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1번째 시간으로서 “세 가지 잃어버린 죄” 三つの失った罪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조금 길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잘못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먼저 이 세 가지 잘못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리고 다음으로 그 잘못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9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만, 우선 10절부터 18절까지를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3장 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10절부터 18절까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는 3장 10절~12절, 두 번째는 13절~15절, 그리고 세 번째는 16절~18절입니다.
먼저 첫 번째인 3장 10절~12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12절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0.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11.悟る者はいない。神を求める者はいない。
12.すべての者が離れて行き、だれもかれも無用の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だれ一人いない。」
여기서 우선 12절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무익하다>(無用の者となった) 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연령대에 있어서 차이는 있습니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유익한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까. 아니면 무익한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까.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올 만큼 큰 상을 받았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큰 죄를 지은
것도 없이 결혼해서 자식들 낳고 이만쯤 길러놓고 그랬으면 된 거 아니야? 돈도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집과 차도 있고,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벌어놓았다. 이 정도면 유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 그 정도면 훌륭하지요. 부끄럽지 않은 아들 딸,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내,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와 어머니. 예, 그 정도로면
충분히 유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로마서 3장 12절에 나온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의 말씀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인생, 그와 같은 부끄럽지 않은 인생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 인생입니다. 그러나 12절에 등장하는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 말씀일까요? 아니요.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인생,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무난하고 그럭저럭 유익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지으시고 우리 육체를 지으시고 지금 오늘 이 순간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기대 없이 우리를 지으시고 인도해주셨을까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대를 하셨습니다. 무슨 기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유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대를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생, 우리가 큰 죄 없이 살면서,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고 기르고, 재산도 어느 정도 모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유익한 것인가요? 아니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11절에 등장하는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내 시각으로 고정을 시켜버리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밖에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의인>이라고 하는 말씀, 그렇다면 과연 의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쉽게 말해서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내게 아무리 유익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은 것이요,
하나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무익하다고 생각되면 무익하다고 판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인인 것입니다. 모든 가치 기준, 모든
판단 기준을 내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인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인이 얼마나 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언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足を悪から遠ざけよ。
우리가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큰
일이지요.
그렇다면 몇 번 정도 떨어져도 괜찮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자동차로 어디까지 여행을 갑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몇 번까지라면 다리에서 떨어져도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그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고속도로에서 몇 번까지라면 오른쪽이나 왼쪽 벽에 갖다 박아도 되겠습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아니요. 말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다리를 건너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 한 번이라도 떨어지게 되면 큰 일이
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 한 번이라도 갖다 박으면 큰 일이 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운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만 봐서는
안 되지요. 도로표지판도 잘 봐야 합니다. 규정 속도가 몇 킬로인지, 앞에 커브가 있는지 없는지, 아니면 또 공사 중인지 사고가
났는지를 전광판으로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려요? 내 자동차의 속도계도 안 보고,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달려요? 앞에
커브가 안 보이니까, 공사 중이 아닌 것 같으니까, 사고가 안 난 것 같으니까 그냥 내 멋대로 달려요? 이렇게 된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보아야 하는 속도계나 도로 표지판 같은 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유일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치게 되면 이는 곧 사망, 우리의 영적인
죽음으로 이어지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대를 가지고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주셨는데, 나는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내 시각만 고집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게 되어서 결국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 무익한 인생을 보내게 되는,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잃었기 때문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셨는지를
망각하고 내 생각만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살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오늘 본문 중에서 첫 번째 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인 3장 13절~15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3절~15절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3.「彼らの喉は開いた墓。彼らはその舌で欺く。」「彼らの唇の下にはまむしの毒がある。」
14.「彼らの口は、呪いと苦みに満ちている。」
15.「彼らの足は血を流すのに速く、
여기서는 우선 단어부터 정리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3절에서는 <무덤, 속임, 독사의 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4절에서는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악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역본에 보면 독설이라고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피 흘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13절부터 봅니다. 우선 무덤과 속임, 독사의 독……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하나로 연결시켜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우선,
무덤은 무엇입니까. 이는 죽은 사람을 안치하는 곳입니다만, 그렇다면 왜 그 곳에 안치하는가 하면, 알기 쉽게 생각한다면, 무덤은
사람을 썩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무덤, 썩는 곳, 죽음의 장소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덤, 죽음의 장소로 어떻게 끌어들이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을 속이는 방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지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말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속여가지고는 그 죽음의 장소 무덤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독이 있습니다. 독이 몸 우리의 몸 안에 들어가면 우리 몸이 말을 안 듣게
되지요. 눈이 어두워지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독이 무엇이냐 하면 대표적인 독이 바로 뇌물과 음행입니다.
뇌물은 성경에서 엄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賄賂を受け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は聡明な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
신명기 16장 19절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あなたはさばきを曲げてはならない。人を偏って見てはならない。賄賂を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
は知恵のある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からである。
그리고 음행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만 특히 인상 깊은 곳은 잠언입니다. 조금 길지만 오늘은 시간 관계상 잠언 7장 21절부터 23절까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7장 21절~23절
“21.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23.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彼女は心動かすことばで彼を誘惑し、滑らかな唇で彼をいざなう。
彼はただちに、彼女の後について行く。牛が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ように、足かせが愚か者を懲らしめているかのように。
最後は矢が彼の肝を射抜く。それは、自分のいのちがかかっているのを知らずに、鳥が罠に飛び込むようなものだ。
이 속여서 끌어들이는 유혹에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소가 죽으러 가는 것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 곳이 어디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을 썩게 만드는 곳, 무덤인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저주와 악독, 즉 독설(呪いと苦み)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저주하고 사람에게 독설을 하게 된다면, 이는 입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는 알기 쉽겠지요.
