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Francis in Ecstasy, 1595
1606년 5월 29일 로마에서 보통 카라바조로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가 테니스 경기의 점수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다 한 남자를 죽였다. 그가 먼저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그렇게까지 된 데에는 그의 책임이 컸다. 6년 전에도 그는 동료 화가를 구타해 기소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일년 후에는 군인을 상해한 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1603년에도 동료 화가에게 폭력을 휘둘러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1604년에는 식당 종업원의 머리에 접시를 집어던져 기소되었고, 그 후에는 경비병에게 돌을 던져 체포되기도 했다. 1605년에는 여자 때문에 싸우다 상대방 남자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몇 달 후 다시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테니스 경기 때문에 사람을 죽여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1607년 초 카라바조는 당시 명성을 떨치던 도시 가운데 하나로 예술가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나폴리에 도착해 범죄자처럼 은신처를 구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어두운 그림자를 투사하게 된다. 즉 가난은 성자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그와 정반대인 악마의 조건으로 비쳐지게 된 것이다. 유럽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부도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회의 호의를 악용하는 범죄자로 치부되었다. 1629년 아그리파 도비네는 "가난은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든다"고 썼다.
St. Matthew and Angel, 1602
열한 살 때 고아가 된 카라바조는 밀라노의 그저 그런 화가의 공방에서 도제로 일했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거쳐 로마로 여행하면서 거리의 삶을 체험했고, 그 과정에서 생각도 바뀌었다. 1597년 스물네 살 때 그는 로마에 있는 산 루이지데이 프란체시 교회의 콘타렐리 예배당을 성 마태오의 일생으로 장식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마태오의 모델로 평범한 거지를 택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인 <성 마태오와 천사>는 너무 저속하다는 이유로 교회 참사회로부터 전시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그림에서 성 마태오의 커다란 발은 캔버스 밖으로 삐져 나와 신도들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천사는 문맹자를 대하듯 마태오의 손을 부여잡고 한 자 한 자 인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나폴리에 도착하기 5년 전 나폴리의 7명의 젊은 귀족들은 '불쌍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비를 털고 있었다. 이들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일 년 후 그들은 몬테델라미세리코르디아라는 모임을 결성해 나중에 피오몬테델라미세리토르디아 예배당으로 알려진 교회를 건립하기도 했다. 예배당은 일곱 가지의 자비를 효과적이고 정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장소여야 했다. 각각의 자선 행위를 감독하고 기부를 격려하기 위해 일곱 명의 대표가 임명되었다. 이들의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1606년 교황 파울루스 5세는 피오몬테 회원으로 활동하는 귀족들에게 모든 죄를 사한다는 은혜를 내렸다.
나폴리의 유명한 화가들은 자비로운 행동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제단 위를 장식하는 영광을 카라바조에게 돌아갔다. 그는 1607년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이라는 대작을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 로마 당국에 쫓기는 몸이었다. 게다가 엄격한 교회 참사회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도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피오몬테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위해 최고의 화가를 초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척 흡족하게 여겼다.
The Seven Acts Mercy, Church Pio Monte della Misericordia, Naples
카라바조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하나의 화폭에 일곱 가지 자비의 행동을 모두 담기로 했다. 이는 종교화 역사상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극장 무대를 연상시키는 하나의 공간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가운데, 캔버스는 칸막이를 이용해 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캔버스 위쪽에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세상의 어둠과 서로 부둥켜안은 천사 둘을 바라보면서 공중에 떠 있다. 여기서 정죄의 성모이면서 자비의 성모이기도 한 마리아는 구원의 젖을 상징한다. 그녀의 발 아래에서 분주하게 돌아가는 인간 세상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주어진 은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고통은 끝없이 계속될 뿐이다.
