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2) 이길상
라. 정통의 칼리프들(632∼661). 라시두운
(1) 할리파(칼리프 : 후계자) 문제
마호메트가 죽은 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의 장로들이 교도(敎徒)의 총의에 의하여 잇따라 칼리프(후계자)로서 이슬람 교단을 통솔하던 시대를 역사에서는 정통 칼리프(라시두운) 시대라 한다.
4대 알리가 쿠파로 옮길 때까지 모두 메디나에 있었으며, 초대 아부 바크르는 전에 이반(離反)하였던 아라비아 제 부족을 재통일하였고, 제2대 우마르는 시리아·이라크·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통치의 대 방침을 정하였으며, 제3대 오스만은 코란의 통일을 기하였다. 그러나 제4대 알리는 우마이야가(家)와 대립 끝에 암살되고 이로부터 정통칼리프시대는 막을 내리고 세습왕조로 이어졌다.
우마이야(옴미니아:옴마이드)왕조라고 지칭하는 이 세습왕조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수부(수도)로 정했고, 다시 750년에는 마호메트가계의 아바스조가 들어서고 수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옮기는 등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따라서 그 중심도 아라비아를 떠나 시리아, 이집트, 이란, 이베리아반도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마호메트가 창설한 이슬람교국 즉 움마의 지도자는 그가 죽은 후라도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었다. 마호메트가 말하는 소위 속무(俗務)를 맡아볼 후계자(後繼者)를 선출해야 한다는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칼리프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할리파라고 불렀으나 이것이 칼리프로 와음(訛音)되였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후계자와 동시에 대행자(代行者)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아라비아 사람들은 여느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부족의 우두머리를 세습하는 일은 드물었고, 그 때의 형편에 따라 유능한 인물이 선출되는 것이 통례였다. 따라서 마호메트가 임종에 가까워 많은 유언을 남기면서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고, 그들 사회에서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호메트가 메카의 상인에서 출발하여 이슬람교단 국가를 형성하기 까지, 그를 협력했거나, 마지 못해 이슬람에 귀의한 무리, 또는 예언자의 집안과 그와 결혼했던 처족 등 몇 개의 세력권이 있었다.
그 첫째가 무하지룬과 안사르 사이의 미묘한 대립관계다. 무하지룬이란 마호메트의 메카시절부터 교우(아스하아브)들을 말하고 헤지라 때 마호메트를 따라 메디나로 옮겨온 사람들로서 정통 이슬람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안사르는 역경에 처한 이슬람을 그들의 도시 메디나로 불러들여 그들을 보호해 주고 용기를 주었던 메디나의 협력자들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다. 그런데 예언자가 죽고나서 이들간에는 소위 주도권 투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경쟁자가 이뿐만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메카 정복 전후에 이슬람에 귀의한 신참 자들로서 그 안에는 메카의 명문집안이 많았고, 특히 우마이야 집안은 그 세력이 대단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교단에 끼친 공과와는 별도로 현실적으로 가장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 치가 않았는데 거기에는 마호메트의 사촌동생이자 사위가 되는 알리가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세력들은 마호메트가 별세했다는 소식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메디나는 유혈의 참극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후계자로 아부 바크로를 추천하여 초대 칼리프를 세운 것은 우마르 였다.
