않은 삶의 언덕
사람은 만날 변해쌓고
말문에 뜬금없이 장대 놓지만
바람의 입 자물쇠 걸지 않으니
우리바람 맞서 외로울 리 없다
- 「바람의 말」 전문
‘바람’은 참으로 많은 시인이 시로 형상화했던 시인과 매우 친숙한 화소다. 최재선 시인의 시에서 ‘바람’은 자연의 원형 중 하나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강둑에 서서」에서는 ‘바람은 얽힌 매듭 하나 없이’ 「경전」에서는 ‘삭발한 바람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길 어디쯤이었다」에서는 ‘바람에 맑게 씻기면서’ 「먼 길」에서는 ‘먼 숲 단풍 끌고 온 바람’ 등으로 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고 있다. 이 시의 출발점은 인식이다. 인식은 재해석이다. 시인은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말 줄곧 걸어오는 것’이라 해석한다. 말을 걸어온다는 것은 무정물을 유정물화하여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일이다. ‘걸어온다’라는 서술어에는 ‘try to walk’뜻도 내포하고 있다. 시인은 바람의 특징을 몇 가지 던지고 있는데, 일단 시비를 걸지 않는다. 입을 닫지 않고 줄곧 말을 건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늘 변하고, 말문에 뜬금없이 장대 놓는다고 한다. ‘바람의 입은 자물쇠 걸지 않으니/ 우리 바람 맞서 외로울 리 없다’라는 마지막 결구는 바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림으로써 바람에 대한 해석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한다.
시인과 사람과 바람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에는 엄청난 의미가 놓여 있다. 인간과 바람을 동등한 위치에 둔다는 의미다. 둘 다 리더라면, 사람은 지시하는 리더고, 바람은 지휘하는 리더다. 지시하는 리더는 자신의 지식으로 팀원을 복종하게 만들고, 지휘하는 리더는 팀원의 지식으로 지혜를 발휘하게 만든다. 지시하는 리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팀원은 리더의 지식에 근거한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말문에 뜬금없이 장대를 놓는다’라고 하고, 지휘하는 리더, 바람은 가장 낮은 곳을 자신이 봉사할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줄곧 늘 입을 닫지 않고 말을 걸어온다는 것이다. 바람과 맞서도 외로울 리가 없다는 것은 바람은 권위주의도 부리지 않고, 갑질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람의 입은 열려있고, 그 방향성은 중용을 지향한다고 하겠다. 강압적인 보스가 아니라 민주적 리더로서 팀원의 팔로워십을 이끌어내고 펠로우쉽을 만들어간다고 하겠다.
몸속 어딘가 통증이 살기 시작한 게
어느 시대인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 동거는 꽤 불편했다가 어느 날
미운 정 고운 정 흠뻑 들어버렸다
지붕에 비 연달아 부딪히는 소리에
이르게 든 초저녁잠 서둘러 달아났다
오른쪽 어깨에서 소곤거리는 통증과
등 돌리고 눈감은 채 술래가 되었다
산동에 산수유 한참 웃기 시작하고
천은사 100년생 홍매화 몸 풀던 시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한의원에 들러 손가락만한 침 몇 개
통점에 찌르고서도 여전히 술래였다
- 「통증과 숨바꼭질하다」 전문
서정시의 모티브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생각, 하나의 비전, 하나의 무드, 하나의 날카로운 정서이다. 플롯과 허구적 인물도 작품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지적 주장도 없다. 이 시의 현재는 고립된 현재가 아니다. 시인의 의식상에 있어서 현재의 순간에 많은 과거, 체험이 동시적으로 공존해 있다. 비록 인생의 줄거리가 없이 시는 한순간 속에 오히려 강렬하고 집약된 형태로 자아를 표현한다. 시인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기억 가운데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에 따라 잡다한 체험을 선택 결합한다. 이를 하나의 유의적 패턴의 새로운 통일체로 변용 창조한다는 것은 지속적 으로 자아 감각을 개인적 독특성을 한순간 속에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는 뜻이다. 