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북간도 독립운동 이야기⌟
2부 <북간도 조선이주민들의 꿈과 참혹한 역사>
2부에서는 순서를 바꾸어서
“점산호와 호주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점산호는 청조에게 헐값으로 불하 받은 황무지를 비싼 값으로 팔거나 조선인 소작농을 수탈하여 개간하여 대 지주가 된 한족에 대한 호칭이지요. 당시 몇 명의 점산호 또는 한 명의 점산호가 한 마을 혹은 한 지방의 모든 토지를 독점하고 있어서 마을 또는 지역의 대부분의 조선인 소작농들이 다 그들에게 예속되었고 그들은 소작인을 마치 노예. 종처럼 부렸습니다.
한족 점산호들의 조선인 소작농에 대한 약탈과 착취에는 세 가지 방법
첫째, 소작료로 내는 지세가 있다.
지세에는 수확량에 따라 내는 활조와 풍흉에 관계없이 정해진 규정대로 내는 정조가 있었다. 활조나 정조나 3할 내지 5할을 지주에게 사용료로 내야 했다. 청조는 개간한 황무지는 3년 동안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규정하였으나 점산호들은 개간한 첫해부터 지세를 받았다.
둘째, 점산호들은 소작농에게 무보수 노동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4상의 토지를 소작하면 1상의 토지를 무보수로 경작해주어야 했으며 또한 해마다 지주의 일을 10일 내지 20일간 무보수로 해주어야 했다. 무보수 노동에는 땔감 마련, 집수리, 수레에 짐실이와 타작 후에 마당 쓸기 등이 있었다. 주인 대신 부역에도 나가고 혼사와 상사 그리고 명절에도 일손을 보태야 했다.
셋째, 생활이 궁핍해서 돈을 빌려야 할 때 연 이율 60% 이상의 고리 대금을 빌려 써야 했다.
특별히 가혹한 것은 “양식반환법”이었는데 봄에 비싼 기격으로 쌀 한 말을 산 것을 가을에 쌀 한 말로 갚는 것이 아니라 이자까지 합하여 쌀을 4말 5되로 갚아야 했다.¹
호주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주인 (戶主人)은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면 마름입니다.
자발적으로 변발호복을 하여 한족 점산호와 조선 소작인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하는 사람을 호주인이라고 불렀다. 점산호를 위하여 조선 이주민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거나 황무지를 개간시키며 소작료를 받아들이는 일을 했다.
다른 한 편으로 조선인 마을 사람들이 치발역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어에 능통하고 행정능력과 사교수완이 있는 사람을 선출하여 마을대표로 청나라에 귀화시켜 치발역복하게 만들고 그의 명의로 토지를 구입하였다.
호주인들은
첫째, 마을의 조선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점산호와 소작권과 소작료 문제를 교섭하였다.
둘째, 가을에 소작료를 거두어서 점산호에게 수납하였다.
셋째, 관청에 지세 등 세금 납부하는 일을 도맡았다.
넷째, 토지소유권이 없어 토지를 구입할 수 없는 미귀화 입적 조선 이주민들의❮명의 지주❯가 되어 토지를 사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수속비를 챙겨서 관청에 수입을 올려 주면서 구입한 토지의 10% 또는 해당한 금액을 수고비로 받았다.
다섯째, 호주인은 차츰 점산호로 부터 장기간 토지를 임대하여 조선 이주민들에게 다시 소작을 주는 중간 소작주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 출발한 취지와 다르게 이중 소작으로 조선인 소작농을 갈취하여 점차 지주가 되었다.
점산호와 호주인은 간도의 조선인 이주민들에게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북간도에서 우리 조선 소작농들은 이런 고통을 겪으며 농사를 지었고 그 돈으로 독립 의연금을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들을 독립군으로 바쳐주었지요. 그러기에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조선 소작농들의 피땀의 열매입니다.
북간도 조선인 농촌마을 중에 처음부터 운이 좋게 자영농으로 출발한 마을이 있습니다.
<예수촌이었던 평강벌의 명암촌>이 바로 그러한 마을이었습니다.
명암촌은 1910년 12월에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달래동 사람들 20여 호, 150여 명이 당시 이도구에 속해 있는❮점산호❯왕복의 지역인 ❮왕가지방❯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조선인 마을이다. 그들은 계속되는 기근과 ❮한일병탄❯의 와중 속에서 만주 땅으로 이주를 결심하며 양태윤을 선발대로 보냈다. 그는 연변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명암촌에서 왕복의 소작농으로 일하는 고향 사람 전씨를 만나서 그 땅으로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양태윤의 안내를 따라서 성진을 출발하여 12월 말에 명암촌에 도착하였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겨울을 지낼 가옥과 농토를 구입하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왕복은 가족유산상속의 문제로 급히 산동으로 철수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호주인❯한윤극을 세워서 왕복의 땅과 건물 일체를 구입하여 단체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숙소 문제와 생존문제인 토지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였다.
새 해 들어, 그들은 우선 개인들의 가옥을 지으며 식량 마련에 주력을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그들이 하나가 되어 세 가지 큰일을 해냈다.
첫째는 1911년에 캐나다장로회 교회로 등록된 ❮장은평교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그들의 고향인 성진은 1898년에 캐나다선교사, 그리어슨이 선교부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 곳이었다. 그들은 이미 성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서 명암촌으로 집단 이주를 하면서 용정에 있는 캐나다선교부 소속인 김계안조사와 안순영조사와 연락했을 것이다.
