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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2주 전 새벽 기도회 본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벽 기도 때에 하나님의 선포하심에 좀 감동이 있어요. 좀 웃기긴 하죠. 자기가 말씀 전하고 자기가 은혜받고 웃기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이게 거짓이 아니니까 오늘 말씀도 한 2주 전에 하나님이 전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히스기야가 남쪽 유다의 왕일 때 북쪽 이스라엘의 왕은 호세아였습니다. 1절에 보면 명확하게 누가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지를 잘 이렇게 기록해 놨어요. 1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3년에 유다왕 아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1절은 되게 의도해서 이렇게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남쪽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다, 북쪽 이스라엘의 왕은 호세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해 놓은 구절처럼 보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차이가 두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놨기 때문인 거죠. 남쪽의 히스기야가 왕인 것이 북쪽의 호세아가 왕인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놓습니다. 일종의 복선이에요. 남쪽 유다의 왕이 히스기야인 것과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호세아인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라놨다. 수준의 차이를 만들고 질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1절을 구분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남쪽 유다의 왕인 히스기야는 유다의 4대 선왕에 속합니다. 히스기야가 첫 번째고, 요시아 아사, 그리고 여호사밧 이렇게 4명이 남쪽 유다에서 아주 착한 그리고 훌륭한 왕으로 꼽혀집니다.
반면에 북쪽 이스라엘 왕인 호세아는 다른 북쪽 이스라엘 왕보다는 조금 나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운명을 북쪽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역량이거나 신앙이거나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호세아가 통치하는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게 되고 반면에 남쪽 유가 유다를 다스리는 히스기야에 의해서 유다는 종교적인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의 차이가 만든 결과인 거죠. 누가 리더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사람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듭니다.
할렐루야 어떤 사람이 리더인지 우리는 목장의 리더를 가장이라 그러죠. 어떤 사람이 가장인지 어떤 사람이 교사인지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4절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4절 시작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양함으로 그것을 부수고 너 수단이라 일컬었더라.
북쪽 이스라엘의 가장 골칫거리는 베드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 우상이었어요. 반면에 남쪽 유다의 가장 골칫거리는 산당이었어요. 이 산당은 유다의 왕들이 어찌하지를 못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뿌리 깊게 유다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왕들이 유다의 등장했지만 이 단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산당도 유다의 오랜 골칫거리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세의 노뱀도 유다의 오랜 골칫거리였어요. 왜냐하면 이때까지도 유다 백성들이 모세의 놋뱀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골칫거리를 해결한 사람이 히스기야예요. 이전에 그 어떤 왕도 해결하지 못했던 산당의 문제와 모세의 노뱀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히스야서 히스기야였어요.
5절 말씀 같이 한번 봅니다. 시작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5절에 의하면 히스기야는 유다의 4명의 훌륭한 왕 중에도 최고였어요. 왜냐하면 그의 전후에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시아 왕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구가 있어요. 그러나 전체적인 역사를 평가하는 이들은 히스기야를 훨씬 더 앞에 둡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스기야를 솔로몬보다 더 낫게 여기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스기야를 제2의 다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히스기야의 삶이 동일한 적인 앗수르 앞에 그래서 유다를 북 이스라엘과는 다른 운명을 맞게 한 거예요.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지금 앗수르가 동시에 북쪽 이스라엘도 쳐들어왔고 남쪽 유다도 쳐들어왔어요.
근데 북쪽 이스라엘은 이 앗수르에서 멸망을 당하고 남쪽 유다는 앗수르를 물리칩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의 삶이 이렇기 때문인 거예요. 다른 왕들보다 차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유다는 번성을 누렸고, 반대로 호세아가 다스리던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은 이제 멸망하게 됩니다.
그럼 히스기야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6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시작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았어요. 연합되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삶을 히스기야가 살았던 거예요.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친 계명도 지켰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또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시대 일을 다스렸지만 통치했지만 후세와 히스기야는 완전 다른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호세아는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게 되고 히스기야 나라가 부응하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삶이 유다를 이스라엘과 다른 운명을 맡게 한 거예요. 히스기야가 이전 왕들과 다른 삶을 살기 때문에 그가 섬겼던 유다가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결과들을 맞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신앙이 다른 삶을 경험하게 하고요. 다른 신앙이 다른 운명을 경험하게 하고요. 다른 삶이 다른 위로를 경험하게 하고 다른 삶이 다른 능력을 갖게 합니다.