영국의 예술사학자 헬렌 랭던은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구원의 희망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는 그 자신의 인생 역정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장면들을 통해 공포와 도주,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위협을 표현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떠들썩한 분위기는... 훌륭한 작품의 탄생을 기대하면서 구원을 갈구하는 그 시대의 풍조를 완벽하게 옮겨놓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The Seven Acts of Mercy (detail)
캔버스 왼쪽 아래에는 벌거벗은 한 남자가 슬픔에서인지 감사의 마음에서인지 손뼉을 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동료는 잘 차려 입은 신사로부터 외투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하고 있다. 그는 로마 병사 신분으로 아미앵 성곽을 지나다 헐벗고 가난한 자를 보고 자비를 베푼 성 마르티누스의 본보기를 따르고 있다. 야코부스의 <황금 전설>에 보면 '아무것도 그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르티누스는 이 남자야말로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칼로 꺼내 입고 있던 외투를 둘로 잘라 한쪽은 거지에게 주고 나머지 한쪽으로는 자신의 몸을 감쌌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사는 복장으로 미루어 순례자 일행 중 한 명인 듯하다. 순례자들은 체격이 다부지고 온화한 인상을 주는 한 남자의 환대를 받고 있다. 아마도 여인숙 주인인 듯하다. 그들 뒤로 반쯤 헐벗은 거지가 당나귀 턱뼈로 물을 마시고 있다. 카라바조와 동시대인들은 물을 뜨는 주발과 당나귀 턱뼈로 적들을 때려눕힌 뒤 사막에서 갈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하느님께서 우묵하게 꺼진 데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어 그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린' 삼손과 연계시켰다. 그들의 오른쪽에는 하얀 저고리와 진홍색 모자 차림의 한 남자가 시체를 떠맨 또 다른 남자에게 촛불을 쳐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젊은 여인이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창살 뒤에 갇힌 늙은 남자에게 젖을 빨리고 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대 로마의 키몬(시몬)와 페로 이야기를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다시 태어난 옛날 이야기 속 인물들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지들의 얼굴, 육신과 닮아 있다. 카라바조의 무대는 인위적이거나 비유적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교회가 빈민들을 정화시키기 위해 준비한 무대나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코메디아델라르테의 정형화된 무대와도 거리가 멀다. 극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자비가 베풀어지는 장소인 카라바조의 무대에는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관찰자가 포함된다. 따라서 카라바조는 국외자로서의 관찰자를 배격한다. 즉 그는 관찰자에게 배우의 역할을 맡긴다. 그는 관찰자로 하여금 관객의 입장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지켜보게 하기보다 사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직접 들어가게 만든다. 그 결과 관찰자는 비참한 형제 자매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통해 카라바조는 관찰자는 행동하게 만든다. 토마스 아퀴나는 행동이 결여된 연민은 자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The Seven Acts of Mercy (detail)
무대 전체는 카라바조의 후기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강렬한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카라바조보다 몇 년 앞서 태어난 화가 프란체스코 알바니는 이 색을 가리켜 '땅의 살빛'이라고 일컬었다. 이 빛의 출처는 과연 어디일까? 현관에 서 있는 남자가 들고 있는 횃불에서 나오는 빛도 아니고, 여인숙 주인의 뒤편에 있는 방에서 나오는 빛도 아니다. 성모와 아기 예수를 떠받치고 있는 천사장에게서 나오는 빛도 아니다.
X-레이로 촬영한 결과 이 성스런 빛은 나중 덧칠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오몬테의 귀족들이 그림이 완성된 후 카라바조에게 마리아를 추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리 그들이 앞서나갔다고 그림에서 너무 세속적인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해 성스런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면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를 감싸안은 이 빛은 사방에서 나온다.
왼쪽에서 보면 빛이 천사들의 날개와 어깨 위로, 오른쪽에서 보면 천사들의 가슴 위로 쏟아져 내린다. 빛은 성모와 아기 예수의 얼굴에 이어 여인숙 주인과 목마른 노인, 순례자, 자비로운 신사, 횃불을 들고 있는 남자, 젊은 여인과 죄수의 얼굴을 비춘다. 또한 땅바닥에 쓰러져 벌거벗은 남자의 등과 매장을 위해 옮겨지는 시체의 발도 빛에 노출되어 있다. 이처럼 빛은 사방에서 나온다. 마치 장면 전체가 우리가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빛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빛은 관찰자 자신의 빛이다. 빛이 없다면 일곱 가지 자비스런 행동은 그림자와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Madonna di Loreto
The Death of Virgin
나폴리의 빈민들에게 성스런 캔버스 속의 무대를 빌려줌으로써 카라바조는 트렌토 공의회의 입장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후에도 그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하면서 때로 축제와 잔치를 벌이는, 심지어 교회의 종교극과 신비극이 펼쳐지기도 하는 거리 극장을 계속 차용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였다. 로나의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 참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성 마태오나 로마의 산아고스티노 교회를 위해 그린 <로레토의 성모>에 등장하는 지저분한 경배자들은 카라바조가 매일 길거리에서 마주친 빈민들이었다. 특히 카르멜 수도회의 의뢰로 <동정녀의 죽음>을 그릴 때는 임신 때문에 고민하다가 테베레 강에 빠져 죽은 어린 창녀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 그림들은 의뢰인들로부터 모두 거절당했다. 그 가운데 <동정녀의 죽음>은 루벤스의 요청으로 그의 후원자인 만토바 공작이 구입하기도 한 이후에야 겨우 일주일 동안 로마 화가들에게 전시되었다. 그 후 이 그림은 공작의 저택으로 옮겨져 일반인들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나폴리에 이어 몰타를 도피처로 정했다. 거기서 그는 그 동안 쌓은 명성에 힘입어 정의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갖가지 범죄들이 대공작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는 또다시 추방당했다. 시라쿠사와 메시나에 이어 다시 나폴리를 찾은 카라바조는 숨을 곳을 구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 1609년 말 나폴리의 한 여인숙 앞에서 그는 <일곱가지 자비스런 행동>에 나옴 직한 사람에게 공격을 받고 크게 다쳤다. 곧이어 유명한 화가가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게까지 퍼졌다. 하지만 7 개월 후 그는 교황령 안에 있는 스페인 영지인 포르테르콜레로 여행갈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거기서 그는 주님의 용서를 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교황을 찾아가 직접 용서를 청하기로 결심했다. 막 배로 오르려는 찰나 그는 실수로 체포당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배는 이미 로마로 떠나고 없었다. 당연히 그의 소지품도 배와 함게 사라지고 없었다. 지친데다 몸까지 성치 않은 카라바조는 바닷가 모래밭에 풀썩 쓰러졌다. 며칠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ST. Francis,1606
알베르토 망구엘의 <나의 그림 읽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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