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조현태
스스로는 절대로 눕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강제로 눕혀놓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어난다. 기계적으로 무게중심에 의해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 놓은 것, 바로 오뚝이다. 무게중심은 오뚝이의 본능과 같다. 얼굴을 가만히 보면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벙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다. 실패나 좌절은 감은 눈과 같다. 오뚝이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눈을 동그랗고 크게 그려놓은 것이 지극히 당연한 착상이리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하나뿐이다. 의학적 용어로 선천성 일안실명이라고 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눈이 두 개 이상의 복수인 까닭은 거리감을 감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을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한쪽 눈을 가린다. 주먹을 쥐고 검지만 펴서 손목을 직각으로 구부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사람의 검지 끝을 마주 닿게 해 보자. 서로 거리가 맞지 않아 어긋날 것이다. 이번에는 두 눈을 다 뜨고 같은 방법으로 해보자. 맘먹은 대로 잘 맞춰질 것이다. 나는 한쪽 눈만 있으므로 좀처럼 원근감을 식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멀고 가까운 것을 대충은 감지한다. 왜냐하면 오십년이 넘도록 살면서 아직도 거리감을 감지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이 탁구를 가르쳐 주겠다면서 유료 탁구장에 데리고 갔었다. 친구가 탁구공을 정확하게 내 쪽으로 넘겨주어도 라켓에 맞지를 않고 항상 빗나가기만 했다. 얼마만큼 공이 내 가까이로 날아왔는지 감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켓을 허공에서 휘두르기만 할 뿐 공을 때리지 못해서 속이 상하다 못해 울기까지 했다. 도저히 눈으로 보고는 불가능한 상태임을 깨닫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친구가 공을 치는 ‘딱’하는 소리와 공이 탁구대에서 튀는 순간 다시 ‘딱’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의 시간차를 감지하여 내 라켓을 갖다 대면 그런대로 맞아 넘어갔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습하여 약간 익숙해지자 친구가 조금 빠른 속도로 공을 쳤다. 당연히 받아 넘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속도가 빠르면 그만큼 시간차도 짧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린 속도와 빠른 속도는 친구가 휘드르는 팔의 동작으로 가늠했었다. 시각으로 감당하지 못할 부분에서 청각적 능력이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이 둘인 보통사람에 비해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탁구를 통해 깨달은 것이다. 이토록 사물을 보기 위한 것은 눈이지만 소리를 듣기 위한 귀도 눈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더듬이나 넝쿨손 같은 촉각의 눈도 있다.
나는 그렇게 탁구를 배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갑절 더 많은 공을 들여도 터득하는 시간이 몇 배나 필요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탁구를 할 정도이지 누구와 대결할 만한 실력 향상이 되지는 않았다.
오래전 중학교 시절에 과외 활동으로 태권도반을 지원하여 태권도 이론과 품세 등을 배웠었다. 자유대련을 마치고 난 우리들은 저마다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그때 사범님이 가장 강조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어떠한 상대를 만나든지 절대로 눈을 감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빠르고 무서운 공격이 있어도 눈을 뜨고 상대의 공격을 보아야 그 공격에 대처할 수 있지 그 순간에 눈을 감으면 반드시 공격을 당한다고 했다.
하지만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눈을 감지 않으려면 대단한 연습과 반복되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절대로 눈을 감지 말자고 다딤하고 다딤하지만 막상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면 나도 무르게 눈을 감게 마련이다. 이른바 본능적 행동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방어 의지를 노력과 연습으로 극복하려니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그러나 어렵긴 해도 가능했다. 심지어 한 학급 전체가 한꺼번에 사범님을 공겨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본능적 행동이라 할지라도 부단한 노력과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바꾸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렵다는 것이 곧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능은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능력이기 때무에 따로 연습하거나 훈련하지 않아도 되는 기능이다. 하지만 부족한 본능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른 능력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만약에 일반적이 기능에 만족하고 보다 나은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본능을 꼭 강조할 필요는 없다. 보고, 듣고, 말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추리하는 여러 각도의 본능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냄새 맡고 만져보고 추리하는 여러 각도의 본능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중에 어느 하나가 없더라도 나머지 기능이 없어진 능력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것을 잠재력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잠재력을 잘 살린다는 것은 오뚝이와 같이 모든 기능이 무게중심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어설 수 있는 다리가 없어도 무게 중심에 맞추어진 다른 기능이 없어진 다리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없는 것에 머물러 있을것이 아니라 다른 기능으로도 대체하는 눈을 가장 크게 뜬다면 오뚝이와 같은 완벽한 무게중심이 된다. 그러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