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현상이 문학에 기입되는 방식
이영숙 | 시인ㆍ문학평론가
1.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작동함으로써 사회 현상은 발생한다.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패러다임 안에서 가변적인 삶의 현장이 구축되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가운데 어쨌든 시간은 내일로 흘러가고 과거의 침전물인 양 현재는 무수한 밑줄이 쳐진 문제적 시점에 속해 있다. 인구 구조 변화라는 국내외적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내 앞에는 두 권의 책이 있는데, 목차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의미하는 세계사적 위기가 감지된다. 제니퍼 A. 스쿠바의 『80억 인류, 가보지 않은 미래』는 서론의 ‘왜 지금 인구학인가’를 시작으로, ‘출생 사망 이주, 세계를 이해하는 3가지 키워드’, ‘고령화는 반드시 재앙인가’, ‘죽음은 불평등하다’, ‘이민, 받을 것인가 막을 것인가’, ‘인구 추세로 읽는 앞으로의 세계’, ‘예정된 미래, 그러나 열린 결말’, ‘인구통계학자의 미래 예측법’을 경유하며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를 결론으로 삼는다. 전권이 인구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가 20세기의 특징이라면, 21세기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간의 극명한 차이로 요약된다. 저자는 21세기의 인구 추세에 대한 이해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폭력과 평화, 압제와 민주주의, 빈곤과 번영의 역학에 왜 필요한지를 조망한다. 각 장을 통틀어 거의 50개에 이르는 부주제가 인구 문제의 제반 요소를 세부화하고 있다. 또 하나는 황준원의 『미래출현』이다. ‘인구 변화’, ‘뉴노멀 인간관계’, ‘기후위기 환경위기’, ‘첨단 기술’, ‘직업’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1장인 ‘인구변화’의 부주제들에는 ‘대한민국의 정해진 미래, 초고령 사회’, ‘초고령 사회의 놀라운 현상들’, ‘실버 산업의 성장’, ‘미래 노인의 정체’, ‘65세는 부양 대상일까?’, ‘머릿수 부족한 젊은 세대, 괜찮을까?’, ‘평생 인구 감소를 경험할 한국 사람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 ‘인구 감소는 축복일까, 재앙일까?’, ‘인구 감소로 바라본 미래 대입과 취업’, ‘소산다사의 시대와 죽음 비즈니스’가 있다. 그러나 ‘인구 변화’라는 키워드가 나머지 장의 주제들과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어 이 책 역시 전권이 인구 문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말해놓고 보니 책 광고처럼 되었는데, 이 글의 목적은 인구와 관련된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다. 목차가 보여주는 명료한 문제점들을 배경에 둠으로써 사회 현상이 문학에 기입되는 방식이라는 글의 주제를 좀 더 수월하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의 일종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회학적 용어의 사용과 그에 대한 설명을 줄이면서 문학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글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먼저 두 편의 소설이 생각났다. 2010년에 출간된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문학동네)과 2021년에 발표된 손원평의 「타인의 집」(창작과비평, 봄호)이 그것이다.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2.
