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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한 마리 멧새 / 문태준
소복하게 내린 첫눈 위에 찍어놓은
한 마리 멧새 발자국 첫잎 같다
발자국이 흔들린 것 보니
그자리서 깔깔 웃다 가셨다
뒤란이 궁금해 그곳까지 다녀가셨다
가늘은 발뒤꿈치를 들어 찍은
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 귀에 부었다
맑은 수액 같다
귀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니 졸졸 우신다
좁쌀 같은 소리들 귀가 시원하다
발자국을 따라가니 내 발이 아직 따뜻하다
멧새 한 마리 시골집 울에 내려와
가늘은 발목을 넞어 앉아 붉은 맨발로
마른 목욕을 즐기신다
간밤에 다년간 그분 같은데
밤새 시골집을 다 돌아보고선 능청을 떨고
빈 마루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산비 소리에 / 문태준
누가 푸른 똥을 누시나
떨어져 번지는 이끼처럼 번지는, 더 번져 몽글몽글
맺히는 똥
맺혀도 몰랑몰랑한 똥
푸른 벌레가 산자두잎 뒤 잎사귀 처마로 들어가 동글동글한 똥을 피한다
목주름 펴 처마 바깥을 기웃 거리다 잗다랗고 말랑말랑한 푸른 똥 누고
자울자울 존다
잎사귀 처마를 득득 긁는 산비 소리에
윗니 아랫니 돋아 간질간질한 산비 소리에
묶다 /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 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에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묶다
백년 / 문 태 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 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 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 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쓸쓸히 울었네
그맘때에는 / 문 태 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 태 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빈집의 약속 / 문 태 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 뿐, 마음은 늘 빈 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은 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붉은 동백 /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평상이 있는 국수집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수집에 갔다
붐비는 국수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 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일을 손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봄날 지나쳐간 산집 / 문태준
한 채의 햇살에 끌려 나는 오후의 산집으로 갔습니다
뜨락에 산도라지가 말라가고 검고 마른 탱자나무에 습하고 푸른 빛이 맴도는 집
그 산집에서
내 뜰과 울타리에도 마르고 곧 젖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햇살이 촬촬 끓는 마루에서 흰 찔레꽃처럼 웃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가는 실을 실꾸리에 감아 옮기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볼에 붉은 무덤이 쌓였다 허물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봄꽃이 지면 나무는 또 숲으로 가고
작은 무덤들 붉은 흙 위로도 들쑥이 돋아날 줄 압니다
그러나 참 오래되었지요,
저 멀리서 밀려오는 산그림자를 마중 나가본 지도.
산그림자에 장지문을 걸어 잠그는 마음의 곳집에 가본지도.
혀 / 문태준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꽃과 사랑 / 문 태 준
너럭바위 옆에 세 개의 꽃이 피어있었다
하체가 남루한 꽃이었다
아슴아슴한 햇살을 큰 꽃이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는 허름한 식당에서 젊은 아들이 밥 먹는걸 나무의
밑동 같은 눈빛으로 지켜보던 주름이 많은 아버지를 보아던 적이 있다
내 배후로 夕陽, 夕陽 / 문태준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내 맨발 흥건히 젖어들 때
툇마루에 반쯤 걸터앉은 햇빛에는 애당초 누군가 살고 있는 게다
한량처럼 열대의 늪을 건너가는 河馬와
南國으로, 남국으로 한절기를 버티려는 되새떼 그 빈사의 폭동 사이
개 같은 , 당최 이 개 같은 틈에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때
내 맨발이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가려질 때
눈에 호롱불을 들이고
바늘귀를 꿰주마, 중얼거리는 그런 오랜 족속이 있는 게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내 할머니 넋, 혹은 내가 부려온 세상의 노복들이 있는 게다
측백나무가 없다 / 문태준
측백나무 곁에 서 있었다
참새떼가 모래알같은 자잘한 소리로 측백나무에서 운다
그러나 참새떼는 측백나무 가지에만 앉지는 않는다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참새떼는 나의 한 장의 白紙에 깨알같은 울음을 쏟아놓고 감씨를 쏟아 놓고
허공 한 촉을 물고 그 긴 끈을 그 긴 탯줄을 저곳으로 저곳으로 끌고 가 버리고
끌고 가 버리고 다만 떼로 모여 울 때 허공은 여드름이 돋는 것 같고
바람에 밀밭 밀알이 찰랑 찰랑 하는 것 같고 들쥐떼가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고
그물에 갇힌 버들치들이 연거푸 물기를 털어 내는 것 같다
측백나무 곁에 있었으나 참새떼가 측백나무를 떠나자 내 감각으로부터 측백나무도 떠났다
사방에 측백나무가 없다
