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꽃이 젖는가?
- 4.19
이삭빛 시인
가장 깊은 상처에서 가장 맑은 수액이 흐른다
그해 사월, 총성보다 더 크게 들려온 것은
어둠의 외벽을 밀어내며
지표를 뚫고 솟구치는
풀리뿌들의 마른 골절 소리였다
누구는 피 흘리며 쓰러진 이들을 보며 절망이라 했지만
침묵으로 산을 옮기는 자들은 알았다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봄의 수렴(收斂)을 위해
스스로 흙이 되는 고결한 선택이었음을
새는 공중에 제 몸을 지우며 길을 내고
사람은 자기 가슴을 태워
어둠 속에 눈부신 이정표를 만든다
이름 없는 청춘들이 꽃잎처럼 흩날릴 때
대지는 그 짧은 생애를
우주의 갈피 속에 접어둔 영원한 문장으로 읽었다
꽃이 젖는 것은 비 때문이 아니라
제 태(胎)를 부수고 나온 씨앗의 비명이 맺혔기 때문이다
비워내지 않고 어찌 새날을 담겠는가?
닿기 위해 떠나간 저 순한 영혼들이
지금 우리 곁에서 가장 푸른 숨결로 흔들리고 있다
그대, 아직도 저무는 꽃을 보며 슬프다고만 하겠는가?
가장 낮은 바닥에 이마를 댄 자만이
하늘의 가장 높은 별을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이 고요한 생의 법전은
사월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기록하고 있다
[시평] 사월의 비명, 지지 않는 민주(民主)의 별이 되다
- 이삭빛의 시<왜 꽃이 젖는가? - 4.19>를 읽고
윤정 시인·평론가
이삭빛 시인의 시는 늘 낮은 곳을 향한다. 하지만 그 '낮음'은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세상을 들어 올리기 위해 스스로 지지대가 되는 거룩한 선택이다. 이번 시 「왜 꽃이 젖는가? - 4.19」는 1960년 산천을 물들였던 사월의 함성을 명상적 어조와 강렬한 형상화로 빚어낸 수작이다.
1. 고통의 형상화
ㅡ역사의 지각을 뚫는 ‘골절 소리’
시인은 4.19의 총성 뒤에 숨겨진 본질을 역사의 지표를 뚫고 솟구치는 풀뿌리들의 마른 골절 소리로 포착해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라는 거대한 어둠의 외벽을 깨기 위해, 당시의 청춘들은 상아탑을 박차고 나와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자신을 던졌다.
시인이 묘사한 '골절 소리'는 바로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비극과 그에 항거하며 전국의 거리를 메웠던 수만 명의 발소리가 응축된 역동적 저항의 사운드다. 낡은 시대를 부수고 나오기 위해 제 뼈를 깎아야 했던 처절한 생명력을 시인은 청각적으로 완벽히 재현해냈다.
2. 존재론적 답변
ㅡ 씨앗의 비명이 일궈낸 민주의 수액
제목이자 화두인 “왜 꽃이 젖는가?”에 대해 시인은 역사적 고통을 관통하는 아픈 답을 내놓는다. 꽃이 젖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비 때문이 아니라, “제 태(胎)를 부수고 나온 씨앗의 비명”이 맺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월 19일, 계엄령과 무력 진압의 공포 속에서도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던 그 '피의 대가'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수액이 되었음을 말한다.
시인은 이를 통해 4.19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역사의 옹이마다 붉은 눈물로 맺혀 여전히 우리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근원임을 일깨운다.
3. 낮아짐의 역설
ㅡ 가장 낮은 이마가 들어 올린 별
“가장 낮은 바닥에 이마를 댄 자만이 하늘의 가장 높은 별을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이자 4.19 혁명의 정신적 요체다.
아시아 최초로 민중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퇴진시킨 이 경이로운 역사는,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가장 낮은 거리의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쓰였다. 시인은 쓰러진 이들의 이마가 닿았던 그 낮은 바닥이 실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라는 가장 높은 별을 밀어 올린 지렛대였음을 통찰한다.
결국 이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마음속에 '가장 푸른 숨결'로 흔들리는 4.19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는지를. 비움으로써 채우고, 낮아짐으로써 비상하는 이 '고요한 생의 법전'은 66년 전 그날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기록되어 오늘 우리를 깨우고 있다.
가장 맑은 수액이 흐르는 상처를 가진 시인만이 쓸 수 있는, 눈부신 사월의 헌사다.
그림 공유함- 공유 후 ai편집 이삭빛