감독 데뷔작이 흥행에 참패한 이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아내는 진즉 떠났고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해 죽음의 벼랑 끝에 선 ‘나’가 『고령화 가족』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나이 마흔여덟에 칠순이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쪽팔리고 민 망한 일이었지만 더 끔찍한 건 엄마 집엔 이미 쉰두 살 된 형이 얹혀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폭력과 강간, 사기와 절도로 교도소에 다녀온 형 한모가 그랬듯 엄마의 낡은 연립주택으로 주거를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을 피우다 두 번째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여동생 미연이 열댓 살 난 딸 민경을 데리고 합류하면서 엄마 집은 갑자기 삼 세대가 북적대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갈등이 증폭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비밀도 하나둘 밝혀지는데, 형이 두 살 때 친모가 죽자 재취로 들어간 엄마가 ‘나’를 낳았고, 형과 나를 두고 엄마가 바람을 피워 씨 다른 여동생을 낳았다는, 말하자면 삼 남매의 아버지가 각기 달랐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가족의 ‘막장 드라마’는 조카 민경의 가출 사건을 계기로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이놈의 집구석, 불이라도 확 싸질러서 다 같이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대성통곡을 하며 퍼붓는 미연의 저주를 삭이며 ‘나’는 조카를 찾을 자금 마련을 위해 그동안 미뤄두었던 에로영화 감독직을 수락하고, 불화의 원인 제공자인 한모는 조직의 레이더망을 빌리기 위해 일이 틀어지면 사장 대신 교도소를 가는 조건으로 비밀도박장의 바지사장을 덜컥 맡는다. 한모 덕에 가출 일주일 만에 술집에 넘겨지기 직전의 민경을 구출하게 된 무렵부터 이 가족을 관통하는 ‘막장’이란 용어에는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막장’이란 인식은 이기적인 성격의 ‘나’가 가족에게 무관심해서 빚어진 오해였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전처 아들인 한모를 제 자식처럼 품어 키웠고, 아버지는 엄마가 바람피워 낳은 미연이를 품어 안았다. 아파트 경비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아버지가 남긴 보상금으로 구입한 방 세 개짜리 연립주택에서 엄마는 세상에서 패배해 돌아온 자식들을 품어 안고 정성껏 밥을 해 먹였다. 미연이가 20대에 유흥업소에서 번 돈으로 가족을 봉양했듯,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와 한모도 가족을 위해 뒤늦게 적어도 희생이라는 것을 시도한 것이 된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풀리는 수도 있나 싶게 한모는 바지사장 앞으로 된 사장의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챙겨 교도소 대신 미장원의 수자씨와 함께 해외로 날랐고, 미연은 두 번째 이혼의 원인 제공자인 세 번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민경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며, 엄마는 미연의 친아버지인 전파사 구씨를 불러들여 오래 끌어온 사랑의 내용과 형식을 완성한다. ‘나’ 역시 형이 떠나면서 엄마에게 주라고 건넨 돈을 우물쩍 가로채긴 했지만, 얼마간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후배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캐서린과 함께 지내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는다. 이 소설은 결혼 등으로 모두 엄마 품을 떠나는 1라운드를 거쳐 삶에 실패하자 엄마에 얹혀살면서 불편한 가족공동체를 이루는 2라운드, 종국에는 각자의 사랑과 함께 이십여 년 전에 그랬듯 이번에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각자의 길을 가는 3라운드로 구성된다.
자, 그런데 해피엔딩이면서 한 가족의 성장소설로도 읽히는 이 소설의 제목이 왜 하필 ‘고령화 가족’일까. 2001년에 고령화사회(고령인구 비율 7% 이상)에 진입한 우리 사회의 객관적 지표에 대한 문학적 반영일까, 혹은 소설의 중후반까지 삼 남매가 엄마에게 끈질기게 눌어붙어 살 것처럼 시침을 뗀 천명관식 유머일까. 다섯 명이 북적거릴 때 49세였던 평균 연령이 다 제 살길을 찾아 떠난 후 남겨진 엄마와 미연의 친아버지로 구성된 70대의 현실적 반영일까. 그로부터 10년, 정확히는 11년 후에 「타인의 집」이 발표되었다. 강산이 한 번 변하듯 이야기의 판도가 확 달라진다.
사진 속의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30년 된 아파트였지만 내부는 몹시 깨끗했고 도심 한중간에 위치했다. 그리고 무엇보 다 가격이 합리적인 걸 넘어 터무니없이 싼 쪽에 가까웠다. 설명에는 수익을 위함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품격 있는 공동체 생활 을 꿈꾸기 때문이라는 말과 원래 살던 사람 중 한 명이 나가게 돼서 충원한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높은 경쟁률에는 그만 한 이유가 있었다.