첫 번째로 다른 삶이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히스기야의 다른 삶이 유다의 운명을 북쪽 이스라엘과는 운명과는 완전히 다르게 했습니다. 같은 나라가 쳐들어왔지만 같은 왕이 쳐들어왔지만 남쪽 유다는 앗수르와 싸워서 이기고 반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줘서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이제 역사에서 사라지게 돼요. 그러니까 누가 왕이었냐 누가 통치했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달라진 거죠. 나의 운명이 달라졌던 것은 백성의 운명도 달라졌 다는 거예요.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유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 반면에 호세아가 다스리는 북적 이스라엘은 나라가 이제 망하게 되고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히스가의 삶에 오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 이스라엘 왕이었던 호세아의 삶에는 많은 차이가 나요. 이 삶의 차이가 나라의 운명을 다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나마 북쪽 왕들 중에는 조금 나아요.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운명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어요.
여러분 조금 차이 나는 것으로는 운명이 바뀌어지지 않더라고요. 많은 차이가 나야 돼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조금 다른 것을 되게 크게 여기잖아요. 내가 옆에 성도들과 조금 다른 것, 내가 옆에 있는 우리 가정 옆에 가정들과 조금 다른 것을 되게 크게 여겨요.
그런데 조금 다른 것 조금 차이 나는 것은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요. 많이 차이 나야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의 삶은 호세아와는 너무 다릅니다. 엄청나게 차이 나요. 5절 후반절에 보면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넘버 원이었다는 거예요.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히스기야를 솔로몬보다도 더 위대하게 보기도 하고요. 제2의 다윗이라고도 말하긴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후 왕들과는 그의 전후 왕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유다의 다른 왕들과도 왕들과도 차별된 삶을 살았어요. 그래서 유다가 망하는 것을 막았고 그리고 유다의 부흥을 영적인 전성기를 그가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호세아와의 다른 삶이 나라의 운명을 갈라놨던 거예요.
여러분 다르게 살아야 나라의 운명도 다르게 될 수 있어요. 백성이 똑같이 살면 나라의 운명도 똑같아지고요. 나라의 리더들이 똑같은 삶을 살면 그냥 똑같이 망하는 거예요. 다른 삶을 살아야 다른 나라의 운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차별된 삶을 살아야 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 구별됨이 이 차별이 다른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똑같이 공부하고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는 건 하면 안 되는 짓인 거죠. 열심히 공부하고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해야 돼요. 내가 주변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고 같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건 도둑 심보예요. 나쁜 마음인 거예요. 물론 나라를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정말 인간의 심리를 자유로 물든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다른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다른 결과를 경험하고 싶다면 당장 오늘부터 아니 지금부터 다른 삶을 살아야 돼요. 돈을 쓰는 것이 달라야 하고 휴가를 보내는 방법이 달라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달라야 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달라야 돼요. 그래서 다른 결과를 다른 운명을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삶이 다른 위로를 만듭니다. 지난주 가장 모임 나눔 주제가 위로였어요. 위로 그러니까 이번 주 목장 모임의 주제가 위로인 거예요. 우리가 한 주 전에 미리 공부하고 이제 돌아오는 주에 그 주제를 이렇게 나누기 때문에 이번 주에 여러분이 목장 모임을 한다면 그 주제가 위로입니다.
여러 가지 위로의 주제를 나눴어요.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가장 위로가 되는 음식은 가장 유료가 되는 성경 구절은 가장 유료가 되는 사람은 가장 유료가 되는 장소는 가장 유료가 되는 음악은 이렇게 나눴는데 이 나눔 아과 그 이후에 우리가 좀 고민해보고 생각해봐야 될 사건이 두 가지가 우리 교회 안에 있어요. 있었어요. 나쁜 사건은 아니고 좋은 겁니다. 그리고 너무 곰곰이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당사자가 누구일까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말씀드리시면 됩니다.