몸속 어딘가에 통증이 살기 시작한 순간, 지붕에 비 연달아 부딪히고, 산동에 산수유 한참 웃기 시작하고, 천은사 100년생 홍매화 몸 푸는 등 여러 가지 체험이 융합되어 있다. 만약 시인이 현재의 지각에만 머물렀다면 소곤거리는 통증과 술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만들어간다. 흔히 인격이니 개성이니 하는 이 자기 정체성의 형성과정이 우리의 인생이다. 통증이 달아났다가 다시 오른쪽 어깨에서 소곤거리는 과정을 겪듯이, “한의원에 들러 손가락만한 침 몇 개 통점에 찌르고서도” 여전히 통증은 잡히지 않고 꼭꼭 숨어“여전히 술래였다”라는 것이다. 자신이 술래가 되었다는 것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자기표현이다. 주관적 경험, 내적 세계의 표현이 서정 스타일이다. 서정 형식은 세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 관계 속에 자신의 이미지들을 제시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꼭꼭 숨어라”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증 앞에서 화자는 통증이 사라져야 할 당위적 상태로 욕망하지 않는다. 서정적인 것은 무엇을 욕구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와 ‘사라져야 함’과 갈등이 없다.
아들아
별일 왜 없겠니
낮달 뜬 허공
가직하게 나는 새
어떤 사이인지
언덕에 걸린 석양
등지고 있는 억새
낯빛 왜 그리 붉은지
은행나무 우듬지에
눈부시게 걸린 달
무엇에 끌려 왔는지
풍경으로 덮지 않고
온통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인 가을
- 「아들의 문안」 전문
「아들의 문안」은 「그럭저럭」이란 시에, “아빠! 뭐 해요?”라는 말을 즐겨 쓴 큰아들이 요 며칠, “아빠! 무슨 일 없어요?”라고 했다는 어구와 연결해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최재선 시인의 시는 지금까지 자연의 사물, 인물 등 다양한 제재가 화소로 등장하지만, ‘아들’이 나오는 경우는 많이 없어서 분석 대상 시로 취택했다. ‘별일 없냐’는 아들의 문안을 듣고, 시인답게 아버지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간접적인 방식을 택해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다. “낮달 뜬 허공/ 가직하게 나는 새/ 어떤 사이인지/ 언덕에 걸린 석양/ 등지고 있는 억새/ 낯빛 왜 그리 붉은지/ 은행나무 우듬지에/ 눈부시게 걸린 달/ 무엇에 끌려 왔는지”에서 시인은 ‘허공과 새’는 어떤 사이인지, ‘석양과 억새’는 낯빛이 왜 붉은지, ‘달’은 무엇에 끌려 왔는지, 온통 수수께끼라고 말해준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 갈등을 전제로 하고 이것을 타개하려 한다.
파토스는 여기서 고뇌의 의미를 지닌다. 파토스는 절제를 떠나 방황하는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 격정과 적대 감정으로써 파토스는 또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갈망이다. 서정적인 것과는 달리 파토스적인 것은 무엇을 욕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욕구 자체는 ‘있음’과 ‘있어야 함’의 분리에 대한 반응이다. ‘있어야 함’의 당위적 세계가 아직 지금 여기에 없으므로, 방황하는 마음이 되고 세계에 대한 적대 감정이 될 수밖에 없다. 파토스적인 것은 언제나 ‘왜’‘어떤’‘무엇’‘무슨’ 등의 ‘wh-’물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당위적 세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파토스는 공허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 집은 대못으로 박혀 있는 한 채의 못 집. 모래재 눈발 성질 급하게 쌓일 때, 이불 밑으로 손 깊숙이 넣으시곤, 방은 따신지 모르것다. 쉰다섯 아들의 겨울을 한숨 기둥으로 세우시곤. 밤낮과 낮밤 구별하지 못하고 만날 소리치고 때리는 스물다섯 손자, 한 곳도 성 한 곳 없으니.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여쭈시곤. 무릎 꿇은 자세로 한숨의 기둥 수시로 무 너뜨리시건만, 어머니 집은 녹슬 줄 모르는 대못에 박혀 늘 완연한 한숨 한 채.