뻘 같은 그리움 / 문 태 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 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 문 태 준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수 없듯이
어느 저녁에 / 문태준
독의 뚜껑을
하나 하나씩 덮는
저녁은
저녁은
깊이 깊이
들어간다
나는 예닐곱1
뚜껑을
덮고
천개天蓋로 나의
바깥을 닫고
미처 돌아오지 못한 것이 있다,
발을 씻고
몇 걸음 앞서
봄마루에 앉으면
너는 내게
아주 가까이는 아니게
산마루까지만 와
길고 긴
능선으로 돌아눕는다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 문 태 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떼 / 문 태 준
송사리들이
송글송글 떼지어 헤엄치고 있다
우루루 몰려다니는데
바람이 일지도 않는다
축축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있다
그림자들은
우수수 빗방울처럼 떨어져
열 지은 기차를 닮았다가
열여덟 량 장대 열차가 되었다가
대통처럼 직선으로 내뻗었다가
등뼈가 휜 곡선이었다가
주먹밥처럼
돌 밑
한군데 모여들기도 한다
송사리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다
일상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역에서 저 역으로
봇짐장사들처럼
가난한 가족의 저녁 밥상처럼
수많은 눈알들이 몰려 다니고 있다
극빈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서리 /문태준
겨울 찬 하늘
한켜 살 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 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는 동천산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매화나무의 해산(解産) /문태준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꽃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입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문태준
1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꽃별, 무슨 섬광이
이토록 작고 맑고 슬픈가
바람은 일고 개망초꽃이 꽃의 영혼이 혜성이 돈다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잠자리가 날 때이다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거꾸로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2
오늘 다섯 살 아이에게 수두가 지나가고, 나는 생각한다, 만발하는 것에 대하여
수두처럼 지나가는 꽃에 대하여 하늘에 푸른 액정 화면에
편편하게 날아가는 여름 잠자리에 대하여 내 생각에 홍반처럼 돋다
사그라드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이다
3
그리고 나는 본다, 한 집의 굴뚝에서 너풀너풀 연기가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얼룩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을 그 얼룩을
에미가 황해도 무당이었고 남편은 함경도 어디가 고향이고 여인은 한때 소를 한때
묵뫼를 사랑했고 올여름 연기를 지독히 사랑했고
불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그 얼룩을
연기는 아주 굼뜨고, 연기는 무학자이고, 연기는 나부이고, 연기는 풀이 무성한 묵밭이고
연기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은 그 여인이고, 갈라진 흙벽의 정신이고, 미친 사람이고
4
하늘의 밭에는 개망초가 잠자리가 연기가 수두처럼 지나가고 있다
더듬더듬거리며 옮아가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병이여,
그래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덤불 / 문태준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 덤불 한 감에 푸른 잎물이 번진다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도 엉킨 내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팔에 팔을 손목에 손목을 굴곡屈曲에 굴곡을 한 획에 한 획을 가필해
나의 덤불은 육체는 부끄러움 없이 가을날까지 휘고 번진다
나의 오늘이 더 큰 참혹함을 부를 뿐이오나
새봄이 오면 나는 또 잊는다, 내 가슴 속 거대한 난필亂筆을
극빈 1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은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 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2 / 문 태 준
- 독방(獨房)
칠성여인숙에 들어섰을 때 문득, 돌아 돌아서 독방(獨房)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 칸 방에 앉아 피로처럼 피로처럼 꽃잎 지는 나를 보았다
천장과 바닥만 있는 그만한 독방에 벽처럼 앉아
무엇인가 한뼘 한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흘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고창 공용버스터미널로 미진양복점으로 저울 집으로 대농농기계수리점으로
어둑발은 내리는데
산서성의 나귀처럼 걸어온 나여,
몸이 뿌리로 줄기로 잎으로 꽃으로 척척척 밀려가다
슬로비디오처럼 뒤로 뒤로 주섬주섬 물러나고 늦추며
잎이 마르고 줄기가 마르고 뿌리가 사라지는 몸의 숙박부,
싯다르타에게 그러했듯 왕궁이면서 화장터인 한 몸
나도 오늘은 아주 식물적으로 독방이 그립다
극빈 3 / 문 태 준
아무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르렀네
귀 떨어진 밥그릇 하나 들고
빛을 걸식 하였네
풀치를 말리듯 내 옷을 말렸네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허물 같은 한나절이 열 달 같았네
뱃속의 아가처럼 귀도 눈도 새로이 열렸네