(2)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573? ~ 634. 8. 29)
아부 바크르는 마호메트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사랑스러운 어린 처 아이샤의 아버지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다. 초대 칼리프(632-634)가 된 그는 자신을 "알라의 사도의 칼리프"(알라의 사도인 마호메트의 대행자)라 칭하고, 예언자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부족들이 교단을 떠나거나, 다른 일신교를 창시하여 다른 예언자가 나타나는 등 자칫하면 이 움마교단 국가가 와해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이슬람을 떠나거나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릿다(Ridda)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배교(背敎)를 의미한다. 이에 아부 바크르는 이 가짜 예언자들을 토벌하는데 진력하였는데 이 토벌에 공을 세운 것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로서 그는 예언자의 마지막 아내였던 마이무나의 조카였고, 처음 메카군에 있다가 이슬람에 귀의하고 마호메트의 용장이 되어 예언자로부터 "알라의 검"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할리드가 나지드고원 남부인 야마바 지방에서 예언자를 자처하고 코란에 대처하는 경전까지 만들어 일신교를 세워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었던 무사일리마(Musailima)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이를 소탕하였을 때, 무사일리마를 따라 순교(殉敎)한 사람이 1만에 달했다고 하며, 이슬람군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메디나 북방에선 트라이하란 자가 나타나 예언자를 자칭했고, 동부아라비아의 타밈족 사이에선 사자하란 여자 예언자가 나타나 음률적인 아라비아 말로 설교를 하였으며, 남부 야만(예멘)에서는 산아(San a)를 거점으로 알 아스워드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세력을 늘리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제 자칫하면 이슬람은 메디나와 메카의 두 도시를 잇는 헤재즈(Hejaz)지방의 일부 세력으로 전락될 수도 있었다.
아부 바크르의 재세기간은 2년의 짧은 시기였으나, 이들을 차례로 토벌하여 예언자 사후에 나타나는 이러한 릿다를 막고 강력한 이슬람교단을 재건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비잔틴제국 치하에 있던 시리아와 사산조페르시아의 근거지 가까이 있던 이라크 남부에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633년에 할리드에게 1만 8천의 병력을 주어 비잔틴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라함왕국의 수도 히라를 공격하였고, 그 해 가을에는 9천의 병력으로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그가 61세로 병사하자 이제 그 임무가 다음 칼리프에게 넘어갔다.
(3) 2대 칼리프 우마르(634 ~ 644)
2대 칼리프가 된 우마르 이븐 알 핫타브(Omar ibn al-Khattab)는 처음에는 "알라의 사도의 후계에 후계"라고 했는데
칼리프의 칼리프란 말이 길어, 이를 간단하게 줄여서 칼리프(할리파)라 칭했고, 또 아미르 알 무미닌(Amir al-Muminin : 신도의 통솔자) 이라고도 칭했다.
이 칭호가 이윽고 중세 유럽으로 들어가 "엘미람 몸미니" "미라로민" "무루무무누스" 등으로 와전(訛傳)되었고, 중국에도 전해져서 담밀막말니(담 密莫末니 ) 모문왕(暮門王) 등으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그는 메카의 명문 출신으로 마호메트의 신흥종교를 처음에는 백안시 했으나, 일단 귀의하자 그 강력한 성격과 탁월한 재능으로 교단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과부가 된 그의 딸 하프사를 마호메트가 거둠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예언자가 죽고 후계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아부 바크르를 선배로서 추대하여 후계자가 되게 하였다가, 그가 죽자 드디어 칼리프가 되어, 마호메트에 이어 이슬람의 제2의 건설자가 되었다. 그의 재세기간에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았고, 사산조페르시아에 치명상을 입히고 이란과 이라크를 정복했다.
그의 정책은 마호메트의 유언(아라비아에 두 개의 종교를 두지 말 것)에 따라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 일색으로 바꾸고,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정복지역에서는 유다교도, 크리스트교도, 배화교도 들과 계약(딤바)를 맺고, 정해진 인두세(人頭稅)와 지세(地稅)만 물면, 생명, 재산, 교회를 보호해 준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래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고 있던 크리스트 교도들에게는 반도를 떠나 시리아나 이라크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고, 이주하면 살 수 있는 땅을 나누어 준다고 하였으며, 메디나 북쪽의 하이바르시에는 많은 유다교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옮겨가지 않자, 우마르는 이들을 완전히 아라비아 반도에서 쫓아 내고 말았다.