「타인의 집」은 아파트의 전세 세입자 쾌조(재욱의 ID)가 웹툰 작가인 희진,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재화, 영어유치원에서 상담교사로 일하며 임용고시 준비를 하는 ‘나’(시연) 등 세 명에게서 “합법적이지 않은 틈새시장” 방식으로 월세를 챙기면서 벌어지는 몇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자본주의 논리, 곧 돈을 낸 만큼만 누릴 수 있는 규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가운데 “단독 계약조건”으로 화장실이 딸린 안방을 쓰는 ‘나’와 달리 나머지 세 명은 거실에 있는 화장실을 남녀 공동으로 사용한다. “소리를 죽이고 존재를 최대한 감추”어도 이들의 “구획은 얇은 마분지로 나뉘어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쾌조와 한 화장실을 쓰기 불편해 재화는 아침마다 관리사무소 화장실을 다녀오고, ‘젊은이들의 품격 있는 공동체 생활’을 운운하던 쾌조는 방 세 개를 모두 월세로 내놓고 정작 자신은 “여름엔 베란다에 천막을 치고 겨울엔 테이블 밑을 잠자리로 삼”는다. “집에서 매일 주식 차트를 들여다보는 전업투자자로 전향”한 쾌조는 이런 아파트의 소유자가 되는 게 종래 희망이지만, 보일러 교체 건을 빌미로 집주인이 방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불법 세입의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짐을 옮기는 등 한바탕 난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이 이 집을 매도하기 위해 부동산중개업자들을 차례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결혼 안 한 젊은 사람들이 세 들어 있는 집이 좋아요. 개 있는 집, 아기 있는 집은 골 아파. 개가 벽지 다 긁어놓고 애가 벽
에 낙서해놓고 아주 가관이에요. 그럼 다음번 전세 구할 때도 수리해줄 필요가 없으니까 금액적으로 유리한 거예요.
“부동산 아주머니”가 예비 매수자에게 건넨 “달변”에는 이 시대의 사회적 함의가 다 들어 있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으며(못하며), 직업을 가졌다고는 하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집값은 비싸고, 반려동물과 아기가 자본주의적 가치 아래서 일종의 장애와 등가로 여겨지는 현실. 안타깝게도 이 주거공동체의 예상되는 해체에는 『고령화 사회』에서와 같은 작은 낭만조차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나’와 쾌조, 재화, 희진은 이 집을 나가 어디로 갈 것인가. “터무니없이 싼” 월세에 맞춰 다시 “합법적이지 않은 틈새시장”을 찾을까, 불편한 교통 상황을 감수하며 도시 외곽으로 밀려날까. 두 소설 사이에 한국은 2018년 고령사회(고령 인구 비율 14% 이상)에 진입하였고, 사랑이 중요하던 『고령화 사회』와는 달리 젊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타인의 집」의 어디에서도 생존의 고투만이 있을 뿐 연애나 결혼의 징후는 찾을 수 없다.
또 하나의 가정假定이 있다. 어쩌면 과거는 미래에서 온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가 구성되고, 현재는 시시각각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라는 시간 단위는 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라고 일컬어지는 현실 세계가 반영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예측 불가능성의 편린일 수도 있다. 인구 구조 변화라는 현상을 누적된 과거의 현재진행형으로 본다면 이때 시간과 사건의 흐름은 자동사가 되겠지만 그 반대라면 현실은 곧 피동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현실은 미래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시의 상황은 어떨까.
3.