함께 오마 하는 당신에겐 저 들판을 빌려주리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미당 수상작>
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 / 문태준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
시골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집짐승이 서로 사고 팔리는 날에는
흰 개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장날 식전食前에 먹을 갈아
먹물을 흰 개 몸에 발라 큰 얼룩을 만드는 집이 어려선 있었지요
흰 개를 검은 개로 반절은 만들어 옥시글거리는 장에다 내었지요
흰 개는 배가 가렵다고 흙바닥에 기고 뒹굴고 뒷발로 옆구리의 무늬를 긁어대었겠지요
그 무늬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용케 개의 배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보고 값을 쳐 주는 약삭빠른 장사치가 있었다지만
흰 개가 가난한 식구의 밥그릇을 빼앗아간다는 오해도 하나의 무늬여서
알고도 모르는 척 속은 척 받아 넘기는 것이 무늬이었지요
개칠한 무늬는 보기만 해도 우습지만 무늬는 크게 쓸어내릴 것이 못 되었지요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살얼음 아래 같은 데 / 문태준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글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 문태준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 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네
감물 들듯 번져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가재미 / 문 태 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랭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2 / 문태준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마라,아이야,울지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노모/ 문태준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붉은 흙 물고기 / 문 태 준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 문 태 준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 문 태 준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숯검댕이 아궁이는 쾡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 손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
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첫사랑 / 문태준
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
내 광대뼈가 붉어져 볼 수 없네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
불에 구운 돌처럼
보기만해도 홧홧해지던 사람
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 밭에
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
마늘졸처럼 깡마른 내 가슴에
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
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
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네
비가 오려 할 때 / 문 태 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 문 태 준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역전 이발 / 문 태 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호두나무와의 사랑 / 문 태 준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개복숭아나무 / 문 태 준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 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태화리 도둑골 / 문 태 준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하도 맑아
상처를 잊은 듯
나무의 존재도 오롯하게
허공에 부풀어
자루/문태준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봄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家長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마치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러워요 내 몸이 무러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 온 영원을 생각하오니
오늘 봄이 다시 와 동백과 동백 진다고 우는 동박새가 한 자루요 동박새
우는 사이 흐르는 銀河와 멀리 와 흔들리는 바람이 한 자루요 바람의
지붕과 石榴꽃 같은 꿈을 꾸는 내 아이가 한 자루요 이 끊을 수 없는
것과 내가 한 자루이오니
보릿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 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오니
夏至日 - 문태준
제비집인데 제비 아닌 뭔 날 것 돌아온다
찬물 위 기름 돌 듯 매번 처마 아래 그 집 허물 생각
그을린 방구들 구름들 서쪽으로 갈아 내놓은 인부들
집터 한 귀퉁이에 엉켜 살던 푸른 풀배암이
가시 덤불 우거진 산 속으로 소낙비처럼 내쳐간다
병 깊어져 오늘 산 속으로 간 사람의 무정함
묻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초저녁녘 중얼거리는
날벌레떼거리, 저 살아 있는 무덤들!
