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푸르름이 짙어가던 여름의 길목, 문득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어느덧 마음은 청춘인데 숫자는 희수(77세)라는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나이,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 쓸쓸함을 거두고 인생의 가장 푸르고 찬란한 한 페이지를 새로 쓰는 여정이었다. 동문들의 희수를 기념하여 해외여행을 기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종용 회장의 결단과 풍부한 식견이 없었다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 동문회 발족 이래 세번째 해외여행길이지만, 이번 여정은 단순한 유람을 넘어 우리의 지나온 삶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가장 값지고 빛나는 금자탑이었다.
하루에 수천 대의 날개가 오르내리는 인천국제공항,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설렘을 안고 모인 18명의 동문과 가족들(부부 7팀,싱글 4명). 하노이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4시간 반을 날아 베트남 땅을 밟았다. 입국 수속의 지루함도 잠시, 친절한 가이드 백영운 씨와 현지 가이드 꿘이의 환대를 받으며 사파(SAPA)로 향하는 45인승 버스에 올랐다. 베트남 법상 현지인과 동행해야 한다는 규정 덕에 늘 함께한 꿘이, 그리고 15년 무사고 경력이 증명하듯 묵묵히 핸들을 잡은 기사의 안정감 덕분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하노이를 벗어나 북서쪽으로 350km, 해발 1,650m의 고산 도시 사파로 가는 길.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생경하면서도 정겨웠다. 물이 있는 곳을 명당으로 여겨 논 한가운데에 들어선 묘소들, 한쪽에서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를 베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인 베트남 특유의 2모작 풍경이 이채로웠다. 해가 기울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는 서늘해졌고, 늦은 저녁을 먹고 출발할 즈음에는 촉촉한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파 중심가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지나 숙소인 '실크 패스 그랜드 리조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반.
전력 사정으로 난방이 되지 않아 두꺼운 이불 속에서도 얼굴이 썰렁했지만, 고산지대의 첫날밤은 그렇게 차갑고도 아늑하게 깊어갔다. 다음 날 새벽, 간밤의 굵은 빗줄기가 거두워간 사파의 아침은 눈부시게 깨끗했다. 김종용 회장과 함께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운해(雲海) 사이로 드러난 장엄한 산세를 배경으로 추억을 카메라에 담았다. 둘쨋 날은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이자 장쾌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목적지는 19세기 북부 베트남의 검은 몽족(Black Hmong)이 정착해 형성된 '깟깟마을'. 가파른 내리막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을 지나자,
간밤의 비로 거세게 불어난 계곡물이 우렁찬 소리로 반겨주었다. 계단식 논과 소박한 마을, 그리고 깊은 계곡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이어 스트리트카와 미니버스를 갈아타고 '용의 전설'이 숨 쉬는 함롱산(1,880m)에 올랐다. 사파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조망에 탄성을 지르고, 사파 스테이션으로 이동해 꼬마 기차를 타고 마침내 판시판산 등정길에 들어섰다. 케이블카 창밖으로 펼쳐지는 계단식 논의 장관에 감탄도 잠시, Do Quyen 스테이션에서 산악열차를 내린 후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끝없이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이었다.
3,000m가 넘는 고산지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마치 유격훈련을 받는 것 같다"는 이종복 동문의 혼잣말처럼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 고통의 끝에서 희열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 4명의 동문이 정상을 앞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남은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마침내 해발 3,143m, '인도차이나의 지붕'이라 불리는 판시판산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비록 자욱한 안개로 천하를 한눈에 담지는 못했으나, 실루엣처럼 아련하게 드러나는 풍경과 정상 표지석 앞에서 흘린 땀방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이었다.
희수라는 나이에 3,000m 고봉을 정복했다는 환희, 그리고 함께 해냈다는 동문애가 가슴 가득 뜨겁게 차올랐다. 하산길 역시 녹록지 않았지만, 구름 속에 웅장하게 서 있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전설이 담긴 석가탑, 그리고 무려 800톤의 청동으로 조성되었다는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 아미타불 청동상은 인간의 신념과 노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거대한 해수관음보살상과 고승들의 동상을 지나며 베트남 불교 문화의 깊은 차원과 숙연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산에서 내려와 한 시간 동안 고단했던 팔과 다리를 마사지로 풀고,
정겨운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사파 전통시장을 둘러보며 맛있는 저녁 식사로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비록 몸은 피곤함으로 가득찼지만, 사파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얼굴에는 평생 잊지 못할 감동과 뿌듯한 행복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희수라는 인생의 고개에서 나는 이 뜨거운 추억은,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남은 여정에도 여원히 시들지 않는 푸른 빛으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