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패
(원경란)
소속되어 있던 직장에서 오래 근무한 일이 있거나
봉사 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한 이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주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반적인 일을 가정에서도 부모나 남편 또는 자식들에게 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애쓴 남편에게 감사패를 만들기로
했다. 몇 번 받아 본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막상 내가 주는 입장이 되고 보니 받을 때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찬 기분이 되었다. 며칠 동안 문구(文句)를 작성하고 패의 상단에 사진도 함께 넣었다. 물론 받는 당사자에게는
전달하는 순간까지 비밀로 하느라 약간의 고초가 따르기도 했다. 남편의 생일을 위해 가족이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던 날 가방 속에 몰래 챙겨 갔다. 그곳에서 저녁 파티를 하는 날 아무도 모르고 있던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감사패를 읽어 가는 중 남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감격하는 눈치였다. 古稀 七旬을 맞은 당신에게 당신의 나이가 칠십이라네요. 문득 세월의 흐름에 깜짝 놀랐습니다. 백년해로의 약속이 얼마 전 같기만 한데,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네요. 돌아보면 작고 큰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큰 바위처럼 버팀목이 되어, 가족을 지켜준 당신이 많이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살아올 수 있어
더더욱 감사합니다. 더 살아야 할 많은 날도 건강하기를 원하면서 70회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 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었기에 이 감사패를 전합니다.
— 당신의 아내가
돌이켜 보면 정말 긴 시간이 흘렀다. 패기만만했던 젊은 시절 친구의 결혼식에서 서로를 처음 알게 되어 결혼까지, 남편에게는 “쳐다봐도 아까운 김 서방”이라는 극진한 장모의 사랑이, 내게는 “열을 주어도 안 바꾼다.”는
시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는 큰 걱정없이 살던 시절이 있었 다. 외아들의 며느리가 되어 첫아들을 낳았을
때 어른들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동네방네 3일 동안 술잔치를 벌이셨다고 한다.
아이 둘이 유치원에 가기 전 집을 샀다고 했더니
아끼시던 황소를 팔아 돈뭉치를 들고 달려오셨던 어른들. 그 후 지방에서 서울행, 월급쟁이 생활에서 정직하고 성실했던 남편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때 사업에 뛰어들어 밤낮없이 열심히 노력했다. 살림만 하던 나도 같이 사업에 뛰어들어 정말 열심히 사업체를 키웠다. 남편의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우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남편이 채워주면서 회사를 키워 갔다. 시작은 작았지만 제법 규모가 커지면서 70여 명의 사원들이 한가족이 되어 서로 열심히 노력하여 함께 잘 살아
보자는 사훈을 걸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나 신은 우리 편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IMF’라는 무기 없는 전쟁이 닥친 것이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마치 쓰나미를 만난 듯 모든 중소기업은 거리로 나서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듯 땅이 꺼지듯 희망은 없었다. 희망이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내 마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남편의 사랑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늘 말이 없고 침착한 남편은 가족의 중심에서
큰 버팀목처럼 힘이 되었다. 고생은 되더라도 마음까지 약해지면 안된다면서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멀리는 미국으로 또는 다시 한국으로, 다시 살아 보려
애쓰고 다녔지만 옛날의 우리는 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병든 사람도 많은데 우린 건강하고 가족이
함께할 수 있으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태평양을 건너온 지 20여 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돌이켜 보면 꿈만 같다. 많은 것 잃고 가진 것 없어도 건강한 가족이 있어 우린 부자 라고 나름 어깨를 펴 보기도 한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지치고 힘들어 할 때 힘이
되어 주는 남편이 있어 고맙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남편의 머리가 백발이 된 지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몇 마디의 말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칠순을 맞은 날을 기념하여
이에 감사패를 전하고자 한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 팔순도 맞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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