지진은 늘 먼 곳의 비극이니
여기는 그러려니 했다
벌들이 사라졌다고들 했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한여름 우박이 쏟아지던 날도
별일이지만 그러려니 했다
때아닌 꽃들이 피었다고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까르르 웃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푸드득 날던 새들이 사라졌다
꽝꽝 얼던 빙하가 사라졌다
인간은 사라지고 인공지능만 좀비처럼 둥둥
지금여기
곧,
개봉박두
―김유철, 「그러려니 비극」 전문, 《내일을 여는 작가》, 2023년 봄호
이 시는 기후 위기의 징후에 대한 현재적 무감각이 미래 예측을 통해 역으로 현재를 고조시키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진, 벌의 집단실종이나 폐사, 한여름 우박, 때아닌 개화뿐이랴. 좀 더 큰 규모의 폭우와 폭설을 비롯하여 자연발생적인 산불, 사막화 등의 발생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인구 감소는 그 모든 요인을 압도한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세계 인구가 줄어들면 지구환경이 회복될 가능성이 커지는 긍정적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국가 멸종 내지는 인간 멸종이라는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앞에 소개한 『80억 인류, 가보지 않은 미래』에 의하면 세계 최고령 사회에 속하는 일본이 지금의 추세대로 간다면 2010년에 1억 2,800만 명이었던 인구가 2060년에 8,700만 명으로 급락하면서 인구의 40% 이상이 65세 이상의 고령 노인이 된다. 『미래 출현』에 의하면 한국은 같은 해의 고령 인구가 43.9%로 심지어 일본을 앞지른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새들이 사라”지며, “빙하가 사라”지는 것은 2060년이 되기 전의 일일 것이다. “그러려니” 하는 가운데 지구멸망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인간은 사라지고 인공지능만 좀비처럼 둥둥” 떠다닐 그런 세계가 “개봉박두” 상태이다.
생로병사 외길 위에
죽는 복이 큰 복이라나
장수시대 누리면서
골골 백수 드문드문
아랫목 막차 탄다면 더한 복은 없으리라
이 시대 고려장이
요양원이라 우기는데
뒤 봐줄 자식 없어
코스가 딱 거기라고!
혼외의 요양보호사가 뒷개를 도맡는다
―김종희, 「생로병사」 전문, 《열린시학》, 2024년 봄호
돌봄 문화가 확대된다는 것은 돌봄의 수혜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여전히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 “아랫목 막차”가 “더한 복은 없으리라”라고 여겨지는 전통적 가치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환자를 돌볼 가족은 대부분 직장이나 학교에 가 있는 현대사회에서 피치 못해 선택되는 장소는 “요양원”이다. 물론 “이 시대 고려장이/ 요양원이라 우기는” 논리에도 일리는 있다. 그간 배우자가 맡았던 돌봄의 역할을 “혼외의 요양보호사”에게 넘기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도 기피의 한 요인이겠지만, “요양원”이 환자 관리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몸의 노쇠와 가족과의 격리라는 심리적 요인이 겹쳐 한 번 들어간 노인이 건강해져서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앞의 「그러려니 비극」이나 「생로병사」가 비교적 사회 현상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면, 다음의 시들은 간접적이거나 그 경계를 아주 희미하게 뭉개는 식으로 표현된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겨울엔 눈 많은 파주로 넘어와서
꿈속의 꿈에서 홀로 울다가
눈사람 몇 개를 만들다 떠나겠지.
지난여름 장마에 맹꽁이가 울 때
시장통에서 사 온 편육을 먹고
고요한 음악에 귀를 쫑긋 세우면
고양이들은 구석에 몸을 숨기고
비탄과 유머도 모르는 채 졸고 있겠지.
피로가 몰려오는 저녁
사랑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
우리는 등을 켠 거실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눈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겠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파주에 산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추억을 리본처럼 매달아주는 저녁들,
식탁에는 귀신들도 와서 밥을 먹겠지.
한밤중 늑골 아래서 누군가 말을 거는데
그건 귀신의 말,
알 수 없는 외계인의 말,
겨울마다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파주에서 인사도 잘하고 잘 웃는 당신,
사랑이 늘 크고 단단할 필요는 없었지.
우리는 작은 사랑을 하며
눈사람을 몇 개나 세우고 고양이를 보살폈지.
제발,
제발,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줘.
파주엔 눈이 많이 내렸지.
눈 쌓인 그곳에서 우리가 죽고 나면
눈썹을 가늘게 그린 딸들이 와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살겠지.
우리의 기일엔 눈썹 검은 세월이란 하객들이
모였다 흩어지겠지.