나는 피우려던 쑥을 그만둔다
뜸부기는 별 하나씩 골짜기에 따 담아
하늘의 벌판에서 꽃들 별똥으로 지는데
하현달에 올라 낫을 갈며 나는 끊어지는 인연을 본다
지는 꽃 / 문태준
언덕길에 곱사등이들이 모가지를 빼고 앉아 있네
문득 휘몰아친다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은
등뼈를 바깥으로 탈골시키네 그들은 대갈못처럼
더욱 주저앉네, 꽃에서 한 잎의 귀가 떨어지네
이 지상에서 잊혀진 소리들이 건너 지방으로……
우리는 등을 켜고 가만히 보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을.
집착에 관하여 / 문태준
지주목에 쓸 요량으로 산에 올라 반나절 톱을 켰다
나무들이 지난 세월을 메치는 소리
쿵, 쿵 귀가 멍멍하다
지게에 쟁여진 나무들은 아직 맥박이 있다
아카시아 그 위에 난 길
나무의 숨통을 조르며 지나간 칡덩굴
너무 용쓰느라 죽는 줄, 썩어질 줄 몰랐겠지만
나무 피질에 웅숭깊은 골, 하늘로 올라갔구나
곳간 / 문태준
바람이 일지 않으면 사람들은 스스로 걸어서 결국 바람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붉은 수수들 출렁이는 벌판에서 마음을 끌어다 들어서는 곳간 ,
나는 머리가 세 개인 매를 잡아다 이곳에 가둔다
죽은 쥐들의 악취를 채는 매의 발톱을 읽고 있으면, 나는 유쾌하다
이 썩은 무구덩이 속에는 귀신들이 판을 치고 있다
휴악범 같은 아버지들의 딱딱한 혀도 한됫박 모여 있다
개밥그릇은 개밥그릇처럼 찌그러지고 그 공기에 담기면 세월도 찌그러진다
수런거리는 뒤란 / 문태준
산죽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이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오오 이런! - 문태준
나의 집에는 묵은 오리 한 마리가 있다 암컷이다
알을 많이 낳아 뒤가 청동주발 같다
항우울제를 먹고살고 자두가 익는 오늘 황혼에 눈에 늪이 괴어 있었다
눈초리로 늪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옆구리 털이 뽑히고 살이 갉혔다
그때 오리 곁으로 쥐 한 마리가 기어왔다
땅구멍을 뚫어 오리 곁으로 왔다 번들번들했다
곁말 거는 척 도리반거리다 오리 곁으로 바싹 기어왔다
更紙를 갉는 소리가 났다
조금 후 구멍에서 익사한 몸처럼 부푼 쥐와 새끼쥐가 기어나왔다
새끼쥐는 눈망울이 또랑또랑했다
一家였다
나와 오리와 세 마리 쥐가 눈이 마주쳤다
오오 이런!
벌레 詩社/문태준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 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정자 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 시사詩社 라 불러 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무봉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 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길 / 문태준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러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 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런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회고적인 / 문 태 준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봄날 쓰다.../ 문 태 준
그대 없는 물가에
얕은 데 물가에
너른너른 모래톱 흰 모래에
새들
오종종하게 논다
흘리듯 어지러이 논다
잘 놀면 노는데
염증이 없다
그대 없는 물가에 또 때(時)는 와
악기처럼
솟고 무너지는 音으로
버들 같은 새들이
푸른 냉이 / 문 태 준
칠년 된 푸른 냉이가 가늘고 긴 뿌리를 봄마당에 내놓았다
마른 둠벙의 물고기처럼 서서히 애처로운.
