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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소망이신 예수님 요 5: 1-9
예수님께서 오늘 서울에 오신다면 어디부터 방문하실까요? 장엄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찾으실가요?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퍼지는 곳일가요? 감동적인 설교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교회일가요?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시급히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명절이라함은 유월절이나 오순절, 장막절을 가리킵니다. 그 중 어느 명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명절은 예루살렘 성 특히 성전을 온 통 들뜨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오늘날 대형교회 예배 시간의 법석과 소란스러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은 물론,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명절을 기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군중들이 몰려들었을 것이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절기행사를 행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는 소리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이스람교 성지 순례자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해마다 모일 때의 혼란함을 상상하면 짐작이 될 것입니다.
당시 헤롯성전은 장엄하고 화려한 당대 최상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모여온 성도들은 너도 나도 성전을 찾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최우선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은 고통과 한숨과 외로움과 상처와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혁기 마른 자들이 누워”(요 5: 2-3)라는 기록은 장애인들 가운데도 중증환자들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이들은 그 부모의 죄든지 또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이런 저주에 빠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저주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자들이요 오직 낫고자 하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명절이 돌아와도 성전에 나아가 경배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인생의 의미, 목적, 그리고 가치를 상실한 자들이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성전에 모여서 감격스러운 예배와 기쁨과 만남과 교제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이 곳 베데스다는 적막함과 쓸쓸함, 한숨과 고통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실로 밑바닥 인생들의 거처일 뿐입니다. 이들을 찾아주신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성전, 행복이 넘치는 축제의 장소,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람들, 기쁨으로 가득한 사람들 보다도 베데스다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시는 것보다 베데스다의 저주 받은 사람들을 찾아 생명으로 넘치게 하시고 새 희망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 천한 곳, 죄악과 질병과 불구와 가난과 눌림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저주와 한숨과 불신과 고통으로 가득한 고난의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38년 된 병자 앞에 서신 예수님
예수님은 베데스다에서도 가장 고통으로 찌든 사람 앞에 서셨습니다. 38년간을 중풍병으로 시달린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그 몰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가 20살에 이 병에 걸렸다면 그 나이가 58세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생각한 다면 이 사람은 노인일 것입니다. 그 부모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부모 말고 그 누가 그를 돌보아주고 사랑하겠습니까? 버림받은 사람, 아무도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직 절망 뿐인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 앞에 서셨습니다. 그에게 말을 거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는냐?”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들은 이 중풍병자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가요? 아틀란타에 소재한 그레이스 감리교회 존 알렌 목사는 38년 동안 베데스다 못의 물이 몇 번이나 끓어올랐을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아마도 그 물이 간헐천이어서 가끔 끓어오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못이 끓어오를 때에 먼저 내려가려고 행각 다섯 행각에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혹시 누가 그 못에 돌을 던진다거나 물장난을 쳤을지라도 잘못 들은 어떤 한 사람이 물이 끓어오른다고 한마디 하면 다른 모든 사람이 덩달아 부화뇌동하여 못을 향하여 달려드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때마다 38년된 병자는 “내가 먼저!”하면서 몸을 굴리고 부딫치고 밟히고 밀치는 소동 속에서 실패하기를 38년 동안 계속해왔을 것입니다.
알렌 목사는 이런 소동이 5천 번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5천 번 시도하고 5천번 실패한 사람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꿈과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실패할 때마다 찾아오는 실망감, 허무감, 자괴감, 등이 그를 상처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처의 사람, 절망의 사람, 무능의 사람, 허무와 고독의 사람 앞에 오셨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를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 12).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십니다.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예수님은 병든 자, 마음이 상한 자를 찾으십니다. 우는 자, 마음이 슬픈 자를 찾으십니다. 실패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좌절감에 절망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을 만나주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고아
한 사람이 고아원을 찾아와 “이 고아원에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고아가 있으면 한 사람 소개해주세요”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고아원 원장은 ‘머시 굿 페이스’를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열 살로 얼굴도 심히 못 생기고 등에는 보기 흉한 혹을 가진 여자 아이였습니다. 그 사람은 머시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그녀를 자기 딸로 삼아 길렀습니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어느 날 아이오와주의 고아원 담당 국장은 자기에게 보낸 직원의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이 고아원은 참으로 훌륭한 가정입니다. 시설도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고, 고아원 여자 감독은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특별한 돌봄을 받고 있고 여 감독의 사랑의 결과를 어린이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녁을 마치고 피아노 주위에 둘러서서 찬송을 함께 부르는 것을 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 감독의 음성은 사랑의 천사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몹시 추악했고 등에는 징그러운 혹까지 달려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머시 굿 페이스였습니다”