다음 15절에 등장하는 <피 흘림>입니다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피를 흘린다고 하면 이는 거룩한 희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나오는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와 같은 뜻이 아니라, 이 또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 1장 16절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彼らの足は悪に走り、人の血を流すのに速いからだ。
잠언 12장 6절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悪しき者のことばは血に飢え、心の直ぐな人の口は自分を救い出す。
잠언 29장 10절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血に飢えた者たちは誠実な人を憎み、心の直ぐな人のいのちを狙う。
이와 같이 본다면 로마서 3장 13절~15절은 상대방을 속여서 죽음의 무덤으로 끌어들이고 저주와 독설로 상대방을 괴롭히고, 이제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물리적으로도 상대방을 해롭게 하는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오늘의 두 번째
죄인,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입니다.
지금까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보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언급된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된 죄는 어떤 죄라고 생각되십니까.
세 번째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16절~18절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자,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된 죄는 어떤 죄라고 생각되십니까.
여기서 힌트를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25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もう一度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金持ちが神の国に入るよりは、らくだが針の穴を通るほうが易しいのです。」
자, 이게 힌트입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3장 16절~18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3장 16절~18절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이를 정리해 보면, 어떤 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은 파멸과 고생이 있다고 합니다. 평강을 알지 못하는 길이에요. 그 길을 가는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길, 저는 제 생각만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이 시점에서 다시 문제를 한 번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소부터 성경을 잘 읽고 계신 분들이라면 쉽게 알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자세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 구절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
主は自ら助くる者を助く
이 구절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1번 출애굽기, 2번 신명기, 3번 잠언, 4번 없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음 말씀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여호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
主は自ら助くる者を助く
1번 출애굽기, 2번 신명기, 3번 잠언, 4번 없다.
예, 정답은 이런 내용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あなたの神、主を愛し、御声
に聞き従い、主にすがるためである。まことにこの方こそあなたのいのちであり、あなたの日々は長く続く。あなたは、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土地の上に住むことになる。
시편 115편 9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일단 너희들이 노력을 한 다음에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장 알기 쉬운 문제가 바로 돈 문제죠.
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000만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요? 예, 돈이야 많은데
1000만원이 문제인가요? 돈으로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1억원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
중에서 1억원을 내고 해결합니다. 10억원? 100억원? 그래도 부자이니까 문제가 없어요. 내 돈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내 힘으로,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1억이요? 10억이요? 아니요. 돈 100만원, 돈 10만원도 없는 분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머니에 만원도 없는데 어떻게 100만원 1000만원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돈 없는 사람은 비극이지요. 자기 힘으로 할 수가 없잖아요. 반면에 돈 많은 사람은 참 행복해 보입니다. 돈이 얼마가
필요하든 아무런 걱정 없이 척척 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에요.
그러나 이는 사람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눈을 돌려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보다도,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이나 재산이 언제까지나 자기한테 있나요?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문제가 돈이나 재산으로 해결되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자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해결했습니다. 이러면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계속해서 닥쳐옵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세 번째 본문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3장 16절~18절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6.彼ら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
17.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
18.「彼らの目の前には、神に対する恐れがない。」”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이 안 된 사람은 자기 힘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기 노력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입니다. 고생의 길입니다. 평강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 힘과 능력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려움 앞에서 주저앉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넉넉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무슨 돈 문제 같은 것이 생기면 평소부터 아예 자기 힘을 의지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꿈에도 자기 노력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한테 힘이나 능력이 있어야 의지하든지 말든지 하지, 자기한테 힘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왜 그런 쓸데 없는
노력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평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훈련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허, 지금까지 내 힘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됐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능히 해결해주실 거야! 하고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主よ、偉大さ、力
、輝き、栄光、威厳は、あなたのものです。天にあるものも地にあるものもすべて。主よ、王国もあなたのものです。あなた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かしらとしてあがめられるべき方です。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속해 있습니다. 모든 힘과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힘으로 해 봤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죄,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힘과 노력만을 의지하려고 하는 오늘 본문 세 번째의 죄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오늘 세 가지 죄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죄
둘째는, 이웃 사랑을 잃어버린 죄
셋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죄
이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겠지요. 이와 같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꾸짖으실 것이라는
것은 우리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비로소 9절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9.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私たちにすぐれているところはあるのでしょうか。全くありません。私たちがすでに指摘したように、ユダヤ人もギリシア人も、すべての人が罪の下にあ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교회에 몇 년 다녀보면 우리가 해야 되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정도는 구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잘 지키고 있나요? 그리고 이를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사람들을 보고 믿음이 없다고 비판이나 비난을
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다가오면 정말 평소에는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을 해보아도,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도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우리가 누구를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누구도 비판할 수가 없어요.
알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한 믿음을 가진, 정말 연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죄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 두
번째로 나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가 죄 아래에 있고, 어차피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잘난 것이 있어야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지,
내가 잘나지도 내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누구를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회복함으로 인해서, 이 세상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이기고 또 이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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