첫 번째는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라고 제가 가장들에게 물었을 때 어떤 분이 제가 했던 말이 가장 위로가 됐다는 거예요. 원래 목사가 이렇게 강대상에서 말을 잘하기는 하지만 사적으로 말 잘하기는 그렇게 크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말을 너무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어떨 때 말을 좀 가볍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성도들에게 좀 상처가 되게 말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했던 위로의 말이 저랑 같이 살면 되죠라는 말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잘못 들으면 이상한 말이 되죠. 그렇죠 그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고 가정의 처음 어려움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그런 환경이 만들어져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있을 수 있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아마 이런 말이 저랑 같이 살면 되조라는 이 말이 그분에게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생뚱맞게 찾아가서 저랑 같이 살면 되지 하면 그분이 얼마나 오해를 했겠어요?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 어려움의 과정에 제가 모두 함께 했기 때문에 제가 이런 말을 해도 그분이 아마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저는 위로가 됐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도 않았는데 그냥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나눌 때 그 말이 엄청 유료가 됐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기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목회자가 이렇게 한 말을 기억해 주셔서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정말 목회자들이 한 말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자녀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목사나 교사들은 조심을 정말 많이 해야 돼요. 왜냐하면 교사가 한 말을 평생 기억하는 아이들도 있더라고 청년들 어떻든 저는 저랑 함께 살면 되죠라는 이 말을 기억해 주셔서 그분께 너무 감사했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지난주 토요일 점심이 된장찌개였어요. 그러면 집에서 된장찌개 드시죠? 왜 된장찌개를 먹게 됐냐 하면 가장 모임에서 이렇게 나누면서 가장 위로가 되는 음식은 이렇게 할 때 이제 어떤 가장이 된장찌개라고 한 거예요 이 가장이 이제 교육자였어요. 저도 이번에 이제 명절 때 시골에 가서 명절을 보냈죠. 제가 가장이니까 예배도 드리고 음식도 푸짐하게 차려놨어요.
근데 정말 이렇게 허전한 거예요. 저희 아내나 또 저희 제수 씨가 음식 솜씨가 없어서 이렇게 허전한 게 아니라 엄마 맛이 없더라고요. 저희 엄마 맛은 양념을 안 한 맛이에요. 그래서 맛이 하나도 없어요. 근데 그 맛이 없어요. 아내나 지수 씨가 한 음식이 맛이 있었는데 엄마 맛은 없었어요. 그래서 대개 이번 추석 때 엄마 맛이 좀 그리웠습니다.
아마 이 전사님도 엄마의 된장찌개가 되게 그리웠던 것 같아요. 이제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고 뭐 그런 걸 해줄 수 없으니까. 근데 이제 이 가장 분 중에 한 분이 제가 된장찌개 끓여드릴게요.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된장찌개를 끓여다가 교회에 갖다 놓으시고 이제 다른 데 가셨어요. 이거 이제 교육자들이 반찬하고 맛있게 해서 이번 주 토요일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삶에 다른 위로가 있어요. 가만히 제가 두 가지 예화를 한번 들어보세요. 똑같은 삶은 아니죠. 다른 삶에 다른 위로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의 위로를 경험하러 오는 사람이 되게 많아요. 근데 목사와 성도들이 다른 삶을 살지 않으면 다른 위로를 할 수가 없어요. 교회에 왔다가 실망한 사람이 되게 많아요. 다른 위로를 기대하고 교회에 왔는데 위로가 없는 거예요. 말은 막 표독스럽고 표정은 막 무섭고
왜 그럴까요?