―장석주, 「꿈속에서 우는 사람」 전문, 『꿈속에서 우는 사람』, 문학동네, 2024
소설은 갈등적 요소와 인과적 관계가 중요한 장르이다. 갈등이 없으면 수필이 되고, 인과가 부족하면 서사적 설득력이 떨어진다. 세계를 재현하고, 인간의 내면을 속속들이 드러냄으로써 소설은 세계에 구속되고 한편 세계에 참여한다. 앞에 인용된 두 편의 소설이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세계의 양상을 어느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인간의 내면 심리를 사물의 본질에 투영하여 어떤 낯선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한 공간이 동일한 시간대 안에서 두 공간으로 분열되는 테마를 다룬다고 하자. 이때 소설은 분량적으로나 기법적으로 SF를 차용하는 등 장황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시는 이 문제를 이미지적으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도 있다. 독해를 위해 독자의 사유가 대신 장황해지는 것을 감수할 수 있다면 말이다.
시의 전면에서 시적 화자는 “우리”라는 공동 화자이다. “꿈속”이라는 개별 공간에서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랑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이어서다. “우리”는 오랜 “사랑”의 시간을 공유해 왔고, 그리하여 “사랑”이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쓸쓸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관습”에 연계된다. “관습”으로 인해 “꿈속”의 공동 화자를 세우거나, “파주”의 실재 공간과 “꿈속”이라는 공간을 서술어로 구분한 것은 바로 시적 논리를 위해서 필요한 전략이다.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사랑이 늘 크고 단단할 필요는 없었지”와 같은 체험적 서술어와, “눈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겠지.”, “식탁에는 귀신들도 와서 밥을 먹겠지.”,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살겠지.”, “모였다 흩어지겠지.”와 같은 미래 예측적 서술어가 그것이다. 이미 도래한 시간대를 반추하는 “꿈속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는 시간대를 꿈꾸는 시적 구조는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살겠지”에 부합한다. 그러나 “제발,/ 제발,/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줘.”라는 부정 혹은 거부의 문장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에 대한 부정 혹은 거부로 이어진다. “추억을 리본처럼 매달아주는 저녁들.”에서 보듯 현실이라는 역동적 공간은 소거되고 “추억”이라는 반추적 공간만 남는 노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는데 그것은 “귀신의 말”이거나 “알 수 없는 외계인의 말”이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야 “눈썹을 가늘게 그린 딸들이” 오고, “우리의 기일”이 되었을 때도 조문객이 아니라 “하객들이” 올 뿐이다. 이를 노부부 일반으로 확장해 보면 “꿈속”이 시의 현장으로 채택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사회 현상을 비교적 뚜렷이 양각화한 시가 있는가 하면, 이 시는 정서적 울림을 지나 지적 모험을 한 끝에야 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스행 비행기는 오지를 않고
그는 끝내 스위스에 가지 못할 테지
알프스며 몽블랑이 눈에 선해도
그의 관심은 오직 베른뿐
베른의 의사들은 실력 있고 친절하지만
그를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테지
스위스행 비행기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도
이번만은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도 문득 알게 되겠지
베른의 날씨가 나빠서거나 공항에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걸
그러다 차차 지켜볼 테지
오랫동안 묵은 고통이 자신의 몸을 떠나가는 걸
베른의 의사를 보지 않고도 그는 마침내 안락을 찾게 되겠지
대성당의 종소리 같은 위로가 겹겹이 그를 에워싸겠지
―한명희,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전문,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여우난골, 2024
안락사를 꿈꾸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숨은 화자인 ‘나’도 안다. 왜 “베른의 의사”에게 가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안락사를 실행할 기술이 아니라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묵은 고통이 자신의 몸을 떠나”갈 때까지 질병에 관한 한 모든 책임은 온전히 당사자와 가족의 몫이다. 의료 기술의 전방위적인 발달에도 불구하고 환경 오염과 스트레스로 인한 불치병이 급증하는 가운데 질 높은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중요해진 탓이다. 지배 집단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 정치가 복무하는 동안 소수자들의 자유와 권익은 방기되거나 유예된다. 아마존의 인공 방화를 막지 못하고, 탄소 배출 억제나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것도 범주만 다를 뿐 같은 맥락이다. 생명줄을 놓고 나서야 “마침내 안락을 찾”는 비인간적 소외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려니’ 하면서 한발 앞서거나 뒤처져 모두 여기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어디에고 “베른”은 없다. 이 시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소수자들이 “그”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장치를 보유함으로써 시는 우리의 약함을 보편화한다.