- 「어머니의 집」 전문
최재선 시인의 시는 주로 두 가지 문체로 쓰고 있다. 문체를 기준으로 보면 서술시와 묘사시로 분류할 수 있다. 주로 묘사시를 쓰지만, 위의 시처럼 서술시도 몇 편 보인다. 서술시는 삶의 과정과 삶의 조건을 다루는 반면, 묘사시는 감각적 대상과 그 특질을 다룬다. 그렇다고 묘사시가 순수하게 묘사만으로 되어 있지 않듯이 서술시도 순수하게 서술만으로 되어 있지 않다. 두 문체 중 어느 것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서술시와 묘사시로 범주화된다.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 두 문체가 뒤섞여 있기도 하다. 최재선 시인의 서술시는 문체적 특징만 서술적이지, 오히려 서술시가 더 묘사적이고 상징적이다. 이는 서술시가 갖는 언술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시적 긴장감을 어느 정도 줄여보려는 의도의 일단으로 보인다. 위의 시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정서가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아들이고, 시적 대상은 어머니의 집이다. 시의 내용은 밤과 낮. 낮과 밤을 구별하지 못하고 만날 소리치고 때리는 스물일곱 손자를 둔 아들 걱정으로 한숨만 쉬고 사는 어머니의 한 많은 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가 사는 집을 시인은 ‘대못으로 박혀 있는 한 채의 못 집’‘녹슬 줄 모르는 대못에 박혀 늘 완연한 한숨 한 채’로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요소를 지닌 만큼 이미지는 시적 사건의 배경으로서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에서는 화자의 감정이 투영되어 있음에도 그것이 객관화되어 문학적 성취로 빛난다.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데 객관적 상관물이 큰 역할을 한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표현이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그것도 가장 인간적인 모성의 시점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시인, 그 시인을 아들로 둔 어머니가 품는 삶의 고통이 충격이 되어 다가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한 곳도 성한 곳 없으니.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여쭈시곤. 무릎 꿇은 자세로 한숨의 기둥 수시로 무너뜨리시건만”에는 화자의 걱정 속 어머니의 모습이 진하게 물들어 있다.
소낙비 살풋 지나가신 여름 숲
독공한 소리 쏟아내는 소리꾼들
춘향과 이도령 첫 밤 보내는 소리
심청이 눈먼 아비 눈 열리는 소리
흥부 형수에게 주걱 뺨 맞는 소리
소리란 목에서 터져 나온 것 아녀
끝없이 묻고 깨물어 이치 깨달아야
낱낱이 터지고 쏟아지는 것이여
소리란 혼자 잘난 척하는 것 아녀
이 사람 저 사람 맘 따시게 읽고
고수의 숨소리까지 잡아야 허는 겨
일주일만 할 수 있는 애타는 사랑
진양조 중중모리 휘모리 넘나들며
피 몇 말 쏟으며 부르는 사랑 노래
- 「매미의 사랑가」 전문
매미는 여름의 가객이다. 애절한 세레나데는 암컷을 향한 사랑가다. 매미가 운다라고 하지만, 암컷을 위한 구애의 표현이라고 보면, 최재선 시인처럼 노래로 표현하는 게 어울릴 것 같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송림한선'을 보면, 늙은 소나무 가지 위에 매미가 앉아 있다. 매미를 돋보기로 보듯 커다랗게 클로즈업하여 그렸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와도 맹렬하게 사는 소나무와 오직 한여름만 살다가는 매미를 잘 대비시켰다. 겸재 선생의 의도된 그림인지 알 수 없지만, 매미와 소나무의 관계에 주목해 본다. 장수하는 소나무에 앉아 노래 부르다가 한여름 짧은 사랑을 하다가 떠나는 매미의 심정이 어떨까. 소나무 입장에서 매미의 짧은 생이 그저 안타까울 수 있다. 시인은 이 매미들을 ‘소리꾼’으로 의미화한다. 더하여, “소리란 목에서 터져 나온 것 아녀”라고 하면서, “소리란 혼자 잘난 척하는 것 아녀/ 이 사람 저 사람 맘 따시게 읽고/ 고수의 숨소리까지 잡아야 허는 겨”라면서 소리의 진수를 말해준다.