둘째는 1912년에 ❮보진학교❯라는 근대식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초대 교장은 이강국 이었고 교원은 양환봉, 유용희, 김정식 이었다.
교원들의 생활은 마을 전체가 책임을 졌다. 그들은❮점산호❯왕복의 토지를 구입해서 나눌 때 처음부터 학전(學田)을 염두에 두고 따로 분리해서 지정해 두었다. 그들은 결혼한 교사들에게는 학전을 분배해 주었고 미혼 교사들은 한 달씩 매 가정을 돌면서 식사를 하게 하였다. 학전노동과 교원들의 의식주 및 학교운영비는 마을의 모든 세대들이 동일하게 분담하였으며 특별히 미혼 교원에게는 가을에 새 옷을 지어 주었다.
셋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에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성진에서 산비탈에서 밭작물을 재배하며 살았기 때문에 벼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고향에서처럼 산비탈과 습지를 개간하여 밭에 주로 조, 콩, 옥수수, 귀리, 보리 등을 재배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처럼 굶지는 않았지만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같은 면적의 땅이면 경제성이 높은 논농사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많은 도전과 실험 끝에 1915년과 1916년에 걸쳐서 벼농사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명암촌에서 여러 부류의 다양한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첫 번째 지도자그룹은 1910년대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이다.
❮간도국민회❯서지방회 회장 한윤극과 ❮간민교육회❯,❮간민회❯ 때부터 구춘선, 이동춘, 김약연 등과 함께 활동을 하였고❮간도국민회❯ 서지방회 주요 책임자가 된 양태윤, 양형식, 양군식, 이태언이 바로 그들이다.
두 번째 그룹은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지도자 그룹이다.
명암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독립 운동가들이 농부나 학교 선생으로 찾아 왔는데,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선전부장이던 장시우 내외, 김광일, 양창걸, 박창호가 그들이다. 항일투쟁으로 이름을 날린 김책, 김성, 우용선도 한 때 은신하며 명암촌에서 활동을 하였다.
세 번째 그룹은 보진학교 졸업생으로 동북항일연군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사망한 투사들이다.
1931년❮9.18사변❯⁶ 후에는 보진학교 졸업생인 이동선, 박윤식, 안정규, 이주봉 등이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하여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
<청산리와 어랑촌 가는 길목에 있는 명암촌의 사람들은 1920년 초가을에 홍범도연합군부대가 두도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고 어랑촌으로 이동할 때 소를 잡아서 부대원들을 위로하였고 의연금으로 내복을 사서 헌납하고, 천을 사서 물감을 들여 군복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청산리전투가 진행될 때, 부대에 식량과 짚신을 공급하였으며 우마차를 이용하여 독립군 부대의 물자들을 운반하였다.>
경신참변에 불탄 52개교회를 찾아서
경신참변은 일본군 25,000명이 1920년 10월 14일에서 1921년 5월 9일까지 북간도에 있는 우리 조선인들을 대학살하며 가옥, 교회, 학교를 방화하고 약탈을 해서 초토화시킨 대참사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피해 상황은 상해임정이 발표한 피살 3,664명, 체포 155명, 재산피해는 가옥 3,520동, 학교 59개, 교회당 19개, 곡물 59,970섬으로 나옵니다.
경신대학살을 공부하면서 불에 탄 마을이나 학교가 캐나다장로회 교회가 있는 곳이며 간도국민회 지회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불탄 교회 이름을 찾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불에 탄 교회 숫자가 최고 28개 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훈춘현, 화룡현 등 지방사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방사에는 임시정부 통계에 나오지 않는 교회들이 나와요.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불에 탄 교회를 찾아보았습니다.
이름을 다 제대로 밝혀내지는 못하였지만 52개 교회가 경신참변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장암촌 교회에서는 가족들의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묶인 채로 교회당 안으로 끌려 들어가 36명이 함께 불에 타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52개는 당시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교회가 120여 개 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교회들은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서 끝까지 일제 저항합니다. 물론 30년 이후에는 는 만주국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민족주의 계열의 관점에서 정리된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동만주의 교회들의 독립운동을 주목하지 않지만 1900년대 초 부터 1920년까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벌인 곳은 용정과 연길, 훈춘을 중심으로 한 동만주의 조선인 이주민들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조선교민들의 힘을 모아서 간민회와 간민교육회를 통해서 민족의 의식을 배양하였고 드디어는 <독립운동의사부>를 만들어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를 주도하여 수만 명이 모인 <3.13 용정 만세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그후 독립운동의사부는 독립촉성회로, 다시 <간도국민회>로 개명을 합니다. 이 간도국민회는 캐나다장로교 산하에 있는 교회를 근간으로 해서 세워진 8천여 회원이 활동하는 당시 한반도와 동만주를 포함해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간도국민회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국민회군"을 세우고 안무를 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교회가 지원하고 있는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이 있어서 <18만원 탈취 항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팩트를 파묻고 한 두 사람의 영웅을 만들어서 그에게 공로를 다 몰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청산리전투> 후에 경신대학살에 캐나다장로회에 속한 교회들이 학살의 주요대상이었다는 사실이 교회가 간도 독립운동의 핵심이며 진원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역사 바로 알기, 더구나 중국 변방에서 일어난 조선 이주민들이 벌인 독립운동을 남한 중심의 독립운동사에서 바로 알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나라와 민족의 독립의 문제로 씨름하며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교회가 기억하고 그 전통을 바르게 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3부 계속됩니다
<3부 알고 싶지 않은 역사, 자유시참변> 은
1921년 6월 28일에 일어난 자유시참변에 대한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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