수건이 수생식물에서 진화하여 공중식물이 되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틸란드시아*나 디시디아**가 수건의 일종이듯
심지어 박쥐란***이 잔털로 수건의 돌기를 연기하듯
연사, 무연사, 죽사, 코마사, 극세사는 식물의 조직에 대한 분류 명세다
습기 많은 날 수건이 눅눅해지는 건 이제 곧 잎을 뻗고 뿌리를 공중에 늘어뜨릴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물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수건이 덤비는 건 저 물 밑바닥에 뿌리를 박고 물결에 일렁이던 추억 때문
누가 수건의 전생을 형상화 했는지
쓰다듬는 대로 돌기는 이리 저리 일렁인다
하고많은 집 중에 물기도 온기도 곡기도 끊긴 집
미라가 뭔가 물기 고스란히 빠진 신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차마 시취를 빨아들이지는 못하고 눈물도 없이
마지막으로 빨아 널린 자세로 잎도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방을 가로지른 줄에서 자기가 공중식물이란 사실만 다시 한번 입증한 채
*ㆍ**ㆍ*** 흙도 필요 없이 공중의 습기만으로 생장 가능한 공중식물의 일종
―이영숙, 「수건의 고독사」 전문, 《열린시학》 2018년 여름호.
누가 “수건의 전생”을 궁금해하겠는가. “고독사”한 시신의 “전생”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시에서 “수건의 전생”은 구구절절하다. “수건이 수생식물에서 진화하여 공중식물이 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입증이라도 하려는 태세다. 이는 “미라”화한 시신의 “전생”도 세세히 짚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예의이며 진정한 애도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나 작동하지 않은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미라”의 살아생전은 아마도 신문의 한 귀퉁이에 단신으로 처리되거나 무연고 장례 등으로 너무 쉽게 “일단락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생을 조명하여 “차마 시취를 빨아들이지는 못하고 눈물도 없이/ 마지막으로 빨아 널린 자세로 잎도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방을 가로지른 줄에서” “고독사”한 “수건”으로 형상화해 보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도 할 것이다.
두근거리는 창문이었어요
흥건히 젖어 드는 머리칼
어디선가 퀴퀴한 물의 냄새를 맡고
물 갈기를 세운 짐승이 침상으로 올라왔어요
빗소리를 인질로 삼고 있는
은둔의 서식지,
울음소리조차 차단된
우리들의 방은 너무 깊고 멀었어요
범람한 계단들이 무명의 발로 쿵쿵 뛰어내리나 봐요
잠긴 벽을 물어뜯어서라도 살아내려는
하등동물, 끊임없이 찍찍거리는 그 소리가 궁금해
이웃은 가끔씩 손을 넣어 울음의 뿌리를 더듬어보지만
음지에 기생하는 것들은 끊을 수 없는 중독 같아요
누구의 고통도 혼자 독점할 수는 없다,
샘솟는 뉴스는 배경으로 밑 빠진 독에 흔한 장미를 부르지만
땅 밑에 밑줄 긋던 땅강아지는 언제 멸종된 거죠
접혀있던 계단엔 종기가 누렇게 퍼져 진득거리는 진창길
‘출입 금지’라는 붉은 포스터도 아랑곳없이
흥건히 젖은 세 모녀가 한 상 가득 녹슨 이끼를 떠먹는 시간
젖은 벨벳 같은 슬픔은 생각보다 겁이 정말 없어요
―김현주, 「이끼」 전문, 《포엠피플》 2022년 겨울호
지난 2022년 8월 폭우에 관악구 신림동에서 반지하가 침수되면서 세 모녀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치권은 너도나도 현장을 방문하여 지상에서 참사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식으로 고인들에게 모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반지하 관련 대책을 떠들썩하게 내놓았다가 흐지부지 때우면서 넘어간 적이 있다. 이와 달리 이 시는 세 모녀의 언어와 정서와 상황을 체화한다. “잠긴 벽을 물어뜯어서라도 살아내려는/ 하등식물”의 “끊임없이 찍찍거리는” “그 울음의 뿌리”를 “이웃”이 가끔 “더듬어보”기도 하지만, 체화는 대상에 빙의하는 정도 이상의 몰입을 통해야 가능한 일이다. 시를 읽는 일 역시 “흥건히 젖은 세 모녀가 한 상 가득 녹슨 이끼를 떠먹는 시간”에 동참해야 가능해진다. 인구 구조 변화의 어떤 갈래가 “세 모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지에 관한 탐구는 사회학의 몫이고, 정치보다 정치하게 삶의 진실을 밝혀내는 탐구는 시의 몫이다.