수탉 같은 봄햇살이 냉이를 쪼고 쫀다
찔레 넝쿨에게 / 문 태 준
찔레 넝쿨에게 오늘 바질바질한 참새때가
찔레야! 찔레야! 실눈 좀 떠다오, 한다.
나비 가듯이 / 문 태 준
나비가 꽃 따먹으러 가듯이 가고 싶은 곳
나비가 주물럭 주물럭거리며 날아가네
젖무덤처럼 물컹물컹한 당신의 고운 품
뜨락 위 한 켤레 신발 / 문태준
어두워지는 저녁에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
굵은 모가지의 뜰!
다 쓴 여인네의 분첩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한 켤레 신발이 있다
아,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
굴을 지나면서 / 문 태 준
늘 어려운 일이었다, 저문 길 소 몰고 굴을 지난다는 것은
빨갛게 눈에 불을 켜는 짐승도 막상 어둠 앞에서는 주춤거린다.
작대기 하나를 벽면에 긁으면서 굴을 지나간다.
때로 이 묵직한 어둠의 굴은 얼마나 큰 항아리인가.
입구에 머리 박고 소리지르면 벽 부딪치며 소리
소리를 키우듯이 가끔 그 소리 나의 소리 아니듯이 상처받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한 발 넓이의 이 굴에서 첨벙첨벙 개울에 빠지던 상한 무르팍 내 어릴 적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 없다.
유혹당하는 마음조차 용서하고 보살펴야 이 굴 온전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이 긴 어둠 어둠 아니다.
한 호흡 / 문 태 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짧은 낮잠 / 문 태 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 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 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개미 / 문 태 준
처음에는 까만 개미가 기어가다 골똘한 생각에 멈춰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등멱을 하러 엎드린 봉산댁
젖꼭지가 가을 끝물 서리맞은 고욤처럼 말랐다
댓돌에 보리이삭을 치며 보리타작을 하며 겉보리처럼 입이 걸던 여자
해 다 진 술판에서 한잔 걸치고 숯처럼 까매져서 돌아가던 여자
담장 너머로 나를 키워온 여자
잔뜩 허리를 구부린 봉산댁이 아슬하다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 문 태 준
세상 한 곳 한 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이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내가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 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그믐이라 불리던 그녀 / 문 태 준
옻처럼 검고 얼음처럼 차디차지만
얼굴에는 개미굴이 여럿 나 있지만
다리는 사슴보다 야위었지만
그녀의 너른 속뜰로 들어가
마음이 쉬어 가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 이상한 평온을 슬픈 그믐이라 불렀다
조모를 열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꽃 진 자리에 / 문 태 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하늘 궁전 / 문 태 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 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 태 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뻘 같은 그리움 / 문 태 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수평(水平) /문 태 준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수평(水平)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지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포도나무들 /문 태 준
오래된 포도밭에는 폐경한 여인들이 산다
지주목도 비와 바람에 삭아서 죽은 포도나무에 기댄다
녹슨 철사줄을 감아 쥔 덩굴손, 살점 다 발라낸 뼈다귀 같다 여름이 솟았다
진 자리, 나무들이 더러 죽었다
죽은 나무를 건드리자 포도 알갱이들이 송이에서 빠져나온다
알은체하니 마르고 쭈그러진 유언들이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무들은 그제야 죽음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을엔 나무란 나무가 죄다 포도나무, 늙은 생애들뿐이다
아, 24일 / 문 태 준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소천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그 오랜 시간 아스라히 물을 길러 살아가는 삼나무,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가는 우리들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거기엔 동화처럼 샘물 긷는 '산골 아이'들도
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200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흰자두꽃 / 문 태 준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의 하얀 자두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픈 나무 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하번 굵은 손벼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바깥 -문 태 준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모닥불 / 문 태 준
비질하다 되돌아본
마당 저켠 하늘
벌떼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떤
깻묵 한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이불로 돌돌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단상>----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얼굴이 푸석푸석하던, 누룩 띄운 독 같던 나무들이 봄이 되어 빛깔을 받는다.