이 시의 최대 묘미는 매미의 사랑가를 우리의 ‘소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일주일만 할 수 있는 애타는 사랑’이기에 ‘진양조 중중모리 휘모리 넘나들며’ 얼마나 애절하게 불러대기에 시인은‘피 몇 말 쏟으며 부르는 사랑 노래’라 했을까. 마지막 멘트가 그야말로 절창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피 몇 말’은 목이 터져라 부르는 사랑 노래에 담긴 매미의 애간장을 잘 꾸며주고 있다. 매미는 땅속에서 유충으로 7년이 넘는 인고의 시간을 지낸다. 땅 위로 나와 우화를 거쳐 허물을 벗고 예쁜 어른벌레가 되어 한 달 정도 살면서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은 후 일생을 마무리한다. 성충이 된 후 어른의 시간은 대부분 짝을 찾는 데 보낸다. 매미 의 합창은 암컷을 향한 수컷끼리 구애 경쟁의 사랑가다. 불타는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피 몇 말’ 그 이상의 표현이 또 있을까.
아침나절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 어느 애청자가 서해 바닷가에 사는 그분과 듣고 싶다며 신청한 쇼팽의 녹턴 20번. ‘서해 바닷가의 그분’이란 문장과 ‘쇼팽의 녹턴 20’이 살을 맞대며 살가워지다 시가 된다. 서해 바닷가는 어데며 그분은 뉘일까? 쇼팽이 이 노래를 누 이에게 바쳤듯이 애청자는 남성이며 그분은 여성일 터. 서해 어느 바닷가, 역동적인 파도 소리 잦아지며 새들 활공하고 해 눈부시게 진다. 발뒤꿈치 들고 밤 슬몃 왔고 그와 그녀 사이에 평화가 달콤하게 녹는다. 밤이 익는다.
- 「서해 바닷가 그분」 전문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쪽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추억과 마주하는 일이다.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보는 일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짚어주는 일이다. 시인은 어느 날 아침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 애청자가 ‘서해 바닷가 그분’과 듣고 싶다며, 신청한 ‘쇼팽의 녹턴 20’을 연결하여 시를 썼다. 상상이 서해 어느 바닷가로 시인을 나르고, 시인은 그와 그녀 사이의 밤을 ‘익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름 모를 두 남녀의 사랑을 서정적으로 평화롭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역시 이 시도 마지막 결구 묘사가 압권이다. “발뒤꿈치 들고 밤 슬몃 왔고 그와 그녀 사이에 평화가 달콤하게 녹는다. 밤이 익는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다의 눈’은 먼 곳 서해 바닷가 두 남녀의 희미한 그림자, 불 꺼진 창도 그려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제공한다.
상상으로 궁금증을 풀어가는 모습의 실체화는 인간이 표현하면서 어떤 인격을 완성해가는지에 대한 연구가 적다는 차원에서,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 쓰기는 자기 속에 내장된 기억을 불러내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그분’은 바로 숨어 있는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상상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물음의 근원을 해결하려고 한 개인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효하게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상징계 속에서 이원화된 욕망을 만나는 장면도 흥미롭다.