639년에는 요르단강 지류인 야르무크(Yarmuk)강가에서 비잔틴제국과 결전하여 이를 궤멸(潰滅)시켰는데 이 때 이슬람 군을 지휘한 것은 "알라의 검"이라고 불리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였다. 그런데 그는 이 싸움에서의 전공을 마지막으로 메디나에 소환되어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죽었다. 그 전공에 따르는 명망이 칼리프를 앞 지를 수도 있다고 보고 칼리프 우마르가 미리 제거한 것이다.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Abu Ubaida)를 보내어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최후까지 버티던 예루살렘과(638)과 카에사레아(Caesarea)도 정복하였다(640)
예루살렘을 함락하였을 때 우마르는 메디나를 떠나서 친히 이곳을 방문했는데, 거암(巨巖)과 쓰레기가 범벅이 된 옛 다윗왕의 신전자리에 이슬람의 "아득한 예배당"이라는 모스크(교회)를 목조건물로 세웠고, 이로부터 약 50년 후 691년경에 우마이야조의 압둘 말리크가 화려하고 장엄한 석조건물로 개축하였다.
이 신전은 이슬람의 3대 성지로서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으로 되어 있다. 이 후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을 두고 유다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는 선례를 만들었는데, 2차대전 때 오스만 투르크의 배후를 교란할 목적으로 이 지역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이슬람에게는 맥마흔선언을 유대에게는 밸푸어선언이라고 하여 양측 모두에게 같은 땅을 준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공화국이 이 지역에 수립되자, 수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였고, 4차례의 전쟁(중동전쟁)을 치루고도 해결이 되지 않아 최근까지 세계가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싹은 이미 우마르 시대부터 트고 있었다.(왼쪽의 그림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사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만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칼을 든 모습. 팔레스타인 난민도 이스라엘 민족도 모두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데...도대체 종교가 무엇인지?.....)
우마르가 이라크를 정복한 것은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카다시아 싸움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하고 페르시아가 조영한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인 (크)데시폰을 점령하자, 사산조페르시아의 최후의 왕인 아즈디기르드 3세는 이란고원으로 일단 도망간 후 군사를 모으고 멀리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637),
전열을 정비하고 싸움에 임했으나 니하완드의 결전에서 패하고(641), 동쪽으로 도망하여 중앙아시아의 마루우 근교의 물레방앗간에 숨어 있다가 그곳 토착민에 의해 살해됨으로서 사산조 페르시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651)
한편 우마르의 이슬람 군은 이집트의 비옥한 나일강 유역으로 쳐들어 갔는데 이 때 이슬람의 주장은 메카의 코레이시족 출신의 아므르 이븐 알 아스(Amir ibn al-As)로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버금가는 대단한 용장이었다.
그는 일찍이 대상(隊商)을 따라 이집트에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곳의 지리에 밝았고, 예루살렘 점령 때에도 그의 공이 가장 컸다. 우마르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 대단한 용장 아므르는 이집트에 진공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신중한 우마르는 장노들의 의견을 물어본 다음에 결정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워 결정을 미루었다. 이렇게 되자 아스는 그 단독으로 이집트에 진공함으로서 칼리프 우마르도 결국은 구원병을 보내어 이집트 정복에 성공하였다(639) 이로서 비잔틴제국은 시리아에 이어 이 기름진 이집트를 영원히 잃고 말았다.
시리아나 이집트의 비잔틴제국이 병력의 숫자나 장비면에서 우세하였음에도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 비잔틴제국의 중세(重稅)에 염증을 느꼈고, 이슬람의 간단한 통치 방침에 환영하여 내심 그들의 침입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방대한 영토를 확보한 우마르의 생각은 매우 신중하여, 정복지에 아라비아인들을 이주시켜 원주민과 혼혈시키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그의 생각은 아라비아인들은 알라의 전사로서 싸우는 것이 사명이며, 그것만이 이슬람의 교단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복지의 토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지세(地稅)만 내게하고, 요소에 아라비아 군을 주둔시켜 이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지원토록 하였으며, 중요한 지점에는 군사기지가 될 도시를 건설하여 아라비아 인들을 이주시켜 성전(聖戰 : jihad)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군사기지로 생겨난 도시를 미스르(Misr)라고 하였는데, 현대의 아랍어로는 이집트를 가리키는 말로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런 도시를 일컫는 말이었고, 이라크의 바스라와 쿠파, 이집트의 무스타트(구 카이로) 등은 전형적인 미스르의 도시었다.