매화와 산수유나무가 우선 그렇다. 불꽃을 받는다. 나는 지난 겨울 보고 들었다,
빈집의 마음을, 바람의 노래를, 얼음의 언어들을, 침묵의 세계를. 요즘 해금 같은
가늘은 소리가, 숨결이 나무에게서는 난다. 새순 한 촉을 땅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참혹했을까? 새순 돋는 나무에게는 회오리가 있다.
새순 돋는 나무들을 보면 나에게 중대사는 무엇인가 묻게 된다. 등짝을 뚫고 나오는 시,
아래로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처음 만난 한 줄기 샘물 같은 그런 시를
받아낸 적이 있는지 묻게 된다. 봄이 오는 산길 들길을 걸으면 그래서 내 마음은
더더욱 오갈 데 없는, 춘설 분분한 공중이다. 나는 어지러운 넝쿨이다.
서른 해 전 아버지는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봄에 볍씨를 장만했을 것이다. 자루에 담긴 싸락눈 같은 볍씨들을 물에 담근 후
이틀 사흘 기다렸을 것이다. 가라앉고 뜨는 씨앗들을 가려 아버지는 봄논에 비로소
파종을 했을 것이다. 물에 가라앉는 당찬 놈들만을 골라 한 해 농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시 짓는 일도 농사라면 농사일 터.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만나면 말이 없어진다.
내 농사는 어떤 살림인가? 남을 살리는 농사인가?
뜨거운 한 그릇 밥을 만드는 농사이기라도 한 것인가? 비참한 일이다.
시골에 가면 저녁 무렵 오리떼 때문에 마을이 흥성거린다.
포도밭이나 물가에서 낮을 보낸 오리들이 해 떨어져 우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습관의 힘으로 돌아가는, 오리떼를 보면서 시간도 오리떼처럼 밀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오리떼가 멀리 사라지는 동안 낮은 밤으로 변화한다.
흘러간다. 무상(無常)하다. 시간이 변화하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풍경을 통해, 나의 오관을 통해 시간의 육체를 보았다. 사람들은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무상하다. 어릴 때 마을 골목길을 따라 상여 나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상여가 나갈 때면 사람들은 집의 창문을 닫고 널어둔 빨래를 거두어들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상여가 산 그림자 속으로 잠겨들 때 나는 시간의 육체를 보았다.
서른 해 전쯤 아버지는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의 묘혈을 파는 일로 일당을 벌어온 아버지는 군불을 지피며 상갓집에서 얻어온
마른 떡을 구워주었다. 아버지는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 긴 침묵을
나는 또 시간의 육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형제를
내가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하관하는 일이 있다. 숙부를 하관할 때였다.
엉겁결에 숙부의 종아리를 만지게 되었다. 물렁물렁한 종아리였다.
그때도 나는 시간의 육체를 보았다. 작년에 중국의 한 시골을 여행 할 기회가 있었다.
어린 당나귀가 짐 실린 수레를 끌고 있었다. 어둑어둑할 때였다.
수염이 길고 몸이 호리호리한 촌부가 당나귀를 끌고 있었다.
흙길에 바퀴소리가 덜컹거렸으나 적적했다. 그때도 길 위로 밀려가는
시간의 육체를 보았다. 무상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인연'이라는 말에는 훈기가 있다. 이 말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작용'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미래의 내가 '현재의 작용'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내 몸과 마음이 '다른 이의 작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은
'어깨를 겯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러므로 상관하여 있다는 뜻이요,
지극하고도 완전하게 평등하다는 말이다. 상즉상입하는 생명세계라는 뜻이다.
지배도 없으며 고문도 없으며 조금의 가혹함도 없다. 나는 어머니에 대해
빚진 인연이 많다. 아마도 그때 어머니는 지금의 내 아내보다 더 어렸을 것이다.
