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인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
경주김씨는 2013년 6월부터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해 왔다.
어떤 주장이든 객관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설득력을 얻으려면 논거(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미 수 년 전부터 영분공은 경순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던 장본인으로서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하나씩 시리즈로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생물학적인 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근거를 대겠다.
경순왕은 978년(경종3년)에 승하하셨고 흔히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한다.
경순왕은 언제 탄생하셨까? 그리고 몇 세까지 사셨을까?
역사에는 경순왕의 언제 탄생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경순왕의 생년이 언제인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삼국사기 <효녀지은(孝女 知恩)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효녀지은(孝女 知恩)은 한기부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 32세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하였다.
그러한 날이 오래 디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도 하여
쌀 10여섬을 마련하였다.
온 종일 그 주인집에 가서 일을 하여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3~4일이 지나자 그 어머니가
딸에게 묻기를,
"지난날의 식사는 거칠었으나 밥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식사는 좋으나 맛이 옛 같지 않으며
간장을 칼날로 찌르는 것 같으니 이 어쩐 일이냐?" 하였다.
이에 딸이 사실대로 아뢰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를 남의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딸도 울어
그 슬픔이 길가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때 효종랑(孝宗郞)이 놀러 나갔다가 이를 보고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그의 낭도 수천 명이 각각 곡식 한 섬씩 내어 도와주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租) 500섬, 집 한채를 내려주고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집에 곡식이 많았으므로 빼앗거나 훔쳐 가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담당 관청에 명하여 군대를 보내 교대로 지키게 하였고
그 마을을 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이어서 표를 올려 그 아름다움을 당나라 왕실에 알렸다.
효종(孝宗)은 당시 제3재상 서발한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그는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문득 인격이 완성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의 형 헌강왕(憲康王)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 효녀지은(孝女 知恩) 이야기는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헌강왕의 동생 정강왕 때 있었던 일이고 여기 등장하는 효종은 경순왕의 아버지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정강왕 제위기간(886년~887년)에 헌강왕의 딸과 혼인을 한 것이다.
헌강왕(875년~886년)에겐 아들(서자)과 두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진성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효공왕(제 52대, 재위897~912년)이고, 두 딸 중 한 명은 신덕왕(제53대, 재위 912~917년, 박경휘)의 왕비가 되었고 다른 한명은 경순왕의 어머니가 되었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의 혼인이 정강왕은 제위기간인 886년~887년이었으므로 경순왕의 생물학적 생년은 886년 이전이 될 수 없다.
경순왕의 생년을 887년으로 본다면 경순왕은 978년(경종3년)에 승하하셨으니 향년 91세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경순왕 주요 년대>
927년 신라를 침공하고 경애왕을 죽인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신라왕이 됨
931년 경순왕의 두 번에 걸친 요청으로 태조 왕건은 경주를 내려와 알현함
935년 11월 신라를 고려에 양위함, 태조 딸 낙랑공주와 혼인
935년 11월 태자보다 높은 위치의 정승이 됨.
975년10월 경종 정승 김부를 상보 도성령으로 올려 식읍 1만호 하사
978년(경종3년) 4월 김부 승하. 경종이 시호를 경순(敬順)으로 내림.
1070년 문종24년 평장사로 치사(퇴임)한 김의진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있는데 고려시대엔 대게 퇴임(치사)하는 나이가 70세였으니 김의진이 돌아가신 년도인 1070년을 기점으로 생년을 추정하면 998~1000년 사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세째 아들 명종이 탄생한 년도를 언제일까?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경순왕이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서 16세에 일(鎰)을 낳고 18세에 황(滉)을 낳고 20세에 명종(영분공)을 낳았다고 어림잡아 본다면 명종의 탄생년도는 907년이 된다.
(영분공파에서는 명종을 영분공으로 보니까 편의상 명종=영분공으로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함을 이해하기 바란다.)
영분공에서부터 김의진에 이르기까지는 907년부터 998년까지이다.
91년만에 8대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907년(영분공)
920년(임흥공)
933년(억종)
946년(계옹)
959년(아개공)
972년(예겸)
985년(주정)
998년(의진)
대한민국 모든 계보를 통털어서 90년 만에 8대가 태어난 예가 없다.
영분공~주정까지 모두 12세에 혼인을 하고 무조건13세에 첫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들 중 하나도 병에 걸려 죽지 않고 모두 건강하게 성장해야 성립될 수 있는 계보다.
사람이 태어나서 배필을 정하고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이건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계보다.
그러므로 영분공은 생물학적으로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
2018년 8월 22일
경주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