미스로가 원래의 목적은 성전(지하드)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건설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슬람의 학예(學藝)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미스르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인들은 의식주 일체를 지급받았고, 지체가 높은 집안은 연금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재원(財源)은 모두 피 정복 민 들로부터 받아들이는 인두세와 지세로 충당하였고, 피정복민이라 할지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인두세를 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농토를 떠나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이슬람교단은 거대한 전투집단이 되었고, 개종하지 않는 피정복민이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피정복민이 개종하지 않는 한, 토지를 팔 수도 떠날 수도 없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우마르가 구상한 이상사회의 건설로서,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노력하던 중, 644년 11월 7일 새벽 메디나의 예배당에서 아부 루루아란 페르시아 태생의 크리스찬 노예의 칼에 찔려 죽었다.
(4) 3대 칼리프 오스만(Othman) (644 ~ 656) -코란의 완성
우마르가 살해되자 칼리프가 된 오스만은 70 나이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성격도 온순하고 부드러워 이 강력한 이슬람교단 국가를 이끌어 가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그는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요지마다 임명된 태수를 차례로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자기의 일족인 우마이야 집안 사람들을 앉혔기 때문에 인기를 잃었다. 이래서 바스라, 쿠파, 무스타트의 3대 미스로의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떼를 지어 메디나로 몰려오는 험악한 세상이 닥쳤다.
이 험악한 형세가 메디나의 예배당에서 늙은 칼리프에게 폭행하는 사람까지 생겨나자 그는 자택에서 연금 상태가 되어 바깥 출입을 못하게 되고, 656년 6월 마침내 폭도들은 칼리프의 저택에 침입하여 오스만을 난도질 하여 죽였다고 하는데, 이 때 이미 여든 두 살의 노칼리프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폭도들이 쳐든 칼날 아래에서 코란을 계속 읽었다고 한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후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코란을 품에 안았고, 그 때문에 코란이 붉은 피로 물들였다. 이 노칼리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면 코란을 결집하여 완성시킨데 있으며 이 때의 코란이 지금 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코란(Koran/Qur?n)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19년경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의 계시·설교를 집대성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자 마호메트가 40세경 메카 근교 히라산(山) 동굴에서 천사(天使)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은 것을 모은 이슬람교의 경전으로서, "코란"이란 아랍어로 "읽혀야 할 것" 또는 암송(暗誦) 혹은 독송(讀訟) 의 뜻이라고 한다.
계시받은 마호메트의 말은 초기의 사도(使徒)들에 의해 기억되어 낙타의 골편(骨片)이나 야자의 엽피(葉皮), 암석의 파편 등에 불완전한 문자로 기록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승이 다양해져 그의 집성·통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코란의 결집(結集)이 이루어졌는데,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시도하여 본격적인 결집은 제3대 칼리프인 늙은 오스만이 646년에 완성하여, 오늘날까지 당시 정리된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란의 용어는 아랍어의 메카 방언이었으나 이것이 후에 고전 아랍어로 널리 쓰이게 되어 현행 아랍어 문어체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며, 그 문체는 사주아라는 일종의 운(韻)을 단 산문체로 되어 있어 독송할 때 그 리듬감이 매력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현행 코란은 6,342아야(句節)와 114수라(章)로 되어 있으며, 각 수라에는 암소, 이므란 일가, 여자 등과 같이 그 장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고, 제1수라의 개경장(開經章)은 7아야로 된 짧은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에 해당하며, 이슬람교도는 자주 이것을 독송해야 한다. 다른 장(수라)은 대개 구절(아야)의 수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서 최종 장에 이르러서는 구절의 수가 아주 적어진다.