내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내 눈동자를
핥아 주던 일을 가끔 떠올린다. 자식들이 보챌 때 젖을 물리던, 빈 젖을 물리던 일을
가끔 떠올린다. '인연'이라는 말은 자꾸 곱씹으면 뒷맛이 떫고 혀가 아리다.
그러나 ‘인연’과 ‘관계’라는 말을 나는 내 시의 밑돌로 괸다.
시는 옆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는 여울과 같은 것이다.
시는 흐르되 흐르는 소리를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시가 그처럼 그러저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시는 반죽을 처대서
마음의 그림자인 형상을 빚는 것이다. 반죽을 너무 오래 주물럭 주물럭하면
시는 도망가고 만다. 반죽이 형상을 빚기도 전에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죽으로 형상을 일단 빚어놓으면 그걸 다시 부수어 다른 형상으로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다. 시는 만들어놓으면 끝내 서글픈 것을 보여준다.
그늘에서 말라가면서 형상은 뒤틀리면서 균열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은 열렬하면서도
슬픈 무엇"이라고 했다지만, 그래서 시를 쓰는 밤에는 목석 같은 사람이어도
철철 우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내력을 들여다보면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시골 마을에는 북한이 고향이라는 칠순의 노인이 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고향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본인의 전답이 없이 남의 논밭 일에
품을 팔아 평생을 살아왔다. 그의 봄날에는, 그의 지게에는 쟁기가 실려 있다.
시골 마을에는 미친 사람이 더러 있다. 지난 설날 마을 회관방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엉엉 울던 두 사십대 중년의 사내들이 있었다. 하나는 미장이이고,
하나는 캄벨 포도 농사를 짓는다. 초등학교 동기들은 하나는 시골 이발사이고,
하나는 햄 공장 직원이며, 하나는 구조조정 당하는 비정규직이고, 하나는 덤프트럭을 몰고,
하나는 가구점을 하고, 하나는 전신주를 세우고, 하나는 이장이고,
나는 시를 쓴다. 그들은 내가 제일로 폼난다고 술 한잔 받으라 한다.
시골 마을에는 낮 동안 제트기가 멀리 날고, 밤 동안 오가는 사람은 없고 개는 짖는다.
아버지는 병을 얻어 눈이 멀고, 꽃이 피는 봄산에는 노루가 운다.
모든 것은 근경(近境)이 슬프다.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절에서 밥을 먹을 때 스님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발우'라 한다.
발우는 '적당한 양을 담는 밥그릇'이란 뜻이다. 발우에 밥을 받들 때 스님들은 노래한다.
아니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를 단속한다. "이 공양을 응당히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다만 이 몸이 말라 병들지 않도록 약으로 삼아 이 공양을 받습니다"라고 단속한다.
시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밥'이라면 지극하게 받을 일이다.
여기 하나의 빈 발우가 내 앞에 있다.
70년 개띠 시인 문태준이 보내는 편지
개는 남사당패처럼 신나게 쏘다녀야 제격이다.
개집이라 할 만한 것도 차려주지 않는 게 좋다. 낮에는 섬돌에 턱을 괴고,
밤에는 대청마루 밑에서 대충 자야 제격이다. 본디 개들은 암탉을 쫓아 다니거나
개 중에 거센 놈은 암탉의 목덜미를 콱 물거나 해야 나른한 대낮이 시끌시끌 생기발랄해진다
그러다 돌도 맞고 해야 한다. 줄행랑을 치는 족제비들을 뒤따라 저 산 밑까지 뛰어 다녀야
바야흐로 폼이 난다.
70년생 개띠인 나는 개와 선연(善緣)이 아니다.