한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이 얼굴이 추악해 보이고 등에 보기 싫은 큰 혹이 달린 머시를 자기의 딸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여자 아이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밖으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머시 속에도 엄청남 보물을 숨겨두고 계셨습니다. 그 보물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무덤에 묻힐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이름 없는 믿음의 사람이 그녀에게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때에 그 사랑은 마치 불쏘시게 같이 머시의 심령 속에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은 머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캐어내는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그에게 사랑의 불을 전달 받은 머시도 이제는 보잘 것 없고 천하게 보이는 고아들 속에 숨겨진 사랑의 보화를 캐어내는 하나님의 천사가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쓸모없고 능력이 없어 보이는 한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를 다시 하나님의 천사로 삼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즐거이 희생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주신 후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유대법은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외에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안식일 규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일은 안식일 율법을 범하는 것이요, 동시에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가는 것 또한 일해서는 안된다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는 것이 그들의 율법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출 31:14)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 16)
예수님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입게될 대적들의 분노와 핍박을 예상하셨을 것입니다. 그 일이 십자가로 이어지는 가시밭 길인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피하여 그 병자를 고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은 그 무서운 결과를 분명히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그 환자를 고치셨을가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관심은 고난 당하는 사람의 구원을 우선하신다는 것입니다. 38년 동안을 저주의 삶을 살아온 그 사람을 보면서 하루라도 더 그 고통을 가지고 사는 것을 볼 수 없으셨습니다. 병자를 참으로 사랑하시기에 환자의 고통을 너무 크고 절실하게 보신 것입니다. 참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너무 큰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당하는 그 병자에게 치료와 기쁨,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을 보면서도 법 때문에 그들을 버려둔다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막 3: 3-6) 예수님은 인간 회복을 최우선 가치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들을 찾아와 진정한 목자가 되시고자 하시며 그 양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다 풍성히 얻게 하려’고 하십니다(요 10: 10) 그러므로 명절에도 감사와 찬송을 부를 수 없는 환자, 실패와 좌절 속에서 고난의 생을 살아온 그 환자를 고치시는데는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어떤 것보다 중시하고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독생자의 생명까지도 바쳐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그 일 가운데서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고 계시며 골고다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환자 치료를 통해서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오직 환자를 위한 사랑 뿐 자신의 희생과 감내해야 될 무서운 시련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본, 희생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온전한 희생이 따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에만 아니라 베데스다 못가에도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인간과 소통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틴 루터 킨 목사의 간증
그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구속하려고 하는 대상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뒤 따라갔습니다. 다음은 그의 간증입니다.
“내 생애의 초기 24년은 성취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근본적인 문제도 무거운 짐도 없었습니다. 나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내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고등학교, 대학, 신학교,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몽고메리에서 버스 승차거부 운동에 앞장서기 전 까지는 인생의 시련에 실제로 직면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항 운동의 책임을 떠맡자마자 우리 집에는 협박 전화와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격하기 잘하는 몇몇 사람들이 하는 짓이며 우리가 맞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면 그들도 풀이 죽으리라고 간단하게 넘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서 그 많은 협박들이 심각한 성격을 띤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머뭇거리게 되었고 점점 두려워졌습니다.
버스 승차 거부운동이 특히 고조에 달했던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나 역시 막 잠이 들려고 하는 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수화기를 들자 성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어라 검둥아,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겠다. 다음 주가 되기 전에 네가 몽고메리에 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테다.” 나는 전화를 끊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두려움은 커질 대로 커져 포화상태가 되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그러다 부엌에 가서 커피를 끊였습니다. 나는 포기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비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극도로 피곤해진 상태에서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나의 문제를 하나님께로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부엌식탁에 엎드려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내가 그 날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기도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지금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렵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앞장 서서 싸워주기를 기대하는데, 만일 제가 힘도 용기도 없이 그들 앞에 선다면, 그들 또한 비틀거릴 것입니다. 저는 힘이 다 빠졌습니다. 제겐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젠 도저히 혼자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내부로부터 확신에 찬 조용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의를 옹호하라. 진리를 옹호하라. 하나님은 영원히 너의 편에 계실 것이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불신감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미 무슨 일이든지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외적인 상황은 여전히 똑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내적 평정을 주셨습니다.
3일 후에 우리 집은 폭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 폭파의 소식을 침착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내게 새로운 힘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의 폭풍우와 같은 문제들에 대처할 내적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두 가지만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 기쁘게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이 길을 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신음하며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때 나를 찾아와 내 마음의 소리에 응답하시며 구원의 손을 펴시는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예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시선을 돌이켜 예수님을 쳐다보기만 하십시오. 그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