틈 비집고
올라온 풀
희망이다
우리 사이
가끔 틈
사랑이다
- 「틈」 전문
이 시는 현대시에서 많이 보는 흔한 사물의 감각적 이미지도 없고, 인간의 내면 풍경도 없다. 극적 사건도 없다. 이런데도 우리는 이 시에서 여전히 일종의 서사적 흥미를 느낄 수 있다. 화자가 ‘틈’과 관련된 ‘우리 사이’ 속에 포함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우리’라는 말을 객관화하여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주체다. 화자는 인간적이면서 보다 삶의 세계에 밀착되어 있다. ‘비집고 올라온’이 주는 역동성은 뒤에 나올 사랑의 성격을 예고한다. 이 시는 ‘틈’ ‘풀’‘희망’을 ‘우리 사이’‘틈’‘사랑’으로 환치시켜 만든 시다. ‘풀’의 속성에서 ‘우리’를 연상케 하고, ‘희망’이 ‘사랑’의 옷을 갈아입는다. 내가 진정한 나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참나’로 거듭나야 한다. 틈은 ‘사이’요, ‘경계’다. ‘사이’나 경계에 서면 분절이 없어져서 타성에 젖어 사는 게 아니라, 탄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틈’을 보는 관점이 우선 남다르다. 남다르다는 것은 현실 반발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에게 틈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터를 박차고 오르는 힘’이다. 이에 의하면, 일상은 비상의 보고이자 비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낭만적 풍조’나 ‘신명 나는 일상’은 전부 비상의 사고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틈은 자조의 울림, 의식적 자아가 주체적 자아를 지키고 발전시키며 완성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와 다름을 조화롭게 끌어안고 거기서 새로운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이 틈의 사랑학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는 「사랑의 철학」이라는 시를 통해 경계와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 사물과 사람이 섞여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경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이다. 그 사이에 희망을 놓는 최재선 시인은 그 경계에 서서 아름다운 사이를 발견하고 이를 사랑으로 전이시킨다.
축축한 하늘 비 곧 내려놓을 듯하다
밤새 가시에 찔리듯 내내 앓다
몸 장미 피기 시작한 뉘 학교 못 온다니
달마다 으레 앓는 통증이었다
아버지 비닐하우스 일 곁에서 돕다
낭창한 허리 삐끗하여 뉘 결석한다니
허리 허물어지는 요통이었다
지난주 아버지 하늘로 모시느라
리포트 쓰지 못했다는 뉘 이해 바란다니
하늘 무너져 내리는 지통이었다
머리 한쪽 아프고 어지러워
도저히 출석할 수 없단 뉘 쉬겠다니
글쓰기 골몰해 앓는 편두통이었다
몇 차례 글쓰기 상담 약속 어기어
이제 볼 낯 없단 뉘 오늘 꼭 온다니
역시 글쓰기 하느라 앓는 글통이었다
어둑했던 하늘 무거운 비 내려놓는다
- 「통증이 안부하다」 전문
‘통증’을 ‘요통’과 ‘지통’, 종국에 가서 ‘글통’으로 전이시키는 변용의 미학으로 해서 절묘하게 ‘시궁이후공’을 의미화한다. 시인은 ‘어둑했던 하늘 무거운 비 내려놓는다’라고 「통증이 안부하다」에서 적고 있다. 거대한 아우슈비츠처럼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 비동일성을 주장하며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예술은 스스로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싸르트르는 피로써 글을 쓰라고 했다. 글쓰기의 고통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다.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기에 진리는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러나 변명은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며 변신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변명의 언어 ‘ 때문에’를 즐겨 쓰는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항상 밖에서 찾는다.