다른 삶이 없어서 다른 위로가 없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왔다가 다른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세상으로 가요. 왜 세상에도 위로가 많거든요. 교회가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위로를 하려면 성도나 목회자가 다른 삶을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서 똑같이 살아서는 세상이 주는 위로의 상을 줄 수 없어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 때 세상이 주는 위로 정도를 받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잖아요. 세상이 주는 위로 이상을 받으려고 한 번 경험하면 삶이 치유되고 영원히 치유된 위로를 경험하려고 여기 오셨잖아요. 그러려면 우리가 다른 삶을 살아야 돼요. 여러분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위로의 말도 나올 수 없고 위로의 행동도 나올 수 없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아버지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위로하고 싶다면 다른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는 다른 삶을 살아야 돼요. 그래야 자녀의 위로가 되는 부모가 될 수 있어요. 부모 중에는 자녀의 근심이 되는 부모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부모가 주변에 다른 부모들보다 더 못 살아요. 또 못되게 살려고 삶의 방식이 너무 틀렸어요. 그래서 자녀가 얻고 싶은 위로를 부모가 줄 수 없는 거죠. 부모도 다른 사람을 삶을 살아야 자녀를 위로할 수 있고, 목회자와 성도도 다른 삶을 살아야 여러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직장을 맛있는 이렇게 선물 세트를 준비해서 방문했어요. 아내와 전도사님이 한 405개 정도 선물 세트를 만들고 여기에 이제 형제들이 많이 우리 교회 오니까 그 부서만 한 40명 있는 부서만 이제 위로하려고 갔어요. 하여튼 저희는 나름대로 열심히 인터넷을 찾아서 한 8개인가 9개 정도 메뉴를 선정하고 이렇게 만들어서 방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 한 명이 그 음식을 먹고 이제 자기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이렇게 선물을 줘서 바다가 먹은 음식 중에는 최고 맛있더라는 거예요. 그 형제 나이가 50이에요. 50이에요. 저는 그 말도 되게 위로가 됐지만 우리의 이 다른 모습이 성도들을 위로하는구나라고도 깨닫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른 위로를 경험하러 옵니다. 성도들의 삶이 세상과 똑같으면 절대로 다른 위로를 줄 수가 없어요. 다른 삶을 살아야 다른 기도를 해야 다른 믿음으로 살아야 다른 위로 위로를 세상에게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그런 위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마지막 세 번째로 다른 삶이 다른 위로도 만들지만 다른 삶이 다른 능력도 만듭니다. 히스기야의 다른 삶이 나라를 아수르의 침략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히스기야가 호세아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유다를 앗수르 손에서 구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삶이 아수르의 손에서 유다를 구원할 능력을 갖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삶이 다른 능력을 갖게 하고 다른 노력이 다른 능력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능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남이 가진 능력을 부러워합니다. 우리가 남이 가진 능력을 갖고 싶다면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살아야 돼요.
탁월한 능력은 탁월한 삶에서 나옵니다. 파리올림픽 사격에서 은메달을 딴 김예지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제 아기 엄마다 보니까 아이를 키우고 하면 이제 몸의 근육이나 힘이 좀 다른 선수보다는 젊은 선수들보다는 좀 빠져나가겠죠. 어느 날 자기 몸에 힘이 빠진 게 느껴졌대요. 근데 선수촌까지는 거리가 있어서 왔다 갔다 하고 가서 거기서 이제 근육 운동을 하고 또 사격 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왕복 90km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는 거예요. 매일 왕복 90km를. 그래서 때로는 막 헐기도 하고 피가 나기도 하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머지 시간을 사격에 집중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격에서 자기가 메달을 딸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수가 대표팀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쉬라는 말이었대요. 좀 쉬어라. 좀 쉬어라. 그런데 안 쉬었어요. 그래서 다른 삶이 다른 능력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목회를 원하지만 다른 삶을 살지 않아요. 우리가 다른 결과물을 원하지만 다른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리고 싶어 하는 건 엄청나게 많지만 그것을 누리게 하는 다른 삶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삶을 살아야 십자가도 지고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또 갖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아무나 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지금 보면 누구나 다 질 수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인 거예요. 이 사람들이 십자가를 질 능력을 갖게 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지 않게 되는 겁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다른 삶이 다른 운명을 만듭니다. 다른 삶이 다른 위로를 만듭니다. 다른 삶이 다른 능력을 만듭니다.
할렐루야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어요. 이 다른 삶이 다른 능력을 또 다른 나라를 그 백성들이 경험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다른 목회를 하고 싶어요. 다른 삶을 살아야 되겠더라고요.
여러분들 마 다른 삶을 살고 싶죠? 다른 결과를 누리고 싶죠?
그럼 다른 삶을 사셔야 돼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정말 좋아지기를 기대하신다면 여러분이 다른 삶을 사셔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은 꿈꾸던 교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 꿈꾸던 그 교회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