예를 들면, 제2장은 286구절, 제3장은 200구절인데, 제113장은 5구절, 마지막 제114장은 6구절로 되어 있고, 모든 장에 메디나 계시 또는 메카 계시라는 표시가 있는데, 메카 시대의 계시는 극히 신앙적인 짧은 것이기 때문에 현행 코란에서는 대개 후반에 집성되어 있고, 후대의 메디나 계시는 대부분 전반에 편입되어 있다. 계시를 받은 순서와는 관계없이 문장의 형태로 구분된 것도 코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코란에는 아랍의 고속(古俗)과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전승들을 많이 포함하고 또 당시의 사회적 관습이나 역사적 사건에 관한 부분도 적지 않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에, 코란에 주해(탑시르)를 첨기(添記)할 필요성이 생겨 그것이 이슬람 신학자들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되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수많은 주해서가 출간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아 타바리, 아 자마후샤리, 알 바이다위 등이 만든 것이며, 그 중에서도 알 바이다위의 주해는 오늘날 코란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무슬림)는 일상생활에서 코란을 독송하며, 각종 의식에서는 정규 독송자가 소리 높이 독송하며, 초기에는 10여 파의 유파(流派)가 각기 다른 정지(停止)나 성조(聲調)로 독송했으며, 10세기경 이후 7파로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란은 유일신 알라 자신의 말로 되어 있으므로 이슬람교도는 이것을 직접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번역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전파지역을 따라 아라비아 언어가 보급되어 아랍문화권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비 이슬람지역에서 학문적인 연구로 번역이 시도되어, 12세기에는 최초의 라틴어 번역이 준비되었고, 이후 1543년에 비브리안델의 라틴어 역이 나왔으며, 이것을 다시 독일어·이탈리아어·네덜란드어로 중역(重譯)되었고, 1698년에는 다시 마리치의 라틴어역이 출간되어 널리 읽혀졌다.
(그 후 프랑스어·영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김용선(金容善)의 한역주해(韓譯註解) 코란 역편(譯編)이 간행되었다고 하니 관심 있는 독자가 계시면.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있는 용산구 한남동에 중앙성원(中央聖院), 항도 부산에 제2성원, 경기 광주에 제3성원, 안양시에 제4성원과 전주시에 제5성원이 있으니 거기에 가시면 한역 코란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5) 마지막 정통 칼리프 알리(?li) (600 ?~661.1)
이슬람교단의 제4대 정통(正統) 칼리프(재위 656∼661)가 된 알리의 정식 명칭은 Ali ibn Abi Talib이며, 메카의 코레이시족 하심가의 사람이며 마호메트의 종제(從弟)로서 예언자가 친 아우처럼 사랑했고, 그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으며, 마호메트의 딸인 과티마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아, 마호메트의 유일한 핏줄인 후손을 남겼다. 또한 누구 못지 않게 예언자를 받들었으므로, 이런 그의 경력이나 혈통으로 보아서는 마호메트의 사후 곧 후계자가 될 만도 하였으나 일이 묘하게 되어 때를 기다리다가 오스만의 암살로 칼리프가 되었다.
그의 인품 역시 총명 박식하였고 특히나 말 솜씨가 뛰어나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싸움터에 나가면 용감한 용장이어서 마호메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성격 역시 성실하고 깨끗하였으며, 남에게 겸손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공평무사하였고 일상생활에서도 검소하고 매우 금욕적이었다......
외견상 이러한 그가 칼리프에 취임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앞길이 잘 열리리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 그의 재임 5년간은 수없는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첫 번째 시련은 오스만이 암살될 때 입은 피 묻은 속옷과, 폭도들로부터 남편을 지키기 위해, 폭도들의 칼날아래 남편을 몸으로 감싸 안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나간 그의 처 나이라의 잘려 나간 손가락이 다마스커스 예배당의 설교단에 전시되자 시리아 총독으로서 그 지방의 인심을 쥐고 있던 우마이야 집안의 무야위야가 추도 연설을 하면서 노칼리프의 죽음을 애도하자, 이 때 6만의 장정들이 복수를 위해 결맹(結盟)을 했는데 이 때 원수(怨讐)로 지목된 것이 알리 였다. 오스만 살해의 원한과 책임을 고스란히 그가 떠맡은 셈이다.