어느 시인은 “안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라고 노래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한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 직장생활을 하다가 거의 만학도로서 대학에 진학한 늦깎이 주부 학생에게 대학 공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사와 병행해서 일인 다역을 소화하려면 더욱 대학 생활이 어렵고 힘들 것이다. 시인은 이런 척박한 현실, 학교에 못 나오는 갖가지 이유를 ‘통증’이라 명명하고, ‘통증이 안부하다’로 묘사하고 있다. 자기 한계에 직면하면서도 제자의 예를 다하기 위해 결석의 변을 던지는 학생의 모습을 보며, ‘어둑했던 하늘 무거운 비 내려놓는다’라는 현직 교수 시인의 통증 또한 아름답게 보인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인과의 원리를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시의 주제는 글공부를 포함한 모든 공부는 생채기를 내는 아픈 과정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느 집 우편함이든
시집 한 권 도착했다면
그 집 詩댁입니다
어느 집 책꽂이든
시집 한 권 꽂혀 있다면
그 집 詩댁입니다
詩가 순수를 잃고
말없음표를 즐기는 시절
하룻날 가운데
반절쯤 꺾어서라도
내키게 다녀오고픈
詩댁 그대 있는가요?
- 「詩댁」 전문
‘詩댁’ 바로 이 말에서 문학적 향취가 풍긴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언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든다. ‘어느 집 우편함이든/ 시집 한 권 도착했다면/ 그 집 詩댁입니다’라는 진술은 시를 읽고 좋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사는 집을 명명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詩가 순수를 잃고/ 말없음표를 즐기는 시절/ 하룻날 가운데/ 반절쯤 꺾어서라도/ 내키게 다녀오고픈/ 詩댁 그대 있는가요?라는 대목은 시가 삶의 존재 이유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소유적인가 존재적인가, 달을 택할 것인가 6펜스를 택할 것인가를 묻는 시인의 질문에 우리는 문득 왜 사는가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저 물음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돈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삶의 이유는 될 수가 없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는 차원에서 이 시가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인생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이다. 작가는 시에서 분명히 말한다. 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자기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시인은 「시론」이란 시에서 “몇 날 몇 밤 뜬눈으로/ 생각 품으며 야위느니” 시가 된다고 적고 있다. 시인은 시를 제대로 쓰려면, 한계에까지 가봐야 한다고 말한다. 한계가 없다면 예술은 불가능하다. 한계는 집중을 낳는다. 한계는 맞서는 데 그치지 않고 협력해야 할 대상이다. 시냇물은 장해물에 부딪혀야 노래한다. 『놀이: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을 쓴 스티븐 니흐마노비치의 말이다. 실존적 주체로서 한계에 도전해가는 시 정신을 보여주며 건강한 자아를 형성해 가는 시인의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곤혹스러운 상황을 잘 견디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혹이 바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택배가 여럿 왔다
갯마을에 사는 벗
파도에 실어 보낸 시집
산막에 사는 벗
송홧가루 튀겨 보낸 시집
강남에 사는 벗
제비 등 태워 보낸 시집
글 집 한 채 지으며
시 서까래 두어 개 올려달란
허리 숙인 원고 청탁서
비늘보다 빛나는 시
문 앞에 굴비같이 엮여왔다
- 「문전성시」 전문
‘문전성시’라는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났듯이, 이 시는 최재선 시인이 살아가는 풍경이 그대로 농축된 작품이다. ‘허리 숙인 원고 청탁서’와 함께 ‘문 앞에 놓이는 시집’은 시인의 문학적 삶을 보여주는 증거다. 시의 그림자에 쌓여 존재적 의미를 시적 분위기 속에서 깨닫고자 애쓰는 모습에 평자는 경의를 표하게 된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는 힘이 좀 드는 한이 있더라도 시를 적으며 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본질에 천착하지 않는 인간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왜곡 뒤에 숨어 있는 실체를 찾아내어 인격으로 통합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언술은 우리 마음속으로 깊숙이 젖어들어 급기야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전국 각지에서 우편으로 배달되어 오는 시집의 시를 “비늘보다 빛나는 시”라고 쓴 마지막 결말부 시구는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상상하도록 배려한 문학적 장치로서, 그의 인품을 보여준다.