고요가 유리그릇에 담겨 정교하게 부서진다
사라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곳은 부엌,
명절 가까운 10월엔 사람보다 구름이 살아 있다
빈집 부엌에서 이십 년 전에 들었던 탄식과 웃음소리를
뭉게구름의 중얼거림처럼 듣는다
향연이 끝나고 외할머니와 이모와 외삼촌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사나?
오래된 냄비와 사발을 씻을 때마다
고요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낡은 싱크대에 붙어 있는 라디오를 통해
엘피판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운 좋게 만나기도 하나
모계의 혈관을 타고 사람 소리가 먼 곳에서 흘러온다
몸은 사라져도 소리가 남는다
홀로 있는 사람은 쇳덩어리 돌덩어리와도 교감한다
홀로 있던 외할머니는 거실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수많은 자동차와 바퀴와 말을 나누곤 했다
저 많은 차들이 누굴 만나러 가나, 누굴 만나고 오나
쇳덩어리 고독을 돌덩어리 고독을 모른 척했다
고독을 모른 척하는 죄의식을 모른 척했다
식구들을 위해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부엌에서
해물탕을 배달시켜 먹으며 기억의 소매가 젖도록 운다
수돗물과 함께 불가사의한 생을 위해 울게 될 줄 몰랐다
―권형영,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산다」 전문, 《예술가》 2024년 봄호
자녀와 형제자매가 있어도 독거노인이 되는 일은 이 시대에 흔하다. 태생이 남달랐거나 세상을 잘못 산 결과로서가 아니라 이는 어느덧 사회 시스템상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외할머니와 이모와 외삼촌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식구들을 위해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부엌에서/ 해물탕을 배달시켜 먹으며 기억의 소매가 젖도록” 시적 화자가 우는 것은 “홀로 있던 외할머니”의 “고독을 모른 척했”고, 그 “고독을 모른 척하는 죄의식을 모른 척했”던 날들에 대한 후회와 반성 때문이리라. “홀로 있는 사람”이 쇳덩어리 돌덩어리와도 교감”할 만큼 “고독”하다는 사실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지만, 어느 만큼은 이미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고, 어느 만큼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다. “거실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수많은 자동차와 바퀴와 말을 나누”고, “저 많은 차들이 누굴 만나러 가나, 누굴 만나고 오나”, 궁금해서가 아니라 무료해서 말을 걸게 되지 않던가.
4.
문학은 역사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기록한다. 반복하지만, 소설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시는 현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문학이 없다면 인간에게 진실도 없다. 현재를 현재화하는 게 아니라 미리 가 본 미래를 현재화하기, 이것이 사회 현상이 문학에 기입되는 방식이다.
―《시와문화》 2024년 겨울호
#사회_현상이_문학에_기입되는_방식 #이영숙_문학평론가 #천명관_고령화_가족 #손원평_타인의_집 #김유철_그러려니_비극
#김종희_생로병사 #장석주_꿈속에서_우는_사람 #한명희_스위스행_종이비행기 #이영숙_수건의_고독사 #김현주_이끼
#권형연_사라진_사람들은_부엌에_모여_산다 #시와문화_2024년_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