메카 역시 반 알리의 거점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신앙의 어머니로 추앙받던 마호메트의 애처 아이샤를 비롯해서, 같은 하심가문의 알 주바이르 같은 원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샤가 알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 것은 이야기가 30년 전 메디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때 마호메트가 외정을 나갔을 때 그들의 풍속에 따라 그의 두 아내(아이샤와 힌드)도 같이 갔는데 문제는 귀로에서 발생하였다. 먼길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일행이 잠시 쉬는 사이 아이샤는 낙타위에 얹힌 가마에서 내려 용변을 보고 돌아와 보니 일행은 떠나고 없었다. 가마 속을 확인하지 않고 당연히 가마 속에 아이샤가 얌전하게 앉아 있으려니 하고 그냥 떠났다는 것이다.
외진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아이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다만 그가 없는 것을 알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이 때 낙타를 몬 건장한 청년이 나타나 아이샤를 낙타에 태우고 메디나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아이샤의 정조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반 마호메트 진영에서는 약점만 보이면 예언자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기에 이 단순한 사건이 확대되어 예언자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이 때 알리는 아이샤를 버릴 것을 예언자에게 건의했고 이것이 아이샤에게는 두고두고 원한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알 주바이르 등은 자신들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반 알리의 진영에 서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리프가 된 알리의 급선무는 이런 반대파를 숙청해야 되기 때문에 먼저 메카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메카의 반 알리파들은 아라비아고원을 넘어 이라크의 바스라를 점령하고 그곳을 본거로 삼았기 때문에 알리도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라크의 쿠파로 옮겼는데(656) 이것이 이슬람교단국가의 수부(首府)가 아라비아를 떠나게 되었고, 이 후 다시는 아라비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드디어 그해 12월 4일 양측은 백병전이 벌어졌는데 아이샤도 낙타를 타고 직접 진두 지휘하였으나, 알리의 승리로 끝나고, 아이샤도 사로잡혔으나 알리는 이 의모(義母)를 정중히 대접하여 메디나로 보냈고, 거기에서 위대한 남편이 남긴 언행을 말로 전한 후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 사람들은 이 전투에서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독전했다고 하여 낙타전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657년 1월 알리는 쿠파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으나 이미 우마이야집안의 무야위야와는 끊을 수 없는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국 이라크와 시리아를 거점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57년 봄 알리는 5만의 병력을 이끌고 무야위야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양측이 팽팽히 맞서 결정이 나지 않자 양측이 합의하여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 알 아시타르를 비롯한 1만 2천의 주전파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알리군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그들은 쿠파근교의 한 부락에 모여 하지리파((Kharijites : 이탈파)라 부르며 이슬람 교단에서 최초의 공공연한 분파가 행해졌고, 그들은 독자적인 신학체계를 가진 강력한 분파를 형성하여 이 후 무수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 이 하지리파(이탈파)들이 왜 알리의 화의(和議)에 그처럼 노여워했는가 하면, 알리가 정통적인 칼리프의 자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알라신의 동의 없이 인간의 잣대로 하는 화의 같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아부 바크르로부터 알리까지 4명의 칼리프가 모두 코레이시족 출신이며, 알리를 몰아내고 칼리프가 되려는 무야위야 역시 마찬가지로서, 그러나 이맘(Imam :칼리프의 다른 용어)이 누구이든 그가 큰 죄를 범했을 때는 이슬람교도라면 반역할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교주를 선출할 때 어떤 가문, 어떤 부족 출신이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고 진정한 모슬렘이면 인종이나 가계는 불문에 붙이고 모두 교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이후 알리는 이 하지리파의 진압에 모든 것을 빼앗겼으나, 결국은 그들이 보낸 이븐 무르잠이라는 자객(刺客)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고(661. 2) 그 때 그의 나이 60세, 이로서 정통 칼리프시대는 막을 내렸고, 우마이야조의 세습칼리프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알리와 예언자의 딸 과티마와의 사이에 두 아들, 알 핫산(al-Hasan)과 알 후사인(al-Husain)에 의해서 마호메트의 혈통이 이어졌는데, 지금도 이 혈통을 이은 사람들을 샤리프(sharifs) 혹은 사이드(said)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알리를 정통으로 보는 시아파가 나타났고,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니파와 갈라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