갯마을에 사는 벗이 보낸 시집은 ‘파도에 실어 보낸 것’으로, 산막에 사는 벗이 보낸 시집은 ‘송홧가루 튀겨 보낸 책’으로, 강남에 사는 벗이 보낸 시집은 ‘제비 등 태워 보낸 저서’로 각기 특성화해서 표현하는 이 일상시는 최재선 시인의 평범한 일상적 삶을 문학적 인생관에 의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시 쓰기 동기가 극히 개인적이고 무엇보다도 사실적이다. 이런데도 시인은 언어의 ‘지시적’ 기능의 우세가 주는 객관성을 피하려고 ‘파도’ ‘송홧가루’ ‘제비’ 등의 구체어를 차용하여 보조관념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원론적으로 사실주의적 시는 개연성 즉 진실에의 충실성이 기본적 의무조항으로 요청하는 만큼 이에 잘 부응하고 있다. 사건과 이미지를 지배소로 해서 중층적으로 그려나감으로써, 시인은 시가 갖추어야 할 신선하고 생생한 감각을 살려냈다. 이 시의 쾌미는 배달지에 따른 시집의 특성을 감각적 인상으로 재현하고자 노력한 데 있다.
Ⅲ.
「강둑에 서서」부터 「문전성시」까지 최재선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통섭의 곳간에 있는 시인의 마음이 독자에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집(屋)에 사는 언어만/ 詩로 알고 살았는데/ㅅ 字로 꺾인 어머니 허리/ ㄱ 字로 굽은 아버지 등/ V 字로 나는 새의 행렬/一 字로 걷는 지렁이/ 立 字로 서 있는 숲의 나무/ 三 水邊으로 흐르는 강/ 눈여겨보고 귀여겨들으니/ 죄다 몸으로 쓴 詩”였다는 「몸詩」의 매력은 최재선 시인의 시적 역량을 잘 보여준다. 엄격한 의미에서 최재선 시인의 시는 언어경영이라기보다는 존재를 창조하고 창출한다는 뜻에서 언어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곧 존재나 사물 자체이자 존재나 사물의 창조인 셈이고 언어는 그 매개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최재선 시인의 시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법이자 방법은 중층묘사다. 대상사물의 이미지와 사상의 결합에 의해 교차된 입체적이고도 조형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다. 시를 읽을 때 한 번, 다시 읽으며 평을 쓰는 동안 또 한 번, 두 번이나 감동이 밀려오는 걸 경험했다. 사물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움직이더니 색을 입고, 마침내 우리가 기다리던 모습으로 걸어 나오며 말을 거는 풍경이 걸작인 이유다.
이렇게 시 안팎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지점을 문학적으로 보듬고 있는 이 시집은 심미적 취향을 가진 사람 또는 최재선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더욱 큰 선물로 다가갈 것이다. 「단 하나만으로」는 ‘기도’‘몸詩’또는 ‘통증의 안부’ 등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다. 최재선 시인의 시는 고급한 정신생활에 따르는 고등감정으로서의 지적 감정, 즉 지적 정조, 미적 정조, 종교적 정조, 도덕적 정조 등 복잡하고 고급한 관념을 기조로 해서 일어나는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또 하나의 특성으로 들 수 있겠다.
작가의 글, “도당산은 늘 품을 널찍이 내어주고, 지리산 둘레길은 이마를 환하게 갖다 대고 반겨주었다. 주천에서 운봉으로 가던 고갯길에서 만난, 반달곰 출현 주의 문장, 반달곰은 차라리 만나고 싶은 설렘이었다, 고대하는 한 문장같이.” 곰에게도 도전장을 내미는 모험정신과 문학적 능력이 독자에게 시적 감흥을 충분히 선사함으로써 시집의 역할 이상을 해냈다. 시인의 마음이 시로 확장되어 다가온 순간, 누구나 최재선 시인의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시를 압축한 단 하나의 시집, 『단 하나만으로』를 아직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꼭 만나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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