시골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엄동설한에 대부분 얼어 죽었다. 46년 생 개띠인 어머니가
개를 묶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이유를 찾았다. 하릴없이 빈 개밥그릇이
나 지키고, 배를 뒤집으며 게으르게 구르고, 말뚝과 목에 달린 개줄 사이의
그 무료한 거리를 뱅뱅 돌다 끝내 동사했다. 땡볕을 지고 앉아 몸에 파리가 꾀는 여름날의
개꼴도 볼썽사납다. 개는 벌판보다 멀리 멀리 자꾸 나아가는 놈이어야 한다.
어릴 때 겨울철이면 소도둑이 극성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역시 묶여 살던 개들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소도둑들이 오징어 껍질에 극약을 묻힌 줄도 모르고 선뜻선뜻 냅다
받아 먹다 그날밤으로 저승행이었다. 한 점 살점도 아니고 고작 비릿한 껍질의 냄새에
홀릴 정도이니 그런 미혹됨도 드물 것이다.
게다가 묶인 개들은 겁이 많기가 유난스럽다. 개 한마리가 짖으면 온동네 개들이
다 짖는다. 그들의 허박하고도 겁많은 동류의식은 차마 말해 무엇하랴. 묶여 사는
개들은 남들이 낮잡아 일러도 둘러댈 말이 없다.
‘58년 개띠’라는 말은 누구나 안다. 그들 뒤에는 ‘100만명의 신생아’와
‘국민교육헌장’과 ‘조개탄 난로’와 ‘뺑뺑이’와 ‘넥타이부대의 선봉’과 ‘사오정’이
라는 수식이 따라 붙는다. 형편을 들어보면 측은하고 백척간두에 선 사람들 같다.
역사가 복기(複棋)가 아니듯 70년생 개띠는 좀 다르다. 70년생 개띠들은 두발과 교복의
자율화 세대이고, 불완전하지만 87년 체제의 수혜자들이고, 영상세대이다. 상상력은
도발적인 모드로 바뀌었다. 하여 신세대라는 수식어를 뒤꽁무니에 달았다.
70년생 개띠들은 적어도 더럭더럭 떼를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울혈도 없다.
나는 58년 개띠들을 흠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의 폭포 같은 에너지를 응원한다.
소위 ‘점잖은 속배(俗輩)’이길 거부해 온 그들의 정신을 존중한다.
그러나, 58년 개띠들이 그들의 수난시대 회고담을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미덥지 못하다.
그런 것도 가치가 있겠지만, 우리 개띠들에게 급한 일은 우리 사회가 은연중에
가압류한 야성을 스스로 되돌려 받는 일이다.
예전에 시골에서는 흰 개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흰 개는 재수가 없는 개라고 시장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흰 개를 장날에 내다 팔 때는 숯이나 재를 칠해서 검정 무늬의
개로 만드는 해프닝이 있었다. 개에 대한 잘못된 무늬 의식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작은 행복에 꼬리치고 언제나 순종하는 것이 개라는 생각 또한 앞서의 무늬 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개를 묶어 두지 말자. 개는 굳은살의 발바닥이 재산이다.
개는 막무가내이거나 제멋대로 용기백배해도 좋다. 닭도 잡고 범도 잡는 게 개이다.
오늘의 운세를 펼치니 70년 개띠는 “학이 닭의 무리 가운데 서 있다”한다. 상괘이다.
그러나 닭의 무리 가운데 성깔이 칼칼한 개 한마리를 풀어 놓아야 더욱 상괘이다.
벌써 대낮의 세상이 시끌시끌하지 않은가. 개는 부지런히 쫓고 되돌아오지 않을 듯 멀리
멀리 쏘다녀야 일품이다. 쏘다니다 돌에 맞아 고꾸라지면 또 어떤가. 냉큼냉큼 엎드리거나,
고작 오징어 껍질에 홀려 선뜻선뜻 받아먹다 캄캄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겠는가.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첫댓글 문태준시인~대단한 분이네요~~
사람을 가재미로 표현 하구~
가재미 1,2 다~표현력이 뛰어난 시네요
공감해요
가재미~~가슴 아픈 시~~
대회용시로도 많이 낭송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