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일에
자녀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자랑스러움이 있습니다. 오늘(8월 8일)은 저희 어머니께서 소천 하신지 2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코로나-19’로 형제들이 모이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대로 추모를 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며 몇 자 적어 봄으로 그리움을 달래 봅니다.
어머니(김을두 권사님)는 여러 측면에서 소개할 것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 교회 일에 있어 언제나 궂은일에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속회를 맡아도 교회가 있는 읍내 보다는 하포리, 성리 등 아주 먼 곳을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두세 곳의 속회를 맡아 노령의 몸으로 자전거를 타시고 다니시며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오직 배려와 섬김의 신앙으로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어머니를 향해‘기도 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끊임없이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 그리고 자녀 손들을 위해 기도하신 어머니께서는 여행 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금식기도 하시던 어머니로 특별히 가족들이 모이면 손자, 손녀까지 일일이 다 이름을 열거하며 축복기도를 해 주시던 어머니의 기도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어머니는 문맹퇴치에도 앞장서시어 속회 때마다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라 달력에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 등의 쉬운 글을 써 가지고 가셔서 읽어 드리며 글을 모르는 시골의 어르신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드림으로 기쁨을 나누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산 지방회 뿐만 아니라 교단 총리원의 표창까지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즐겨 드리는 어머니였습니다. 쓸 것, 먹을 것 다 제쳐 놓고 우선하여 하나님께 드릴 뿐 아니라 자녀들이 드린 용돈까지 꼬박 꼬박 모아 건축헌금은 물론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즐겨 하셨으며,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던 어머니는 1년에 한 번은 크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추수감사절에는 제일 많이 헌금하려고 노력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종을 지극히 선대하며 대접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귀한 것이 있으면 먼저 목사님께 드리고 담임 목사님만이 아니라 부목사님께도 생일이나 심방 때에는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일일이 챙기셨던 것으로, 한 번은 동생이 학교에 가다가 꿩을 잡아 왔는데 다녀와서 보니 벌써 목사님께 갖다 드렸다고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시던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온화하고 평화롭고 인자하신 어머니였습니다.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대하시며, 화를 내지 않음과 함께 인생 여정에서 되어 진 갖가지 어려운 문제나 힘든 일들까지 다 참으시고 또 싫은 소리를 할 때면 화평과 덕을 끼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타이르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인생의 스승이기도 하신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주민들의 신임을 얻고 동네를 위해 여성 위원장 등을 역임하셨고, 오랫동안 여선교회 회장으로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마련하여 전달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자‘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하시면서 어머니의 다년 간 몸에 체득된 인생 년륜과 신앙 체험 등 갖가지 지혜들을 알려 주시고 타일러 주시던 어머니의 깊은 뜻이 마음속에 각인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믿음으로 승리하신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고귀함을 알고, 만사를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신 자랑스런 어머니로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믿음으로 이기며 용기를 갖고 담대함 중 평안 속에 항상 승리의 삶을 사시던 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 6형제 중 2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와 1명의 권사를 만들어 충성스럽게 헌신하게 하신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한 생에 자체였습니다.
언제나 불러도 다정스런 세 글자‘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자녀 된 이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효도 잘하므로 후회함이 없기를, 그리고 부모 된 이는 더욱 더 좋은 부모로 훌륭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 줄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